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너에게 편지를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 문학실 우리말 스크랩 소설 속 새말④ ‘빨리빨리 문화’와 산업화의 결합이 만든 말 급-急
흐르는 물 추천 1 조회 85 13.08.08 08: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설 속 새말④ ‘빨리빨리 문화’와 산업화의 결합이 만든 말 급-急

 

'빨리빨리 문화'와 산업화의 결합이 만든 말 급- 急-
 


 



골골샅샅이 새벽종이 울리는 새벽 여섯 시에 졸린 눈을 비벼 뜨고, 키보다 더 큰 싸리비를 들쳐 메고, 골목길로 내달렸던 세월의 뒤안길엔 ‘급성장, 급속도, 급신장’ 등과 같은 말들이 무수히 흘러내린다.

 
《독립신문》의 〈논셜〉기사 ‘대한인민의 직무’에 ‘국?에 유의유식-이 십분에 구요 도?과 협잡-가 한량이 업시1989. 3. 3.’ 있다 하였다. 국민의 90%가 유의유식遊衣遊食 즉, 놀고먹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유의유식에 대한 성찰은 1920년대 어느 신문 기사에서도 나타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나태하고, 게으른 민족이었다는 것을 성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빨리빨리 문화’가 적어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속담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우리 민족의 ‘낙천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빨리빨리’를 넘어서 ‘급’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 상으로 보이는 한 신문의 헤드라인이 퍽 인상적이다.

 

깍듯한 인사에 문○○ '급방긋' 《오마이뉴스2013. 4. 26.
 

‘급방긋’의 ‘급-’은 명사와 결합하여 ‘갑작스러운’, ‘매우 급한’, ‘매우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사이다.

 


ㄱ. 급냉각, 급당황, 급매매, 급물결, 급반전, 급발진, 급변동, 급변화, 급속력, 급수정, 급연락, 급정리, 급처리, 급처방, 급처분, 급추격, 급추락, 급출두, 급편성, 급하강, 급확산, 급환자 등
ㄴ. 급방긋, 급방실, 급사랑, 급울음, 급웃음, 급이별, 급잊음 등

 

이들은 모두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은 말로, ‘ㄱ’은 주로 신문 기사들을 통해서, ‘ㄴ’은 주로 방송의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통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 중 어떤 말이 끝까지 살아남아 사전에 실리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급물결 친 이 강변 쫓기는 참새떼들. 《이청준, 흰옷》
짧은 침묵의 순간, 내 생각은 회오리쳤고 급반전을 했다. 《신장현, 방생》
내가 탄 소심 낙타는 여전히 소심해서 재빨리 앞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규가 탄 불량 낙타는 급발진을 하듯이 걸음을 뗐다. 《정도상, 낙타》
처음엔 고분고분하던 학생들이 이삼 년이 지나면서부터 사고와 행동에 급변화가 왔다. 《현기영, 누란》
차는 급속력으로 달리며 크락숀을 울려 댔다. 《조정래, 태백산맥》
기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 급수정되는 시나리오. 《장은진, 앨리스의 생활 방식》
급처방한 약이 형의 심장을 막고 있던 혈관을 늘여 놓은 것이었다. 《김인숙, 아버지의 얼굴》
발명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걸 10억에 급처분할 작정이라고 했다. 《우영창, 하늘다리》
역시 소년의 연이 머리를 아래로 돌리고 급추락을 한다. 《윤정모, 그들의 오후》
새된 소리를 내뿜으며 급하강을 했다. 《강효근, 강 건너 꽃구경》
급환자라는 것도 우리 소대원 중에서 나왔던 것이어서 나는 고성역에 내릴 적부터 남달리 신경을 써야 했다. 《이호철, 칠흑 어둠 속 질주》

 

‘급물결, 급반전, 급발진, 급속력, 급수정, 급처방, 급처분, 급추락, 급하강, 급환자’를 제외한 다른 말들은 아직 문학 작품 속에서 그 쓰임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ㄴ’의 부류는 더욱 그러하다.

 

작품 속 길다는 급사랑하고 급이별하는 엉뚱한 인물이지만 사건의 주요 힌트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 《노컷뉴스2008. 4. 16.

 

국민들의 유의유식을 걱정했던 일제 강점기에 1920년 조선 총독부에서 간행된 《조선어사전》에는 ‘급-’이 결합된 단어는 ‘급선무’ 하나뿐이며, 1942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에는 ‘급경풍, 급병, 급선무’가 전부이다. 이후 1957년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큰사전》에는 ‘급경사, 급구배’, 1961년 북한에서 간행된 《조선말사전》에는 ‘급상승, 급속도, 급침하, 급회전’이 추가되었다. 1961년 산업화 이전에 간행된 국어사전에 ‘급-’이 결합된 단어는 ‘급경사, 급경풍, 급병, 급상승, 급선무, 급속도, 급침하, 급회전’ 등 고작 여덟 개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1999년에 간행된 《표준국어대전》에는 ‘급-’이 결합된 복합어가 대거 수록된다.

 

급가속, 급각도, 급강하, 급기류, 급매물, 급부상, 급선봉, 급선회, 급성장, 급속도, 급신장, 급실속, 급유아, 급전환, 급정거, 급정지, 급정차, 급제동, 급진전, 급체포, 급출발, 급템포, 급행군, 급회전
 

‘급-’이 결합된 말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빨리빨리 문화’는 단순히 민족성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화 이전에 간행된 사전에 실린 단어와 이후에 실린 단어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이웃 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의 개방 개혁 정책 이후 중국인들도 '만만디慢慢的'가 아닌 '콰이콰이快快'를 부르짖고 있다고 한다.

 

‘빨리빨리 문화’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대충대충’이 ‘철저함’으로 무장되면서 정보화 시대 한국인의 미덕으로 승화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급매물’이나 ‘급매매’도 부족해서 ‘급-’에 ‘급-’을 더해 ‘급급매물’, ‘급급매매’라는 말을 서슴없이 만들어 쓴다.

 

매매시장 '꽁꽁'…… '급급매물'도 안 팔려. 《아주경제2012. 12. 9.

 

산업화 이후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은 매체의 표현 능력을 극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급-’의 결합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기폭제 역할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앞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른다. 다만, ‘급-’의 홍수 속에서 사전을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단어의 생명을 쥐고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뿐이다.

 
*본문에 포함된 예문의 표기는 원문의 것을 그대로 인용하되, 띄어쓰기는 일부 수정함



 
 

글_이길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

최신기사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