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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
(김인환 목사)
(룻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생각해 볼 이야기 ¶
누군가 저에게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여자라는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여자와 말이 잘 통하세요? 이외수씨가 이런 책을 펴냈습니다.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이 시대의 작가도 알 수 없는 존재, 바로 여자입니다. 이외수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백 번 다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만약 그대가 남자라면, 그리고 한 여자와의 사랑에 승리할 목적으로 여자를 탐구하기 시작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충언해 주고 싶다. 여자는 결코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부디 탐구하지 말고 그저 모르는 상태로 무조건 사랑하라. 무조건 사랑하라. 사랑이 그대의 인생을 눈부시게 하리라
- 눈부신 인생 살기 원하세요? 여자를 사랑하세요. 아멘이 안 나오시네요? 최근 저는 한 여자에게 무려 육 개월 간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전부터 첫 눈에 반해 버린 여자입니다. 세은 엄마를 만나기 전부터 알던 여자인데 사실 결혼 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홀로 된 과부입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본문에 소개된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
성경 속의 진리 찾기
- 오늘부터 우리는 잠시 사도행전을 접어 두고 약 두 세 날 남짓 룻기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로 인해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룻기보다 좋은 책은 없으니까요? - 자 룻기가 어떤 책입니까? 4장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룻기는 혼돈과 불순종으로 인해 희망이 사라진 사사시대,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신앙으로 새로운 희망을 열어간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룻기를 통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희망을 써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룻은 어떤 여인이기에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망가진 사사시대에 아름다운 희망이 빛이 될 수 있었을까요? 본문 4절 보세요.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암흑의 시대에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 오늘 본문은 뜻하지 않은 인생의 흉년을 만난 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흉년으로 인해 피할 길을 찾았는데 도리어 더 큰 고난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나오미라는 여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은 거예요. 얼마나 살려고 몸부림 쳤을까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을 모압여인에게 장가 드렸는데 두 아들 다 죽고 만 것입니다. 과부 시어머니와 과부 며느리들만 남은 것이죠.
-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네 희망이 있습니다. 아니 무슨 희망이요? 지금도 과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남편을 다 잃은 세 과부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룻기가 그것을 증언하거든요. 이렇게 피눈물 나는 이 가정의 이야기가 기록된 룻기가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추수와 출생의 기쁨으로 마무리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속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피눈물 나는, 그런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룻기의 여정을 함께 따라간다면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우리의 가정을, 아니 우리의 인생을 행복한 여정으로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희망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떻게 희망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진리 찾기Ⅰ : 상황에 흔들려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 본문 1절 보세요.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그곳은 바로 약속의 땅,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입니다. 유다란 “기쁨”이란 뜻이고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입니다. 에브랏이란 베들레헴의 옛이름으로 “수확이 많은 집”이란 뜻입니다.
- 무슨 말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수확이 많아 늘 먹을 것이 풍성한 떡집, 그래서 늘 기쁨이 가득할 것만 같았던 땅, 바로 그 땅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는 흉년이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고난 끝, 행복 시작”이란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쁜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 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예수를 정말 잘 믿었는데 흉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 그 고난을 이해하실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이해는커녕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망에 빠지고 말 거예요.
- 본문에 소개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아세요? 그 의미는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참 귀한 사람 아니에요? 사사시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했던 타락의 시대,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시대. 그런 시대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지만 믿음으로만 버틸 수 없는 흉년이 다가왔습니다. 결코 흉년이 들 것 같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흉년이 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버텼을 것입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간절히 새벽을 깨우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 그런데 상황은 끔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때 계속 기도할 수 있어요? 우리는 종종 어떻게 반응합니까? -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이지만 이런 예화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주일날 등반하다가 실족하여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 누구 다른 사람 없어요.”
- 그래요. 기도해도 안될 때 우리는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방법이 아닌 나름대로의 방법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 엘리멜렉 역시 그랬습니다. 주변을 바라보니 모압 땅은 살만했습니다. 양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흉년을 피하려고 가족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잠시 이사를 갔습니다. 아주 이사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잠시 거류하려고 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임시 체류를 하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모압 땅이 어떤 땅이에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땅입니다. 모압 족속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 보세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왜 하나님께서 모압을 이렇게까지 미워하신 것일까요?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그의 두 딸이 아비에게 술을 먹여 동침하여 낳은 아들 중 하나입니다. 그 뒤 모압 후손들은 계속 그 땅에 머물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할 때 방해를 해서 이스라엘과 원수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 땅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간 거에요. 왜요? 모압이 희망의 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하지만 그 땅은 희망의 땅이 아니라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멸망의 땅이었요. 엘리멜렉과 사랑하는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죽었어요.
-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때 왜 사람들이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황에 흔들려 믿음의 자리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상황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믿음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희망은 다시 찾아 올 것입니다.
Ⅱ. 한 발 더 나아가서 희망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떻게 희망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진리 찾기Ⅱ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황에 쫓겨 믿음의 자리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이 그랬습니다. 살길을 찾아 모압 땅으로 갔지만 그것은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결국 잠시 모압 지방에서 입에 풀칠을 하며 살던 그들에게 더 큰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본문 3절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 뭐라고요?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잠시 우거하려고 왔던 땅, 희망을 찾아왔던 모압에서 사랑하는 남편 엘리멜렉이 죽 것입니다. 나오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나오미와 그의 가정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성경은 나오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거예요. 왜냐하면 아직 나오미에게는 아들들이 남아 있었거든요. 사실 지금도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그 당시 과부로, 그것도 이방인의 땅에서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어려움이었을까요?
- 하지만 나오미는 사랑하는 두 아들, 그 아들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해 장가를 들였습니다. 새로운 가정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들들을 의지하면서 아니 아들들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들들이 장가가는 날 얼마나 기뻤을까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시 희망이 찾아 온 거예요.
- 그러나 아세요? 인간적인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을 의지해 보신 적이 있나요? 자녀를 바라보면서 힘든 세월을 견디어 보신 적이 있나요? 누군가를 의지하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해 보신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떠셨습니까? 잠시 힘이 되었겠지만 결국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마음의 더 큰 상처만 남지는 않으셨어요?
- 나오미도 그랬습니다. 한 십년 즈음은 별탈 없이 잘 지냈어요. 남편이 없는 외로움을 아들과 며느리들을 통해서 위로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본문 5절 보세요.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상처와 외로움과 아픔으로 얼룩진 과부에게 있는 두 아들, 그 희망이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희망도 붙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아들은 나오미의 마지막 희망이었거든요.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들어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더 힘들지 않으세요. 바뀌지 않는 아이들을 혼내고 나서 무기력한 자신을 더 자책하지는 않으시나요? 아이들이 죽은 것도 아닌 데 우리는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나오미의 두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어떻게 살 수 있어요? 무슨 힘으로 살아야합니까?
- 하지만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은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깊은 절망의 벼랑 끝에 이르렀을 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를 맞으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 아래에 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인생의 모든 희망이 사라져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소망이 끊어져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최후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모든 소망과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우리의 희망 이신 하나님,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아멘!
Ⅲ. 마지막으로 희망이 사라질 때 어떻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진리 찾기 Ⅲ :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 두 아들마저 다 죽었습니다. 모든 인간적 희망이 다 끊어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나오미 자신과 과부가 된 두 며느리뿐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절망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한 아들도 아니고 두 아들 모두 죽었습니다. 아마 나오미는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갈 의미를 상실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희망이 넘치는 상황이라는 걸 아세요? 본문 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뭐가 보이세요?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가 보이세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보이세요? 무엇이 보이십니까? 희망이 남았다는 단어가 보이지 않으세요.
- 안 보인다고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세요. 무엇이 남았습니까? 여인들이 남았다구요 아니요. 여인들만 남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세요. 뭐가 남았어요? 절망이 남았어요? 죽을 일만 남았어요? 아니에요. 절망이 남은 것이 아니라 희망이 남아 있는 거예요.
- 본문을 잘 읽어보세요. 강조하고 있는 단어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남았더라”라는 단어입니다. 아니 뭐가 남았습니까? 남기는요? 남았다면 이제 아무 소망도 희망도 없는 나오미와 두 과부 며느리만 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 도대체 뭐가 남은 거에요? 뭐가 남았길래 오늘 본문은 이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요. 본문은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차례가 남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남은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남은 거예요.
-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붙잡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분은 희망을 갖고 우리의 현장을 찾아오십니다.
- 그 희망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그 다음 구절입니다. 룻기 1장 6절 보세요. 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까?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뭐라고요? 주께서 누구를 돌보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주께서 마침내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적 소망과 희망이 끊어질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인간이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지할 때 그것을 끊으시고 거기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써 가십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엘리멜렉처럼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름은 갖고 있지만 엘리멜렉처럼 믿음의 자리를 떠난 채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고 상황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로인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 그러기에 희망을 찾고 싶다면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믿음의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왕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낙심과 절망에 빠진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를 새로운 희망으로 안내하게 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갖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도전하는 이야기
윌 보웬(Wili Bowen)의 “불평 없이 살아보기”란 책에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콘웨이 외곽에 있는 와카모 강 위를 지나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던 한 남자가 이상한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지저분한 마분지로 ‘행복하면 경적을 울리세요.’라고 만들어진 표지판이었습니다. “행복은 무슨! 도대체 행복이 뭔데?”
- 쾌락은 알고 있었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던 그 남자는 몇 주 후 다시 가족과 함께 그 길을 지나가다 자신도 모르게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러자 함께 타고 있었던 아내가 묻습니다. “갑자기 왜 그래요? 길에 뭐가 있었나요?” “아니, 길가에 ‘행복하면 경적을 울리세요!’란 표지가 있어서‘ 그러자 이 말을 듣던 4살짜리 딸 리아가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길을 지나치는 데 딸이 소리를 칩니다. ‘경적을 울려요. 아빠, 경적을 울려요!’
- 그때까지도 가족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은 잊어버리고 다음날 나를 기다리는 많은 일을 생각하면서 피곤함과 짜증, 심지어는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던 남자는 전혀 행복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딸아이를 즐겁게 해주려고 경적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잠시나마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집으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오후, 운전 중에 리아와 얘기를 하면서 차선을 바꾸려다 실수로 다른 차의 진행을 방해했어요. 그 차가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못 봤던 거죠. 하마터면 그 차와 부딪힐 뻔했어요. 잔뜩 화가 난 그 운전자는 우리 차 옆으로 따라와서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경적을 울렸어요.” “그런데 그게 뭐가 재미있어?” “그 사람이 경적을 누르자, 리아가 그 사람을 가리키며. ‘엄마 저 사람은 행복해!’라고 말하잖아요.”
- 아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시각을 갖고 있는가. 그 표지판의 경험으로 인해 그의 딸아이에게 경적은 오직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었습니다. - 당시 보험을 하던 그 남자는 표지판을 세운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그 표지판을 세운 사람은 고등학교 야구 코치였습니다. 왜 표지판을 세웠을까? 아내와 함께 그곳 해변에서 행복하게 살던 야구 코치 가정에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코치의 아내가 갑자기 병들어 살 날이 길어야 6개월밖에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충격과 분노, 그들은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병원 침대를 집으로 옮겼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어느 날 집 계단에 앉아 있던 코치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였던 그 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아내는 죽어가고 있지만 행복은 그녀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 그래서 표지판을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차 안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그 행복한 순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 그러자 그날부터 여기저기서 경적소리가 울립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아내가 왜 경적소리가 울리는 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 경적소리는 더 자주 들려오면서 놀랍게도 그 여인을 행복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6개월이 아닌 1년이 넘도록 그 행복한 순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윌 보웬은 말합니다. “불평 없이 살기 위해서는 당신이 긍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을 도와주고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그 상황에서 좋을 점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이 도전을 그만두고 싶을 때 당신을 격려하고 당신이 이 도전을 완수 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지지자가 필요하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불평 없이 사는 것에만 적용되는 말일까요? 아니요.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인생의 흉년으로 인해 소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은 아닐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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