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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金載圭, 1926년∼1980년)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박정희와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 동기생으로 인연을 맺었는데 고향이 같고(경북 구미) 군에 몸담기 전에 교사를 지낸 경력이 같았다. 이후 1954년 9월경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과는 악연이 좀 있었다. 윤필용이 1.21사태 때 김신조의 모가지 발언을 여과없이 보내는 바람에 윤필용이 방첩부대(현 국군기무사령부)장에서 경질되고 김재규가 후임 방첩부대장이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방첩부대를 육군보안사령부로 개편하고 자신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육군보안사령관이던 197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의 전화를 도청하다가 발각되어 제3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군단장 시절 한계령 도로 건설을 지휘했으며, 이 때문에 한계령에 건설 중 사망한 장병 위령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으나 현재 위령비에는 그 부분이 삭제당했다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안동댐 건축 기념탑에도 원래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10.26 사건 직후 그 이름 부분이 뜯겨나가 있다. 여담이지만 인트라넷 3군단 역대 군단장과 그가 복무했던 모든 부대에도 김재규 장군은 삭제되어 있다. 한편 이때 그의 전속부관이었던 박흥주 포병대령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 되고, 10.26 사건 당시에도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자리에 있었고, 결국 박정희 암살에도 가담한다. 정말로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당시 국방부 총무과장(준장)으로 있었는데 다른 국방부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쿠데타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혁명군사령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에도 불구하고 부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석방 후 현역 장군으로서 호남비료 사장에 파견 임명되었다.
▲ 육군중장 김재규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1977년 박정희에게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했다. 이때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는 효력을 다했으니 더 강력한 긴급조치 10호가 필요합니다.” 라며긴급조치 10호를 건의했다가 반려당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에는 노동및 종교의 추가탄압이 들어가있어 과격하기는 마찬가지였던지라 현재까지도 그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다만 김재규는 훗날 법정에서 그 건에 대해 말하길 박정희의 눈을 속이고 긴급조치 9호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해명했다. 김재규는 또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서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정국을 순리대로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방법을 모색한 것. (물론 결과적으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박정희에게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2.1. 최태민에 대한 조사, 그리고 경고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최태민의 조사를 지시했고, 10.26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 최태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었다. 이 보고서엔 최태민과 박근혜 간의 부적절한 관계와 최태민의 문란하고 부적절한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처음 입수한 언론에서 공개한 시점이 2012년 말, 즉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이였기 때문에 당시엔 찌라시 취급을 받으며 묻혀졌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위 항소이유서에서 보다시피 현재 최순실이 박근혜와 함께 기업들에게서 돈을 뜯어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전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박근혜와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돋을 뜯어내었다. 1970년대 아버지가 했던 사기행각을 딸년이 그대로 2016년까지 써먹은 셈이다. 당연히 최태민의 범죄행각을 비판하는 민원이 빗발쳤으나,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에게 직언을 할 용기를 가진 관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소수만이 직언을 했다 핍박받는 실정이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높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방법이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분신이었고, 저격 사건으로 죽은 영부인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 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 더욱이 마음에 안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최태민에게 분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으라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 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거기다가 김재규의 말이 아예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김재규를 불러 최태민을 대질시켜놓고 친국을 벌였다는 말이 된다. 당시 김재규는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의전상 부총리였다. 대통령의 왼팔이 일개 사이비 종교인을 고자질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엄청나게 체면을 구긴 일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자면 검찰총장이 사이비 교주 하나 기소했다고 대통령에게 친국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심한 꼴이다. 거기다가 김재규가 최태민이 저지른 온갖 부정의 입증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오히려 최태민(정확히는 박근혜)을 신뢰하는 꼴을 보였다. 이는 김재규 입장에서 자신이 끝까지 모신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인 자신보다 어디서 굴러와 영애를 홀린 사이비 종교인을 더 신뢰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있던 충성심도 바닥이 날 수밖에 없다.
즉, 10.26 사태를 결심한 동기 중 하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겼다. 김재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가 지속될 경우 벌어질 잠재적 위험성을 알고 이를 항소이유보충서로 남기며 최후의 순간까지 경고 했지만, 그의 우려와 경고는 37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실제 육성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 1980년 5월 23일 사형집행이 내려지기 전날 유서에서.
당시 최후진술의 녹음본이 있다. 들어보자. 무려 40년 가까이 된 녹음본임에도 의외로 들을 만 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인맥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정희와 고향 후배이며 육사 동기라는 2중의 인맥인 김재규는 그야말로 심복이었다. 하지만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을 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다. 이것이 이른바 10.26 사건이다.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장에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할 줄 생각 못한 경호팀은 무력했고 그들 모두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 당시 경호계장이던 박상범이고,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민간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게 된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다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했으나 박상범은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부상입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식사하던 경호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호원들과 같이 식사하던 중정 직원들인 운전수와 요리사가 자신들의 총에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어쨌든 거사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김재규가 이동한 곳은, 엉뚱하게도 중정이 아닌 육군본부였다. 만약 김재규가 거사 후 중앙정보부로 향했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지금까지도 중론이다. 암살장소인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부장인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박정희를 죽인 사실을 은폐하고 불순세력의 소행으로 몰아가 국무위원과 장성들을 깨끗하게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사태 수습을 빌미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나리오를 써갈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를 암살한 장본인이 차지철이었다고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소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라는 미명으로 온갖 월권행위와 경거망동을 서슴치 않았고, 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주동자 1순위는 단연 차지철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후 청와대로 들어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들은 김치열 당시 법무장관은 "그 새끼가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군!!" 하고 호통을 쳤는데, 그 새끼는 물론 차지철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체포되면서 사태를 장악하지 못했다. 김재규가 육군본부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① 대통령의 그늘 밑에서만 권력을 휘두를 뿐 대통령 사망 후에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특권을 휘두르는 군부의 협조가 절실하므로 이를 얻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을 거라는 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와 원만한 관계였으므로, 그에게 자신의 박정희 저격을 알리고도 그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박정희 암살자에게 협조하여 그의 정권 획득을 도울 장성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당시 군에 자기 인맥이라고 볼 수 있는 장군을 거의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② 김재규가 박정희를 순전히 우발적으로 저격했으므로 거사 후 사태장악에 대한 아무 계획이 없었다는 설. 사건 수사결과에 의하면 거사 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승용차에 동행하여 사건현장을 떠나 이동하던 중,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정보부와 육본 중 어디로 가는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어 "육군본부로 가는게 좋겠다"고 제의하였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운전기사에게 육군본부 행을 지시했다. 이때 정승화는 안가 본관(연회장은 나동)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사건을 저지른 김재규와 차에 동승한 것이었는데, 그땐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가 육본으로 갈 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박흥주 대령의 구두를 빌려 신을 정도로 우왕좌왕했던 행동을 볼 때, 이 견해도 설득력은 있다.
• 이 추측들에 대해서는 10.26 사건에 보다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알려진 바와 같이 12.12 군사반란 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긴급체포하여 군을 장악하게 되었고, 김재규는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박선호, 유성옥, 김태원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어 기각 4일 만인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법관들 사이에서는 소수의견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내란목적이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단순살인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형사3부 판사인 양병호와 서윤홍은 내란 목적이라기에는 암살후 김재규의 움직임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에 내란을 목적하고 박정희를 죽인 게 아니고 그저 우발적으로 죽였다고 본 것이며 최종판결 당시 민윤기 등 6명의 판사들이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소수 의견을 낸 판사 6명은 신군부의 보복으로 전부 법복을 벗어야 했으며 특히 양병호는 보안사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훗날 양병호는 김재규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당시 판결문은 비공개 처리되어 묻혀버렸으나, 훗날 공개되면서 당시 몇몇 재판관들의 용기있는 소수의견들이 밝혀졌다. 한홍구,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참조.
10.26과 관련한 김재규의 보다 자세한 입장표명은 김재규/항소이유 보충서에 되어있다.
2.2.1. 민주화 운동 층의 평가
민주화 운동 층에서는 평이 서로 상반되게 갈라지는 편이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유신독재라는 암흑기 속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요즘 인터넷에 빈번히 보이는 단어가 김재규 의사. 이렇게 영웅으로 치켜 세우진 않더라도 10.26 사건이 독재를 몰아내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경우도 많다.
유야무야 하면서 유신이 장기화 되었다면, 최악의 경우 북한처럼 반대세력이 모두 숙청되거나 중국, 싱가포르처럼 정도는 덜해도 독재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만약 이 상태로 정치에 참여하였다면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박씨 일가가 다스리는 독재국가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김재규를 긍정하는 사람들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강신옥, 장호권, 이해학 등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주로 교계 사람들로, 민주혁신계 중에서도 약간 보수적인 사람들 쪽이다. 함세웅 신부는 "김재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효림 스님은 "여러가지 정황 근거로 봤을때 재평가할 가치는 충분하며,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더 시일을 요구할 뿐 명예 회복은 희망적"이라고 보고 김재규의 행적과 뜻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작업에 매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 또한 과거 유신정권하에서 한자리를 해먹던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박정희를 암살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를 국민의 손으로 정당하게 심판할 기회를 빼앗았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그동안 갖은 압제와 고문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노력해오던 자신들보다, 단순히 박정희 한 명 암살했다고 김재규가 포커스를 더 받는 건, 몇십 년을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입장에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다만, 소극적인 국민들의 성격과 견고한 기득권의 힘 때문인지 몰라도 근·현대사를 통틀어 당사자 개인에게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진 사례는 실제로 흔치 않다. 또한 박정희 본인은 이승만이나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어떤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또, 국민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많으면 수만에서 수십만의 애꿎은 목숨이 필요할 터인데 그것을 대신 이루어준 것이 과연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사안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실제로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구속되었을 당시 감방동기였던 이해학 목사는 "당시 장준하가 '이제 민중투쟁으로는 안 된다. 양심적인 군인을 포섭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수 말고는 박정희를 몰아낼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절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재규를 비판하는 재야/민주운동가들은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동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한 기여도 및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시도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진보적 사회운동가 백기완도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어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며 민주화운동의 본체, 기본적인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2.2.2. 그게 최선이었을까?
2.2.2.1. 긍정론
김재규는 정권 내에서 온건파였고, 당시 부마항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는 먼저 이승만과 곽영주 운운하며 총기사용을 지시했고 차지철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거론하며 아부를 하여 무력사용을 부추겼다. 결국 대통령인 박정희가 직접 유혈진압을 지시한 이상, 김재규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부마항쟁 때 5.18 민주화운동이나 천안문 6.4 항쟁처럼 사격명령이 동반된 진압이나 심각한 경우 차지철 말대로 킬링필드급 학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차지철이 킬링필드같은 개소리를 지껄여도 박정희가 저지하지 않은 점은 김재규나 차지철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학살을 묵인하겠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 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자칫하다간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라고 판단했다. 또한 박정희의 곽영주&총기 사용과 차지철의 킬링필드 운운하는 발언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선 박정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김재규가 자신의 변호인인 안동일에게 털어놓은 내용에 의하면 이승만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정희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국민과 정부 사이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를 사살한 것이라 말하였다.
• 실제로 항쟁 당시 부산과 마산 내의 시민들이 대거 경찰서로 끌려가거나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또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외에도 김대중, 이철승 등 호남인사가 신민당에 있었고 여촌야도 현상이 강하여 수도권 민심이 야당에 있었으므로 단순히 부마에만 그치지 않고 호남, 수도권까지 퍼져 전국적으로 경찰, 군인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생겨 엄청난 희생자가 났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김재규는 차지철과의 갈등 이전에도 유신의 방향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자주 내비쳤고, 장준하 등의 민주화 운동 인물들을 비밀리에 도우면서 관련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도 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박정희를 '환자'로 비유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도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이며 사형 선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자세를 보았을 때 단순히 차지철과의 갈등으로 인한 우발적인 권력 싸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결정적으로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결단했던 건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대응책 방향이었는데,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압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김재규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결국 이것이 10.26이라는 도화선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0, 80년대에도 국정 방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박정희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자주 표명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7대 대선에서 마지막만 하고 다시는 안 하시겠다는 약조를 김재규가 청원했다는 증언과 더불어, 한 때 진지하게 하야를 권고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10.26은 박정희에게 오랫동안 직언을 통해 온건한 설득을 하려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지철을 중용하며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동안 쌓였던 실망감과 울분이 폭발하여 강경한 수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윗 내용들이 복합적으로 담긴 관련 출처
그동안 김재규를 썩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한홍구도 2013년에는 주장이 달라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덧붙여 한홍구는 "김재규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야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상천 전 교수는 각종 문헌과 증언들을 근거로 김재규의 10.26을 재평가해야한다는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강의 1 강의 2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은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평가하였다.
야권의 거물정치인인 천정배 의원도 10.26 희생자 30주기 합동 추모제에 참석하여 "김재규 장군과 의인들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을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10.26 재판 때 인권변호사들에게 김재규의 변론을 부탁하기도 하였고, 훗날 김재규와 그 부하의 가족들이 구명탄원을 위해 김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사라 칭하며 박정희는 절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기에 김재규의 거사가 없었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최태민 문제 관련하여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김재규의 충언을 무시하고 김재규의 주장이 모함이라는 박근혜의 말만 믿고 사건을 덮어버린 박정희의 행태도 10.26의 원인이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회창 전 총리는 김재규의 저격이 박정희 시대라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를 여는 역사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10.26 사건의 재판을 맡았던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것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였다고 평가하였다. 양병호 판사는 김재규를 내란목적 살인범으로 판결할 수 없다는 소신을 펴다 보안사로 연행되어 강제사직을 당하고 변호사 개업에도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후임자인 전두환에게 엄청난 이득이 되었던 3저 호황, 반공이라는 궤를 같이 하여 박정희와 코드가 맞았을 확률이 높은 로널드 레이건 등의 호재를 맞아 개발 독재와 반공주의에 날개를 달았을거란 의견이 있다. 당장 광주를 피로 물들였음에도 불구하고, 3저 호황에 제대로 수혜를 입어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한 전두환이 경제적 차원에서 상당한 면죄부와 지지를 얻고 있는것을 생각해 보면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다. 게다가 박정희는 1981년에 완성 예정으로 핵무기 개발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경제성장과 핵무장이라는 업적을 내세워서 리콴유 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봤을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말 더 간단한 예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이 다 멍청이라 3대 독재가 이루어졌나? 박정희는 헌정사상 독재자 중 가장 군을 잘 장악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공무원, 군인 등을 다룰 때 소위 '금일봉 정치'라는 것을 행하였다. 이는 누군가에게 포상을 줄 때, 훈장이나 공적 상금 등의 공식적 포상을 주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포상인 '금일봉'을 전달하여 포상을 주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을 부각,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행위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내탕금을 가지고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포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중세 수준의 정치행위였지만 효과는 매우 굉장했다. 이런 금일봉 정치는 상당한 비자금을 필요로 해서 박정희 휘하 3,4공 실세들은 정치자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출처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중앙정보부의 돈이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활용되었고, 관행이 되었다. 당장 2010년대에만 해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돈을 개인 쌈짓돈 마냥 써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박정희 당시,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관례'가 고스란히 유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정희의 금일봉 정치는 단순히 금전을 제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 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해당 군인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금일봉이라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다더라.'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박정희가 그 '누구'에게 보이는 '총애의 정도'가 되었다. 돈 자체도 좋지만 금일봉의 액수는 박정희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와 관심이었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이는 곧 자신의 발언권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충성 박치기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박정희의 사병(私兵)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마치 조선인민군마냥 독재자 개인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박정희는 군 뿐만 아니라 오랜기간의 독재정치, 우상화를 통해 사회 곳곳에 자기 세력들을 확보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이승만, 전두환도 박정희만큼의 무소불위의 권력, 충성스러운 군대를 갖지 못하였다. 그런 인물을 민중혁명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낭만주의, 모험주의적 시각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따이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이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에서 3선이나 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한 자체로 어떻게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2.2.2. 부정론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결국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벌인것 이라는 해석이 있다. 2004년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도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이에 대해서 격분했다는 증언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흘러나온 바 있다. 출처 이런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김재규가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차지철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비해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온건성향으로 비쳐질 따름일뿐, 그 역시도 결국 독재정권에 부역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출처
유신정권의 크게 3개의 권력 축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국군보안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차지철, 김재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간에 치열하게 견제하고 있었다. 출처 바로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파장이 일어난 것이 10.26이라는 것. 출처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 등 공화국시리즈 등에서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대립과 반목은 그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시절에도 이들은 사이가 몹시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무렵에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던 김치열 법무부장관이 차기 중앙정보부장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박정희가 야당문제와 부마항쟁 등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서 김재규를 책망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재규 본인도 파워게임에서 밀릴 것이라는 직감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는 주장이 있다. 출처
실제로 쿠데타 이후 김재규는 박정희를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장관들을 모아놓고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압박했는데, 이를 정권탈취시도로 보는 경우도 많다. 김재규 본인은 권력장악을 의도하지 않았고, 유신의 잔재를 청산한뒤 물러나 박정희 묘에 시묘살이나 할 생각이라고 했었지만 이런거야 자기만 아는 일이니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쿠데타 당시 보여주었던 일련의 치밀하지 못했던 행동 역시도 결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암살한 후, 자신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이동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 시간만에 체포되었다. 이는 김재규가 단순히 차지철, 혹은 박정희를 암살한다는 계획만 세웠을 뿐, 그 후 신정부 수립이나 정국 주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계획이나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국가원수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급진적 권력 교체를 시도한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치밀한 계획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10.26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주려고 한 계획이었다면, 단순히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박정희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이와 관계된 사람들과 철저하게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리고 난 이후 정권교체 및 민주화까지 질서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진정으로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저지르는 입장에서 그는 너무나도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다 보니 10.26으로 박정희의 장기 철권 통치는 끝났을지 몰라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권력질서가 안정적, 민주적으로 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전두환의 신군부 등장과 12.12, 5.18, 그리고 8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독재였다. 만약 김재규가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동조자를 늘리는 동시에 신정부 수립에서 정권 이양까지의 과정을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면, 신군부의 폭주를 막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단하게 거사 직후 육군본부로 가지 않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신군부의 폭주를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는 10.26 사태 직후 유신의 잔재를 5개월 내로 설거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확대를 구상했는데, 출처1, 출처2 민주공화당은 이러한 구상안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낮다. 10.26 직후 김종필이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과 협박까지 당한터라 김재규에게 호의적이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10.26 이후 JP는 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 역시도 김재규의 구상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체포되기 전까지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사실을 숨기려고 했고, 박정희 사망 이후 국민들의 박정희에 대한 동정과 추모 분위기 등을 감안해본다면 김재규가 암살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지 않는 한 저항에 직면했을 공산이 크다.
김재규는 10.26이후 전국비상계엄령 확대 조치를 취하고, 군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신이 위원장을 맡고 육군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은 뒤 유신의 잔재를 제거하겠다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출처1, 출처2 대법원 판결에서는 김재규가 계엄군을 장악하여 무력으로 사태를 제압하고,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을 장악한 이후 대통령 출마까지 계획했다고 판결하였는데, 김재규 본인은 대통령 출마 의사나 사리사욕은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야당이 과연 김재규의 계획에 동의하거나 협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이루어지기는 거의 어려웠을 것이다.
최후의 진술을 통해 박정희 정권동안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고, 당시까지 정부나 대통령이 순리대로 선출된 적이 없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순리대로 하는 사례를 만들어 보고 싶어 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유민주주의가 문 앞에 왔으니, 받아들이기를 간청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으로 하여금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하였다. 또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겨놨다는 자부을 가지며 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그 자유민주주의의 만발을 보지못하고 가는게 아쉽다고 하였다. 끝으로 자신을 따라준 부하에 대해 그들은 좋은사람이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선처를 바라면서 극형만은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2.3. 최후와 그 뒤
먹구름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을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철색 무지개 되어
이 땅위에 길이 이어지리
- 김재규 묘비 윗면에 쓰인 추모시
그리고 8:6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적용되 사형판결을 받는다. 80도306 사형 판결을 받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으로 숨진다. 사형집행일 김재규는 아침을 먹지 않고 냉수마찰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는데, 이는 이승에 남기고 갈 마지막 흔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였다고 한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규는 사형집행 직전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남길 말이 있으면 하라"는 참관 검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향년 54세. 사형 집행 장면 그 비극은 김재규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이어져, 부인인 김영희와 동생 김항규는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당했으며 '3족을 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인들 역시 갖은 고초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라고 적혀 있었다. 당초 그는 유언으로 묘비에 '의사 김재규 장군 묘'를 쓰라고 했지만 신군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89년에 1월에야 광주/전남 송죽회가 세웠다. 그러나 수십년 전에 박정희 지지자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의사' 와 '장군' 이라는 글씨를 훼손시켰고, 추모비를 굴러 떨어뜨려 금이 가게 만들었다.
이 추모비는 아직까지도 금이 가고 글자가 훼손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추모비를 새로 세우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재규의 유족과 송죽회가 현 상태 그대로 두겠다고 밝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추모비가 훼손되고 금이 가 있는 모습도 역사의 기록이라는 판단에서라고.
3. 재평가
나는 여기서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늘의 심판인 제4심에서 이미 나는 이겼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의사(義士)"로서의 재평가는 그를 옹호하는 소수 사람들이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당시 대중들에게는 대부분 헛소리로 취급당했다. 10.26 사태도 객관적으로 볼 때 사상 초유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언급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정부 집권 이후 박근혜의 실책에 대한 반발, 조롱으로 "의사 김재규"라는 "유머"컨텐츠가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 또한 김재규 드립을 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개드립이었고, 그가 진짜 의사라고는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였다. 의사 김재규 드립을 치는 집단 내에서도 진지하게 의사설을 주장하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할 정도.
그러나 이러한 유머소재로써의 흥행을 통해 대중들에게 언급되는 일이 많아지며 김재규 본인과 당시 사건에 대한 관심도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독재권력 부하의 알력다툼"에서 형성된 이미지와는 다르게, 김재규는 평소에도 민주주의와 민주개혁세력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이들을 알게 모르게 도와 왔다는 사실. 또한 부마 항쟁에 대한 박정희 군부독재세력들의 태도와 이후 전두환 군부독재세력들의 광주학살 사건을 볼 때 그가 암살을 하지 않았다면 부마지역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이 속출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등. 자연스럽게 "진지한 재평가"에 대한 정보들도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재평가의 흐름은 아직 대중들 사이에서 소수측에 불가하였다.
이 당시 개그 소재로 디시인사이드의 2대 장군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김재규와 조승희였다., 조승희는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곳곳에 팽배한 서양 우월주의와 동양인 비하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김재규는 박근혜의 실정과 우상화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김재규의 지인들을 통한 미담, 존중받을 만한 행적과 언행들이 발굴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김재규가 단순히 장난식으로 찬양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7-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퇴진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민주개혁에 방해 되었다는 주장은 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며, 이전부터 보여온 친민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단순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경받을만한 많은 언행 + 특히 독재정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려하는 행동 등이 조명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국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가가 퍼져나간 것이다.
1 2 3 4 그 결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반독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김재규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가 보편화되었다. 여전히 김재규와 10.26 암살을 유머 소재로 써먹지만 예전처럼 단순히 박근혜와 박정희에 대한 조롱만을 담은 것이 아닌 김재규라고 하는 의사에 대한 존경심 또한 일반화 된 상황. 혹자가 평하길 "박근혜가 박정희 신화에 금을 냈다"라고 했는데 동시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도 불러일으킨 상황.
그를 안중근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세세한 걸 따지기 이전에 정말 공교롭게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날이 10월 26일로 동일하고 그 간극이 정확하게 70년이라는 점 때문에 상당한 이야깃거리가 되기는 한다.
한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실제로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선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2004년 8월 11일 한겨레2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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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보수우익계의 마지막 대륙형 인간
(중략)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2013년 5월 17일 한겨레 기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재규가 살아나는 것은 박정희 신드롬에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10·26의 주범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보부장 시절 박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의 비위사실을 알린 당사자다. 한 교수를 김재규를 ‘박정희의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며 “유신시대의 자료를 꼼꼼히 읽으면서 김재규란 사람이 자기가 잘릴 수도 있는데 박정희의 충신으로서 자기 몸을 던져서 최태민을 막으려 했던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최태민을 막았다면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내막이 최근 들어 다시 알려지면서 집회에 김재규 얼굴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중략)
한 교수는 “그래도 박정희가 박근혜보다는 낫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는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충신들이 있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나 박승규 민정수석처럼 자신의 직을 걸고 최태민 보고서를 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도 다른 비서관들에게 최태민과 어울리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유신정권의 핵심 참모들은 분별력과 상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드러난 바로 볼 때 박근혜 정권의 참모 중에 최순실 문제에 대해 올바른 소리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아니냐”며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