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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이준형의 보물상자 : 러시아 피아노 악파 2편>
뭔가 짧고 아쉬웠다. 듣다 만 느낌이랄까? 길렐스의 강철타건을 보고 싶었는데 못본 것도 그렇고, 리히터 이후 최근 세대 피아니스트들이 없어서 그렇기도 해서일 것이다.
1.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1893)
<사계> op.37b 중 '5월-밝은 5월 밤'
- 콘스탄틴 이굼노프(피아노)
(3:21)
*1947년 녹음
2. 프리데리크 쇼팽 (1810~1849)
녹턴 C샤프단조 op.posth
- 레프 오보린(피아노)
(3:40)
*1952년 녹음
■ 레프 오보린, Lev Nikolayevich Oborin (11 November, 1907 - 5 January, 1974)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오보린은 이른바 ‘러시아 피아노악파’의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에서 근대적인 피아노 주법으로 이행하던 시기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리고 명교사로서 기교와 해석면에서 합리적인 피아니즘을 제자에게 전수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피아니스트로 숱한 명반을 남겼던 러시아의 명 피아니스트 레프 오보린은 공교롭게도 오이스트라흐가 타계한 해인 1974년 그보다 몇 달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으며,하차투리안의 협주곡을 초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뛰어난 앙상블 연주자로 특히 오이스트라흐와의 연주는 가장 이상적인 이중주를 만들었다.
그는 절제와 자기 수양을 음악 활동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던 연주자로, 철두철미한 컨트롤과 단정함이 가장 큰 특징이다.
오보린은 1907 년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철도기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4세 때 혼자서 피아노를 익혔고,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알았던 아버지와 가끔 연주했다고 한다.
9세 때 모스크바의 유명한 피아노 교사였던 엘레나 그네신(Yelena Gnessin)에게 사사하여 정식 레슨을 받았고, 1921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음악원에서 콘스탄틴 이굼노프(Konstantin Igumnov)에게 피아노를,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26 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여 데뷔하였으며, 러시아가 낳은 제 1의 피아니스트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듬해인 1927 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 1 회 쇼팽 콩쿠르(International Frederick Chopin Piano Competition)에서 우승하였으며,서유럽 각국을 연주여행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928 년부터 모교인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1930 년에 조교수,1935 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한편 1938 년부터 바이올린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소나타를 연주했고, 1941 년에는 첼로의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세비츠키(Sviatoslav Knushevitsky)와 더불어 '오이스트라흐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로도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1948 년 이굼노프가 별세한 후로는 음악원의 피아노科 주임이 되었는데, 그의 문하에서 드미트리 사카로프(Dmitri Sakharov),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 미하일 보스크레센스키(Mikhail Voskresensky), 에카테리나 노비츠카야(Ekaterina Novitskaya), 안드레이 에고로프(Andrei Egorov) 등의 피아노 명인들이 배출되었다.
작위적이고 가식적인 해석이나 교육을 싫어했던 오보린은 학생들에게 무척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보린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9 세기 스타일의 명기주의(名技主義)에서 탈각하여, 고도로 정확한 기술로써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지적(知的)으로 억제된 조형(造型)이 격조높은 아름다움을 낳으며 그 속에 원숙한 풍격(風格)을 담고 있다.
그는 베토벤 연주자로서 정평이 있지만, 레퍼토리는 매우 넓었으며 러시아의 작품소개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균형 잡힌 기교와 쉽고도 명확한 연주를 보여주었으며,무엇보다도 물 흐르듯 아름다운 레가토는 특별한 것이었다.
1964년 소련 공훈 예술가의 영예를 안은 오보린은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기도 했던 작곡가였으며, 다양한 저술을 남긴 평론가이기도 했다.
레코드로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 번,월광> 등이 수록된 <오보린 리사이틀>과,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협연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하챠투리안 지휘,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하챠투리안(Aram Khachaturian,1903-1978)의 <피아노 협주곡>, 가우크 지휘,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연주에 의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2 번> 등이 명연주로서 정평이 높은 앨범들이다.
그리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세비츠키와 트리오로 연주한 레코드로는 베토벤의 <피아노 3 중주곡 제 7 번,대공>,슈베르트의 <피아노 3 중주곡 제 11 번> 등이 가장 걸출한 명연이다.
3.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1827)
피아노 소나타 7번 D장조 op.10-3 <비창> 중 4악장 Rondo. Allegro
- 마리아 그린베르크(피아노)
(4:07)
Maria Grinberg마리아 그린베르크(1908-1978)
마리아 그린베르그는 1908년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 학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18세까지는 오데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당시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블루멘펠트의 문하에는 마리아 유디나, 시몬 바레레 그리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있었다. 블루멘펠트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데 1935년 연방 콩쿠르에서 2등 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1937년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이 정치적인 문제로 체포되어 처형된 뒤로는 음악계의 변방을 떠돌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그녀가 50세가 되던 해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중앙 무대에 복귀하게 되었고 해외 연주가 허락이 되었다.(물론 그 뒤로도 그녀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견제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그녀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지만 해외 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평론가들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클라라 하스킬에 견줄 만한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였다. 이후 그네신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1970년 13장의 LP로 제작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녹음을 완성한다. 이 녹음은 연주뿐만 아니라 러시아 피아니스트로서는 최초로 베토벤 전집을 완성한 의미를 지닌 기념물이었다. 이 베토벤 전집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베토벤 전집 역사상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후 음악 활동을 이어가다가 70세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4. 프레데리크 쇼팽 (1810~1849)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 op.11 중 2악장 Romance
- 겐리흐 네이가우스(피아노), 알렉산데르 가우크(지휘), 소련 국립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
(8:53)
*1952년 녹음
명불허전이었다. 곡이 긴만큼 보람도 있었다.
구소련을 대표하는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는 국내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Siviatoslav Richter)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평생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수많은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들을 길러냈고, LP음반시절 Melodiya레이블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던 피아니스트이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멜로디야 레이블의 음반들이 속속히 수입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 루마니아 출신의 라두 루프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제라드 프레니(Geard Fremy), 체코의 Zdenk Hnat, 불가리아의 가네프 라자로바(Ganev Lazarova), 헝가리의 가비 아미라스(Gaby Amiras) 그리고 많은 구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이 있다. 네이가우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교습을 받았는데, 에밀 길레스, 야코프 자크(Jakov Zak), Anatolij Vedernikov, 네이가우스의 아들인 스타니슬라브 네이가우스(Stanislav Neuhaus), 테오도르 쿠트만(Teodor Gutman), 에프게니 말리닌(Evgenij Malinin), 레프 네모프(Lev Naumov), 베라 고르노스테바(Vera Gornostaeva), 블라디미르 크라에브(Vladimir Krajnev), 에프게니 모길레프스키(Evgenij Mogilevskij)등이 있다. 또하는 그는 국제적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미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스위스 그리고 이스라엘,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일본등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는 뛰어난 피아니스트, 교육자, 피아노 연주의 예술의 발전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피아노 “스쿨(School)"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네이가우스의 오랜 교습방식은 그의 어린 시절의 첫 경험들속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는 1888년 우크라이나 엘리자베트그라드(Elizavetgrad)에 있는 지방도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인으로 구스타프 네이가우스(Gustav Neuhaus)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인으로 올가 블루멘펠트(Olga Blumenfeld)이었다. 이들은 음악교사로 고향에 처음으로 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오랜 기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기억에 따르면, 비록 아버지의 피아노 실력은 약간 부족했지만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고, 그는 어린 네이가우스를 가르치는데 항상 모든 제한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도록 피아노 연주의 기술적인 또는 물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몇 년 동안, 하인리히는 매일 피아노 연주의 물리적인 요소들에 기초를 두고 부모님의 연주를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아버지의 교습법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런 까닭에 네이가우스는 피아노 교육의 중요한 컨셉을 학생의 지성에 호소하였다.
그의 어머니 올가 블루멘펠트(Olga Blumenfeld)는 1931년 작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성페트스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이고 유명한 지휘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와 여동생이었다. 블루멘펠트의 조언에 따라 1905년 네이가우스는 베를린로 가서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vsky)에게 사사하게 된다. 온 가족은 몇 번 독일을방문하였는데, 1904년에는 펠릭스 불루멘펠트와 그의 사촌인 카롤 시마노프스키(Karol Szymanowsky)와 함께 독일로 여행하였다. 17세의 네이가우스는 베를린에 머물러 있을 때 이미 뛰어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고, 독일, 프랑스, 이태리, 영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폴란드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잠시 고도프스키에게 사사한 후, 네이가우스는 2년 동안 이태리에 머물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었고,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였던 시기이다.
그 후 가족들의 강요로 네이가우스는 다시 엘리자베트그라드로 되돌아오게 되고 이러한 귀향은 네이가우스의 음악인생에 큰 침체기를 겪게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그는 Hochschule der Musik에 입학하기 위해서 베를린으로 가게 된다. 그의 피아노 선생인 하인리히 바트(Heinrich Bart)가 그 음악원에서 재직하고 있었고, 그는 이론과 작곡의 전 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바트의 가르침은 오랜 독일 학교의 영혼속에서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리스트, 바그너, 드뷔시, 스크라이빈, 말러, 슈트라우스 그리고 레거와 같은 작곡가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브람스이후로 음악이 종결되었고, 실제로 음악 예술이 브람스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절대적으로 동시대 피아니스트들과 부조니 같은 대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적 보편성을 갖춘 네이가우스는 이런 바트의 생각을 전수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베를린을 떠나 우크라이나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의 부모은 이런 네이가우스의 음악적 좌절감을 보고 젊은 네이가우스를 비엔나 음악 아카데미의 Masterschule에 보낸다.
1915년 네이가우스는 성페테스부르크 음악원에서 졸업시험을 보고 음악원을 졸업한 동시에 구루지아에 있는 트빌리시 음악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17 혁명이 점차 거세지자 그는 곧 엘리자트그라드에 있는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1919년에서 1922년까지 그는 키에프 음악원에서 교편생활을 하게 된다. 이 곳에서의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생활은 매우 혈기 왕성한 시간이었다. 첫 시즌에 키에프에서 그는 7차례의 솔로 리사이틀을 갖게 되고 젊은 음악팬들 사이에서 특별한 우상으로 사랑받게 된다. 그 당시 네이가우스의 콘서트 프로그램은 바하에서부터 시마노프스키까지 다양한 음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22년 네이가우스와 키에프 음악원의 교수이었던 블루멘펠트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기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네이가우스는 1964년 사망할 때까지 교육자로서 피아니스트로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네이가우스의 음악교육 방식은 다른 음악교사들의 교육방식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그의 레슨에는 항상 청중들이 함께 하였고, 음악과에서 다른 전공을 하는 학생들까지도 네이가우스의 교습법을 듣고 보기 위해서 하루 종일 그의 수업을 청강하곤 하였다. 이런 특별한 교육방식으로 네이가우스는 학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네이가우스는 학생들이 음악적인 언어를 이해하기를 권고하였다. 그는 음악가들이 음악적인 작업의 논리와 구조의 완전한 통찰력을 이해하는데 노력하기를 권고하였고, 피아노의 음향과 톤의 질감, 기타)등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그의 콘서트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의 피아니즘은 시적 영감, 아주 순수한 감각의 스타일과 특성 그리고 다른 음악적 이미지들로부터 인도 받은 음악적 깊이감과 숭고함으로 사랑받았다. 그의 뛰어난 기교는 화려한 대가성이 아니라 그의 창조적인 상상력, 마치 음악적 파렛트에 피아노의 음율의 풍부함으로 채우는 능력이었다. 또한 그는 항상 각각 작품들에서 진실된 예술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네이가우스는 피아노 사운드의 대가이었다. 피아노에 놓인 그의 손가락들은 음색들의 다양성과 감정적인 표현성, 풍부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네이가우스의 에술은 피아노의 위대한 가능성을 청중들에게 열리게 하였다. 그는 이것을 이상적인 지휘자에게 복종하게 하는 오케스트라처럼 만들기도 하였다. 네이가우스의 깊은 음악적 지식, 시, 문학, 예술, 그의 개인적인 경험들, 예술적인 상상력, 이런 모든 것들은 그가 연주하였던 작품들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네이가우스는 어떻게 각각의 작곡가들에 개별적인 특성과 작품의 정수를 찾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네아가우스의 스크라이빈 작품을 연주한 공연들은 특별히 기억할만하다. 마치 피아노 현들을 망치로 두드리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공기속에서 피아노 현들 그것 자체들의해서 보여지는 소리의 환영을 창조하였다.
연주자로서 네이가우스의 매력, 그의 뛰어난 음악적 분출, 예술을 사랑하는 천재적인 재능,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성품들은 재능 있는 젊은 사람들에게 네이가우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하였다. 네이가우스와 밀접한 친분을 나누었던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의 예술적인 개성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고, 예술에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네이가우스의 클래스에서 에술적인 정취를 느껴왔던 제자들이다.
자신의 교습법에 있어서, 네이가우스는 어떤 독단적인 원칙들을 따르지 않았다. 네이가우스의 주요한 주제는 예술적인 교육법이었다. 이런 영향력은 각각 다른 실제적인 통찰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음악적인 작업의 예술적인 해석을 완성하는 것으로부터 소리, 악절, 리듬, 다이나믹, 가장 뛰어난 뉘앙스들을 갖춘 피아니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피아노 클래스에서 네이가우스의 연주는 즉흥성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창조적인 이벤트이었다. 교육적인 목표를 해결하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따르는 예술적인 직관적인 통찰력의 순간들이었다. 그는 음악의 예술성, 음악의 개념들과 감정적인 개념들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자주 “먼저 무엇을 연주할지 인식한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1964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The Art of Piano Playing"의 저서를 남겼고, 제자중 Esja Elinatjte는 스위스에 하인리히 네이가우스 협회를 창립하였고, Elisso Wirsaladze는 매년 하인리히 네이가우스를 추모하는 그루지아 페스티발을 개최해왔다.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의 녹음들은 대부분의 구소련의 Melodiya 레이블에서 남겼다. 또한 일본의 Denon레이블에서 그의 녹음들을 집대성 세트 음반이 출시되었다.
5.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1750)
두 대의 건반을 위한 협주곡 C장조 BWV1061 중 2악장 Adagio
- 야코프 자크 & 에밀 길렐스(피아노)
(4:20)
야코프 자크가 제3회 쇼팽 콩쿨에서 우승했고, 그 제자 니콜라이 페트로프가 조성진을 모스크바 음악원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던 중에 죽었다는게 요즘 조성진을 보면 그다지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사람의 운명이라는게 참 알수 없는 것인가 보다.
6.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프렐류드 B플랫장조 op.23-2
-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피아노)
(3:27)
역시 리히터였다. 첫음부터가 달랐다. 내가 괜히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변덕스럽고 격정적인 연주를 한다는 이준형 선생님의 평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알다시피 음악에서는 므라빈스키, 오이스트라흐와 길렐스 등이 50년대부터 그 공산주의의 음악체계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마지막 서방침공의 종지부를 리히터가 마무리 지었다고 말할수 있을만큼 리히터의 명성은 지금도 굳건하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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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5월 25일 하리키우에서 | |
기본 정보 | |
본명 | Святосла́в Теофи́лович Рихтер, Святослав Теофілович Ріхтер |
출생 | 1915년 3월 20일(1915-03-20) 러시아 제국 지토미르 |
사망 | 1997년 8월 01일 (82세) 러시아 모스크바 |
직업 | 피아니스트 |
장르 | 서양고전음악 |
악기 | 피아노 |
활동 시기 | 1934년 ~ 1997년 |
레이블 | 멜로디야, DG, 필립스, RCA |
스뱌토슬라프 테오필로비치 리흐테르 (러시아어: Святосла́в Теофи́лович Рихтер, 우크라이나어: Святослав Теофілович Ріхтер, Sviatoslav, Richter , 1915년 3월 20일(율리우스력 3월 7일) ~ 1997년 8월 1일)는 소련의 피아노 연주자로, 20세기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해석의 깊이와 레파토리의 넓이, 탁월한 연주법으로 유명하다.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태생이며,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인 부친으로부터 피아노의 솜씨를 물려받고, 15세경부터 무용곡을 반주하였다. 23세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10년 동안은 겐리흐 네이가우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45년 소련 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60년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1962년 유럽을 돌며 연주회를 열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주자가 되었다.
연주에서는 중량감이 있으며, 따뜻하고 색채가 풍성하다. 손이 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섬세한 뉘앙스를 내었다. 스케일도 크고 내용도 깊다.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등 연주 범위가 넓다. 같은 곡이라도 때에 따라 치는 방식이 다르나, 어느 음반도 수준 이상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계속 기침소리가 나서 거슬렸으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왔다. 길렐스가 차분하고 감정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준형 선생님의 평과 내가 알던 강철타건이라는 것과 잘 매치가 안되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표기 언어 Emil Gilels
분류 | 연주자>기악 연주자>건반 연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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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10월 19일, 우크라이나 오데사 |
사망 | 1985년 10월 14일 |
유형 | 피아노 연주자 |
수상 | •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1938) • 스탈린상(1946) • 레닌 훈장 수여(1961) |
데뷔 | 1929년 5월 |
요약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러시아 음악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고전과 낭만을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가 특징이다. 냉전시대에 최초로 미국 무대에 진출한 구소련 피아니스트이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와 더불어 러시아를 대표하는 20세기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는 1916년 10월 19일 소비에트연방의 오데사 지방(현재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음악수업을 받은 길렐스는 타고난 천부적인 기억력과 매끄러운 테크닉으로 남다른 성장세를 보였다. 1929년 5월, 13세의 나이로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와 리스트의 〈연주회용 에튀드〉, 스카를라티의 〈소나타〉 등을 연주하는 데뷔 리사이틀을 성공리에 마쳤다.
데뷔 연주 이후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을 거쳐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 문하에서 수학했다. 1938년, 네이가우스에게 받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벨기에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콩쿠르(Ysaÿe International Festival)에 출전했으며,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전신인 이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인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과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의 극찬을 받으며 당당히 1위를 차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콩쿠르 우승 후 미국에서 연주 제의도 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러시아의 많은 음악가들이 망명을 떠났으나 길렐스는 러시아를 지키며 전방의 군부대와 병원 등을 다니며 연주를 이어갔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2차 대전이 끝난 후 길렐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민 예술가의 칭호를 얻어 외국 무대에 진출하는 자격을 얻었다. 1947년 이후 길렐스는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다니며 연주 활동을 이어갔고 1955년에는 냉전 시대에 미국에도 진출했다. 전쟁 후 미국 무대에 선 최초의 구소련 피아니스트로 기록된 에밀 길렐스는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이며 미국 청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타고난 테크닉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길렐스의 레퍼토리의 폭은 무척 방대하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등 자국 음악가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바흐와 헨델, 모차르트와 브람스, 생상스와 스메타나 등 폭넓은 작품을 연주했다.
실내악에도 관심이 많았던 길렐스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여동생 엘리자베타(Elizabeth Gilels)와 호흡을 맞추었고 그녀의 남편이자 처남인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Leonid Kogan)과도 함께 연주했다. 특히 코간과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와는 피아노 트리오 활동도 이어갔으며 미국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kh)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는 한 살 위의 피아니스트인 리히테르와 종종 비교되었다.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리히테르가 길렐스의 콘서트에서 그가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의 〈3번 소나타〉 연주를 듣고는 길렐스의 연주가 너무나 완벽해서 그 이상의 연주는 없을 것이라고 평하며 더 이상 공식석상에서 그 곡을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약 5피트, 즉 167센티미터 정도의 키로 작은 체구였던 길렐스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강력한 타건으로 무대를 압도하곤 했는데, 조지 셀(George Szell)이 이끄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오이겐 요훔(Eugen Jochum)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호흡을 맞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등은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에밀 길렐스는 1985년 10월 모스크바에서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병원을 찾았다 주사를 맞고는 쇼크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