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단어들을 살펴보면 활집인 궁대는 우리가 활터에서 활쏠때 허리에 둘러메는 자루를 지칭하는 말과
가죽으로 된 궁대 두 가지를 구분 없이 말하고 있는것 같읍니다.
활을 부리면 궁대에 넣어서 보관을 하고 얹게되면 통개(동개)에 넣어서 보관하는것이 아닌가 싶은데 말이죠.
아래 문장에서는 화살집을 지칭하는 말로 전통,시복,통개 등 여러 단어들이 나오고 있읍니다.
궁대(弓帒) 시복(矢箙) 전통(箭筒)
http://blog.naver.com/msk7613
1408년 3월 25일 태종이 안장(鞍裝)을 얹은 말인 안마(鞍馬)와 활을 넣어두는 활집인
1.궁대(弓帒)·전통(箭筒)을 진경(陳敬)·이빈(李賓)에게 주었다. 1425년 3월 27일 세종이
동교(東郊)에 행행하여 매를 날려 사냥하는 방응(放鷹)을 구경하고,
저자도(楮子島)에 가서 물고기를 잡도록 명하였다.
연(輦)을 살곶이 전관(箭串) 들에 머무르고 거가를 수종한 내금위(內禁衛)의
사복(司僕) 갑사(甲士)에게 기사(騎射)하도록 명하였다.
낮참에 삼전도 하평(三田渡 下平)에서 머물러 술자리를 벌이니,
2품 이상 및 지신사 곽존중(郭存中)이 입시하였다. 술과 고기를 3품 이하와 군사에게 내려 주고,
매를 잘 부리는 총제 문효종(文孝宗)에게 저피(猪皮)로 만들고 띠는 녹비(鹿皮)를 사용한
시기(矢器)인 2.시복(矢箙) 1부(副)와 말타고 활쏘기를 잘 하는 부사직(副司直) 김자옹(金自雍)에게
전통(箭筒)을 하사하였다. 5월 19일 사신 김만(金滿)이 백록비(白鹿皮)와 담비가죽인
흑사피(黑斜皮)로 지은 신 한 켤레와 유지(油紙)·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차일장(遮日帳)
각 한 벌과 하늘색 다래 첨(韂) 한 벌과 염소가죽인 홍전피(紅猠皮) 피체(皮替) 하나와 은실로
꾸민 달단(韃靼) 고삐 한 벌과 해달피(海獺皮) 시기(矢器)인 시복(矢箙) 하나를 청구하니
모두 다 주라고 명하였다.
1468년 5월 24일 김보(金輔)가 장차 장단(長湍)에 가고자 하여 통사(通事)로 하여금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계순(韓繼純)에게 청하기를 “궁대(弓帒)·전실(箭室)을 다시 전하에게
아뢰어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하니, 세조가 명하여 한계순에게 3.표미 구궁대(豹尾 具弓帒)·
전실(箭室) 1부(部), 달구(韃狗) 2마리를 가져다 주게 하였다. 1506년 1월 28일
연종(연산군 묘호 추상)이 전교하기를 “손재주가 교묘하여 기교한 물건을 잘 만드는
활집 만드는 장인인 궁대장(弓帒匠) 이불지(李佛知)에게 4등 록(祿)을 주게 하라.”하였다.
1523년 11월 4일 중종이 순변사 조윤손에게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인 초구(貂裘) 및 활 1장(張),
장전(長箭) 1부(部)와 궁대(弓帒)·화살통인 통개(筒介)를 내렸다. 1530년 1월 29일 중종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병사(兵使)가 지방관(地方官)에 제수되어 부임(赴任)할 때 임금에게 나아가 작별을
아뢰는 배사(拜辭)할 적에는 궁대(弓帒)와 통개(筒介)를 하사하는 것이 예이다.
전에 순변사(巡邊使) 허굉(許硡)이 출발할 때는 함께 데리고 가는 군관에게도 궁대와 통개를
지급했었다. 이사균이 배사할 때도 이 예에 의거해서 아울러 지급하도록 궁방(弓房)에 말하라.”
하였다. 1624년 5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주(濟州)로 하여금 국마피(國馬皮)를 날라 보내게
하여 궁대(弓帒)를 만드는 밑거리로 삼고, 그 나머지 군기도 군기시와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편의한 대로 조치하게 하소서.”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궁대는 제주에서 만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
1.궁대(弓帒)와 궁대(弓袋)- 같은 뜻으로 쓰이는 걸까요?
전통(箭筒)-활터에서 습사시 사용하는 화살을 넣어 갖고 등에 메고 다니는 길다란 통
(죽전통,지전통 등)
<궁대弓袋?> <전통 箭筒>
2.시복(矢箙)-화살을 넣고 허리춤에 차는 방식의 전투용 화살집
<시복 矢箙> <궁대弓袋?>
동개살: 대우전이라고 하며 동개 즉 건에 넣기 때문에 동개살이라고 하 는 바 전시 마상용이다.
동개활: 활과 화살을 동개, 즉 건에 넣어 등에 메고서 말을 타고 쏘는 활이다. 전시용으로서,
만드는 방법이 각궁과 같으나 여섯가지 재 료를 합성한다는 것이 다르다. 활 중에서
가장 작은 활이다.
동개 설명에서는 동일하게 활과 화살(궁대,시복,동개일습)을 등에 멘다고 서술하고 있읍니다.
마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에 멘다고 서술하고 있읍니다.
조선시대 이전인 고구려벽화에도 명확하게 허리춤에 시복을 차고 동개(궁대)를 찬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등에 멘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위 내용을 살펴 보면 궁대,시복에 대한 해석이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있읍니다.
또한 고구려 벽화에도 궁대,시복의 착용모습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조선시대의 문헌속에는 장비착용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지요..
이런 모습속에서 책 속의 내용만을 따라야 합니까? 용어나 해석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저는 궁대를 동개라 표현한 이유가 위 내용에서 보듯 동개일습(궁대,시복)을 등에 멘다는 동일한 내용으로 인하여 영화속에서의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싶었읍니다.
그래서 궁대는 우리가 활터에서 부린활을 넣는 용도에 허리에 둘러메는 천조각으로 만든 자루로 된 궁대와 얹진활을 넣는 가죽으로 된 궁대 즉 동개(통개)로 나누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개활을 넣는 통개(동개)와 화살을 넣는 시복을 동개,시복이라 칭한것이랍니다.
그래서 이를 등이 아닌 허림춤에 차는것이라 설명해 왔던 것이지요
동개일습이 궁대,시복이라는 문헌속 내용을 인정하기가 왠지 헷갈린다는것지요,
활을 자루에 부려서 넣는것도 궁대요, 얹은활을 넣는것도 궁대라면
명확한 구분이 있었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궁대,시복인 동개일습을 등에 멘다는 내용으로 설명 되어지고 있는것은
잘못이라는 거지요,
하여 허리춤에 차는 전통방식을 표현 하고자 허리에 두르는 천조각의 궁대가 아닌 가죽으로 만든 궁대를 동개라 했고 화살집은 시복이라 칭했던것입니다.
부린활을 넣는 궁대와 가죽으로 된 궁대의 차이가 한자로 어떻게 표현 되는지 궁금합니다.
궁대(弓帒)와 궁대(弓袋)로 함께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같은 의미인가요?
첫댓글 등에 지고 안 지고가 궁대라는 명칭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궁대'. 말 그대로 활 담는 자루(포대기)입니다. 무슨 이견이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