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두는 시련 발아래 두는 시련
정종민 성균관대 겸임교수
존 웨슬레는 "시련은 가장(假裝)된 축복이다"라고 했다.
축복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시련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생은 탄생 그 자체가 시련의 시작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과 마주치는 과정이다.
모든 인간이 시련을 맞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피할 수도 없다.
시련이 찾아올 때 시련으로 받아들일지 축복으로 받아들일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인 아름다운 사례도 많다.
유능한 헤어디자이너였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친구들과 떠난 휴가지에서
사고를 당해 한쪽 팔을 잃었다.
접합수술을 시도했지만 패혈증세가 심해 결국 절단했고,
이후 수많은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모든 꿈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그녀는 많이 울고 좌절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녀는 "목이 터졌다면 즉사했을 테고,
오른손잡이인데 왼쪽 팔이 절단돼서 차라리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좌절에서 벗어나던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피트니스였다.
그녀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피트니스를 시작했고,
선수가 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리고 대회에 출전해 장애인 부문 챔피언을 비롯해 비키니 쇼트 체급 1위,
미즈비키니 톨 체급 1위, 가장 큰 상인 오버롤 부문에서 우승했다.
비록 왼팔은 없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당당했고 아름다웠다.
마치 사람처럼 두 발로 서서 언덕을 깡충깡충 뛰어가는 푸들 한 마리가 있었다.
‘코라 로즈’라는 이름을 가진 그 강아지는 2017년 차에 치여 앞다리 뼈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골반도 부러진 심각한 상태로 발견됐다. 결국 앞다리 모두를 절단하게 됐고,
동물구조단체의 보살핌을 통해 점차 뒷다리에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서서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녀석은 뒤뚱뒤뚱 춤추는 듯한 모습이지만 씩씩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시련을 겪은 후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한다.
이는 역경과 고통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이기도 하다.
회복탄력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련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참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넓고 길게 보면
그 시련을 통해 더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한 측면도 있다는 경지까지 생각이 닿아야 한다.
다음은 시련의 충격에 매몰돼 삶 전체를 망가뜨리게 놔두지 말고
그것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다.
심리적 공간, 즉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련의 아픔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 아픔에 빠져 있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내면의 자유를 얻게 되고,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련으로 얼룩진 새로운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이는 시련에 처했을 때 자신이 내면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잠재능력이나 가족, 친구 등의
도움을 활용해 극복하는 힘이기도 하다.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시련이 어느 순간 반전돼 우리의 삶을 더 깊이,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시련이 축복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이 생성되기도 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보이듯, 시련은 보이지 않던 기쁨과 행복을 보이게 해 주는 삶의 과정이다.
시련의 크기는 성장의 크기, 행복의 크기와도 비례한다.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C.F 블렌차드의 말처럼
시련을 머리에 두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원망하게 되지만,
발아래 놓으면 그것을 디딤돌 삼아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희망이 된다.
==늘 청춘6789다음카페에서==
첫댓글 감사 합니다.
오늘도 행복하고 건강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