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8일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58,1-9ㄴ
복음 마태오 복음 9,14-15
◈ [서울]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고
구름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평화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꽃은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새는 둥지 하나에 만족하기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구름은 자신의 틀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늘은 모든 것을 품어 주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 있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회담이 무산되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은 크고, 주고자 하는 것은 작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를까?’라는 말도 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미국이 북한에 대한 재재 완화의
길을 모색한다면 앞으로의 대화는 동상동몽(同床同夢)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합이라는 꿈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이란 말도 있습니다. 겉으로 하는 말과 속의
마음이 다른 경우를 이야기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이는 표리부동입니다. 동업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면 이것도 표리부동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다면, 약속한 것을 꼭 지킨다면 표리불이(表裏不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겉은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의 고통을 도와주지 않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식을 한다고 하면서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는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식을 하면서 삶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식을
하면서 악행, 죄악, 다툼, 못된 주먹질, 불의한 결박, 억압, 모든
멍에를 끊어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식을 하면서 자신의 것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덮어 주고, 도움을 구하는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단식이 표리불이(表裏不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느냐
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신심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신심행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신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혜를 청하며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배부른 눈, 배고픈 눈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배부른 눈, 배고픈 눈>
복음: 마태오 9,14-15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에서 나온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콘서트
공연장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의 공연계획이
잡혔습니다. 9만석이 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스타디움을
방탄소년단이 다 채울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티켓팅 단 90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은 전 세계 어디든 가장 큰 공연장에서 매진을 이루어낼
수 있는 세계 몇 안 되는 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밴드 뒤에는 그들을 키워낸 프로듀서 방시혁이란 인물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큰 꿈을 품고 차곡차곡
실행하여 이런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대
졸업식에서 했던 방시혁의 축사는 이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습니다.
방시혁은 애초에 꿈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꿈이 없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지만 가족의 바램대로 서울대 법대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위태위태하여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금 낮은 ‘미학학과’에 지원하게 됩니다. 별 생각 없이
지원한 학과였는데 그 어려운 수업이 매우 재미있어 음악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그때 즐기며 사는 스타일
같습니다.
그러면서 왜 다시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대학을 졸업하고 박진영과 함께 제이와이피(JYP)를
설립합니다. 그러다 ‘빅히트’라는 지금의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독립합니다. 당시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SNS나
유튜브를 통하여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팬들과 소통하게 하였고
그것이 큰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방시혁이란 프로듀서가 계획하여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다보니 그냥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시혁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앞으로도 꿈은 가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게 된 비결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을 방시혁 자신은 바로 ‘분노’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음악이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 분노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그럭저럭 하려는 연습생들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아마도
JYP에서 뛰쳐나온 것도 그런 불만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무엇을 먹으려고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배가 고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분노가 그의 힘이었고 배고픔이 그의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고파지기 위해서입니다.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짐승의 눈을 보면 잘
압니다. 배부른 짐승의 졸린 눈과 배고픈 짐승의 매서운 눈초리는 그
짐승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지 예상하게 합니다. 배가 고프면
인생이 치열해집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단식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배부른 사람과 배고픈 사람이 차이가 납니다.
배고프고 박해받을 때의 신앙의 자세와 차만 있으면 언제든 성당에
갈 수 있는 지금의 신앙의 자세가 같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은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무뎌져있고 미지근해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고플 때의 신앙이 사라졌기에 미사에 나오지 않고 선교도 잘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배부른 짐승은 잠만 자기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갓 혼인을 한 신부가 어떤 이에게 신랑을 빼앗겼다면 밥 생각이
날까요? 단식은 이런 목마름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유학시절 신학생 때 무언지 모를 배고픔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사제가 되고 싶은 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새벽 4시에 혼자
일어나서 성당에서 기도했습니다. 졸지 않으려 서서 기도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하루 한 끼 먹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체중도 지금보다 20kg 덜 나갔습니다.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제가 되니 그런 갈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먹고 마시다보니 어떤 때는 배가 고픈 것이 무엇인지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배 좀 고파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도 있었습니다.
배고픔이 없으면 열정도 없고 열정이 없으면 그냥 시간만 흘러갑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방시혁의 분노는
아무래도 자신의 인생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 분노가 그
근저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지나버리는 오늘 하루에 분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배고픔을 위해 단식을 해 봅시다.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는 초식동물의 두려운 눈 대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하이에나의 눈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흐리멍덩한
눈을 날카롭게 새로 장착하라고 기회를 주는 시기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마태 9,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마태 9, 15)
신랑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단식은 사순을 충실하게 지내려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인 삶의 실천입니다.
실천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단식입니다.
자기입장에서 벗어나 주님을 만나는 것이 단식의 본질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조차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이 단식의 마음입니다.
스스로 응답하고 스스로 선택한 우리의 단식입니다.
단식이 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생명은 구체적인 실천을 필요로합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단식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단식은 회개를 향하고 회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향합니다.
신랑을 되찾는 은총의 단식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참된 단식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막
하나를 걷어줄 것입니다!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참된 단식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막 하나를 걷어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 시기에 수행해야 하는 과제 중에 하나인
단식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제 일천한 체험을 돌아보니, 단식에는
동기나 목적성에 따라 여러 차원의 단식으로 분류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담당 의료진들은 제 침대 앞에
‘절대 금식’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았습니다. 치료를 위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주일 간 단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단단히 마음 먹고 한달씩 단식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관공서 앞에 천막을 치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공공연하게 단식 투쟁을 펼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의 극심한 고통, 죽음 앞에 연대나 애도의 표현으로
단식을 합니다.
다시 맞은 사순 시기, 단식에 담겨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단지 교회 규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단식이 아니라, ‘왜 단식을 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단식에
참여할 때, 우리의 단식이 보다 차원 높은 단식, 주님 마음에 드는
단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유다교에서는 일년에 두 번, 속죄의 날과 예루살렘이 파괴된 날에
단식을 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에 큰 강조점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단식의
끝판왕으로, 밥 먹듯이 단식했습니다. 규정된 날 이외에도 일주일에
두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평소 자발적인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메시아로서 사람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시는 이
구원의 시기는 혼인잔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고, 질좋은 포도주가 즐비한데, 단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단식과 고행 대신, 미리 앞당겨진 하늘 나라를
찬양과 기쁨으로 즐겨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그렇지만 조만간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실텐데, 그때부터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 단식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으로 인한 단식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단식입니다.
더 나아가서 참된 단식은 악행을 중단하고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참된 단식은 더 큰 것, 영적인 삶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작은 것,
지나가는 것, 이 세상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참된 단식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는 그 무엇을
치워버리는 일입니다.
참된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극복하고 지배함을 의미합니다. 참된
단식은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참된 단식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장막 하나를 걷어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은총에 더 민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단식은 우리를 괴롭히는 갖은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며
하느님 나라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외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본질을 가리지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9,14-15)
단식은 왜 하나요?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인의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법이나 규정 안에 녹아있는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을 흐리는
모든 벽을 허물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3월 8일 (금) - 아름다운 것은 헛되다
오늘은 ‘아름다운 것은 헛되다’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31장 30절 말씀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외모를 많이 가꿉니다. 특히 남자들은 힘, 여자들은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높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남자의
힘도 여성의 아름다움도 오늘 말씀에서는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라는 존재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결코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을 나타내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탄생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또 그 약속대로 우리의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우리 기독교의 원리가 분명하고 확실한데 말씀에
순종해야하는 성도들조차 예배드릴 때에나 봉사 할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외에는 걸핏하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우쭐함이 아차 하는
순간 고개를 쳐들고 나를 좀 봐달라고 소리들을 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오늘도 곱고 아름답게 해서
어깨에 힘을 주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더 높여 하나님께 칭찬받는 성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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