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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5부 2
도대체 어떤 이유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혼란된 머리에 이런 터무니없는 추도식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마르멜라도프의 장례 비용으로 라스콜니코프한테서 받은 20여 루블이나 되는 돈에서 거의 10루블 가까운 돈을 써버렸다. 아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아말리아 이바노브나에게 고인이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경우에 따라선 훨씬 훌륭했는지도 모른다’는 것, 따라서 그들중 누구도 고인을 ‘얕잡아 볼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격식대로’ 고인을 추도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가난한 사람 특유의 자존심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다만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서 최후의 힘을 짜내어 오늘날의 생활 습관상 누구에게나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사회적 의식 등에 귀중한 저금을 죄다 털어버리곤 한다. 그리고 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지금, 그것을 기회로 해서 ‘비천하고 추악한 셋방살이들’에게 자기는 ‘의젓한 생활 방식과 접대법’을 알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이러한 신세가 되려고 양육되지는 않았으며 ‘훌륭한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대령의 가정’에서 태어나 손수 집안 청소를 하거나 밤중에 아이들 누더기 옷을 세탁하도록 양육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여봐란듯이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자존심과 허영심의 발작적 충동은 이따금 매우 가난한 생활에 짓눌린 사람에게도 찾아들어, 때때로 도저히 참기 힘든 조급한 요구로 변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결코 환경에 짓눌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비록 환경에 시달려서 죽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압도되는 일, 즉 위협에 굴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소네치카가 그녀의 머리가 좀 이상하다고 말한 것은 충분히 근거 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그렇다고는 아직 단언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실제 최근 1년 동안 그녀의 가련한 머리는 너무도 시달림을 받아왔으므로 얼마쯤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폐병의 격심한 진전도 역시 지적 능력의 혼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주류라고 해도 갖가지 술이 고루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데이라주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과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드카, 럼주, 리스본 포도주 등은 품질이 최하이긴 해도 양만은 모두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은 꿀밥 이외에 두세 가지 요리가 있었으나(그중엔 블린도 있었다.) 전부 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부엌에서 운반되어 왔다. 그 밖에 식후의 차와 폰스를 위해서 사모바르가 두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장보기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이, 무엇때문에 리페베흐젤네 집에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 건물에서 셋방살이하는 초라한 폴란드인의 도움을 받아 처리했다. 이 사나이는 곧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어제 하루 종일과 오늘 아침나절을 꼬박 뛰어다녔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까지 연방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달려와서 상의하고, 심지어 공설 시장까지 그녀를 찾으러 뛰어와서는 간단없이 그녀에게 파니 호룬지나(‘소위 부인’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바람에, 처음에는 이 ‘부지런하고 친절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엄두도 못 냈을 거라고 칭찬하던 그녀도 나중에는 싫증을 느껴 모리를 내젓고 말았다. 원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더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빛깔로 장식해서 사람에 따라서 민망스러울 만큼 성급히 칭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을 칭찬하려는 나머지 전혀 있지도 않은 일까지 꾸며내고는 자신도 진심으로 그것을 믿어버리지만, 얼마 후엔 환멸을 느끼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문자 그대로 숭배했던 사람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으면서 사정없이 밀어내는 성격의 여자였다. 그녀는 원래 웃기 잘하는 쾌활하고 온순한 성품이었으나, 끊임없는 불행과 실패를 겪은 결과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화와 기쁨 가운데서만 살기를 지나치게 원할 뿐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기 까지 했으므로, 생활상의 대수롭지 않은 부조화나 사소한 실패까지도 그녀를 거의 광분 상태로 몰아넣곤 했다. 조금 전까지 가장 빛나는 희망과 공상을 품고 있었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별안간 운명을 저주하면서 손에 닿는 대로 찢고 던지고 벽에 머리를 부딪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로지 이 추도식이 계획되었을 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충심으로 모든 일을 돌봐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식탁 준비에서부터 식탁보와 식기, 그 밖의 것들을 마련하고 자기 집 부엌에서 요리를 만드는 일까지 도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모든 권한을 그녀에게 일임하고 빈집을 부탁한 뒤에 묘지로 갔던 것이다. 사실 만반의 준비가 훌륭하게 갖춰져 있었다. 탁자에는 제법 깨끗한 식탁보가 깔리고 식기, 포크, 나이프, 술잔, 컵, 찻잔 등은 모두 물론 여러 집에서 빌려 온 것이므로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이었지만 하여튼 예정 시간에는 각각 제자리에 놓였다. 그래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훌륭히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느끼면서 검정 옷에 새 상장(喪章)을 단 실내 모자를 쓰고 완전히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다소 우쭐해하는 빛까지 보이면서 묘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기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왜 그런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마치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없었다면 식탁 준비도 못했을 거라는 태도로군, 정말이지 참!’ 그리고 또 새 리본을 단 실내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저 못난 독일 여자는 자기가 여주인이랍시고 자비심으로 불행한 셋방살이 식구를 도와준다고 으스대고 있는 거 아닐까? 자비심이라니! 농담은 그만해두시지! 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대령이며 거의 지사에 비길 만한 신분이어서 때로는 40인분의 식탁을 마련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니까 신분도 알 수 없는 천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따위- 아냐, 류드비고브나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지 - 그런 여자는 아마 부엌에도 들여보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마음속으로 오늘은 꼭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골탕 먹여서 자기 분수를 알게 해주자, 그렇지 않으면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모를테니까, 하고 결심했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히 대해주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불쾌한 사실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부분적 원인이 되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장례식에는 묘지까지 따라온 폴란드인 말고는 초청된 셋방살이 동료들이 한 명도 얼굴을 보이지 않더니 그 후의 추도식, 즉 음식을 차린 추도식이 되자 그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더기라고 할 수 있는 가난뱅이들만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서도 좀 나이도 지긋하고 지위도 있어 보이는 패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쏙 빠졌다. 예를 들면 세 든 사람들 가운데 지위가 제일 높아 보이는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 같은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엊저녁에 이미 온 세상 사람에게, 즉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며, 폴레치카며, 소냐며, 폴란드인에 이르기까지 그 고귀하고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신사는 자기 선친의 친구로서 친정에 출입한 일도 있으며 각 방면에 교제가 넓은 분이어서 자기에게 상당한 연금이 나오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고 신이 나서 풍을 떨었던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두거니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설사 타인과의 관계와 상태를 자랑하는 일이 있다 해도 이해 관념이나 이기적 타산 같은 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감정이 넘쳐흐르는 대로 그저 남을 칭찬하고 그 사람에게 좀 더 가치를 높여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루쥔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의 흉내를 냈는지 ’그 더럽고 비열한 레베쟈트니코프‘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자는 도대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이 사나이야말로 순전히 자비심에서 초청했으며, 그것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한방에 살고 또 그의 친지라는 점에서 초대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과년한 딸‘을 데리고 사는 오만한 여자도 역시 오지 않았다. 그 모녀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집에 세 든 지 아직 두 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마르멜라도프네 방에서, 특히 고인이 술에 취해 돌아왔을 때 일어나는 소동과 아우성에 대해서 몇 번인가 불평한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통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와 싸우고 가족들을 죄다 이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위협한 끝에, ‘너희들 일가는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훌륭한 동거인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래고래 악을 쓴 적이 있었기 대문이다. 그래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번에 일부러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부인과 딸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그 부인이 거만스레 외면을 하곤 했으므로 더욱 못마땅했는데, 이렇게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부인에게 ‘우리는 생각도 감정도 당신들보다는 고상하기 때문에 원한을 잊고 초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자기가 본래부터 이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식사하는 동안 자기 친정아버지가 지사와 거의 동등한 인물이었다는 것 등을 그들에게 설명해주고, 그와 동시에 오다가다 만났을 때 인사도 않고 외면해버리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도 넌지시 귀뜸해줄 작정이었다. 그 밖에도 뚱뚱한 육군 중령(실은 퇴역한 2등 대위)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은 어제 아침부터 ‘술에 취해 녹초가 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컨대 참석한 사람은 폴란드인과, 땟국이 흐르는 연미복을 입고 악취를 풍기며 여드름투성이 얼굴에 말이 없는 가난한 월급쟁이와, 옛날엔 어느 우체국에 근무한 일이 있으나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동정으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셋방에 신세 지고 있는 귀먹고 눈도 잘 못 보는 다 늙어빠진 노인 정도가 고작이었다. 또 한 사람, 주정뱅이 퇴역 중위가 와 있었는데 실은 식량국 관리로서 함부로 방약무인하게 커다란 소리로 웃어대곤 하는 사나이였다. 더구나 조끼도 입지 않고 있었으니 가히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지 정체도 모를 사나이 하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식탁 앞에 앉아벼렸다. 그다음 끝으로 어떤 사람 하나가 옷이 없어서 잠옷 바람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무례하기 때문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와 폴란드인이 간신히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폴란드인 자신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셋집에는 한 번도 산 적이 없고 이곳에선 아무도 모르는 폴란드인 친구를 두 명이나 데리고 왔다. 이 모든 일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을 말할 수 없이 불쾌하게 만들고 역정까지 나게 했다. ‘이러고 보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 모든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군!’ 조금이라도 장소를 아끼려고 아이들은 방 안을 가득히 차지한 식탁에는 동석시키지 않고, 뒤쪽 구석의 상자 위에다 식탁을 만든 다음 두 어린아이를 벤치에 앉혔다. 그래서 폴레치카는 누이 구실을 하느라고 아이들을 돌보며 음식을 먹여주기도 하고 ‘어엿한 집안의 아이들처럼’ 동생들의 코를 씻어주거나 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저도 모르게 여느 때보다 거드름을 피우며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손님들을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세 명에 대해선 우선 엄숙한 시선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고 나서 거만하게 자리를 권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어째선지 모든 불참자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집주인인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그녀에게 몹시 불손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햇다. 그러자 상대방도 곧 눈치를 채고 감정이 크게 상하고 말았다. 이윽고 일동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모두가 묘지에서 돌아온 것과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가 온 것을 무척 기뻐했다. 그것은 첫째로 그는 모든 손님 가운데 유일하게 ‘교양 있는 손님’인 데다 또 ‘모두가 알다시피 2년 후엔 이곳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맡을 예정’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가 곧 정중한 말로 장례식에 꼭 참석하려 했으나 부득이 그러지 못했노라고 사과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자기 왼쪽 옆에 앉혔다(오른편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앉았다). 그러고는 요리가 순서대로 잘 나와 고루 분배되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쓰며 조마조마해했다. 지난 이삼일 동안 병세가 악화된 듯 끈덕진 기침이 자꾸만 말을 중단시키고 목을 아프게 했음에도 끊이지 않고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건네고,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가슴에 쌓이고 쌓인 울적한 감정과 이 추도식에 대한 불만을 성급히 털어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불만은 별안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손님, 특히 집주인에 대한 신랄하기 짝이 없는 조소로 대체되곤 했다.
“모든 게 이 뻐꾸기 탓이지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인지 아시겠어요? 저 여자에요, 저 여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집주인 여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글쎄 저걸 좀 보라니까요. 저렇게 눈을 부릅뜨는 걸 보니 우리가 제 흉을 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가보죠? 하지만 무슨 얘긴지 몰라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군요. 아, 마치 올빼미 눈 같네요! 호호호...콜록, 콜록, 콜록! 저 여잔 모자를 뽐내고 싶은 거예요! 콜록, 콜록, 콜록! 눈치채셨나요? 저 여잔 말이죠, 자기가 항상 나를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준 건 나에게 영광을 베풀어주는 거라고 모두가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도 난 저 여자가 똑똑한 사람인 줄 알고 되돌고 훌륭한 분들을, 그러니까 고인의 친지만 초대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보세요. 저 사람이 끌고 온 사람들을....하나같이 광대 같은 사람들뿐이군요! 저 불결한 꼴들이란! 저기 저 더러운 얼굴을 한 사나이를 좀 보세요, 꼭 두 발 달린 허수아비 같군요! 그리고 저 폴란드 사람들....호호호! 콜록, 콜록, 콜록! 아무도, 아무도 저자들을 본 사람은 없어요. 나도 오늘 처음 보는걸요. 저런자들이 뭣 하러 왔을가요? 정말 왜 왔느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에요. 어쩌면 저렇게도 태연히 들러붙어 있을까요? 저, 여보세요!” 그녀는 그중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예보세요, 블린을 드셨나요, 더 드세요! 맥주도 드세요, 맥주! 보드카는 어떠세요?....아아, 저걸 보세요, 벌덕 일어나서 머리를 굽실거리는군요. 저것 봐요, 저걱 봐....무척 배가 고픈가 보죠, 가엾게! 상관없으니 실컷 먹게 내버려둡시다. 설마 난폭한 짓은 하지 않을 테죠...다만....다만 집주인 여자의 은수저가 걱정이군요!....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그녀는 갑자기 집주인을 돌아다보며 좌중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 댁의 은수저가 없어져도 난 책임지지 않겠어요. 미리 말해두지만요! 호, 호, 호!“ 그녀는 다시 라스콜니코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집주인 쪽을 턱으로 가리키고는 자기의 기발한 착상을 기뻐하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래도 몰라요. 아직 모르고 있어요!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군요. 저 꼴 좀 보세요, 올빼미예요, 새 리본을 단 영락없는 저 암올빼미를, 호, 호, 호!’
이때 그녀의 웃음은 다시금 5분 동안이나 계속된 참을 수 없는 기침 때문에 끊어지고 말았다. 손수건에는 약간의 피가 묻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잠자코 라스콜니코프에게 핏자국을 보였다. 그리고 겨우 숨을 몰아쉬게 되자,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양쪽 볼에 홍조를 띠면서 소곤소곤 그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시겠어요, 실은 저 여자에게 그 부인과 따님을 초대해달라고 햇어요. 누군지 아시겠죠? 말하자면 극히 미묘한 부탁을 했지요. 그런 경우엔 그야말로 가장 미묘한 태도로 아주 능숙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저 여자의 초대 방법이 서툴러서 그 떠돌이 바보 여자가, 그 거만한 빌어먹을 년이, 그 돼먹지 못한 시골드기가 초청을 받고도 오지 않게 만들어버렸단 말이에요. 그 소령의 미망인인가 뭔가 하는 여자는 연금을 타내러 올라왔다는데, 옷자락이 해지도록 관청에 들락거리며, 더욱이 쉰다섯이나 된 나이에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루주를 칠하고 있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런데 그 썩어빠진 짐승 같은 여자는 초대를 받았으면 참석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이런 경우의 보통 예절인 한마디 사과조차 없어요!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또 왜 안 오는지 까닭을 알 수 없군요. 그건 그렇고, 소냐는 어디갔을까? 아아, 소냐가 마침 들어오는군요. 소냐, 웬일이냐? 어디갔었니? 아버지의 장례 날인데 그렇게 쏘다니면 되겠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제발 이 애를 당신 옆에 앉혀주세요. 자, 여기 앉아라, 소네치카.....뭐든지 먹고 싶은 걸 먹어라. 우선 젤리라도 들려무나, 그게 좋으니. 이제 블린도 나올 게다. 그런데 애들에게도 주었니? 폴레치카, 너희들한테도 다 있니? 콜록, 콜록, 콜록! 오냐, 그럼 좋다, 얌전히들 먹어야 한다. 레냐, 그리고 콜랴, 함부로 발을 한들거리면 안돼. 도련님답게 점잖게 앉아 있어야지. 아니, 뭐라고, 소네치카?“
소냐는 곧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말에다가 일부러 수식까지 더한 최상급의 정중한 말씨로 그의 사과 인사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전했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여러 가지 용건에 관해 할 이야기도 있고 이후 취할 방법에 대해 상의도 하고 싶으므로 틈나는 대로 방문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소냐는 이 보고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진정시켜줄 뿐 아니라, 그녀를 기쁘게 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옆자리에 앉자 황급히 인사를 하고 흘긋 호기심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죽 그를 보거나 그와 말하기를 되도록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 얼굴만을 보고 있었으나 어쩐지 망연한 방심 상태에 있는 듯 싶었다. 그녀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상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상복이 없었던 것이다. 소냐는 짙은 갈색 옷을 입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단벌의 충충한 서양목 옷을 입고 있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에 관한 보고는 무사히 거침없이 통과되었다. 카체리나는 근엄한 얼굴로 소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역시 근엄한 어조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모두 들으라는 듯이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자기 집안에 대해서 아무리 깊은 성의를 갖고 있더라도, 또 자기 친정 부친과 옛날에 아무리 절친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그처럼 존경할 만한 훌륭한 신사가 이런 ‘터무니없는 모임’에 참석한다는 게 오히려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일지 모른다고 라스콜니코프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는 당신이 이렇게 누추한 자리에 참석하여 이런 변번치 못한 대접을 쾌히 받아주신 데 대해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불쌍하게 죽어간 우리 주인과 그토록 친하게 지내셨으니까 약속을 지켜주신 줄로 압니다만.”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오만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손님들을 둘러보고는, 갑자기 친절한 태도로 식탁 맞은편의 귀머거리 노인을 바라보며, “구운 고기를 더 드시고 싶지 않으세요, 리스본 포도주는 드셨나요?”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옆자리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무슨 말인지 오랫동안 알아듣지 못했다. 노인은 입을 떡 벌린 채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그것이 자리의 흥을 더욱 북돋워주었다.
“저런 바보가 어디 있담! 보세요, 저걸 보세요! 무엇 하러 저런 사람을 끌어왔을까요? 그런데 표트르 페트로비치로 말하면, 나는 항상 그분을 굳게 믿고 있었어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라스콜니코프를 보고 말했다. “물론 그분하곤 비교도 안 되지만요....”하고 큰 소리로 내뱉듯이 말하더니, 그녀는 갑자기 무섭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으므로 상대방은 그 기세에 찔끔 놀랄 정도였다. “그 현란한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런 족속들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죠. 그따위 무례한 모녀는, 우리 아버지 같으면 부엌데기로도 쓰지 않았을 거예요. 죽은 우리 주인 같으면야 성인 같은 호인이니까 혹시 써주는 영광을 베풀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고말고요, 한잔하기를 좋아하셨죠. 술을 좋아하고 잘 드시는 편이기도 했죠!” 보드카를 열두 잔째 비우면서 식량국 관리가 느닷없이 고함을 쳤다.
“죽은 주인에게 그런 결점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갑자기 그 사나이한테 대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주인은 사람이 좋고 결백한 성질이어서, 자기 가족을 무척 사랑하고 또 존경했답니다. 단 한 가지 나빴던 것이라면 사람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어떤 건달이라도 모두 신용했고, 어떤 사람하고도, 자기 구두 바닥만도 못한 사람하고도 같이 술을 마시곤 한 점이죠! 하지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그이 호주머니엔 닭 모양 당밀 과자가 들어 있었답니다. 죽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애들은 잊지 않았던 거예요.”
“닭이라고요? 다아앍이라고 하셨다고?”하고 식량국 관리가 외쳤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 품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주인한테 너무 심하게 굴었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녀는 라스콜니코프를 향해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예요! 주인은 나를 존경해주었어요! 정말 상냥한 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따금 그이가 가엾게 여겨질 때도 있었어요! 묵묵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내 얼굴만 쳐다보곤 했는데, 그런 때는 여간 불쌍하지 않아서 친절히 대해주려고 하다가도 곧 마음속으로 ‘아냐, 친절히 대해주면 기분이 좋아서 또 모주망태가 될 거야’하고 생각을 고쳐먹곤 했지요. 조금이라도 그분을 붙잡으려면 엄하게 구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랬어요, 가끔 구렛나룻을 뽑히곤 했죠.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식량국 관리는 다시 이렇게 외치고는 보드카를 또 한 잔 들이켰다.
”구레나룻을 뽑히는 것쯤은 약과예요. 세상에는 빗자루로 쓸어내야 효과를 볼 만한 바보들도 수두룩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우리 주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녜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식량국 관리에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볼의 붉은 반점이 점점 짙어지고 가슴은 크게 물결쳤다. 1분만 더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재미있어 보이는 듯했다. 모두 식량국 관리를 쿡쿡 찌르며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을 붙여보려는 것이 분명했다.
”저, 실례지만 당신은 대체 누구 말을 하시는 거요?“ 하고 관리가 입을 열었다. ”누구에 대해서, 대체 그건 누구를 빈정대는 말이오!....당신은 지금.....그만둡시다! 어리석은 일이지! 과부라! 과부를 상대할 순 없거든! 용서해 주지...좋아요!“ 리렇게 말하고 그는 또 보드카를 꿀꺽 마셨다.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앉은 채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들의 언쟁을 들었다. 그는 다만 예절에 못 이겨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연방 접시에 옮겨주는 요리에 손을 대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소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소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안감에 휩싸여 몹시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녀 역시 이 추도식이 조용히 끝나지는 못하리라 예측하고, 공포심을 품으면서 차츰 격화돼가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흥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그 부인과 딸이 무엇 때문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초대를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묵살해버렸는지, 그 중요한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소냐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통해서 그 부인이 도리어 이 초대에 화를 내면서, ”어떻게 내가 그런 여자와 내 딸을 한자리에 앉힐 수 있겠어요?“ 하고 반문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귀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갔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그녀, 즉 소냐에 대한 모욕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자기 자신과 아이들, 아니 아버지에 대한 모욕보다 더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 현란한 옷차림의 모녀에게 자기네가 어떤 신분인지 알려주기 전엔’ 결코 진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일부러 꾸미기라도 한 듯이 식탁 한쪽 끝에서 누군지 소냐 쪽으로 화살이 꽂힌 심장 두 개를 검정 빵으로 만들어서 접시에 얹어 보냈다. 그것을 본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불덩이같이 격분해서 곧 탁자 저쪽에 대고, 그런 무례한 장난을 한 자는 물론 ‘술 취한 바보 지식’임이 분명하다고 소리쳤다. 역시 무엇인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동시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거만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한편으로는 좌중의 불쾌함을 털어버리고, 또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려고 밑도 끝도 없이 별안간 딴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가 아는 ‘약제사 카를’이라는 사내가 밤에 마차를 타고 갔는데, ‘도중에 마부가 카를을 죽이려고 덤볐습니다. 카를은 마부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매우매우 부탁했습니다. 울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빌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심장을 찔린 듯했습니다’라고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처음엔 싱긋 웃었지만, 곧이어 아말리야 이바노브나 같은 사람은 러시아 말로 재담을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더욱 화를 냈다. ”우리 아버지는 베를린에서도 매우매우 훌륭한 명사로서 언제나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돌아다녔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웃기 잘하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더 참질 못하고 배를 안고 깔깔 웃어댔다. 그래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도 마침 내 참다못해 분통을 터뜨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글쎄, 저것 봐요, 꼭 올빼미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적이 유쾌한 듯이 곧 라스콜니코프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손을 자기 호주머니에 찌르고 거닐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손을 남의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돌아다녔다는 의미가 돼버렸어요. 콜록, 콜록!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으세요? 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외국인, 주로 어디서 몰려오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독일인들이지만, 어째서 모두 하나같이 우리보다 바보들일까요! 지금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약제사 카를이 놀라서 심장을 찔린 듯했다’느니, 그 사나이가 마부를 잡아 묶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울었습니다, 매우매우 부탁했습니다’라고 했더니 정말 저런 바보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자신은 퍽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얼마나 바보인지는 꿈에도 모르거든요! 내가 보기엔 저 주정뱅이 식량국 관리가 훨씬 영리한 편이에요. 적어도 마지막 지혜까지 죄다 마셔버린 술망나니에는 틀림없으니까요. 그런데 저 진지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저 들을 보세요....어머나,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앉아 있는 저 꼴이란, 노하신 모양이야! 단단히 노하셨어! 호, 호, 호! 콜록, 콜록, 콜록!“
기분이 더없이 유쾌해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곧 여러 가지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지금 진행 중인 연금이 들어오면 그것을 자본으로 해서 반드시 고향 도시에서 양가의 여학생을 수용하는 기숙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아직 그녀 자신의 입으로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매력 넘치는 여러 가지 계획을 털어놓기에 열중해버렸다. 어느 사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예의 ‘상장’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남편 마르멜라도프가 언젠가 술집에서 라스콜니코프에게, 자기 아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 ‘지사를 비롯한 여러 귀빈 앞에서’ 숄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이야기하며 자랑하던 바로 그 상장이었다. 이 상장은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 기숙학교를 설립하는 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그보다도 실은 그 화려한 옷자락을 질질 끄는 거만한 모녀가 추도식에 참석할 경우 그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은 가문이 썩 좋은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대령 집안에 태어난 딸로서, 요즘 부쩍 늘어난 여자 사기꾼들에 비하면 훨씬 훌륭하다’는 점을 명백히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준비햇던 것이다. 상장은 곧 술 취한 손님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별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상장에는 실제로 그녀가 7등관이자 훈장을 받은 사람의 딸이라는 것이 en touteslettres('틀림없이 상세히‘라는 뜻) 적혀 있었으므로, 사실 대령의 딸이라 해도[대령은 5등관에 해당하는 관등) 과히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다. 의기양양해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미래 T시에서의 아름답고 평온한 생활을 곧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숙학교 선생으로 초빙하는 중학 교사들이 이야기며,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자신이 학창 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운 망고라는 존경할 프랑스 노인 이야기며, 그 노인은 지금도 T시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으므로 보수를 적당히만 드리면 꼭 도와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내 이야기는 소냐에까지 미쳐서 ”이 애는 나하고 함께 T시로 가서, 거기서 내 일을 돕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식탁 끝에서 누군가 픽 웃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곧 멸시해버리듯이 식탁 끝에서 일어난 웃음소리는 아예 듣지도 못한 체하려고 애썼으나, 이내 음성을 높여서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자기의 조수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이 충분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그녀가 온순하고 인내력이 강하며, 자기 헌신적이고 결백하며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냐의 볼을 살짝 두들기고는 몸을 좀 일으켜서 두 번이나 뜨거운 키스를 해 주었다. 소냐는 얼굴을 확 붉혔으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바보처럼. 도가 지나친 모양이군. 이젠 끝낼 때가 됐어, 마침 음식도 다 끝난 것 같으니 곧 차를 내오는 게 좋겠군’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한 번도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한데다가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데 몹시 분개한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갑자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모험을 시도했다. 은근히 혼자서 애태우고 있던 그는 용기를 내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이번에 생기는 기숙하교에선 여학생들의 속옷을 깨끗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 ‘반드시 속옷을 잘 감독할 수 있는 훌륭한 부인을 두어야 하며,‘ 둘째로는 ’모든 젊은 여학생이 밤중에 몰래 숨어서 소설 같은 걸 일절 못 읽게‘해야 한다고 어디까지나 지당한 말을 의미심장한 말투로 강조했다. 정말 몸이 불편해져서 손님 접대하기에도 싫증이 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즉시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는‘ 당신 따위는 아무 것도 모른다, 여학생의 속옷 걱정은 담당 교사가 할 일이지 양갓집 학생을 맡은 기숙학교 교장의 할 일이 아니다, 또 소설을 숨어서 읽는다느니 하는 것은 무례하고 상스러운 말이니 제발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딱 잘라‘ 쏘아붙였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버럭 화를 내면서, 자기는 다만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이다‘ 더욱이 ’당신은 오래전부터 집세도 안내지 않았느냐‘고 응수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이에 대해서 곧 ’나를 위해서‘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증거로는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고인의 유해가 탁자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집세 재촉을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이 말을 듣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매우 조리 있는 논법으로 , 자기는 ’그 부인네 모녀를 초대했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 모녀는 지체 높은 집안 사람들이라 신분이 천한 여자 집엔 올 수 없었다‘라고 말해버렸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얼른 말을 받아 ’너 같은 건 무식한 여자라 어떤 게 진짜 훌륭한 가문인지 판단 못한다‘고 공격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참을 수 없었던지 곧 ’우리 파터(아버지)는 베를린에서도 매우매우 훌륭한 인물이라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녔다. 어제나 이렇게 푸흐! 푸흐! 하면서‘라고 뽐냈다. 그리고 자기 파터의 위풍을 좀 더 완연히 표현해 보이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볼을 불룩거리면서 푸흐! 푸흐!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좌중은 일시에 와락 웃음을 터뜨리고, 두 여자 사이에 할퀴고 뜯는 싸움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부추겼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도 이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서 갑자기 좌중에 다 들리도록,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일정한 파터는 없다, 아말리야는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싸다니던 주정뱅이 핀란드 여자이며 전엔 필시 어디서 식모살이를 했거나 더 추악한 직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새우처럼 빨개져서, 어쩌면 아마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야 말로 ’아비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파터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기다란 프록코트를 입고 늘 푸흐! 푸흐, 푸흐!하고 계셨다‘라고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경멸하는 듯이, 자기의 신분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고 자기 부친이 대령이었다는 사실은 이 상장에도 분명히 인쇄되어 있다. 그러나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아비는(만일 아버지란 게 있다면) 우유 행상이나 하던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아버지라는 게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늘까지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의 부칭이 이바노브나인지 류드비고브나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게 무엇보다 훌륭한 증거가 아니냐고 말햇다. 그러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극도로 분개해서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자기는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지 류드비고브나가 아니다, 우리 파터는 요한 이라는 이름이며 시장까지 지내셨다, 그러나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아버지는 한 번도 시장 같은 벼슬은 못했다고 사나운 소리로 악을 썼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사나운 표정으로, 그 목소리만은 침착하게(비록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가슴은 몹시 물결치고 있었지만)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를 향해 ’네가 한 번만 더 그 더러운 파터를 우리 아버지와 동등하게 놓고 비교한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이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는 네 모자를 빼앗아 짓밟아버릴 테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아말리야 이바노브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자기는 이 집 주인이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달라‘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목이 터져라 악을 썼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별안간 식탁 위의 은수저를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욕지거리와 아우성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어댔다. 소냐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를 진정시키려고 그 옆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아말리야 이바노브나가 노란 감찰에 대해서 외쳐댔으므로,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소냐를 떼밀고 모자 운운하던 조금 전의 위협을 당장 실행하려고 아말리야 이바노브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문턱에 뜻밖에도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날카롭고도 조심스러운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