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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많은 신자들이 기도와 관련해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하느님께서는 끝끝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요?”
신앙의 선조들도 우리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예언자로서 한평생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던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해도 내 기도소리에 귀를 막아 버리시고 내 길에 마름돌로 담을 쌓으시며 내 앞길을 막아 버리셨네.”(애가 3장 8-9절)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기로는 시편의 저자도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철저하게도 자신을 버리셨다며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시편 22장 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 한 가지는 우리의 위대한 대 예언자들은 기도의 응답 유무와 상관없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정성을 다 쏟아가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도가 지닌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치고 있는 기도에 대한 정화와 쇄신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기도에 대한 응답 여부 보다는 하느님과 나 둘 사이에 오고가는 인격적인 만남, 그분과의 진솔한 대화, 일상적인 소통, 그 결과 선물로 다가온 사랑의 삶이 곧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도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자판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런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마다 우리는 청하는 바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식별 작업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 기도의 질, 기도의 순수성이 진정 그분 마음에 드시는 것들인지 아닌지 성찰하고 식별해가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와 비례하는 성령의 활동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지쳐나가 떨어지곤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라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혼 안에 충만히 현존해계십니다. 특별히 삶의 중요한 여러 단계 안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세례성사 때, 견진성사 때, 혼인성사나 신품성사 때... 왜 그럴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보통 우리는 평소보다 더 순수해집니다. 평소보다 더 마음을 비웁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기도합니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기도와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영혼 안에 성령께서는 더욱 왕성히 활동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활동은 겸손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자신을 낮추고. 더욱 자신을 비우는 영혼 안에 더욱 활발히 활동하십니다. 반대로 자만심, 우월감, 자기중심주의로 가득 찬 영혼 안에 성령의 활동은 미미할 뿐입니다.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아무리 노력해도 기도가 잘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내 안에 그 누군가가 들어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면 내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떡하니 내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내적인 평화나 고요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기도생활이나 영적생활도 지지부진합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노력이 내안에서 ‘그’를 빨리 쫒아내는 것입니다. 그를 몰아내고 나면 또 다른 ‘그’가 들어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비운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4세기 수도생활의 대가였던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그 자리를 ‘하느님의 처소’ ‘천상 예루살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성령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 나라, 내 안에 천상 예루살렘을 마련할 때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던 기도들도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조용하신 분이십니다.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흰 비둘기처럼 가까이 다가오시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도망가십니다. 반대로 가만있으면 다가오십니다. 순풍이 불면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사람, 그분께서 활동하시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편안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생활성서 2012년 8월호 게재)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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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28 연중 제17주일 창세18,20-32 콜로2,12-14 루카11,1-13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오늘 말씀 묵상과 관련되어
새롭게 와 닿은 아침 성무일도 두 번째 후렴과 다니엘 찬가입니다.
“세 소년이 불가마 속에서 입을 모아 하느님을 우러르며,
주는 찬미 받으소서 하고 부르짖었도다. 알렐루야.”
불가마 속에서 길게 이어지는 다니엘 찬가(3.57-88.56)입니다.
불가마가 상징하는바 경쟁 치열한 세상일 수 있고 공동체 삶일 수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지, 불가마 속에서
다니엘을 비롯한 두 청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기도였듯이
우리가 이 불가마 같은 세상에서 건재할 수 있는 길도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승들입니다.
마침 제주 강정마을 평화활동 중 구속된 예수회 박도현 수사의 옥중 서신에서도 다니엘 찬가가 소개되어 있어 반가웠습니다.
-저도 하루를 정리하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성찰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했는지.
하여튼 매순간 참으로 귀중한 시간인데 말입니다.
다니엘의 찬가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찬미가 삼라만상의 기쁨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해야 달아, 주님을 찬미하라/하늘의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비와 이슬아, 주님을 찬미하라/모든 바람아, 주님을 찬미하라.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라/추위야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라.
빛과 어두움아, 주님을 찬미하라/번개와 구름아 주님을 찬미하라.
땅아 주님을 찬미하라/산과 언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땅에서 싹트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샘들아, 주님을 찬미하라/바다와 강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고기와 물에 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다니3,51-90 ‘세 젊은이의 노래 중에서)
여기를 기도의 집으로 알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2013.7.18 2하2방 박도현 수사-
불가마 같은 교도소 독방에서 찬미의 기쁨을 절절히 체험한 박도현 수사입니다.
진정 찬미의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불가마 같은 환경임을 깨닫습니다.
불가마 같은 세상에서 건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뿐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어떤 환경 중에도
인간 존엄과 품위를 유지하며 자존감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기도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한 몇 가지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무엇을 기도하는가?'
기도 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선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전체의 요약이자 예수님 삶의 요약이요
우리 삶의 틀을 만들어주는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필요가 이 기도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평생 배워도 끝이 없는 기도의 샘 같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가 육화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짧은 주님의 기도라 전부 인용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서 구하소서.”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하며 진정성이 가득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친근감 가득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자비하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 살아계신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는 일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기쁜 일이며 이 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어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상징하는바 먹을 양식은 물론 그날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하루살이 가난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과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일입니다.
숨 쉬듯이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살 수 있고,
하느님 은총의 도움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 ‘어떻게 기도해야하는가?’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진정 신뢰할 때 항구한 기도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참으로 두려움 없는 집요한 기도가 놀랍습니다.
그대로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를 반영합니다.
주님을 철두철미 신뢰하기에 무려 여섯 번이나 묻습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신뢰의 원천입니다.
복음의 예수님 또한 비유를 통해 기도에 항구할 것을 간곡히 권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산 같은 신뢰로 항구히 기도할 때
하느님은 당신이 적절하다 생각하실 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안타깝게도
기도 중 도중하차하여 필요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온갖 신뢰심을 다하여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든 때가 되면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
셋째, ‘왜 기도해야 하는가?’
성령을 받기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한없이 신뢰하면서 항구히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선사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청했지만 진정 지혜로운 이는 성령의 선물을 청합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성령 충만한 이가 진정 부자요
성령 따라 사는 영적인 삶일 때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일 때 저절로 영육의 건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 대신에 뱁을 주겠느냐?
달걀을 달라는 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 하나 성령을 청하는 이가 진정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령을 청할 때 부수적인 필요한 것들은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이게 사람의 정의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 잘하고 싶은 욕심은 얼마든 좋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항구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바칠 때
선사되는 성령입니다.
주님은 이 이 거룩한 미사 중
신뢰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 성체와 더불어 평화와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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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충청도 금산에 위치하고 있는 ‘장애우 평등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사실 처음 방문할 때에는 많은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장애도 아닌 1급 장애인들만 모여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두가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고, 말하는 것이 편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곳에서 살고 계신 분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불편함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편하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주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나의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기뻐하실까요? 따라서 언제나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 특히 주님의 입장에서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특히 우리들의 큰 잘못은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쉽게 포기하여 주님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청하기만 한다면 끝까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가시는 주님을 향해 계속된 청을 드려서 결국에는 의인 열 명만으로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자신의 짧은 생각과 이해로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굳게 믿고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을 주신다고 하시지요. 즉,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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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기도하십시오. >
2011년 4월, MBC '서프라이즈'에서는 1920년 인도, 2008년 러시아, 2009년 시베리아 등 1920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발견된 약 80여 명의 야생 아이들에 대한 비화에 대해 전했습니다. 이 중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1920년 10월, 인도 동부 어느 마을, 저녁이면 가끔씩 근처 개간지에서 동물의 환영 같은 것이 출몰, 그 기괴한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곤 하였습니다.
목사 죠세프 싱은 이 환영이 무엇인지 꼭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잠복하였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이윽고 몇 마리의 늑대들이 출현하고 뒤이어 두 환영이 나타났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환영은 두 여자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늑대들과 함께 몇 년 간 굴 속에서 생활하였으며, 늑대들은 아이들을 양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키웠던 것입니다. 이 때 한 아이는 2살 정도였으며, 다른 아이는 7살가량 되었습니다.
결국 두 아이는 잡혀서 고아원에 보내졌고, 이윽고 네 발로 달리거나 늑대처럼 울부짖을 줄밖에 모르는 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아이에게는 아말라, 큰 아이는 카말라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슬프게도 아말라는 일어서거나 말하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구출된 지 1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말라는 자신이 완전한 늑대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종족을 떠난 사람들 속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정글북의 모글리를 본따, 모글리 현상이라고 합니다. 모글리 현상이란 인간도 어떻게 키워지느냐에 따라 그 키워질 때의 습성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인간에 의해 키워져야 인간답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다행인지 언니 카말라는 16살까지 10년을 더 살면서 바로 서서 걷기도 하고, 약 30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익힌 음식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물에 의해 키워진 대부분의 아이들은 10년 이상을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임에도 10년에 30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을 여전히 인간으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에 의해 키워져야 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운오리새끼’ 동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오리인줄 알고 미움 받으며 오리 가운데서 컸지만 나중에 백조 가족을 만나 자신이 백조였음을 깨닫게 되고 백조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고 믿는 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믿으면 사람처럼,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처럼.
따라서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니체는 “자신을 아는 자는 세상에서 못 해낼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아는 게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내 자신에게 온전한 해답을 주지 않고 그만 그 질문하는 것을 멈추고 맙니다.
동양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인 공자님도 죽음에 대해 물어보는 제자에게 “아직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은 그 누구도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말해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면 나에 대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늑대아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인간으로부터 왔다는 것만 알았다면 끝까지 늑대로 살려고만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처음 시작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늘은 우리가 나온 곳이요 돌아갈 곳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대로 살아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의 자녀, 혹은 동물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하느님도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우리 정체성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뉴스, 2012년 8월 31일자 기사에 타이페이 대교구 주보에 실렸던 타이완 산궈스 바오로 추기경의 편지 전문이 실렸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산궈스 추기경이 마음으로 깨닫고 싶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움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움(필립 2,7)’으로서 하느님과 더 친밀해지는 신비였습니다.
그분이 당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셨고, 기도와 묵상 중 죽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종종 나타났다고 합니다. 동시에, “자신을 비워라, 그러면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비운 예수와 가깝게 지낼 수 있게 골고타 언덕 꼭대기 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이 환영은 나를 깨우쳤다. 나는 내가 입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직자의 장백의, 주교반지와 주교관, 추기경의 진홍색 수단, 이런 것들은 과다로 포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원래 자신을 잃게 했다. 하지만 이런 옷들은 내 일상의 하나가 됐고, 이런 옷들을 벗어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할 수 있으시다.
지난 6월 말, 가슴에 찬 물을 빼기 위해 입원했다. 의사는 내 허파에 고인 물을 빼기 위해 이뇨제를 처방했고, 나는 이 사실을 몰랐다. 미사를 드리는 중에 약효가 나타났다. 독서를 할 때쯤에 화장실에 가야 했다. 화장실로 가는 동안 오줌을 지려 심하게 젖었고 마루에 자국을 남겼다.
사제품을 받고 57년 동안 미사를 드릴 때 이런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권위를 잃었다. 수녀와 의사, 간호사들 앞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했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의 허영심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얼마 뒤, 타이베이에서 나는 이틀 동안 대변을 보지 못했고 의사는 완화제를 줬다. 약효는 한밤중에 나타났다. 나를 돌보던 남자 간호사를 깨워 샤워실로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샤워장으로 다 가기 전에, 내 속이 비워졌다. 대변이 나와 바닥에 떨어졌고, 이 간호사가 내 똥을 밟았다.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신고 있던 슬리퍼와 바닥을 닦으며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똥 묻은 파자마를 벗기고 나를 화장실 변기에 앉혀 내 다리에 묻은 똥을 닦으며 어른이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나를 꾸짖었다.
그는 ‘두세 발짝만 더 가면 변기였는데, 그것도 참지 못했느냐? 이것 때문에 내가 고생했다. 다음에는 더 일찍 말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내가 한 살짜리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의 말은 날카로운 칼로 나에게 다가와 내가 90년 동안 갖고 있던 모든 존경과 명예, 직함, 직위, 권위, 위엄을 난도질했다. 나를 다 씻기고 나서 그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바로 잠이 들었다.
나도 잠에 들었지만 곧 깨어났고 아주 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비운’ 예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자고 초대했다.
세 번째 당황했던 순간은 2주 전이었다. 나는 그때 막 예수회의 병원으로 옮겼다. 발에 부종이 생겨 의사들은 강력한 이뇨제를 처방해주면서 또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방사선치료를 하러 가던 도중에 약효가 나타났다. 의료진과 기술진은 내 바지가 완전히 젖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위엄도 잃었다.
이런 당황스러움이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는 이 90대 노인에게 원기를 회복시켜줬다. 며칠 만에, 이 당황스러움은 어릴 적 순진함을 다시 가져다줬고 오랫동안 쌓여왔던 도움 되지 않는 습관을 없애줬다.
내 몸이 아주 작은 캥거루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 나는 주님께 내 영성적 질병을 낫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했고, 이로 인해 나는 아이처럼 생기를 되찾고 단순해지며 겸손해졌다.”
이것이 참다운 기도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그분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그분과 함께라면 하느님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는 자신을 비울 때만 가능해집니다.
이는 마치 스마트폰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스마트폰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잘 사용해 줄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면 스마트폰은 그냥 하나의 돌덩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분에게 주어지면 비로소 그렇게도 찾던 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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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넓고 깊고 높은 사랑입니다. 때로는 품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며 기다리시고 마침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시간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양보하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하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세상의 기둥이고, 지혜의 창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낙심의 치료제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로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지금까지 기도를 안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회당의 집회와 가정의 부모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유다의 아이들치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기도에 대하여 매우 자상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자기들이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법이 분명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수없이 외우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11,2)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 그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뼈대가 되시고 거기에다 살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행동은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청해야 하고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고 청하되 거기에 걸 맞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몫이란 말입니다. 사실 “기도의 목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를 자꾸 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도 한밤중에 기도하시고 때로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이 활동하시면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사는 것인지요?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통보가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문을 외우는데 급급해 하고 자기의 바람을 청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이 앞서고 떼를 쓰며, 침묵하시는 주님께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거지처럼 달라고만 하고, 때로는 흥정하고 심지어 협박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고 받길 원하고, 찾지도 않고 얻길 기대하며 두드리지도 않으면서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청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1-4). 사실 이럴 때는 구한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더 고마운 응답입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1요한5,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하면서 갈구해야합니다. 벗을 찾아가 귀찮게 해서라도 빵을 얻어내듯 우리도 참고 기다리며 매달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아브라함이 간절한 청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약하십니다.
어떤 아가씨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발 신랑감을 보내주세요!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제발!” 그러나 도대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하느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사정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아가씨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을 보내야 된다고 안달을 하십니다. 제발 사윗감을 보내주세요!”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으로 기도하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숨결,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항구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숨은 한꺼번에 쉬고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꾸준히 고르게 쉬어야 합니다. 기도는 일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좋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자투리 시간을 내놓지 말고,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내 놓으십시오. 나를 위한 공간 꾸미기에 급급해 하지 말고 기도할 장소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이 앞에서 결코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십시오. 옛 말에도 “울어야 젖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아가며 다리를 뻗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과 결과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시기에 청하는 대로 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급해 하며 답답해하여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8,26)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믿으십시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늦춰질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이야기 하고 저는 그분께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심장의 고요함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심장이 충만해진 채 우리가 말하고 그분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심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심장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제 뜻을 접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폰스).
우리가 많은 경우 우리의 바람을 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원의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여전히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14,28). 그러므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종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귀한 선물로 만족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더하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사랑합니다.
@@총알택시기사와 신부님이 같은 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천국으로 가고 신부님은 연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아니! 하느님의 일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하였는데 너무하네요!”하고 투덜댔습니다. 그러자 그 옆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저 총알택시 기사는 손님들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게 만들었고, 당신의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다 졸고 있었는데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아야 하겠느냐?”
“인생이 짧든, 길든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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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기도가 간절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와 방식으로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여기며 끈기 있게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성조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일흔다섯 살이었을 때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친자식처럼 키우던 조카 롯을 하느님께서 염두에 두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롯은 아브라함을 등지고 분가해 버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종 하가르를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곧 약속을 하신 지 25년이 지난, 아브라함이 백 살이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라를 통하여 이사악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방식과 때에 자식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철없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무엇인가를 청했을 때, 지혜로운 아버지는 적절한 방식과 때를 맞추어 그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뢰 속에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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