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레오가 찾은 백년의 맛, 종가는 맛있다 (15)예안 이씨 문정공파 이정렬 종가
봄기운 담은 참죽나무 두번째 순
고추장양념 발라 바짝 말린 뒤 일년 내내 먹는 ‘참죽순고추장절임’
간장 끓여 그늘에서 묵힌 ‘그늘간장’ 순하고 부드러운 맛 일품 제사음식 등 귀한 음식에만 쓰여
“참죽순을 특별하게 요리해서 먹는 종가가 있다는데요. 전 먹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더라고요. 같이 가보실래요?”
찬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한 어느 날, 강레오 셰프가 종가행을 서두른다. 서양요리부터 우리나라 궁중음식까지 어지간한 음식은 다 안다고 자부하는 강 셰프다. 그런데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종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빨리 가보자고 한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민속마을에 있는 예안 이씨 문정공파 종가다.
외암리민속마을은 약 500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양반가옥과 서민가옥 등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한옥들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예안 이씨 문정공파 종택은 이 마을 한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때마침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굵은 빗줄기에 혹여 손님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우산을 받쳐들고 대문 앞까지 최황규 종부(76)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들 와요. 비 다 맞겠네. 빨리 마루로 올라와요.”
벌써부터 손님을 기다린 듯 마루에 놓인 작은 소반에는 소박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안주로 올라온 것은 매화모양으로 오려낸 오징어, 뽕잎부각, 다시마부각,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이었다.
봄기운 간직한 ‘참죽순고추장절임’
“이게 참죽순으로 만든 음식인가요?”
드디어 만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강 셰프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종부가 답한다.
“저기 저 마당에 참죽나무 보이죠? 5월이면 저 나무에 순이 올라오거든. 보드라운 첫순을 따다가 바로 데쳐서 나물을 해먹는데 두번째 순은 좀 세서 나물로 먹기가 나빠요. 그래서 그 두번째 순은 고추장을 발라서 말리는 거지.”
데친 참죽순에 고추장양념을 발라 바짝 말린 뒤 잘 갈무리해뒀다가 일년 내내 꺼내 먹는단다. 오늘은 강 셰프에게 보여주려고 술상에 올렸지만 대개는 밥반찬으로 올린다고. 짭짤하면서 달달한 게 한개만 있어도 밥 한공기는 뚝딱 해치울 만큼 맛난 밥도둑이란다.
“맛있는데요! 참죽순 말고 다른 나물에 응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음식 이름이 뭐냐고 강 셰프가 묻자 종부가 곤란한 듯 웃는다. 이 댁에서는 워낙 흔하게 해먹던 음식이라 딱히 다른 이름을 붙여서 불러본 적이 없단다.
“그럼 이름 하나 붙여줘야 할 것 같은데요. 장아찌도 아니고 절임이라고 해야 하나? 참죽순고추장절임이요.”
밥도 없이 참죽순 하나를 뚝딱 먹어치운 강 셰프가 여세를 몰아 종가에서 먹는 다른 특별한 음식은 없는지 묻는다.
“특별한 음식? 글쎄, 생태김치나 조기김치 같은 거 말해주면 되려나?”
손님이 많을 때는 온종일 부엌에서 나오지도 못했다는 종부는 손님치레를 위해 김장도 많이 해야 했다. 양도 많았지만 종류도 많아서 동치미김치 두독, 총각감치 두독, 짠무김치, 배추김치 등 그렇게 김치로 항아리 열독을 채웠다.
“그중 항아리 하나는 생태김치로, 또 하나는 조기김치로 채웠어요. 만드는 법은 간단해요. 일단 김장을 한 뒤에 잘 손질하고 토막내 소금·고춧가루에 버무린 생태를 김치 사이사이에 켜켜이 넣어주면 생태김치가 되지. 조기김치는 조기젓의 젓국물을 따라낸 뒤 남은 조기를 김치양념에 섞어서 배추를 버무리면 돼요.”
귀한 음식에만 썼던 그늘간장
이런저런 종가음식 이야기를 하다보니 결국 장 이야기에 도달했다. 음식맛은 장맛이라고, 종가의 음식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다.
“우리집에서는 특별한 장을 써요. 그늘간장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그늘에 두고 쓴다고 해서 그늘간장이지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이댁에서도 음력 정월이면 지난가을에 만들어뒀던 메주로 장을 담근다. 정월에 담근 장은 두어달 지난 뒤 간장과 된장으로 가르는데 그늘간장은 이때 탄생한다고.
“장을 가르고 나면 간장을 한단지 따로 떠서 끓인 뒤 부엌 안 그늘에 가져다 둬요. 나머지 간장은 장독대에서 햇볕 쪼이며 묵히는데 그늘간장은 지붕 아래 그늘에 두고 묵히는 거지.”
선선한 그늘에서 천천히 묵혀서인지 그늘간장은 일반 간장에 비해 맛이 순하고 부드럽단다. 귀한 만큼 제사음식 같은 귀한 음식을 만들 때만 사용한다.
“육회를 할 때도 그늘간장을 쓰면 맛이 달라요. 쇠고기 우둔살의 힘줄을 다 제거하고 나서 곱게 다진 뒤 그늘간장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거지. 마늘·설탕·참기름을 넣고 버무리면 정말 맛있어요.”
끝없이 이어지던 음식 이야기가 종내에는 술에 달했다. 그러고보니 이댁 종부는 연잎을 넣고 빚는 연엽주 제조 기술을 보유한 충남무형문화재다.
“이게 그 유명한 연엽주인가요? 한번 맛봐도 되죠?”
종부가 따라놓은 연엽주를 입에 머금고 잠시 음미하던 강 셰프가 감상을 내놓는다.
“상큼하고 개운하네요. 누룩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깔끔하고요. 더울 때 시원하게 마시면 좋을 술이에요.”
후한 평을 한 뒤 연엽주 한잔을 훌쩍 마신 강 셰프가 한마디 더 보탠다.
“연엽주도 마셨겠다, 지붕에서 빗물도 떨어지겠다, 대청마루에 누워서 낮잠 한숨 자면 딱 좋겠다.”
아산=이상희, 사진=김덕영 기자
최황규 종부의 손맛
밥도둑 ‘참죽순고추장절임’
강레오 셰프가 ‘참죽순고추장절임’이라고 이름 붙인 이 음식을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두번째 돋아난 참죽순을 따서 한번 데친 뒤 말려서 고추장양념을 바른다. 고추장양념은 고추장에 파·마늘·설탕(과일청)·들기름·깨소금을 넣고 만든다. 고추장양념을 바른 참죽순은 햇볕에 바삭하게 말린 뒤 공기가 닿지 않게 잘 포장해서 그늘진 곳에 보관했다가 꺼내서 바로 먹으면 된다.
도전!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
순한 양념으로 버무린 ‘육회’
곱게 다져서 만드는 최황규 종부의 육회와 달리 강 셰프는 쇠고기 우둔살을 가늘게 채 썰어서 육회를 만들었다. 종부의 그늘간장이 없으니 대신 양념에 달걀흰자를 섞어서 맛을 순하게 했다. 보기 좋은 떡을 완성하기 위해 육회 위에 등골을 얇게 저며서 얹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우둔살·등골의 식감과 간을 한 듯 안한 듯 순한 양념맛이 잘 어우러진다고.
예안 이씨 문정공파 종가는
이사종의 5대손 외암의 후손
외암리 입향조(入鄕祖)인 예안 이씨 이사종의 5대손 외암 이간(1677~1737년)의 후손이다. 외암 이간이 왕으로부터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써 문정공파가 됐다. 현재 이득선·최황규 종손 부부가 고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고택은 외암의 6대손으로 조선시대 말기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이라 해서 참판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