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게 난 은혜를 갚는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이리 흔히 말한다
그래서 역관 홍순언의 이야기를 옮긴다
여기서 비단 백필에서 한필은 가로 90센티,세로12미터로 그당시 가격이 720키로 쌀과 맞먹는다고 하며
지금으로는 2억 1600만원이다
그러나 ..한필 한필에 보은이란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하니.
돈보다 그 정성이 얼마나 귀한가 ?
역관이란 조선시대에 외국어를 통역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관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 당시 역관을 배출해 내던 기관을 ‘사역원’이라 불렀고 사역원에서 교육시킨 외국어는 총 6개였다. 중국어, 위구르어, 일본어, 만주어(여진어), 몽고어, 유구어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몽고어 교육을 고려 이후로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몽고(원나라)는 고려 말에 명나라에게 밀려 동북 초원으로 물러간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을 향한 공포스러운 기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라도 기회가 생기면 다시 일어나 세상을 호령할 것만 같은 강력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역사상 수많은 역관들 중 가장 관심을 끌만한 인물이 바로 16세기 조선 선조 때 역관이었던 홍순언이다. 지금부터 만들어 갈 이야기는 그의 일화들이다.
홍순언이 여느 때처럼 공무수행을 위해 명나라를 갔을 때의 일이다. 연경(북경)에 도착하기 하루 전 날, 그는 통주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어느 홍등가를 방문하게 된다. 술을 마시기 위해 기생 한 명을 청하는데, 보통의 화려한 색상의 기생 옷을 입지 않고 백색의 상복을 입은 여인을 맞이하게 된다. 홍순언은 그녀가 왜 상복을 입고 들어왔는지 그 연유를 묻게 되고 그녀는 자신의 사연을 홍순언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남경이라는 도시에서 호부시랑의 벼슬을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공금횡령 누명을 쓰고 옥사를 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죽게 되자 부모의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 기생이 되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낀 홍순언은 그 자리에서 조선 관아에서 빌려온 무역자금 2천 냥의 돈과 상당량의 인삼을 선물로 주고 그냥 돌려보내게 된다. 그녀의 성은 류씨였고, 그녀는 나중에라도 홍순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요량으로 그의 성과 이름을 물었으나 홍순언은 끝가지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그냥 조선에서 온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고만 알려준다.
그 후 공무를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홍순언은 류씨 여인에게 준 2천 냥의 돈 때문에 공금횡령의 죄목이 붙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류씨 여인은 그 후 홍등가에서 나오게 되며 홍순언에게서 받은 돈 2천 냥과, 인삼을 팔아서 마련한 천 냥을 포함한 3천 냥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부모의 빚도 갚게 된다. 모든 가족사의 일들을 정리한 후 류씨는 고향을 떠나기로 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예부시랑 석성이라는 사람의 집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들르게 된다. 그러나 석성의 본부인이 심한 중병을 앓고 있어서 그녀는 석성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그곳에 머물게 된다. 류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석성의 부인이 별 차도가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석성은 자신의 부인을 간병하던 류씨 여인의 정성에 감동 하여 그녀를 계비(둘째 부인)로 맞게 된다.
한편 조선에서는 홍순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선조 임금의 역관들을 향한 노발대발의 화가 극에 달하게 된다. 바로 ‘종계변무’라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과 선조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고민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에 버금가는 명나라의 법령과 제도를 기록해 놓은 ‘대명회전’이라는 책에 조선왕실의 가계도에 관한 잘못된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명회전 정덕본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름이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 이성계 아버지의 이름은 이자춘이며, 이인임은 고려 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이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틈나는 대로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잘못된 내용을 고쳐 달라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명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후로도 계속 조선의 왕들은 200년 동안이나 사신들을 보내 수정 요청을 하였으나 명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소위 ‘종계변무(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라 칭한다.
특히 선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에 관해 스트레가 심했다고 한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서자였고, 선조 또한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적통 문제에 있어서 신하들에게 보이지 않는 멸시와 무시가 있었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하여 이명(귀울림) 증상 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였을까? 선조는 왕실 역사 안에서 필적할만한 업적 하나를 남겨 체면을 살리고자 종계변무에 더욱 열을 올리고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홍순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선조는 모든 역관들을 불러놓고 ‘이번에도 종계변무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역관들의 목을 치겠다’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이에 모든 역관들이 회의를 한 후 옥에 갇힌 홍순언의 횡령금 2천 냥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명나라로 보내 해결해 보자는 것에 만장일치의 합의를 보게 된다. 모든 역관들의 목숨이 모두 홍순언의 어깨에 달려있게 된 셈이다.
옥에서 풀려난 홍순언은 바로 연경(북경)으로 떠났고, 연경에 들어서는 입구인 조양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홍순언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명나라의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이었다. 명의 예부시랑이 조선의 역관을 마중 나와 기다린다는 것은 양국의 유사 이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석성 곁에 한 여인이 홍순언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은 예전에 통주의 홍등가에서 만났던 기생 류씨였다. 그녀는 잊지 않고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 석성 또한 홍순언이 연경에 온 이유를 듣게 되었고, 본인이 앞장서서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는 일을 자처하여 종계변무의 일을 도와주게 된다. 그렇게 200년이 넘도록 끌어오던 종계변무는 두 달간의 시간이 소요된 이후에 조선의 요구대로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여 바르게 바뀌게 된다.
종계변무의 수정본은 ‘대명회전 만력본’에 그 내용이 드디어 실리게 된다. 홍순언이 조선과 선조의 숙원을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에 석성의 부인 류씨는 보은(報恩)이란 수를 직접 새긴 비단 100필을 홍순언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선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19명의 일행들에게 광국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홍순언에게는 우림위장(임금을 경호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종 2품에 해당)을 임명하게 되는데, 역관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관직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릉군이라는 군호까지 하사하기에 이른다. 군호를 받는다는 것은 왕실과 한 핏줄이라는 의미로 신하로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또한 선조는 땅과 노비도 하사하였는데, 그 때 받았던 땅은 지금의 ‘을지로입구’에 해당하며 그 당시에는 홍순언이 류씨 부인에게서 받아온 보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100필의 비단 때문에 ‘보은단동’ 혹은 ‘보은골’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번 홍순언의 역량이 발휘될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이 그것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하루 만에 부산 동래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불과 20일 뒤에는 도성인 한양까지 함락되고 만다. 선조는 치욕스럽게도 한양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과 의주로 몽진을 떠나게 된다.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인 의병 활동이 있었고 남해 바다에서 이순신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반전 시키려면 조선에게는 명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조선의 파병을 꺼려하고 있었다. 명이 조선 파병을 주저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명나라는 왜를 주목하면서 또한 조선도 함께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왜와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소문이 명나라에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 남짓한 시간에 선조가 평양으로 몽진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명나라의 의심은 점점 더 확신이 되어갔다. 조선의 왕이 피난을 가장하여 왜군 북진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의심을 한 것이다. 명은 직접 사람을 보내서 상황들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명의 경제가 피폐해져 국가의 재정 상황도 좋지가 않았고 여진이 세운 후금은 계속해서 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명의 파병을 기다리는 선조로서는 모든 상황이 암담한 현실이었다. 심지어 후금이 조선에게 파병을 해주겠다고 하였으나 조선은 오랑캐라 하여 그들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원병을 받을 경우 명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후금의 제안은 끝까지 거절하게 된다. 이런저런 복잡 다양한 동북아의 역학 관계는 조선에게는 불리하기만 하였다. 선조는 이러한 다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종계변무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홍순언을 다시 한 번 명나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홍순언은 연경에 가서 석성과 류씨 부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석성은 명의 조선 파병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하게 된다. 홍순언이 예전에 종계변무의 일로 명을 갔을 때에는 석성이 예부시랑(외무부 차관)으로서 도움을 줬고, 이번에는 병부상서(국방부 장관)로서 홍순언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 파병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병부상서 석성 한 사람 뿐이었다. 석성의 주장은 이러했다. “만일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 반드시 요동을 침략할 것이고 명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만 조선의 문제만이 아니라 명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명은 병부상서 석성의 지속적인 설득과 주장으로 인해 조선에 원병 파병을 결정하게 되고, 군사와 재정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전쟁은 7년이라는 시간으로 장기화 되었고 홍순언은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고구려 후예)의 통역관으로 함께 전장을 누비게 된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쟁의 양상은 반전을 이루게 된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육군에서는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향해 압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98년 9월부터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홍순언은 전쟁이 끝나는 해에 조선 땅에서의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조선 파병을 주장했던 석성은 막대한 군비 소모에 대한 책임으로 투옥되고 결국 옥사하고 만다. 옥에 살아있는 동안 석성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우려해 류씨 부인과 아들 석담과 석천에게 조선으로 망명할 것을 유언한다. 그들은 석성의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건너와 귀화했고 선조는 그들에게 황해도 해주 땅에 정착하도록 허락한다. 첫째 석담은 해주에 정착하여 수양군에 봉해졌고, 둘째 석천은 경북 성주에서 정착하였다. 그래서 각각 해주 석씨와 성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조선에 있는 명나라 유민들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석씨 일가를 경상도 산음(山陰) 지방으로 피신시키고 전답을 다시 내렸으며 엄격한 보안을 통해 그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경남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 일대이다. 섞씨 가문은 과거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서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금도 석씨의 후손이 이곳에 살고 있다. 추성리에는 석담의 15대손과 16대손들이 살고 있다. 석성의 첫째 아들 석담의 13대손인 석상용은 일제강점기 시절 의병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해주 석씨 가문은 조선이 일본에 의해 두 번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지원군을 보내도록 돕거나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는 가문이 된다.
198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해주 석씨는 2,600명 정도라고 한다. 해주 석씨 뿐 아니라 왜란 당시에 조선에서 전쟁을 치르던 명나라 장수들 중에 조선으로 귀화한 성씨들이 여럿이 있다. 절강 신씨, 절강 편씨, 절강 팽씨(예: 개그우먼 팽현숙), 삼공 마씨, 소주 가씨 등등...
2015년에는 남양 홍씨(홍순언) 종친 대표와 해주 석씨(석성) 종친 대표, 절강 편씨(편갈송-임진왜란 시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운 장군)의 종친 대표가 430년 만에 함께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홍순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교훈으로 배울 수 있을까? 뛰어난 통역사가 될 만큼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때는 손익 계산을 따지지 말고 ‘통 크게’ 도와주라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보은(報恩)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가?...그 몫은 각자의 상황과 목적론적 시각에 따라 많은 해답으로 다양하게 도출되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