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고 여름 외 2편
채인숙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뿌리며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를 피워 내는
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어른 키만 한 도마뱀이 발견되었다
근처 라구난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거라고
동네 수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림을 헤쳐 만든 도시에는
식은 국수 면발 같은 빗줄기가 끈적하게 덮쳤다
밤에는 커다란 시체꽃이 입을 벌리고
도마뱀의 머리통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납작하게 익어 가는 열매를 따먹으며
우리는 이 도시에서 늙어 가겠지만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려나
여름 가고 여름 온다
네덜란드 인 묘지
이방인들이 그들의 묘지로 당신을 데려갔다
서둘러 이름을 새기고 하얀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당신이 죽고서야 떠나왔다는 먼 나라의 당신 이름을 보았다
남은 생은 무덤에 이마를 대고 살아가야지
낡은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묘지 위로 햇볕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함께 잊자고 했다
잊을 수 있는 것들이 아직 있어서 좋았다
당신이 살았던 나라의 항구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이 핀다고 했던가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지쳐버리던 아침
계절이 바뀐다는 건 어떤 것일까
끝내 알 수 없었고
화란의 말을 잊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다는 편지를 쓰지 못했다
눈먼 자바의 물소처럼 소리를 죽여 혼자 울었다
무엇을 위해 떠나왔는지
누구를 위해 돌아가야 하는지
세월은 이유를 남기지 않고 흘렀다
당신만이 유일했으나
당신만이 죽었다
묘비 위로 푸른 이끼가 지붕처럼 덮여 갔다
나의 위로는 모든 당신이었으나
당신의 위로는 언제나 당신 눈물뿐이었다
유파스나무 숲의 은둔자
숲은 어둠을 내장한다. 개미의 분주한 고독을 위해 나무는 하루 5센티미터씩 키를 키우고 뿌리는 가야 할 방향을 거슬러 땅 위로 솟아오른다
18세기 홀랜드로 그림을 배우러 떠났던 화가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긴 겨울 그림자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지배자의 얼굴에 주름을 그리면서 고독과 고립의 처지를 설명하느라 병들고 말았다.
눈이 어두워지자 화가는 자바해를 건너 숲으로 돌아왔다. 유파스나무 줄기로 엮은 동굴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사랑이나 영원 따위를 발견하려는 어리석은 모험가를 만날 때마다 독이 든 즙을 발라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그는 언제나 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독을 품은 마음이란 그런 것이지. 한때 내 팔 위에 앉아 쉬었던 새들은 향해 한 점 눈물을 뭉쳐 독화살 촉을 겨누고 말아.
숲은 거대한 그림자 덩어리. 그가 사는 숲에서 구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놀랍도록 견고한 이름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
숲은 오늘도 은둔자의 검은 가운을 덮고 잠들었다.
― 채인숙 시집,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 2023)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