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네요.
어제 2시 쯤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시 7시쯤 그쳤습니다.
맑았던 하늘인데, 낮에는 덥다가 밤엔 시원한 바람이 불길래
비가 오려나 했었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립니다.
공사와 말글을 이어봅니다. '일위대가'라는 글감으로...
어떤 사람이 전원주택을 지어 공기좋은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친한 사람 중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묻습니다.
"얼마면 되니?"
"딱 잘라서 말을 못하는데 어느 정도는 들거야."
이런 상황에서 계약을 해서 문서를 남긴다하면,
내역에는 [전원주택 건설-1식-1,000(원)],이렇게 적히고 도장이 찍히고
거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다보니 집만 짓나요?
거기에 물이 들어가야죠, 가스가 들어가야죠, 전기가 들어가야죠,....
티브이 봐야죠, 전화가 되야죠. 누리그물도 엮여야죠.
아무리 넉넉하게 1식 금액을 잡았다해도
그 일을 한 사람은 돈이 부족합니다.
집주인을 위해 희생봉사하고 자기 돈도 더 넣습니다.
모아 놓으니 1,000원이라는 금액이 크게 보이지,
실제로 들어가는 일들이 서로 엮이면 그리 큰 돈이 아닌 거지요.
그래서, 이익을 남기려면
'전원주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조각냅니다.
일단 집의 틀이 없으면 안되죠...
문이 없으면 안되고...
전기 없으면 안되죠...
물이 없으면 안되죠...
불이 없으면 안되죠...
티브이도 보고 싶죠...
이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약간은 남는 값을 매겨서 일을 합니다.
일을 하는데, 처음에 1식으로 값을 매긴 방편으로 합니다.
그러면, 그 차액의 반 정도의 이익을 얻습니다.
여기서 '틀'을 만드는데 처음부터 드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값을 매긴 표를 일위대가라고 합니다.
일위대가를 만들면,
'틀' 하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
아는 모습의 이름으로 펼쳐지니,
전체 감각의 80%이상이라는 시각, 눈에 보여
일하는 사람과 돈주는 사람이 협력할 수 있습니다.
서로 필요하니까, 협력이라고 합니다.
'1식'으로 계약하면, 그냥 말하는 사람을 믿는 모습입니다.
얼마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무언가를 빼먹고 생각할 수 있으나,
말을 했기 때문에
말한 사람이 손해를 떠맡게 되는 거죠.
이런 과정은 실제로 해봐야 알 수 있는데
'1식'으로 하면 대부분 손해라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면서 욕먹게 되죠.
어떤 일이든
그 일을 구석구석 조각낼 수 있는 사람이 돈을 법니다.
구석구석 조각낼 수 없으면, 하지 않는게 돈을 버는 꼴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말글로 이어 볼까요?^^
우리가 말글을 다 안다고는 하지만, 글을 써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과,..
전원주택하면, 일단 집이 있어요.
'집'은 보통 몇 가지로 짜여져 있나요?
낱말을 사용하면, 덮다,막다,열다,닫다,세우다....다섯 가지 정도네요.
이런 다섯가지 모습이 모여서,
일단 있는 생명이 이어 갈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집이라고 하겠죠?
이런 모습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둘 세던 사람이
주먹으로 다섯,열 세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럼, 이 다섯을 다시 쪼개볼까요?
전에도 쓴 적이 있는 '열다'로 한번 해 볼까요?
우리의 모습으로 알 수 있으니까요...
일단 문에 열다를 사용합니다.
열리지 않는 공간에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은 무엇이건 문이 있습니다.
집의 문을 '열다'하면,
우리는 몇 가지 낱말을 써야 합니다.
다가섬,
열쇠를 뺌,
열쇠를 꽂음,
열쇠를 돌림,
손잡이를 돌림,
손잡이를 잡음,
문을 당김,...
적어도 일곱 가지 움직임이 들어가 있네요.
이 일곱가지 움직임이 뜻을 가지려면,
문을 만듬,
벽을 만듬,
자물쇠를 끼움,
적어도 세 가지 모습이 들어가네요?^^
이 세 가지도 움직임으로 쪼개면
열 개 이상씩은 나올 겁니다.
그럼, '열다'에 들어 있는 움직임만,
일곱 더하기 서른이니, 서른 일곱의 움직임이 모여 있네요.
제가 왜 이런 분석을 할까요?
물론 돈을 버는 일과도 이을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런 모습은
몇 번의 정신의 진화단계를 거쳤다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몇 개의 움직임이 모여서 하나의 낱말로 만드는
시적언어의 단계를 몇 차례 걸친 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을 보고 든 느낌으로 움직였을 때,
그 이름의 뜻을 알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는 거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오감으로 배웁니다.
한 낱말을 쓰더라도 오감이 동의할 수 있는 뜻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읽는 모습은 다른 정신생명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화 되지 않고, 온 몸의 물에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이어지기 힘듭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감으로 움직이며 배우는 것만 '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겨레에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먼저 들어와 배어 있기도 하지만,
반야심경의 '색수상행식'이 학문에 배어 있습니다.
색, 자연의 이치를
수, 보고 느끼며
상, 생긴 정신 속 그림을
행, 움직여 오감으로 느낄 때
식, 앎이라고 합니다.
그럼, 들온말글이 이름이 되었을 때
그 이름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물론, 하려하면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못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오감으로 느낀 사람은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살기 싫어져요.
혼자서는 못 사니까
욕하고 화난 것을 표현해서 협력을 이룰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름을 오감으로 느껴 알아야 더 크고 넓은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계속 시적 언어가 만들어져 수많은 움직임을 포함한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시적언어의 특성을 우리 말글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언어의 특성을 살리는 민족이 지구별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갑니다.
'다가섬,꽂음,돌림,당김'을 소리내는 사람과
'엶,닫음,세움'을 말하는 사람과
'집'을 이야기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