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병을 잊지 마세요 포병 자원한 341명 중 전사·실종자 112명 그들 기리는 비석 출신 학교마다 세워지길
현재복(83)씨는 6·25 소년병이다. 17세 때 포병으로 자원입대해 북한군과 싸웠다. 그는 2010년 6·25 60주년 때 '6·25 소년병가'라는 군가(軍歌)를 작사 작곡했고, 최근 자서전 '이러한 전쟁 6·25―한 서울 학도포병의 6·25 참전 회고'를 펴냈다. 그는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책을 낼 형편도 안 됐다. 현씨는 11일 그의 모교인 서울 서초구 서울고 본관 앞에 있는 6·25전쟁 참전 기념비에서 만나자고 했다. 서울고 출신 참전용사 457명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에서 5회 입학 동문 중 '경재천'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 어머니가 피란 중에 충청도 장터에서 노점상을 했는데, 우연히 나와 동창인 재천이 어머니를 만났대요. 두 분은 아침마다 만나서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했대요. '두 아들이 부디 살아 돌아오도록 해 주시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함께 하늘나라로 데려가십시오'라고. 그런데 나는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구사일생했고, 재천이는 전사하고 말았어요. 재천이 어머니는 아들 전사 소식을 듣고도 몇 달 동안 아침마다 학교 앞에서 재천이를 찾아다녔답니다.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 마음이 다 그랬겠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재천이 같은 소년병을 잊지 말아 달라고 책도 쓰고, 군가도 만든 거예요."
현씨는 서울 종로에 살았다. 6·25가 발발하자 경기 파주 외가에 피란 가서 숨어 지냈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1950년 10월 20일 학교에 군용 트럭이 왔다. 포병 징집을 위해서였다. "장교가 그랬어요. 우리 국군이 평양 탈환 후 계속 북진 중이다고. 그런데 이번에 북한 탱크를 무찌를 105㎜ M―2 대포를 미군한테 받았는데 수학과 영어 소양이 있는 학생 여러분이 포병 인재라고 했어요. 지원 학도는 앞으로 나와 달라더군요."
현씨는 오른손을 번쩍 들고 학생 중에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고 한다. "이모가 생각나서였다"고 했다. 현씨의 이모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인민재판에 회부됐고 공개 처형 직전에 겨우 도망쳤다고 한다. 현씨는 "외가에 돌아온 이모는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귀신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그때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겠구나' 생각했지. 장교가 그랬어요. 크리스마스 이전에 틀림없이 전쟁 끝낼 테니 석 달만 싸워달라고요. 그 얘기 듣고 안 나가는 사람이 이상하지, 안 그래요?"
현씨를 포함해 11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바로 트럭을 타고 용산고로 보내졌다. 새까만 교복 입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이미 수백 명 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곧바로 구두 면접시험을 보고 341명이 선발됐다. 대한민국 육군 제18포병대대 요원이 된 것이다. "그날 밤에 아버지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용산고에 오셨어요. '왜 부모 허락도 안 받고 이러느냐'고 물으셔서 '시간이 없었습니다. 잘 싸우고 돌아오겠습니다' 했지요."
341명은 이튿날 자정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했다. 포술 교육은 이동 중 휴식 시간에 실시됐다고 한다. 이들은 1950년 11월 평북 개천에 투입돼 첫 포격을 했다. 현씨는 그때 이등병 계급과 "저승에서도 외울 수 있다"는 군번 0357315를 받았다.
"밤마다 포를 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쏘라는 거야. 규정상 1분에 3~4발 쏘게 돼 있는데, 7~8발씩 쐈어요. 나중엔 포탄 수백 발을 주고 떨어질 때까지 다 쏘래. 포신(砲身)을 식히려고 개울물로 적신 모포를 덮기도 하고 철모에 오줌을 받아서 뿌리기도 했지. 철모에서 지린내가 진동했어요. 그때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평남 덕천 전투에서 아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했고, 현씨가 소속된 부대는 중부전선 춘천과 횡성 지역으로 이동했다. 1951년 2월 중공군 9개 사단의 '4차 대공세'가 시작됐다. 현씨는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군에 넘겨졌다.
그는 1953년 8월 남북한 포로 교환을 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북한에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중노동을 했다. 58㎏이던 몸무게는 40㎏으로 빠졌다. 그는 "배고픔보다 담배 한 개비가 더 생각난다"고 했다. "어느 날 중공군이 내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어찌나 냄새가 구수하던지. 나도 모르게 구걸을 했어요. 중공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우던 담배를 나에게 주고 딴 데로 가더군요. 한 모금 깊숙이 빨고 서서히 내뿜으니 피로가 싹 가시고 생기가 도는 것 같아. 그런데 미군 포로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손을 내미는 거야. 순간 울컥하고 목이 메더라고. 한 모금 다시 빨고 그에게 줬어요."
현씨는 귀환 후 군에 복귀해 1954년 5월까지 복무한 뒤 일등병으로 전역했다. 그는 만 21세에 복학했고, 서울대 사범대학에 합격해 졸업했다. 중학교 교사가 돼 도덕을 가르치고, 서울 지역 사립대에서 교육학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현씨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서 잘 키웠지, 박사 학위(교육심리학)도 받았지, 이제 연금도 꼬박꼬박 나오지…. 뭘 더 바랍니까?"
현씨는 자신이 만든 군가 '6·25 소년병가'를 직접 불러줬다. "조국의
부르심에 분연히 일어나/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으로 달려가/ 후퇴를 모르고 끝까지 싸웠다/ 아 우리는 대한혼의 꽃 6·25 참전소년병".
현씨처럼 서울에서 자원입대한 26개 학교 출신 학도포병 341명 중 전사 및 실종자는 112명이다. 현씨는 "26개 학교에 341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가 세워지고 현충일마다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게 내 소원"이라고 했다.
6.25 참전 미성년 학생들의 홀대
게시일: 2016. 3. 27.
6.25 전쟁 발발로 대한민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18세 미만의 미성년 학생들도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수한 소년병들이 조국수호의 화신으로 스러져 갔다. 정부는 휴전이 됐음에도 이들을 귀향조치 하지않았고, 제대한 뒤에는 징집 영장을 받은 일반병과 똑 같이 예우하고 있다.
- 소년병을 잊지 마세요 포병 자원한 341명 중 전사·실종자 112명 그들 기리는 비석 출신 학교마다 세워지길
현재복(83)씨는 6·25 소년병이다. 17세 때 포병으로 자원입대해 북한군과 싸웠다. 그는 2010년 6·25 60주년 때 '6·25 소년병가'라는 군가(軍歌)를 작사 작곡했고, 최근 자서전 '이러한 전쟁 6·25―한 서울 학도포병의 6·25 참전 회고'를 펴냈다. 그는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책을 낼 형편도 안 됐다. 현씨는 11일 그의 모교인 서울 서초구 서울고 본관 앞에 있는 6·25전쟁 참전 기념비에서 만나자고 했다. 서울고 출신 참전용사 457명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에서 5회 입학 동문 중 '경재천'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 어머니가 피란 중에 충청도 장터에서 노점상을 했는데, 우연히 나와 동창인 재천이 어머니를 만났대요. 두 분은 아침마다 만나서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했대요. '두 아들이 부디 살아 돌아오도록 해 주시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함께 하늘나라로 데려가십시오'라고. 그런데 나는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구사일생했고, 재천이는 전사하고 말았어요. 재천이 어머니는 아들 전사 소식을 듣고도 몇 달 동안 아침마다 학교 앞에서 재천이를 찾아다녔답니다.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어머니 마음이 다 그랬겠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재천이 같은 소년병을 잊지 말아 달라고 책도 쓰고, 군가도 만든 거예요."
현씨는 서울 종로에 살았다. 6·25가 발발하자 경기 파주 외가에 피란 가서 숨어 지냈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1950년 10월 20일 학교에 군용 트럭이 왔다. 포병 징집을 위해서였다. "장교가 그랬어요. 우리 국군이 평양 탈환 후 계속 북진 중이다고. 그런데 이번에 북한 탱크를 무찌를 105㎜ M―2 대포를 미군한테 받았는데 수학과 영어 소양이 있는 학생 여러분이 포병 인재라고 했어요. 지원 학도는 앞으로 나와 달라더군요."
현씨는 오른손을 번쩍 들고 학생 중에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고 한다. "이모가 생각나서였다"고 했다. 현씨의 이모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인민재판에 회부됐고 공개 처형 직전에 겨우 도망쳤다고 한다. 현씨는 "외가에 돌아온 이모는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귀신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그때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겠구나' 생각했지. 장교가 그랬어요. 크리스마스 이전에 틀림없이 전쟁 끝낼 테니 석 달만 싸워달라고요. 그 얘기 듣고 안 나가는 사람이 이상하지, 안 그래요?"
현씨를 포함해 11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바로 트럭을 타고 용산고로 보내졌다. 새까만 교복 입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 이미 수백 명 와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곧바로 구두 면접시험을 보고 341명이 선발됐다. 대한민국 육군 제18포병대대 요원이 된 것이다. "그날 밤에 아버지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용산고에 오셨어요. '왜 부모 허락도 안 받고 이러느냐'고 물으셔서 '시간이 없었습니다. 잘 싸우고 돌아오겠습니다' 했지요."
341명은 이튿날 자정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했다. 포술 교육은 이동 중 휴식 시간에 실시됐다고 한다. 이들은 1950년 11월 평북 개천에 투입돼 첫 포격을 했다. 현씨는 그때 이등병 계급과 "저승에서도 외울 수 있다"는 군번 0357315를 받았다.
"밤마다 포를 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쏘라는 거야. 규정상 1분에 3~4발 쏘게 돼 있는데, 7~8발씩 쐈어요. 나중엔 포탄 수백 발을 주고 떨어질 때까지 다 쏘래. 포신(砲身)을 식히려고 개울물로 적신 모포를 덮기도 하고 철모에 오줌을 받아서 뿌리기도 했지. 철모에서 지린내가 진동했어요. 그때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평남 덕천 전투에서 아군은 중공군에 밀려 후퇴했고, 현씨가 소속된 부대는 중부전선 춘천과 횡성 지역으로 이동했다. 1951년 2월 중공군 9개 사단의 '4차 대공세'가 시작됐다. 현씨는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군에 넘겨졌다.
그는 1953년 8월 남북한 포로 교환을 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북한에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중노동을 했다. 58㎏이던 몸무게는 40㎏으로 빠졌다. 그는 "배고픔보다 담배 한 개비가 더 생각난다"고 했다. "어느 날 중공군이 내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어찌나 냄새가 구수하던지. 나도 모르게 구걸을 했어요. 중공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우던 담배를 나에게 주고 딴 데로 가더군요. 한 모금 깊숙이 빨고 서서히 내뿜으니 피로가 싹 가시고 생기가 도는 것 같아. 그런데 미군 포로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손을 내미는 거야. 순간 울컥하고 목이 메더라고. 한 모금 다시 빨고 그에게 줬어요."
현씨는 귀환 후 군에 복귀해 1954년 5월까지 복무한 뒤 일등병으로 전역했다. 그는 만 21세에 복학했고, 서울대 사범대학에 합격해 졸업했다. 중학교 교사가 돼 도덕을 가르치고, 서울 지역 사립대에서 교육학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현씨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서 잘 키웠지, 박사 학위(교육심리학)도 받았지, 이제 연금도 꼬박꼬박 나오지…. 뭘 더 바랍니까?"
현씨는 자신이 만든 군가 '6·25 소년병가'를 직접 불러줬다. "조국의
부르심에 분연히 일어나/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으로 달려가/ 후퇴를 모르고 끝까지 싸웠다/ 아 우리는 대한혼의 꽃 6·25 참전소년병".
현씨처럼 서울에서 자원입대한 26개 학교 출신 학도포병 341명 중 전사 및 실종자는 112명이다. 현씨는 "26개 학교에 341명의 이름이 새겨진 명비가 세워지고 현충일마다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게 내 소원"이라고 했다.
6.25 참전 미성년 학생들의 홀대
게시일: 2016. 3. 27.
6.25 전쟁 발발로 대한민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18세 미만의 미성년 학생들도 펜 대신 총을 들고 전선으로 향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수한 소년병들이 조국수호의 화신으로 스러져 갔다. 정부는 휴전이 됐음에도 이들을 귀향조치 하지않았고, 제대한 뒤에는 징집 영장을 받은 일반병과 똑 같이 예우하고 있다.
첫댓글 6.25의 노래 / 20120623 外 https://cafe.daum.net/bondong1920/8dJ1/2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