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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경외하는 자
말 3:13-18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3-18 / [여호와의 날이 오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에 대하여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우리가 주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반문을 한다. 14) 그러므로 너희들이 한 말을 들어 보아라. `우리가 주님을 섬겨도 모두 헛일이다. 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께 순종하는 일 때문에 세상의 온갖 재미와 쾌락을 멀리하는 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15)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사는가! 그토록 악한 짓들을 하는데도 그 사람들이 부유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리려면 내려 보라고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형벌을 모면하고 있다.' 16) 이와 동시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도 친구들과 모여 그들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였다. 주께서 그들의 이야기도 정확하게 들으셨다. 그래서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의 이름이 주님 앞에 있는 회상록에 기록되었다. 17) 그때에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선언하셨다. `내가 가서 심판하는 날에, 그들은 나의 사람이 될 것이다. 마치 부모가 효도하는 자식을 아껴 주듯이 내가 그들을 아껴 주겠다. 18) 그때에 너희가 악인과 의인의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과 반역한 사람의 결과를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논쟁이 마무리 되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불평하는 자들을 향해 심판의 날에 의인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13-15) 말라기는 또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지적합니다. ‘대적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화를 내며 대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는 완악한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명령을 지키는 모습을 슬프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유익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종교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금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식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애통했지만, 하나님이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으시고 여전히 어려운 삶이 계속되자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한 두 번째 완악한 말은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는 말입니다(15). 어려운 삶의 상황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에 비해 이방나라들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16-18)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6). 중요한 것은 이 경건한 자들이 피차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 믿음을 세워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16). 기념책은 우리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된 책입니다. 이 기념책을 근거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17절의 ‘정한 날’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에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믿는 자들은 심판을 면하게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정한 날에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여(18),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고 아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7).
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삶의 어려움 때문에 믿음에 회의를 가져본 적은 없으십니까?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후 심판에 대해 진지하게 전해야 합니다. 종말을 믿지 않는 세대를 향해 심판을 언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난과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조차 좋은 말을 듣기 원하지 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전해야 합니다.
< 설 교 >
세 종류의 말
말 3:131-18 / 피영민 목사
서 론
말라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43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부패했을 때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와 책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다가올 메시아 시대를 예언하는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이면서도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흠 있는 제물을 드렸고, 백성들은 제사를 온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도적질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정생활에서도 이방 신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은 것도 모자라 아내를 학대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생활 실패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종류의 말이 나옵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 경건한 사람들의 말, 하나님의 말씀. 이 세 종류의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언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Ⅰ. 불경건한 자들의 말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말 3:13~15).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 영적인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영적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오직 남은 자들만이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남은 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합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 그리스도인일 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요 불경한 자들이며 알곡이 아닌 가라지입니다. 말라기 3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만 헛되다고 생각했고 명령을 지키지만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종교인처럼 입고 다니고 종교 교육을 전공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갖추었다고 해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완악한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말 3:13) 완악한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만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대적하는 것 자체를 모르고 하나님을 꾸짖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을 형통하게 하시니 참 잘못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 14~15절을 보면 불경건한 자들이 하는 말의 내용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겨봐야 헛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봐야 유익이 없다며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되다고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을 쉽게 하면 하나님에게 투자해도 건지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의 말에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복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화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겨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화를 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해 유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샤머니즘과 같습니다. 박수무당에게 가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남편의 사업이 잘되고 자기의 건강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면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겨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기도해줘서 떨어지면 무슨 목사가 영권도 없어서 기도해도 떨어지느냐고 말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도 공부한 만큼 거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의 아닙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기 실력에 맞는 대학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해달라고 하면 찍은 것도 맞게 해달라고 기도는 합니다. 하지만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 헛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의 신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유익을 얻으려는 샤머니즘과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유익을 얻지 못하는 종교를 헛되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는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의인은 손해를 보고 악인은 유익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도리어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며 봉사했는데 자녀가 삼수해서 또 떨어지고 앞집에 사는 사람은 우상숭배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 자식이 서울대에 갔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고 말하며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신앙이 없는 명목적인 신자들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은 영원히 구별하여 분리시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악인은 영영한 형벌에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Ⅱ. 경건한 자들의 말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6). 경건한 사람들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지식의 근본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죄를 짓다가도 돌이켜서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삽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짓다가도 이러다가 하나님께 혼나겠다고 생각하면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되는 것도 중요하고, 출세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고, 돈 많이 벌어 잘먹고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그들의 신앙은 인본주의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 중심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셋째, 경건한 사람들은 서로 말씀을 나누며 교제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두세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십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여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말하면서 서로 신앙을 확인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가 상징적인 시간으로 몇 천 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원숭이는 원숭이처럼 사람은 사람처럼 만드셨습니다. 원숭이가 사람과 비슷하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고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존치 않으시면 태양이 어떻게 적당한 온도를 비추겠습니까? 만물과 별들이 제대로 운행하도록 하지 않으신다면 지구와 부딪쳐서 박살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메시아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메시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아가 수난받을 것을 이야기했고 시편 22편에 메시아가 고통당할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때부터 메시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고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십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셔서 악인들은 초개처럼 날아가게 될 것이며 의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자, 섭리자, 구원자, 심판자시라는 말씀을 나누며 위로받고 격려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 술을 좋아해서 술친구들이 많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친구 등 술친구가 많아서 서울 시내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 보면 그곳에 동창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친구들을 만나도 대화가 안 됩니다. 그 사람들과 관심사가 달라서 대화도 안 되고 위로도 안 되고 격려도 안 됩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며 서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말라기 3장 16절 중반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신다고 나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흘려듣지 않으시고 조심스럽게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신앙 고백하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빠짐없이 듣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오랫동안 기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6). 안나 선지자는 시집가서 7년 뒤에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혼자가 되고 난 후에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로 몇 년이나 기도해보셨습니까? 아마 안나처럼 84년을 기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84년을 하나님께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응답이 됐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8). 안나 선지자는 매일 성전에 가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곤비해지는 것은 첫째, 성경을 멀리하기 때문이고 둘째, 기도생활을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에 더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신앙고백도 들으시고 기도도 들으신 후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3장 16절 후반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6). 인간의 언행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록해놓으신 기념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이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나오는 생명책과 동일한 것입니까?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책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념책에는 경건한 자들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억력의 한계가 있으셔서 기억하시기 위해 기록하신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무한하십니다. 그리고 기념책은 여호와 앞에 있는 것인데 왜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두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경건한 자들을 위해 여호와 앞에 기념책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모든 신앙과 모든 경건한 말과 너희의 기도가 영원히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것과 기도한 것을 우리는 잊어버릴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성실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기념책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기록하시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도 USB 메모리 하나에 수천만 명의 주민등록번호를 다 기록할 수 있습니다. 작은 메모리에 어마어마한 분량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못 하시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말 3:17). ‘나의 정한 날’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는 것입니다. 보석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아끼고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슈퍼마켓과 보석상은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슈퍼마켓에 가면 과자, 비누, 배추가 진열되어 있고 아무나 물건을 집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석상은 다릅니다. 다이아몬드 1캐럿도 유리장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져보려면 열쇠로 유리를 열어야 됩니다. 이처럼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아끼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만지지 못하고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를 슈퍼마켓에 있는 물건같이 두지 않으시고 아주 특별하게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아무도 우리를 심판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8). 돌아와서라는 말은 다시 한 번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너희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은 상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의 날이 되면 다시 한 번 확연히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의인보다 악인이 더 잘되고 의인과 악인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말을 하지만 그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차이가 어떤 것이지 똑똑히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초개처럼 날려버리시고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석처럼 대우해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살면서 하는 말들을 대부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말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다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도 다 들으시고, 우리가 하는 믿음의 말들도 다 들으십니다. 고백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그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지 않은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기도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 죄가 용서받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는 샤머니즘과 인본주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신본주의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시기는 존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Those Who Serve God
말라기 Malachi 3:13-18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요한복음 John 17:3).
어떤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리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그것을 진리라고 하셨기에 진리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진리와 하나님의 상관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것이 진리라고 하셨기에 진리입니다. 구지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이 진리를 진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 우리가 누리는 영생, 우리가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꾸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우리 주님이 하신 긴 기도가 나옵니다. 13장부터 16장까지를 예루살렘 마가의 집에 있는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이기에 “다락방 강화”라고 부릅니다. 17장도 역시 다락방에서 하셨지만, 이 부분은 우리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가 주보에 인용한 3절을 보죠. 우리 주님은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 이러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아는 것은 언제나 체험, 경험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시편 34:8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s him)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음식의 맛을 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진리를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라기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을 그들은 틀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틀렸다고 선언하신 것을 그들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아니면 역행합니까? 하나님께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거스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을지 주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1. “교만한 자가 복되다” “The arrogant blessed” (13-15)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3 "You have said harsh things against me," says the LORD. "Yet you ask, 'What have we said against you?'
하나님은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강하게 고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는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면 “너희는 나에게 매우 센 말을 했다.”(Hard against Me have been your words)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말은 듣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말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살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말, 행동 이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을까요?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4 "You have said, 'It is futile to serve God. What did we gain by carrying out his requirements and going about like mourners before the LORD Almighty?
(1)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런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은 독립을 잃은 상태에서 겨우 페르시아 제국의 한 속주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유대 민족의 인구는 불과 5만여 명 정도였습니다. 주변의 다른 민족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늘 위협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나름대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지키지 못했을 때 스스로 슬프게 행동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주의 자녀의 삶은 주님의 언약,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기쁨으로 유지됩니다. 때로는 불순종했을 경우, 성령께서 이를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이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녀의 바른 삶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기를 거부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또 우리의 슬픔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까? 오늘 오전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여러분의 마음은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습니까? 혹시 마음에 깨달아지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진정한 슬픔을 느끼셨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삶을 거부하고 무엇이라 주장하였을까요? 15절에는 이스라엘의 세 가지 선언 혹은 주장이 나옵니다.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15 But now we call the arrogant blessed. Certainly the evildoers prosper, and even those who challenge God escape.' "
(1) “교만한 자가 복되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정확하게 반대로 선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망합니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작은 것으로 인하여 교만하다면 하나님께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한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하여 이러한 강한 주장을 합니다.
(2)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한다.”: 둘째,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누누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의 악인이 악한 방법을 사용하여 여러 면에서 번성하는 것을 보고, 악인이 번성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 망한다고 주장합니다. 악을 행해야 잘 되고, 부자가 되고, 번성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복으로 번성하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함으로 얻는 복은 사실은 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부럽습니까? 세상의 성공, 세상의 부요, 세상의 행복, 세상의 번영이 부럽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악을 행함으로 번성하는 길에 들어서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큰일이 납니다.
(3)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완전히 거꾸로 뒤집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일하심을 하나님께 받는 복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정말로 우리 삶에 관여하는지 시험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송구스럽습니까? 이왕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려면, 순종함으로 큰 복을 받아 크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냅시다.
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Those who feared the LORD” (16)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6 Then those who feared the LORD talked with each other, and the LORD listened and heard. A scroll of remembrance was written in his presence concerning those who feared the LORD and honored his name.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남은 자를 따로 구분하여 두십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서로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말만을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고 하고, 묻기도 하고, 서로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서로 나눌 때, 우리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우리가 예배 후에 식탁에서 우리의 삶을 나눌 때, 각 목장에서 서로 나눌 때, 화요일에 말씀 묵상으로 서로 나눌 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 그 말씀을 하나님의 기억 책에 기록하십니다. 우리는 혹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는 용서하시고 잊으시지만, 우리가 찬양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한 이 모든 것을 기록하시고 기억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도 하나님이 다 기억하고 기록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최고의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단순히 말뿐인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 “Those who serve God and those who do not” (17-18)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7 "They will be mine," says the LORD Almighty, "in the day when I make up my treasured possession. I will spare them, just as in compassion a man spares his son who serves him.
세상의 사람은 결국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처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생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처음부터 시작되어 이 땅에서 계속되며, 우리가 죽음의 문을 지난 후에도 계속됩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이 육체의 밖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다시 결합되고 부활의 생명체가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요,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리라
18 And you will again se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between those who serve God and those who do not.
이제 18절은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지기 않는 자를 분별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함을 받았기에 의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때로 우리 삶에는 시련과 환난이 닥쳐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통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지어지기 이전에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잃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또 하루의 삶, 또 한 주간의 삶을 삽니다.
결론 Conclusion: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가, 그렇지 않은 자인가? Are you a God-server or not?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가장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함께 모여 서로 은혜를 나누고 받은 복을 나눌 때,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록하십니다. 하나님이 다 찍어두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단지 교회에서의 삶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주간 168시간의 모두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주 동안에도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또한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기념책에 기록될 사람은?
말 3:13-18 / 이삼규 목사
2002년 1월 달에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서는 한국판 베드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구계리에 있는 구계교회의 김상태집사님은 어부로 생활하시는 분이십니다. 평소처럼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른 어부들의 그물에는 고기들이 얼마 잡히지 않았는데 김상태집사님의 그물은 찢어지도록 방어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10Kg 짜리 큼직한 방어가 2,370마리나 잡혔습니다. 방어는 한 마리 당 16만 9천원을 받았는데 약 4억7천만원 상당의 큰 수입을 올린 것입니다.
어촌은 어디를 가든지 우상숭배와 미신을 섬기는 일이 많습니다. 그 동안 김상태집사님도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돼지머리 놓고 제사를 드리기를 권유받았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풍어제를 거부하였습니다. 집사님이 섬기는 구계 교회는 어촌 교회로 20년 동안 한번도 성전 수리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상태집사님은 목사님에게 "이번에 고기가 좀 많이 잡혀야 성전을 수리할 수 있을 텐 데요" 라는 말을 하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방어를 잡은 수익금으로 김상태집사님은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새롭게 지을 계획을 한 후, 한 달이 지나서 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길이 5m의 밍크고래가 집사님의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밍크고래는 5천 만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큰 믿음을 보시고 넘치도록 축복을 부어 주신 것이 아닐까요? 더욱 큰 축복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전국 교회로부터 간증 요청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말라기 선지자의 여섯 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은 심판하시고 반면에 의인은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구계교회 김상태집사님 처럼 기념책에 기록될 만한 성도들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13-15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황충의 재앙이 임하고 저주가 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범한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들의 가장 큰 죄는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입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굳다'라는 말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강퍅하다"라는 말로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완악하다는 말은 옥토와는 반대로 돌짝 밭처럼 단단한 상태를 말합니다.
렘 5: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완악한 말'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강퍅한 말'을 의미합니다. 어떤 번역자는 이것을 "언어 폭력"이라고도 말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2장 1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1)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한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의심하는 한계를 넘어 무시하며 대항하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말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정말로 헛된 일입니까?
어떤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무런 사고가 없을 때는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였는데 어떻게 잘못하여 사고가 났습니다.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장로님이 운전하는 차가 사고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 일로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안나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년 미국에서 있었던 9.11 테러 참사가 일어났을 때 거기에 예수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 없었을 까요? 분명히 그 중에는 많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역센터는 붕괴되었고 심지어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잿가루가 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잠에서 깨어났습니까!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노래가 우리가 즐겨 부르는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비록 죽었으나 천국에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경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헛되다고 말합니까? 아무런 보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버림을 당하고 탄압을 받으며 환난을 받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음을 괴롭게 하며 애통과 회개로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한가 하는 악한 말로 하나님께 불평하며 원망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 하였습니다.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읍시다. 바울은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여정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하였고, 마실 물이 없어서 원망하였으며, 길이 나쁘다고 원망하였고, 때로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더욱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한 둘째는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을 받고, 악한 자들이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한 자들도 화를 면한다는 것입니다.
말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히브리 성경에는 '우리'라는 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미 3장 12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말하기를 복된 자는 '우리'가 아니라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없고 율법도 없이 방자하게 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교만은 멸망의 선봉임을 말씀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향한 교만이 있습니다.
렘 50:29 활 쏘는 자를 바벨론에 소집하라 무릇 활을 당기는 자여 그 사면으로 진을 치고 쳐서 피하는 자가 없게 하라 그 일한 대로 갚고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니라
그런가 하면 사람에 대한 교만도 있습니다.
출 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고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자나 사람을 향한 교만한 자 모두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자가 복되도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악인의 형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할 까요? 3;10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험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그런 시험입니다.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자, 악인,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무서운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여호와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될 사람(16-18절)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말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그때에'는 언제를 말합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원망의 말이 남발될 때는 말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할 때 그것을 분명히 들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의 호소를 들으실 뿐 아니라 한 말씀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분명히 기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십니까? 이것이 그들을 포상하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기록되는 기념책은 '여호와 앞에'있는 책입니다. 이 말은 '그의 얼굴 앞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것을 앞에 놓고 주의 깊이 살펴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또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원문, 두려움)한다는 뜻은 결코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좀더 사랑하지 못하는 두려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그 곳에 좀더 가까이 이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들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사랑하셔서 기념책에 기록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까지 기록하실 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성도간 피차에 말하는 것까지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념책에 남길만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말도 기록된다면 그들이 행위는 물론 기록되겠지요?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낙양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서 어떤 기념될 만한 말을 남기셨습니까? 어떤 기념될 만한 행적을 남기셨습니까? 혹시 유명무실한 사람은 아니었던 가요? 또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아니면 있어서는 안될 사람은 아니었던 가요? 여러분은 낙양교회 하면 어떤 분이 떠오르십니까? 어떤 분은 좋은 일로 기념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분은 안 좋은 일로 기념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좋은 일로 기념되는 성도가 될지언정 안 좋은 일로 기억되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서 기념되는 일을 남기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들의 행적이 낱낱이 기록될 것입니다.
단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사 65:6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3. 기념책에 기록될 사람들이 받을 축복은?(17-18절)
1)특별한 소유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한 그날, 심판의 그 날이 오면 사악한 자들이 이 세상을 누비는 그러한 중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골라서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26: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다시없는 보물 같이 소중히 여기십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임이 확실합니다.
2)아낌을 받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아끼는 것처럼 자기 아들을 아끼신다고 하셨습니다.
암 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 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아낌을 받는 백성이 되는 것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받는 사람일까요? 아낌을 받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 받는 사람이 아닐 까요? 어떤 사람은 죽을 때에도 아껴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아낌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 중요합니다. 사람들도 자기 집에서 아낌을 받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도 아낌을 받습니다. 집에서 천덕꾸러기는 밖에 나가도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아낌 받는 다는 것은 귀한 축복입니다.
3)하나님 편에 서는 축복을 받습니다.
말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의인과 악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른편에 있는 사람과 왼편에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양과 염소의 구별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여러분은 어떤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의인의 편입니까? 악인의 편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편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의 편입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말라기 시대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완악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 얼굴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념될 만한 일을 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서 기념책에 여러분의 행적이 영광스럽게 기록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보배
말 3:13-18 / 오정호 목사
인권변호사로 이름이 난 어느 변호사에게 나이 지긋한 의사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이혼문제였습니다. 그는 대학병원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의사였으며 그의 사위도 역시 의사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그에게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남부럽지 않게 쌓아온 부와 명예가 더 이상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변화를 이상하게 여긴 그의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의사는 아내의 의혹의 눈초리를 피해 병원 옆에 작은 방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가족들로 하여금 더욱 의심을 부추기게 하였고 심지어 경찰들과 그의 방을 급습하기도 하고 마약중독자로 오인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 하루라도 가족으로부터 인간적인 정을 느끼거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여 이제는 정작 의사인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할 형편이 된 것입니다.
또 한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도 의사였습니다. 그는 서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간호보조원을 아내로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그는 30대 중반이 되자 골목귀퉁이에 신경외과를 개업했고 아내는 가정주부와 간호원의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돈을 빌려주면 많은 이윤을 얻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사기꾼에게 점차 재산을 맡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전 재산을 맡긴 것이 화근이 되어 그만 무일푼의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소망이 있었던 것은 끝까지 남편을 신뢰하고 격려하는 아내가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사 부부는 얼마 있지 않아 새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정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첫째 가정은 부동산 등기 권리증이 그 가정의 복이었으나 두 번째 가정은 그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보배는 무엇일까요? 우주만물의 신비로움과 그 광대함일까요? 아니면 웅장한 바티칸의 대성당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특별한 소유 즉 보물로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17a절). 이는 놀라운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나 자신을 하나님의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마치 효도하는 자식을 둔 부모가 자식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들을 아끼시겠다고 말씀합니다(17b절).
이처럼 하나님의 보배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악한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함께 본문을 추적해가며 영적인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자들의 특징(13-15절).
첫째, 말로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13절). 말은 사상의 표현이며 인격과 가치관의 표현입니다. 13절의 ‘완악한 말’은 ‘건방진 말’, ‘뻔뻔한 말’, ‘교만한 말’을 의미하며 ‘대적한다’는 것은 외적 표현이나 내적 태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말로 자신을 대적하는 것에 대해 꾸짖자, “우리가 주께 무슨 못할 말을 했습니까?”라는 오히려 뻔뻔한 태도로 대적합니다.
둘째, 신앙적 회의에 빠집니다(14절). 14절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다 헛일이다. 세상의 쾌락을 멀리하는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라는 신앙적 회의의 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제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 무슨 유익이 있었습니까?” 라고 완악하게 대적하지 않겠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습니다(15절). 악한자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하나님을 뜻을 거역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 그들은 큰소리 치며 제멋대로 사는데도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는가?”(15절)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궁극적인 심판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세속화를 초래합니다. 예수 믿는자의 자부심을 다 던져버리고 세상사람들의 가치관과 유행에 휩쓸려 살게 됩니다.
에이즈 환자와 영적인 교만한 자의 공통점은 그 증상이 천천히 진행되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과 자신뿐 아니라 남도 전염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자들의 말과 태도는 다른 사람을 전염시키며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기억책에 기록됩니다(16절).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불신앙의 물결이 거센 슬픈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의 대화를 경청하시고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을 하나님의 기억의 책에 기록하십니다(16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모든 말을 다 기록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상을 주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망령되이 내뱉은 악한 자들의 말도 다 기록하십니다. 이는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무시하는 언행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맥추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부부가 함께 “우리의 정성을 담으십시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적당히 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열매를 다 기억하십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감옥에서의 찬송,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의 옥중 기도, 이 모든 것들도 주님께서 기억의 책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의 책에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들이 녹음되어 있는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상과 심판이 있습니다
(4장1-2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악한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될까요?
교만한 자와 악인은 초개와 같을 것이며 그 뿌리와 가지를 남겨두지 않는 처절한 심판이 있습니다(1절). 그러나 의인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2절). 우리의 삶에 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은 경제회복, 건강, 자녀의 잘됨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침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귀한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완전한 승리와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 발바닥의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3절).
상반기를 결산하면서 혹시 신앙의 자세를 벗어나 내 입술로 함부로 주님과 교회에 대해, 그리고 형제에게 편벽되게 말한 것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시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환경에 굴복하는 환경의 종이 아니라 주님 앞에 보배로운 존재로 서야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새천년 상반기를 정리하는 7월 첫주일에 주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나의 생애를 걸고 우리의 말과 태도를 바꾸어 영적인 정비를 새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도록 합시다. 하반기에는 상반기보다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에게 더욱 충만하게 머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말 3:16-18 / 박성복 목사
이 땅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지마는 그중에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소유로 삼았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을 줄 압니다. 여기에 ‘특별한 소유’라고 하는 이 단어가 ‘보배, 귀중한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귀중한 보배인 성도는 절대로 심판 날이 와도, 이 세상 끝날에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권리행사를 하시면서라도 챙겨주시겠다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귀중한 특별한 보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것은 절대적으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그러한 자를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기념책이 나오는데 이는 인간들의 말이나 행위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나 어록을 기록해놓은 것이 기념책입니다. 어느 국가나 사회에서도 귀중한 자료나 인물을 기록해놓은 것은 아주 귀하고 엄하게 다루고 있지요? 오늘 이 추하고 더럽고 험한 세상에서 사는 인생들 중에 기념책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대단한 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꼭 그런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념책에 올라가 있을 정도의 이름이 있다면 놀라운 사람입니다.
이 기념책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록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 오늘 이 기념책에 아무개 씨가 기록되어 있다면 이 땅 위에 살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일을 하여서 하나님이 잊을 수 없어서 귀중한 책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어쨌든 간에 주님 오실 때에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기 ‘소유’라고 했는데 이는 내가 하나님께 ‘나를 좀 택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당신을 위해서 나를 불러서 택하여 소유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유는 누구도 손댈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유는 누구도 해할 수가 없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사야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꼭 집어서 택한 백성으로 부른 중에 그 이름을 불러서 내 것이라고 지명했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로 지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땅 위에 많은 신, 불신간의 인류가 섞여서 살고 있으며, 또한 그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특별한 보화로 선택을 입었다고 그러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현재는 약하고 현재는 부족하고 현재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주시리라고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말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동지들이 교회가 어두워져 가는 것을 보고, 교계가 탈선되어 가는 것을 보고 피차에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마는 사사로운 말을 한 것은 아닌줄 압니다. 인간의 생각을 한 말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시편 139편 4절에 보면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 내가 혀를 놀려서 입으로 무슨 말을 내뱉었든지 해도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내가 뱉어낸 모든 말이 마지막 날에 공개가 된다면 두렵고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심판 날이 오기 전에 내가 행했던 것, 내가 뱉었던 말을 하나님 앞에 일절 다 내어놓고 결산을 봐야 됩니다. 지워져 버려야 됩니다.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책이 아닌 이 기념책에 내 이름이 올려져 있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영광된 자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정치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교계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말라기 2장 8절,9절 17절 보면요, 제사장들과 교회 어른들이 바른 지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암흑시대라 그랬습니다. 어두운 시대라 그랬습니다. 해가 뜨지 않고, 달이 뜨지 않아서 어두운 시대가 아니라 진리의 빛이 바로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두운 시대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말라기 1장 10절에 보면, “누가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습니다. 얼마나 교회가 부패했어야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랬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분명히 말라기 선지자가 살던 그 시대와 같이 지금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편치를 못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가 교회에 와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신앙에 좌절하면 안됩니다. 이런 시대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승장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념책에 올라 있는 자를 특별한 소유로 삼겠다고 했고 그 다음에 아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이런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아야 되요. 이 말씀이 내 말씀이 돼야 되요. 어떤 분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말씀이어야 되고, 이것은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권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에게 권한 말씀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한 소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특별한 보배’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껴주시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아껴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한 것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여러분, 세상에서는 값진 귀금속을 제일로 칩니다. 이 세상에서 은금보화를 최고로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영생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영구적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보화로 삼으시고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고 기념 책에 여러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자, 여러분 소유가 누구냐에 따라서 나중 영광이 다릅니다.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서 값이 달라집니다.
오늘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하는 종들을 첫째로 절대적으로 기념할 책, 잊지 못할 책에 기록하였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특별한 자기 소유로 삼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종이 어떻게 살았냐면 부패한 세상에 살았는데 그런 세상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부패한 세상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흑암시대에 살았어도 흑암시대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저는 그렇습니다. 이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함께 생명을 바치고 싶지만 이 진리를 배신한 자에게는 저는 말도 하기 싫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렇습니다. 대화도 하기 싫더라고요. 왜 이 진리를 배신합니까? 나는 그런 배신자들하고는 대화도 하기 싫은데 소통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소통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진리의 배신자는 그리스도의 배신자입니다. 여러분, 인격이요?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로 보잘 것 없습니다. 가치가 없습니다. 연약합니다. 미련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진리의 보화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싫어하는 것은 내가 싫어해야 되고요, 주님이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해야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쓸개 빠진 사람같이 놀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대쪽같이 나갈 때도 있어야 하고 포용할 때도 있어야겠습니다만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기에 ‘특별한 소유’라고 했는데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세계가 내게 속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보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귀한 보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26장 18절에도 “보배로운 내 백성”이 나오는데 꼭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보배로운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겁니다. 신명기 7장 6절에는 이 단어가 기업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재산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이런 말씀이 나에게 응한다고 하면, 내가 오늘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내 삶이 얼마나 복되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잊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시고, 특별한 보배로 여기시고, 특별한 소유로 여기시고, 자기의 것으로 여기시어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내 것이라 그래도 내 마음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보호를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제가 항상 얘기하죠. 벧엘 광야에 야곱이 홀로 외롭게 누워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와서 지켜주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 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주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달라고, 달라고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나.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지만 받을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 약속된 것을 달라고 그래야지 아무렇게나 달라고 해서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분명히 이런 축복을 해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언제 이렇게 역사해 주실 것이냐면 세상 끝날 입니다. 지난주일 오후 예배 때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원을 나누어서 참 이럴 때는 이 구원에 해당되고 이럴 때는 저 구원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을 전부 나누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도 때가 돼야 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 종말에도 개인 구원을 받을 때가 돼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류의 종말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아무 때나 주시는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 끝날에 아주 명명백백하고 질서 있고 정확하게 나눠지게 되는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소유했을 때 그것이 무기가 됩니다. 원수를 물리칠 때에 무기가 되고요, 저희들이 목이 마를 때에 그것이 시원한 생수가 되고, 갈증이 날 때에 생수가 됩니다. 그래서 물맛이 달다라고 하는데 실은 물은 맛이 없습니다. 원래 맛이 없어야 되요. 그런데 물맛이 단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은 목마를 때에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 배가 고플 때에는 무엇이라도 먹을 때 맛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양식이 되어야 됩니다.
저는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이 염려스러운게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아멘’하고 대답해도 그 말씀 사상이 안 들어오면 안 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볼 때 거리가 좀 있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다는 거예요. 정말로 여러분, 우리는 말씀에 묶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을 쭉 볼 때는 아니거든요. ‘저것이 아닌데’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면 소유다운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우리 동인교회는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세계적으로 없는 교회가 동인교회라고 저는 자부하거든요. 그 이유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특별히 선택했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아니지요? 세상 것을 배워서 훌륭하게 되는 사람은 세상적인 성공은 하겠지만 오늘 이런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되게끔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는 도저히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재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선택을 했다’고 했는데 ‘골랐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고른 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골라서 내 것이라 했다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할 때에 인간의 소리는 참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완전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내 것이라고 하신 이후에 하나님이 놓친 것이 있나 보십시오. 절대 하나님이 챙기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이 특별히 선택을 입은 자라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귀한 보화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 18절에 뭐라고 말해놨는가 보십시오.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과 같이 아낀다라고 말을 하면서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한 자를 분별하리라’고 했는데요 여러분, 여기는 좀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분별하리라’ 그랬죠? 원어는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럼 뭘 바라보겠다는 것입니까? 세상 끝 날에 의인과 악인을 갈라내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갈라내는데 이것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4복음서에 전부 다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기독교인 중에 두 부류로 나눠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여기 악인과 의인을 갈라내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한 자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엔 ‘분별한다’고 했는데 원어에는 ‘바라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악인이 심판받는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의인은 구원받는 것을 바라보게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어서가 아니고 심판날까지 살아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내가 인정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뭘 해서 그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이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별 것이 아닌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원수가 진노의 날에, 심판 날에 환난을 당하는 것과 심판 받는 것을 내가 이렇게 목도하게 될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귀한 종이기 때문에 심판 날에 원수가 심판받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7절부터 보면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 주위에 천 사람이 내 우편에 만 사람이 엎드러질 것이다라는 것은 심판 날이지요? 여러분, 이런 무서운 심판 날에 “이 재앙에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대단한 말씀이에요.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유행 질병이 엄습해 올 때에 이 병이 너희 장막 근처에 엄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그것도 감사합니까? 그런데 전 인류가 멸망하는 날, 심판하는 날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라고 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보장이 얼마나 확실한 보장입니까? 얼마나 확실한 약속입니까? 이 약속이 누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자에게. 보배된 자들에게 이 약속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악인과 선인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가 나눠지고, 또 이 말씀 사상에 묶인 자와 묶이지 아니한 자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고 공생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나눠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를 나눈다고 했고, 주님 맞이할 자와 맞이하지 못할 자를 나눈다고 그랬으며, 이제 하나님 앞에 살아서 맞이할 자와 살아서 맞이하지 못하고 죽어서 맞이할 자를 나누신다고 하셨는데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자들이 되어 이 살아서 맞이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 말라기4장에 보면 무서운 진노 심판이 내릴 때에 이 특별한 소유가 누구냐? 라고 할때 마지막 엘리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역사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여러분이 지금은 귀한 인물이 못된 것 같고, 지금은 훌륭한 자가 못된 것 같지만 이 날이 올 때에 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목사가 안됐더라면 이 말씀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목사가 아니라도 이 말씀 깨달을 수 있었을까? 절대 안 그렇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노니”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역사하게 되기 때문에 은혜시대의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이 시대에 이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사자가 돼야 되지, 뒷북치는 사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남의 뒤를 따라가는 사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고,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고, 역사가 되며 영생이 될 수 있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남의 소리를 하는 그런 목사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한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위하여 역사해 주셔야 그 말씀으로 인해 사망도 삼킬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오죽해야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까요? 오늘 한 번 봐보십시오. 수많은 교회와 수많은 주의 종들이 지금도 해마다 배출되고 있습니다. 과잉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실 때 어떻게 평가를 내리실까요? 그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뿌리는 일꾼은 너무 많이 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하는 말씀인데 지금 그 말씀이 실감이 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이 효자자식을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는 것같이 여러분은 아낌을 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기 세 가지 꼭 기억하십시오. 첫째로 기념 책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된다는 것과 둘째로 내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소유, 즉 귀한 보화가 돼야 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를 아껴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귀해야 나를 아껴주십니까? 그러면 아끼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아낍니다.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귀한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것이 되고 특별한 소유가 여러분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심판하실 때,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묵도하게 되고, ‘저렇게 심판을 무섭게 하고 계시는구나, 전 인류가 저렇게 멸망을 당하는구나’라고 하면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만년동안 대한민국은 많은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8.15때 저한테 인터넷으로 메시지가 하나 쭉 온 게 있습니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사람을 그렇게 많이 작두로 자릅니까? 제가 그것을 보고는 우리교회 인터넷에 보내 가지고요 오후 예배 때 한번 상영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여러분, 일본사람이라는 그 악랄한 그 사람들이요 36년동안 우리나라 사람을 큰 그 작두로 대놓고 자르는 사진을 보는데요 피가 끓어서 그걸 못보겠드라고요. 전 제가 엊그제 일본사람이 이틀동안 만나서 식사대접을 하면서도요 ‘내가 밥은 사주지만 못된 종자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참 그 사람들은 순진해요 민족이 나쁜민족이라 그렇죠. 아마 여러분도 그 장면을 바라봤다면요 밥을 못먹을 정도입니다. 내용도 굉장히 긴데 어떻게 그걸 찍어 놨는지 모르겠지만 그 일본 민족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 보십시오. 제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 놓고 독립 국가가 되었는데, 36년 동안 짓밟은 그 민족이 독도를 그 때 빼앗았다고 역사의 모든 자료가 있는데도 지금 자기 땅이라고 야단이잖아요. 여러분, 또 중국이 지금 하는 짓 보세요. 옛날에 중국이 얼마나 많은 예쁜 우리나라 처녀들을 빼앗아 갔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좋은 것 다 뺏기고 일본에게 다 뺏기고 했는데 지금 중국이 강대국으로 득세하고 있고, 일본이요 저 난리인데 우리가 그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경제가 이정도로 되어서 우리의 국력을 성장시키지 않았더라면요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저 악랄하게 하는 거 보십시오. 지금 딱 우리나라가 그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을사보호조약까지 하면 40년동안 그렇게 짓밟고 그렇게 못된 짓을 하고 이 민족을 사정없이 짓밟았다가 이 연합군에 의해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 두 발 때문에 일본 천왕이 손들고 바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으나 2, 3년 만에 6.25전쟁이 터져가지고 아주 거지 같이 망했던 우리나라였었습니다. 그때 막강한 전쟁 물자 때문에 일본이 강대국 다시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 16개 강대국이 우리나라 와서 피 흘려줬지만 일본은 한 사람도 건너와서 싸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전쟁이 난 바람에 또 피가 강 같이 흘렀던 이민족에게 전쟁 물자를 만들어서 대 주고 그렇게 부활하게 되었는데 지금 또 미친 짓 하는 것 보세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동경을 한번 더 흔들러 주지 않을 랍니까?’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나라는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이에요. 하나님이 보호하는 나라 손대가지고 덕 되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혀서 덕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민족이나 그 국가를 괴롭혀 가지고요 복 받는 민족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일본을 보세요. 김빠진 나라입니다. 보세요. 김빠졌나 안 빠졌나 보세요, 절대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야 할 때가 세상적으로 볼 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저 못된 일본과 저 강대국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돼 있는데 하나님이 보호하는 그런 특별한 섭리를 우리가 모르면 이 나라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역사는 이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면 우리 때문이라도 이 나라를 하나님이 지켜 주시게 되어있고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게 될줄 압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
말 3:16-18 / 김남수 목사
우리는 말라기에서 하나님의 섭섭하심과 분노하심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마음이 몹시 상하셔서 하나님의 인내를 무시하고 사랑을 거절하고 완악해진 이스라엘에 대한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주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사건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괴롭게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일들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분노하게 한 사건이다. 사실 말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속에도 없으면서 말을 거칠게 한다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끔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이 그렇게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이 정중하고 사랑스러우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은 마음의 표현이고, 마음에 있는 것은 말로 나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로 하나님을 괴롭히고
말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렇게 말라기에서 세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로 하나님을 어떻게 무시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 이 말이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2, 1: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의 말로 무시를 당하셔서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언제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말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시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말로 나를 괴롭게 하였고,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하나님이 계시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이 가슴아파 하시고, 당신을 무시하고, 괴롭게 한 것으로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하기를 쉽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이 하나님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분명히 아시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하나님이 반드시 역사하시는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계신데 왜 그러느냐? 하는 말을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산등성이에 앉아서 아래 있는 우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물을 마시고 갑니다. 그런데 지갑을 떨어뜨리고 갑니다. 그 다음 또 다른 사람이 옵니다. 그는 물을 마시고 지갑을 보고는 그것을 가지고 갑니다.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물을 마시고 가려고 하는데 지갑 잃은 사람이 와서 그에게 지갑을 내놓으라고 하며 옥신각신 싸우다가 그만 쳐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이 앉아서 보던 사람이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신가? 어떤 사람은 지갑을 잃어버리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지갑을 그냥 주어 가지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시비걸려 맞아 죽는 어떻게 이런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너는 지금 앉아서 당장의 일만 보지 나는 옛날부터 다 보아왔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만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아시고, 전에도 아시고, 그 전에도 아시고, 장차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냐고, 말할 수 없고, 왜 어찌하여 이런일이 일어나는가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권위와, 그분의 지혜와 그 분의 공의와 그분의 사랑을 인정해 드릴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하나님의 뜻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보고 하나님 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을 하나님을 도매금으로 욕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남의 티를 보고 떠드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도, 이 사람도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할 권한이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공경하고 영광을 돌려야지 우리가 재판장이 아닙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뿐이지 하나님을 심판할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다. 3:13절에 보니까 "너희가 나를 완악한 말로 대적하고, 우리가 무슨말로 주님을 대적 했습니까 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괴롭게 하고, 대적했다는 것은 그 이름을 경외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경외치 않았다는 뜻과 이름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동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 속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옵소서"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아주 존중히 여기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도 인간간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야 하는데 함부로 하면 마음에 존경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하는 교역자들이 가끔 이야기할 때, 아무 장로, 권사, 집사, 그렇게 말하는데 듣기가 참 거북합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렇게 말해야 듣기도 좋고, 은혜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존경이 있어서 그 직분과 함께 그 분을 존경할 때에 그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 이름을 존중히 여겨야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높임을 받으실 수 있도록 우리가 늘 그 이름과 그 분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이 경외함을 떠난 자의 언행이라고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아들은 아비를 종은 주인을 공경할진대,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주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멸시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섭섭함을 표시하셔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저를 축복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시골의 목동이었습니다. 형들이 심부름시키면 가서 양들을 돌보아주고 궂은 일을 맡아서 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이 소년이 어느 날 하나님을 향해서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힘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가득 찼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주시옵소서" 달라고만 하는데 이 소년은 저 산골 양치는 가운데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 소리를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하고,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게 됩니다. 자기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자기를 신뢰하고, 믿어주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이 다윗이라는 소년을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잘나고 멋있는 아들들을 다 제껴놓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를 높이시고, 자기를 존중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가지고 계신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바쁘고 욕심이 너무 많고 탐욕이 너무 많아서 바빠지고 복잡합니다. 만물을 보십시오. 나무를 보십시오. 봄에 잎이 나서,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열매를 맺어서 다람쥐가 먹게하고, 사람이 먹게하고, 모든 것을 나누어 줍니다. 빈 껍질만 남아 있습니다. 겨울에 무엇을 먹을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욕심이 없습니다. 짐승도 욕심이 없습니다. 먹을것과, 마실 물과, 잠 잘 자리만 있지, 그 이상의 욕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욕심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앞세워놓고 쟁기를 갈면서 하는 말이 "요즘 풀만 먹었더니 기운이 없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고기를 사다 먹어야지" 그러나 앞에 있는 소는 들의 풀만 먹었지 언제 고기 먹나요. 그러나 소는 풀만 먹어도 기운이 세서 밭도 갈고 짐도 나르는데, 사람만 풀먹어서 기운없다고 하면서 욕심부려서 밤새도록 고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심플하게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자체가 축복이 될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서 25장에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 때 그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여 그 신들을 섬기게 하였고, 그 신 바알브올에게 절을 하고 그 신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보니까 비느하스라는 청년이 일어나 시므리라는 사람과 고스비라는 미디안 족장의 딸을 단칼에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된다. 그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진멸하시려고 할 때에 이 비느하스라는 청년이 일어나 죄의 대표적인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게 됩니다. 이 언약이 평화의 언약이라 는 이름으로(신25:12-14) 세워 주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 젊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면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린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세우십니다. 네가 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고 내 마음을 이해했으니 내가 너와 너의 자손이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손들이 되어서 축복을 받게 하리라 하는 것이 오늘 말라기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말라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너희가 지키지 아니하는구나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한국말에는 없습니다. 영어에는 He was as zearous as I am for my honor among them, so that in my zeal I did not put an end to them. I am making my covenant of peace with him.... 그와 함께 평화의 언약을 맺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레위 청년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을 때에 그것이 분해서 일어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이름을 높여 드린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약속을 하시면서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축복해 주겠다. 그래서 네가 영영히 나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앞으로 일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 약속을 어떻게 너희가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느냐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영광을 받으시다가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 이름을 멸시하고, 그 이름이 사람들 발에 밟히게 하니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그 이름을 높일 것이고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데 까지 모든 민족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지경이나,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높이는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그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시지 경멸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시지 멸시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이시지 무시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분이지 동정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심을 받을 분이지 천대를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그 발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리가 할 가장 존귀한 일인줄 믿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름과 그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제일 높이고 그 분을 경외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하나님이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정한 날에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며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저들을 아끼리니 내가 아주 소중한 보석같이 소유를 삼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악할지라도
말 3:16-18 / 기독신문
고단한 불신앙의 시대, 하나님 말씀으로 이겨갑시다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 3:18)
오늘날 기독교는 수세적인 측면에 서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무신론, 그리고 동성애와 같은 반성경적 이슈들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내적으로도 신앙의 확고함을 세우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의 선택에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은, 신앙의 내면화와 신앙교육에 있어 문제점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새로운 존재방식을 찾아야 하는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각한 위기의 시대 : “그 때에”
본문 16절은 “그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 때에”는 13~15절에 기록된 당시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말 2:17),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14절)고 말하며,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유익이냐”(14절)라고 말하였습니다. 말라기 당시의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서 회의와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완악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15절)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이 지켜온 신앙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가치와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10)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찮은 것이 되고, 믿음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신앙의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아픔과 상처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와 바벨론의 포로생활의 아픔을 경험하였고, 포로귀환 후에는 기대가 무너지는 반복적인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2성전이 건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영광이 회복되지 않은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은 절망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은 믿음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속적인 불신앙으로 흘러갔던 것입니다.
조시 W. 부시 대통령의 인력담당 보좌관이었던 레스 쏘르바(Les. T Csorba)는 <신뢰 trust>라는 책에서 미국 사회의 신앙 위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사회에서 믿음은 “할아버지 때에는 경험이요, 감동이요, 기적이었는데, 아버지 때에는 그것이 전통이 되고, 아들 때에는 ‘그저 그런 것’이 되고, 손자의 시대에는 믿음은 ‘귀찮은 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이러한 현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도 심각한 위기 상황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16절)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소수의 사람들, 그들이 피차에 하는 말을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들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몇 가지 조치를 취하십니다. 불신앙과 방종, 형식적인 예배와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 세상을 다 뒤덮은 것과 같은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님은 바라보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일하십니다.
첫째, 그들의 말을 여호와 앞의 기념 책에 기록하십니다. “기념 책”은 ‘기억의 책’입니다. 그 말과 행동들이 잊히지 않도록 기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시대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말이라 생각하고 흘려버렸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기념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둘째, 그들을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로 삼아 아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고,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17절)라고 했는데, “내가 정한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4장 1절 이하에 보면,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악인들의 존재 자체-뿌리와 가지-가 소멸되는 심판의 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공의로운 태양이 떠올라서, 치료의 광선이 발하여지는 생명의 날입니다(말 4:2).
마지막으로, 그들의 믿음이 드러나고 빛날 것입니다. 지금은 악인과 의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가 혼재되어 있지만, 그 날에는 그들의 신앙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시대가 악하고 변할지라도” : 믿음으로 사는 법
그럼 어떻게 우리는 이 불신앙의 시대 가운데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신 증거가 삶에서 나타나지 않고, 악인이 번성하고 교만한 자를 복되다 하는 사회 속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낙심과 절망의 현실이 우리의 믿음을 짓누르는 상황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구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은 존재를 결정합니다. 에스겔은 말라기와 같이, 신앙의 심각한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에스겔은 스물다섯 살 되던 해, 주전 597년에 여호야김 왕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전도 없었고, 제사도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꿈을 펼칠 수 없는 절망의 상황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에스겔이 절망의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1:3)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와서 눈을 뜨면 절망의 현실을 확인해야 하는 5년 여의 기나긴 기간 동안 자신이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시의 아들 나 제사장 에스겔”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목사요, 장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악할 지라도 우리는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약속과 비전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고단한 현실에서 열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습니다(딤후 3:12). 어떻게 이 고단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말씀 안에 있는 약속과 환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서 보이지 않은 미래를 보고, 말씀 안에서 미래의 환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라기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환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용광로와 같은 불이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지푸라기처럼 불태우고, 그 뿌리와 가지를 살라 버리는 환상,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치료하는 광선이 비추어서, 그들로 생명력 있게 살게 하시는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 안에 고단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비전이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 기록된 마른 뼈의 환상은 패망하여 아무 소망과 가능성이 없는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시고 회복시키시겠다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그 소망이 어두운 현실을 밝히고 이겨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고단하고 불신앙이 만연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성도의 근원적인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현실을 넘어 말씀 가운데서 비전과 환상을 보고, 현실의 방종을 넘어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기념 책에 기록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