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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6 : 3 천사를 판단함 - 고전 6 : 7 피차 고발함
고전 6 : 3 천사를 판단함 -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을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1]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나의 논지를 향한 그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질문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는 앞 절에서 사용한 수사적 표현보다 더 강조된 부정 의문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지가 필연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보좌하는 천사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신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 사 24: 21 -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 벧후 2: 4 -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 유 1: 6 -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여기서 '천사'(*, 앙겔루스)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 6) 곧 범죄한 천사들(벧후 2: 4)을 가리킨다.
* 히 2: 14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2]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하물며'(*, 메티게)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판단하게 될 위치에 있는 성도들이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세상 법정에 송사하며 그 권위에 굴복하겠느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세상 일'로 번역된 헬라어 '비오티카'(*)는 법정 용어가 아니라 '일반 생활 습관에서 발생하는 평범한 일' 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평소에 사소한 마찰 정도도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에 소송한 것으로 추측된다(Farrar).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성도는 장차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상호 간의 일들을 판단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성도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한 천사들도 판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일들을 판단하지 못할 것인가.
성도는 양심을 깨끗이 씻음을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받았으므로 세상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고전 6 : 4 세상 사건이 있을 때 -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교회가 성도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처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본 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1) '경히 여김을 받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2) '세우느냐'로 번역된 '카디제테'(*)를
직설법으로 쓰인 수사 의문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풍자적 어조를 띤 명령문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카디제테'는 '카디조'(*, '임명하다')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나 문맥상 그 의미는 의문문과 관계된 직설법 동사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본 절을 다음과 같은 풍자적 의미로 해석한다.
즉 '만일 너희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위치에 있는데도 이러한 세상 사건으로 논쟁해야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교인들 중에 가장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워 이런 작은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KJV, NIV, Godet, Calvin, Mare, Bengel).
이처럼 명령법으로 받을 경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는 교인들 중에 '믿음이 약한 자'로서 '무시당하는 자' 또는 '어리석은 자'로 해석한다. 그래야만 풍자적 의미가 강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카디제테'를 직설법 동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은 "너희에게 세상 사건으로 인한 논쟁이 있다면 왜 너희는 그 사건을 교회로부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 맡기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한다(RSV, C.K. Barrett).
이 경우 '경히 여김을 받는 자'는 성도들의 송사를 주관하는 '세상 법관'들을 시사한다. 세상 법관들이 아무리 높은 지식과 천성적인 미덕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Barrett).
우리는 여기서 전자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4: 8에서 고린도 교회를 풍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사실과 전자의 해석이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본문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Mare, Harris).
후자의 해석을 취할 경우 이 문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당시의 재판관들을 경멸이 여겼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본 절의 의미를 어느 것으로 취하든 간에 이 말을 한 바울의 근본 의미는 손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말을 한 목적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려한 데 있었으니 명령적인 어조든 의문문적 어조든 이 말은 교인들 간의 사적 문제를 법정으로까지 끌고 간 것에 대하여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교훈하는 바는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당한 해결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분쟁의 사건이 사소한 생활의 문제이든지 아니면 큰 분쟁이든지 교회 자체 내에서 공동체(共同體)의 능력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 6 : 5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지혜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그런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적절하게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세워 주실 것이다.
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에 대한 바울의 솔직한 심정이 표출된 본 절의 뜻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교인 중에 경히 여김을 받는 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E.B. Allo).
그것은 본 서신의 전반부에서 자기의 지식을 자랑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자만심에 비해 현재 그들의 초라한 상태를 지적하려는 것으로서 '정말 너희 중에 그 분쟁을 해결하거나 중재할 만한 지혜자 하나 없느냐'라는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L. Morris).
바울이 4: 14에서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으나 본 절에서 그 의도를 바꾼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듯 한 심한 풍자를 사용해서라도 법관들에게 양도되어 판단 받는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사도가 그들을 향한 지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이 면박(面駁)은 결국 그들을 명예롭게 할 것이다. (J. Calvin).
2]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1) 판단할 만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나이'(*)는 부정 과거부정사로서 재판에 대한 판결이나 결정이라는 의미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여 해결한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Morris).
형제와 형제 사이에 발생한 분쟁은 재판의 판결이라는 것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의지와 조정자의 중재에 의하여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지혜자 한 사람 찾지 못했다.
(2) 바울은 말한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교회가 성도 간의 문제를 재판하기 위해 모였을 때, 교회는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교회의 일들은 먼저 믿음이 있는 자,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한 자를 세워 처리해야 한다. 믿음과 성경의 바른 지식이 있어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가 있는 자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가 교회의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교회가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일꾼들과 봉사자들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
고전 6 : 6 형제와 더불어 -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부끄럽고 잘못된 일이다. 죄씻음 받은 자들이 죄인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더 낫다.
1]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바울은 접속사 '카이'(*, '그리고')를 사용하여 논리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의 잘못은
(1)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발생하여 이에 따라 있을 수 없는 분쟁이 발생했다.
(2) 그 분쟁을
교회 안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송사하였다.
(3) 결정적인 잘못은
그 분쟁을 제소한 법정이 불신자의 법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분쟁이라는 잘못된 행위로부터 출발하여 형제를 이방의 법정에까지 고소하고 이교도로 하여금 성도를 판단하게끔 하는 더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떡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들 가운데 발생한 작은 악은 점진적(漸進的)으로 성장하여 개인과 이웃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멍들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이라도 악의 연결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에서 형제와 형제 사이의 분쟁을 서로 간에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분쟁 문제를 꼭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이런 일을 충분히 처리할 만한 지혜를 가진 교인을 찾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소송을 통하여 서로 다투고 판단 받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다(Mare).
고전 6 : 7 피차 고발함 -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이들의 송사에 대한 판결은 소송을 제기하기 이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속한 두 형제는 세상 법정에 제소하는 그 순간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1] 너희가 피차 고발(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허물'이라는 헬라어 '헥테마'(*)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서 '패배'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Morris).
본 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도덕적 패배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의식(지체 의식)의 패배이기 때문이다.
* 롬 12: 5 -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 엡 4: 4 -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원리를 저버리고 세상의 법정을 선택함으로써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영적 패배를 선택하였다(Harris).
'헥테마'를 '패배'가 아닌 '허물'이나 '결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그 의미는 송사한 사건이 이미 그들의 약점이 되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허물이든지 패배이든지 간에 사랑과 용서를 저버린 그들의 행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하는 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 골 3 : 13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2]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여기에서 바울의 주장은 절정에 달한다.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법적 소송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이며 나아가서 완연한 허물이라고 지적한다.
사도는 교인들이 이런 싸움에 휩쓸려서는 안 될 일이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주거나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어려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Mare).
그들은 분쟁의 승리를 위해 송사하기 이전에 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만 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이다.
* 마 5: 39-42 -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3)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 희생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손해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신이 불의한 자가 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양보이다.
'불의를 당하는 것'(*, 아디케이스데)과 '속는 것'(*, 아포스테레이스데)에 해당하는 두 헬라어 동사는 모두 현재 중간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허용적 의미를 띠는 수동태에 가깝게 해석되어야 한다.
(1) 불의를 당하는 것
'아디케이스데'는 '부당함을 입는', 또는 '불공평한 상태나 모욕을 당하는'을 뜻하는 단어로서 공평하고 평등한 해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불공평을 감수하라는 것을 암시한다.
(2) 속는 것
'아포스테레이스데'는 '강도를 당하다', '빼앗기다'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형제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치 강도에게 약탈당하는 것과 같은 불이익(不利益)을 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양보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자신의 지혜와 의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에게는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이기적인 추구보다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삶의 원리와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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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에도 여백의 공간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내 삶에 여백이 클수록 사랑과 행복을
넉넉히 채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