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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정하신 날
말 4:1-6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 4:1-6 /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의 분노가 횃불처럼 타오를 날이 온다. 그날에는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나를 멸시한 자들이 모두 검불처럼 타버릴 것이다. 그날에는 가지와 뿌리도 남기지 않고 태우는 불꽃처럼, 그들을 말끔히 태울 것이다. 2)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며 산 너희에게는 그날에 의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의 의로운 생활이 밝혀질 것이다. 그날에는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햇빛이 비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오랫동안 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다가 초원으로 풀려 나온 송아지들처럼 기뻐서 뛸 것이다.' 3)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나가서 심판하는 날에는 너희가 악인들을 모두 짓밟을 것이다. 너희는 내게 반항한 그들을 땅바닥에 흩어진 재처럼 밟고 다닐 것이다.' 4) [결론]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여라! 내가 호렙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하여 그에게 전해 준 그 계명과 규정들을 실천하여라!' 5)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온 세상을 심판하는 그 무섭고 위대한 날이 오기 전에, 보라, 내가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겠다. 6) 그러면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려주고,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로 돌려줄 것이다. 그가 부모와 자녀들이 화목하도록 가르쳐주어, 내가 가서 심판할 때에 온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논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던 말라기는 마지막으로 심판의 날에 임할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1-3) 악인의 마지막 모습이 용광로 불 앞에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1). 용광로는 철을 녹이는 강력한 불입니다. 지푸라기가 견딜 수 있는 불이 아닙니다. 용광로 불로 표현된 하나님의 강력한 진노는 악한 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인데 가지와 뿌리까지 태워 버릴 것입니다(1). 악인의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심판이 의인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2). 심판의 날이 악인들에게는 두려움과 파멸의 날이 될 것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공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는 것은 그날에 의인들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치료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2). 이로 인하여 심판의 날에 의인들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뛸 것입니다(2). 악인들의 압제 아래서 고통을 당하던 의인들은 심판의 날에 역전이 됩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3). 이 땅에서 세상이 이기는 것 같고, 때로는 우리가 초라해 보일지라도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속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하님의 은혜와 자비 속에 있습니다. 다만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된 줄을 모를 뿐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4-6) 말라기는 모세의 법을 기억하라 말합니다(4). 말라기 이후에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5). 엘리야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말라기의 예언을 끝으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는 중단됩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아들이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권고를 듣지 않는 자들에게는 크고 두려운 심판이 미칠 것입니다.
적용: 지금은 악인이 형통해 보일지라도 심판의 날에는 악인과 의인이 역전됩니다. 오늘 당신은 심판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과 멸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헛된 것을 부러워할 때도 있고 그들을 따라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그날에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남을 믿어야 합니다.
< 설 교 >
공의로운 해 The Sun of Righteousness
말라기 Malachi 4:1-6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 (고후 2 Co 4:6).
성경의 맨 처음 책이 창세기죠. 창세기를 펴면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저는 상당히 오랜 동안 이 1절 말씀을 창조 전체를 아우르는 서론 겸 결론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세요. 1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죠? 2절에 보면 그 땅의 형태가 혼돈하고 공허하고 깊은 어둠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면”이라는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그러니까 1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이미 물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3절에 보면 “빛이 있으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입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은 빛을 보기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태양이 지음을 받지 않았지만, 빛을 낮이라 칭하셨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이 지났습니다.
자, 그러면 1절부터 5절 전체까지가 창조의 첫째 날에 해당되는 거죠? 그러면 첫날에 지으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봅시다. 1절에서 천지, 즉 하늘과 땅, 2절에 보니 물, 3절에서 빛, 4절에서 빛과 어둠을 구분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공기죠. 땅에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흙이죠. 그리고 물과 빛입니다. 공기, 흙, 물, 빛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체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생명체는 작은 바이러스와 단세포 생명체로부터 인간까지 다 이 공기, 흙, 물, 빛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광합성을 하는 것이 다른 생명체를 살리는 생산자 역할을 합니다. 식물의 광합성이 무엇이죠? 흙에서 빨아드린 물과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이용하여 태양 빛 속의 열에너지를 화학 에너지 형태인 포도당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광합성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공기와 물은 광합성의 조건을 이루고, 광합성의 진정한 목적은 빛의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 형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광합성을 하는 생물은 이렇게 생산한 포도당을 다시 세포 안에서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남는 포도당은 주로 녹말의 형태로 바꾸어 저장하죠.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모두 다 이 광합성을 하는 생명체에 의존해서 살거나, 그렇게 의존하는 생명체에 다시 의존해서 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채식, 육식, 잡식 등으로 설명할 수 있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물질과 생명의 주인이시지만, 또한 영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열면 빛이 단지 육체적 생명의 근본 에너지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망하는 사람들을 복음의 빛을 받을 수 없도록 가리어졌습니다. 4절을 보면 그들 뒤에는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창조되기 이전에 혼돈, 공허, 흑암만이 가득한 땅의 상태와 같죠. 그들에게는 광채가 비치지 못합니다. 어떤 광채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입니다. 그러나 6절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의 비췸을 받은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만이 있던 우리 마음, 이 세상 신이 가로막았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라기 4장에는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공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힘을 얻고, 고침을 받고 삽니다.
1.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1 "Surely the day is coming; it will burn like a furnace. All the arrogant and evildoer will be stubble, and that day that is coming will set them on fire," says the LORD Almighty. "Not a root or a branch will be left to them.
불은 열과 빛을 내는 광원이죠.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듯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용광로 불과 같은 심판을 내리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지푸라기처럼 탈 것입니다. 그들이 나무라 하더라도 그 뿌리와 가지까지 남김이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열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용광로 불 정도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심판은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in the fiery lake of burning suffer)라고 하였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 빛과 열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용광로 불, 더 나아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만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 교만한 사람이며, 누가 악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이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2절 말씀을 봅시다.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2 But for you who revere my name,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And you will go out and leap like calves released from the stall.
2절 말씀은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이 약속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 (for you who revere my name)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아야 하며,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주시는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전체를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Revere God and you will live).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 나도 피조물이기에 겸비할 수 있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때로는 교만하고, 때로는 악을 행하고, 때로는 불의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악에 빠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시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가 되고 병이 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먼 이웃에게까지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근본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용서와 회복과 치유를 간구합니다. 그러면 공의로운 태양이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에게 떠오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제압되었던 우리 마음에 의로우신 우리 주님이 태양처럼 떠오르십니다. 그러면 그 태양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빛의 날개가 살처럼 우리 마음에 비췹니다. 그리고 그 빛이 우리의 상한 마음, 상한 몸을 고치십니다. 내 마음의 상처, 내 이웃의 상처가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누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립니다.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모습을 말라기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And you will go out and leap like calves released from the stall)라고 하셨습니다. 송아지도 병이 납니다. 외양간에서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하였을 때, 넘치는 활력과 기쁨으로 대지를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주님 주시는 힘과 새롭게 하심으로 하루하루를 누리게 됩니다.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3 Then you will trample down the wicked; they will be ashes under the soles of your feet on the day when I do these things," says the LORD Almighty.
더 나아가 예언자 말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 동참할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하여 악인은 우리 발바닥 밑의 재와 같이 사그라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심판을 하는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어야 할까요?
2.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Remember the law of my servant Moses, the decrees and laws” (4)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4 “Remember the law of my servant Moses, the decrees and laws I gave him at Horeb for all Israel.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왕국을 만드시며, 우리를 그 왕국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 왕국 백성이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3. “I will send you the prophet Elijah”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5 "See, I will send you the prophet Elijah before that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comes.
언젠가는 최후의 심판, 영원한 심판의 날이 옵니다. 그 날을 말라기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선과 악, 선인과 악인이 영원히 분리되는 날입니다.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을 볼까요?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악한 세력의 삼위일체인 마귀와 그 짐승과 그 거짓 선지자를 먼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지십니다. 12절을 보세요. 모든 죽은 자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 그 책들은 그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 사람 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들 모두가 둘째 사망, 곧 불 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행위대로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생명책이 있습니다. 이제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If anyone's nam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것이 곧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증거입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믿음을 주시고, 고백할 힘을 주시고, 따를 힘을 주셨기에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됨을 압니다.
이제 21장을 보세요. 이렇게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남편이신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입니다. 3절을 봅시다. 보좌 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조금 더 볼까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어떤 빛으로 인하여 살게 될까요? 23절을 보세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예수님의 빛으로 우리는 영원토록 삽니다.
그러나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언제입니까?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의 날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침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최초로 증언한 사람이 바로 이 침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감옥에 있습니다. 아마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의 구원을 기다리다 지치고 실망하고 의심과 회의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분명히 메시아이신 증거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fall away on account of me). 무슨 말씀이죠? “내가 네가 원하는 메시아의 상이 아니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지 말라. 나는 네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아, 내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 메시아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을 향하여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바로 10절에서 그 침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An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he is the Elijah who was to come). 무슨 말씀이죠? 어떤 사람은 침례 요한을 말라기에서 오리라고 예언한 엘리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나 그럼에도 바로 침례 요한이 바로 말라기를 통해서 예고하셨던 그 엘리야라고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오리라 약속되었고, 그래서 엘리야의 심정과 역할을 하였던 침례 요한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말라기 4:6을 다시 봅시다.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6 He will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 their children, and the hearts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or else I will come and strike the land with a course."
우리 주님의 길을 예비함으로 엘리야의 사역을 감당하는 침례 요한의 사역의 핵심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것입니다. 원상으로 복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늘 우리를 돌이키라고,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더 나아가 사람과의 바른 관계, 가족과의 바른 관계, 성도와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바른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복이 아닌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결론 Conclusion: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마 Mat 5:16).
의로우신 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도우심으로 빛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또 치유함을 받는 우리는 또한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5:1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 그 빛은 바로 착한 행실이다. 그러면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사는 이유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공의로우신 해, 생명과 능력의 해이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빛과 힘을 받아 착한 마음, 착한 행실로 세상을 환하고 따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주간에도 이렇게 빛이신 주님과 동행함으로 빛을 비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말 4:1-3 / 성흥모 목사
우리 시대에 예수 잘 믿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잘 믿는다는 말은 바르게 믿고 옳게 믿는다는 말이요, 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고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종이었던 사도바울은 그가 섬기던 교회의 성도나 서신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처리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자책할 것을 찾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충성하였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기능적인 면에서는 더 발전하고 유능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라는 직책도 잘 감당하고 장로라는 직책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익숙함이 인격적이고 영성에 있어도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 발전한 것뿐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직무에 충실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전부요, 나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만 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리고, 주님이 원하는 그 귀한 뜻을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이루어드리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실한 자녀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비로소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3:13)라고 하셨으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3:1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가 믿는 것이 따로 놀고, 아는 것이 따로 노는 것 같은데, 이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며, 우리의 행하는 일들이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과 인품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하는 마지막 골인지점, 우리의 푯대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루돌프 R. 오토가 있는데, "성스러운 것"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거룩함과 경외심을 나타내는 철학 용어로서 그는 '누미노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라틴어의 누멘(numen)이란 말을 빌려쓰고 있습니다. 누멘이란 말은 명확한 표상을 갖추지 않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오토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누멘 앞에 서 있는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높이고, 경외하여야 하는데, 이 거룩한 두려움을 "누미노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있어 그는 창조주의 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으며, 무서울 정도의 신비로서, 이 말을 다시 분석하면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전율적인 두려움, 압도적인 권위, 권세를 가진 절대타자로서의 신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은 무슨 뜻이 있으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에 처음에는 무서워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라고 창조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지만, 결코 무서워하라는 말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경외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라고 하는데, 경외 한다,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 앞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높여드리는 것이며, 경건한 자세와 받드는 마음입니다.
*.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성경 도처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복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려고 많은 은혜와 은총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 크신 인자하심이 함께 하십니다.
시34:9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시편31:19에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시33:18-19에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많은 은혜와 은총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3:30하)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영광돌리는 것이 아니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경멸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시하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좋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자랑하시고, 손쉽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면서 경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만을 경외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레위기19:2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잠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노라 하면서 악을 버리지 못하고, 죄악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욥기1:1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면서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고 했습니다. 이런 같은 자랑을 한번 더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식하며 하나님의 얼굴 빛 아래에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온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요, 악에서 떠나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순종하면서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창22:12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독자 이삭을 죽여 제물로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독자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셨고,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려주시려고 하면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조이 도우슨이란 분은 예수전도단 국제 강사의 한 분이신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책을 쓰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하나님께 즉시, 기쁘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조이 도우슨 여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 신실하심, 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보다 수월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하나님께 즉시, 기쁘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외의 것은 다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미적미적하며 뒤늦게 순종하는 것도 불순종이며, 부분적으로 순종하는 것들도 불순종이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대하여 투덜대거나 불평하는 것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면 그를 경외하게 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은 "전쟁의 하나님", "군사령관이신 하나님", "많은 무리의 하나님", "천군천사를 거느리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말라기란 짧은 성경에서만 만군의 여호와라는 명칭이 24회나 나오는 것을 보면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승리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천군천사를 거느리신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자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음만 가지고 습관적으로 모음을 붙여서 언어 소통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음을 붙여 사용하는 것이 일정한 법칙을 가질 필요가 있어서 후대에 점과 선의 모음을 만들어 자음에 붙여서 발음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은 야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의 4자음 "요드, 헤, 와우, 헤" 이것을 신성4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신성4문자는 유대인들이 관습적으로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글만 써놓고 읽지는 않는 글자였습니다. 이 신성4문자를 "야훼"라고 읽어야 합니다. 필사자들이 신성4문자를 기록할 때는 매번 완전히 목욕을 하고 완전히 옷을 갈아입었으며, 문자들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붓을 부러뜨리고 새 붓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십계명 중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제3계명이었습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감히 부르기가 황송하여 후대에 와서는 "아도나이"라고 하여 "나의 주님"이라고 다른 이름으로 읽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경솔하게, 경망하게 부르지 않기 위하여 여간 힘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은 그를 대신하고 있으며, 그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명칭이나 이름 중에 가장 의의가 깊고 중요한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에게도 고유한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부르면 오시고, 또 교제하기 위하여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란 곳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출20:24에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곳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곳에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베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민6:24-26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지키시고, 은혜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정하신 날, 그 날이 오면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이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용광로 불같은 날이 될 것인데, 교만한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인데, 다 불살라지고, 그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주제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죄악의 근본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면서 우리도 거룩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자들, 불신자들을 위해서는 용광로가 준비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는 사실 용광로보다 수천 수만 배나 더 뜨거운 태양이 준비되었는데, 그 태양은 우리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시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공의로운 해는 우리 구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하는 광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의 태양이시기에 주님 앞에는 모든 불의와 부정과 어두움이 물러가고, 참 빛이 되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구원하러 오신 참 빛이십니다.
지금 어려운 역경에 사로잡혀 마치 외양간에 갇힌 송아지 같은 신세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습니까? 외양간은 처음에는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지만, 그곳에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 활동이 부족하여 허약해집니다. 자기를 풀어놓아야 합니다. 자기 억압감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상한 감정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완전히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긍정이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십시오. 마지막 날, 그 날, 우리 주님이 왕으로 오시는 날에 그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악인을 밟을 것입니다. 지금은 악인들이 거만하게 다니지만,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 그들은 성도들의 발바닥 밑에 있는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말라기3:16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해두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가장 아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은 남기지 아니하고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의로운 태양이 떠올라서 우리에게 치료하는 광선으로 비추시고, 우리를 풀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기뻐 뛰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겨울 내내 외양간에 갇혀 있던 송아지가 봄날 따사로운 햇볕에 나와 온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을 상상해보면 우리의 신앙이란 이렇게 기쁘고, 복되고, 신명나는 것입니다.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데, 우리 자유 얻었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상처 입은 성도들을 치료하시기 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도 거룩하게 지내며,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면
말 4:1-4 / 홍문수 목사
12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각 사람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릅니다. 상인들은 성탄절과 연말연시에 대목을 보기 위해 기다립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고 기다립니다. 젊은이들은 연인들이나 친구들과 낭만적인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휴에 여행이라도 하며 즐기기 위해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기다림’이요 ‘헛된 기다림’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단순하고 엄연한 사실을 제쳐놓고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공이 빠진 생일잔치! 주인공을 빼놓고 객꾼들이 모여서 생일잔치를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해괴망측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해괴망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요즘의 성탄절 풍속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데 쳐도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하는데,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신자가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날입니다. 말하자면 복음 전도의 계절이요, 신앙 부흥의 계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직전 4주간을 대강절(待降節, Advent)이라 부르는데,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만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간절히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탄의 은혜를 충만히 받게 됩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그렇습니다! 사모하는 만큼 은혜를 받는 법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다가오는 성탄절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오늘부터 다음 주일, 그리고 성탄절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성탄과 관련된 성경 말씀을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들이 성탄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주는 은혜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말라기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말라기는 구약 성경 마지막 책입니다. 말라기는 B.C. 430년경 활동한 선지자인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을 사모하도록 권고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성탄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 말라기의 예언과 권면 : 메시아(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사모하라
말라기 시대는 한 마디로 암흑기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말라기는 그들을 경책하면서 장차 오실 메시아(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보면 말라기는 마치 캄캄함 밤을 지나 여명이 밝아오듯이 메시아가 강림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 날을 가리켜 ‘여호와의 날’이라 불렀습니다. 그 날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심판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범죄하는 악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그 날에 악인들은 마치 풀무불에 지푸라기가 불살라지는 것 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2절 보면, 예수님의 강림(탄생)을 가리켜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으로 구원하시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이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은 요한복음에서도 언급됩니다.
요3:17~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 라”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시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그 죄로 인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냥 놔두면 죽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밧줄을 던져 줍니다. 그것을 붙잡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그대로 멸망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이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캄캄함 밤중에 간절한 마음으로 새벽을 기다리듯이,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저 너머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탄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게 됩니다.
[2] 의로운 태양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라
2절 다시 보면, 예수님이 의로운 태양으로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광선’이란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빛이란 의미로 광선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히브리어 원어로 ‘마르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단어는 본래 ‘날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중에 이 단어를 날개(wings)라고 번역한 경우가 있습니다. (NIV -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이것은 태양 광선이 마치 새의 날개가 나풀거리듯 비추는 것을 형상화시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것이 마치 새가 날개로 품고 어루만지듯이 치유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성경 다른 곳에도 나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직 땅이 공허하고 흑암 가운데 있어 정형화되지 않았을 때 성령의 창조 역사가 어떠했는지 창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니라” 여기서 운행한다는 단어가 날개를 나풀거리며 공중에 떠다니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날개로 품고 어루만지면서 창조하시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에 나타납니다. 막1:10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나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 육적 치유, 영적 치유, 환경적 치유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광선(빛)을 발하시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성경에서 어둠은 죄, 사망, 질병, 고통 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시는 역사에 관해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 제사장도 예언한 바 있습니다. 눅1:78~7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그러면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하는 광선이 비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긴다고 했습니까? 2절(하) 보면, 신자들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신자들의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3절 보면, 악인에게 승리할 것을 증거합니다. 악인은 신자들의 원수인 죄, 사단, 그리고 세상 등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2절에 나오는 ‘치료(치유)’라는 단어는 구원이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합적으로 치유하십니다. 말하자면 전인 구원 혹은 전인 치유입니다. 이것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육신의 치유 :
물리적으로도 태양 광선은 살균하고 치료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광선은 훨씬 더 강력한 치료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으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 수 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라파(출15:26)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수님을 ‘치료자 예수’ 즉 ‘예수 라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신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예로 들어 봅니다. 막5:25~34 보면 12년 동안 혈류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의 옷자락을 잡는 순간 그분의 능력이 빠져나와 치유되었습니다. 막10:46~52 보면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후에도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면 놀라운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행3:1~10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지내던 사람이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쳤을 때 치유되어 벌떡 일어난 사건이 있습니다.
영국의 육상 선수 에릭 리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24 파리 올림픽 400 미터 달리기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는 본래 100 미터 달리기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주일날과 겹치자 예배를 드려야 된다며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민들의 비난과 원성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평일에 있었던 400 미터 달리기에 출전합니다. 그는 당당하게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면서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간증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몸이 너무 허약했습니다. 한번은 심한 고열로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눈물로 밤새 기도했고 고열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고열은 사라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다리가 마비되어 일어서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매일 다리를 주무르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아이가 일어섰고 한 걸음씩 떼게 됩니다. 조금씩 걷고 뛰고 하더니 마침내 그 다리로 위대한 달리기 선수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모든 질병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질병에서 구원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영혼의 치유 :
물리적인 빛이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수년 전 연대 의대 정신과 교수가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다 우울증과 빛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겨울철에 우울증 증세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혹시 일조량과 관계가 있지 않나 실험을 해 본 것입니다. 겨울철 일조량을 보충하는 의미로 아침에 몇 시간, 저녁 무렵 몇 시간 2,500 룩스의 강렬한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랬더니 3일 만에 우울증 증세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다음에는 빛을 차단했더니 다시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북유럽 지역은 잘 사는 곳이지만 우울증 환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태부족한 일조량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비춰주시는 광선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여리고 세관장이던 삭개오(누가복음 19장)는 로마 정부에 붙어서 돈은 많이 벌고 출세도 했지만 죄의식과 소외감 속에 살았습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유대인들이 삭개오 같은 세리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영혼의 치유를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자기가 그동안 토색한 게 있으면 4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치유 받고 자유를 얻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얼마나 돈에 집착이 강한 사람인데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는 6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극도의 수치심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정오 시간에 우물가로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맨 처음에는 단순히 유대인 남자로 알고 경계하던 그가 대화 중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영혼은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기뻐 뛰며 물동이를 놓고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렇게 피해 다녔던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영혼이 치유 받지 못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광선이 비춰지면 우리 영혼은 생명을 얻고 밝아집니다. 기쁨과 평안, 천국의 확신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이것은 육신의 치유보다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14:3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또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 “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디 이번 성탄절에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영혼의 치유를 받고 평안과 기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③ 환경의 치유 :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 살 동안 아무리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 환경적인 어려 움을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환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승리케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요16:33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환경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이길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실컷 얻어맞고 고문당했지만 한밤중에 일어나 찬미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립니다. 물론 바울이 자결하려는 간수를 구하려고 출옥하지 않지만, 놀라운 기적입니다. 다음 날 천부장이 와서 바울 일행에게 제발 나가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 역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환경을 바꾸어주시는 주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정반대로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심지어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가 이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빌4:11~12 보면, 그가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예수님)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어떤 환경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 로마 당국에 체포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쾌재를 부르며 투옥 명령을 내립니다. “여봐라, 그놈을 독방에 처넣어라” 그러자 옆에 잇던 신하가 만류합니다. “폐하! 그건 아니 되옵니다. 기도교인들은 독방을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런가?” “독방을 조용한 기도실로 여기고 열심히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악당들이 갇힌 방에 집어넣어라.” “그것은 더더욱 아니 되옵니다.악당들을 몽땅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끌어내서 목을 쳐 죽이라!” “폐, 폐하! 그건 정말 정말 아니 되옵니다.” “그건 또 왜 그렇단 말이냐?”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니 되옵니다. 그들은 순교할 때 울지도 않고, 오히려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그리고 다른 놈들이 큰 자극을 받아 더욱 더 기승을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황제는 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부릅니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히 11:38) 어떤 환경도 이겨내는 능력을 가진 대단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성탄절을 기다립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의로운 태양 예수님이 떠오르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님이 떠오르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대강절과 성탄절에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
말 4:1-6 / 곽선희 목사
요새 한참 뜨고 있는 인기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친구” 말입니다. 안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요사이 장안에 “친구”라고 하는 영화가 아주 최고로 인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1981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있었던 일로 이 영화는 시작이 됩니다. 야비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교사가 교단에서 내려와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나 학생의 뺨을 세게 움켜쥐고 나머지 손으로 뺨을 후려갈깁니다. 방금이라도 피가 터질 만큼 그렇게 세게 내려칩니다. “다음 학생”하고 부를 때 도살장에 들어서는 것 같이 움츠리고 벌벌 떠는 학생을 또다시 마구 내려칩니다. 무자비하게. 그러면서 물어봅니다. “느그 아버지 뭐하노?” 학생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회사에 다니십니다.” “이놈아, 상사에게 굽신굽신거려 가면서 돈벌어서 공부시키는데, 이놈아 이 공부 꼴이 이게 뭐야?” 그리고 또 한바탕 먹입니다. 다음 학생에게 또 물어봅니다. “ 느그 아버지 뭐하노?” 움찔움찔하다가 “장의사를 하시는데요.”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합니다. 선생은 또 다시 눈을 부라리면서 말합니다.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염해 가면서 오만 고생하며 벌어서 너 공부시키는데 이놈아 이 성적이 뭐꼬?” 그리고 또 한바탕 먹입니다. 그 학생은 장동건입니다. 그 다음에 유오성이 나타났습니다. 이 학생을 또 놓고 “느그 아버지 뭐하노?” 한참 망설이다가 “건달입니다” 그래요. 움찔 했지만은 또 다시 화가 나서 그대로 먹입니다. 이 매 맞는 학생들이 하나같이 피하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맞습니다만 마음속에서는 반항이 막 불 일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자존심 상관하지 않고 막 짓밟으면서 죽일 고기 다루듯이 이렇게 매질을 하는데 딴에는 학생 잘되라고 하겠지요. 공부 잘하라고 하는 것처럼 되겠지요. 그러나 학생들은 끝까지 반항하고 이 두친구가 나가서 건달이 됩니다. 그 일생이 망가지고 맙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인생은 세상에 나면서 세 가지 복을 타고나야 됩니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닙니다. 첫째, 부모를 잘 만나야 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내가 부모를 선택한 게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어서 세상에 태어났지요. 부모를 잘 만나는 것, 이거 결정적인 축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선생을 잘 만나야 됩니다. 단 한사람의 좋은 선생을 만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단 한사람의 천하의 못된 선생을 만나서 일생이 망가지고 맙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마누라, 남편, 이거 잘못 만나면 큰일납니다. 나는 결혼주례 할때마다 얘기하지만은 황홀경에 있는 청년들이 못 알아듣는 것 같습디다만은 “행복을 찾아 결혼한다만은 너희가 진정으로 사랑하면 천국이다. 오늘 천국에 들어가는 거다.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은 오늘부터 십자가를 지는거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생각하는 곳이 가정이다. 알았느냐?” 잘 모르더라구요.
자, 오늘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역사의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요. 구원받은 성도가 있을 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가정이 구원되겠다는 거죠.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구원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다는 것, 이것이 오늘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문제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많습니다.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죽입니다. 자식을 아예 비틀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것이 사랑이요,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먹고 사람은 사람되는 것이올시다.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게 아니에요. 사랑을 먹고사는 겁니다.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사랑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첫째, 진실입니다. 여러분 정직함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사랑하는 자 앞에는 정직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진실만이 최고의 웅변이요 최고의 교육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앞에 정직하세요. 뭐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요.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속는다는 배신처럼 괴로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만난 바로 이 부모님, 그들의 정직함, 그 진실함만이 가정교육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하없는 이야기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진실한 말만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는 그런 전문적인 서적을 보면은요 그저 다 종합하면 간단합니다. 세 마디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대화는 진실입니다. 진실한 말. 그 다음에는 넓은 가슴으로 수용하는 수용적 자세. 그리고 깊은 이해올시다. 깊이 이해하는 거예요. 그들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요. 그것이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올시다. 진실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진실을 보고 자녀들은 그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올시다.
마음은 곧 겸손입니다. 부모의 교만이 자녀의 허영으로 이어지는 것이올시다. 허영과 허세. 이 나라 경제 정치 문화를 다 망쳐버리고 말았어요. 허세. 자녀들 앞에 겸손합시다. 뭐,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아주 낮추어서 “나는 실패했다. 나는 너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다. 나는 너만큼 그렇게 하지 못했느니라” 해보세요. 아이들은 신바람 나게 공부해요. 그런데 어른들이 자기는 굉장히 잘 한 것처럼 “야 나는 안 그랬다.” 애들이 벌써 어머니 성적표까지 보고 앉았다고요. 멀쩡한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세요? 아주 겸손하게 낮추어서 “나는 이러했느니라. 그러므로 네게 소원하는 것은 이렇게 해다오.” 진실 겸손입니다. 허영이 문제입니다. 부모님의 교만이 문제입니다. 보세요. 최고가 되라고 하고 최고 지향적인 교육을 하면서 그만 최선을 잃어버렸습니다. 최고, 그것이 문제예요.
가끔 우리는 그런 걸 봐요. 우리의 잘못된 풍속인데요. 뭐 한다는 사람, 6개월 한사람 장관 지낸, 6개월밖에 안한 장관인데도, 그 사람 죽을 때까지 장관이라고 불러줘야 좋아한데요. 뭐 별로 잘한 장관도 아닌데, 보니깐. 오히려 제발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불러달라고 한데요. 이게 망조라니까요. 무슨 잘난 과거라고 그걸 간판처럼 생각하고 다닙니까? 그걸 뭐 명함에다가 찍어 가지고 다닙니까. 치워버려. 깨끗하게 치워버리고 Mr. Kim 으로 돌아가세요. 그래야 당신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가정도 삽니다. 나 별거 아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유로울 텐데. 우리 가문이 어떻고, 우리 뼈대가 어떻고. 무슨 대단한 뼈대라고. 이게 바로 이 나라 교육을 망치고 있는 거에요. 최고만 지향을 하고 최선은 없어요. 그래서 최고에 이른 사람은 교만해서 망하고 최고가 되지 못한 사람은 낙제생이기 때문에 절망하고. 다 망합니다. 최선이 뭔지. 내가 사는 처지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뭔지, 행복의 질적 소양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대로 이 처지 이대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얼마든지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최선의 길이 있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런고로 마음은 곧 겸손입니다.
또한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곧 시간을 주는 것이올시다. 기다림의 시간이 사랑을 가름하는 바로메타입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런 재미있는 얘기를 한 번 들은 일이 있어요. 옛날에 상하이 대학에 다닐 때 그 권사님이 어떤 말씀하는데, 어떤 남자가, 뒤에 장로님입니다만은, 그분이 그저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찾아와서 만나려고 합니다. 저 문 앞에 눈이 오는데 서있는걸 보고 그때부터 목욕을 한답니다. 그리고 분장을 하고, 두시간 동안, 이 짓을 하고 내려다보면 아직도 서있데요.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이 “야, 이제 그만하고 나가봐 줘라” 그랬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습니까?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거죠. 기다림의 즐거움, 이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좀 언짢은 일을 보던가 그 단 한시간도 못 참아가지고 발칵 뒤집어 놓는, 이 얄팍한 마음. 이게 바로 사람을 망치는 거예요. 인격을 짓밟는 거예요. 기다려 보세요. 넉넉히 알 수 있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아픈 마음의 치유’ 라고 하는 책을 쓴 저자 론 멜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경험을 그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이 하나가 마음을 아파하고 절망감에 빠질 때, 아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이 아버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아이가 잠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서 옆에 가만히 누워서 아침까지 누워 있었답니다. 아침에 이 아들이 눈을 뜨더니 “아버지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우리는 따라다니면서 “왜 그러냐? 왜 그러냐? 뭐 때문이냐?” 자꾸 상처를 찌르고 앉아있습니다. 가만히 옆에 앉아계세요. 조용하게 누워계세요. 그리고 침묵하세요. 그 기다림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너무 말이 많아요. 말을 통해서 뭘 해결하려고 그래요. 아닙니다. 침묵이라고 하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조용하게 함께하는 그 기다림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이요,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이에요.
또한, 마음이란 곧 믿음입니다. 끝까지 믿어주어야 됩니다. 과거에 대한 것도 믿습니다. 그랬을 거다. 내가 너의 정직함과 진실을 믿는다. 현재를 믿고 그들의 장래를 또 믿어주어야 됩니다. Lesson from the Top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우리말로 “CEO가 되는 길”이라고 번역됩니다. 여기에 세계적인 대표적 CEO 한사람 제네랄 일렉트릭의 잭 웰치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크게 성공한 분입니다.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 라고 하는 분은 아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믿지 않을 때에도 어머니는 믿었고,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때 어머니는 나를 믿었다고.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이 믿음 때문에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곧 믿음입니다. 믿어줍니다. 끝까지 믿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곧 행복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가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빛입니다.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눈빛은 언제나 밝습니다. 그런고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I am so happy because of you.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이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이 말보다 더 감동적인 말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천 마디 보다도 그 말 한마디가 더 좋은 겁니다. “나는 너를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고 하나님의 내 가정에 너를 보내주신 것이 행복하고 너를 볼 때마다 행복하고 너를 위해 수고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나는 행복하다.” 해보세요. 생각해 보세요. 나 때문에 행복하다는 사람, 내가 만나기 좋은 거예요. 나도 행복한 거예요. 그러나 만날 때마다 “너는 왜 태어나 가지고, 이 원수야! 너 때문에 나는 살수가 없다.” 이 어머니를 왜 만나겠어요? 뭐 때문에 이 어머니와 같이 살아야 됩니까, 나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는데. 이게 바로 우리의 문제라구요. 딴에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되요. 사랑이 중생해야 됩니다. 보다 더 진실해야 됩니다. 그건 자기 사랑이지 자식 사랑이 아니에요.
어느 어머니가 정말 실수를 해서 애가 집을 나가버렸어요. 가출을 했는데, 한달 동안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 찾고 보니까 계단 밑에 있는 지하실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하숙을 하고 그리고 살더랍니다. 물어 물어서 그 집에 들어가 보았더니 마침 아들은 없는데 그 방안은 난장판이었고, 그리고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 그래서 어머니가 다 청소를 해놓고, 냉장고를 음식으로 가득 채워놓고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다가 사진 하나를 붙여놓았어요. 그 애 100일 때 찍은 사진. 온 가족이 그 아이 하나 때문에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 100일 사진을 딱 붙여놓고 와버렸어요. 아들이 돌아와서 그 백일 사진을 보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해서 온 식구가 이렇게 좋아한 때가 있었구나. 어머니가 나로 인해 이렇게 행복해 한 때가 있었구나.’ 그는 조용히 짐을 싸가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곧 행복이에요. 너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고 해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이 소중하게 여깁니다”라고 하는 말은 잘못된 말이고, “당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른 고백이라고요. 당신이 너무너무 소중해요. 그런고로 내게 필요한 것이에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피터 드러커의 The Essential Drucker on Individuals 라고 하는 책을 한 권 가지고 가면서 읽었습니다. 그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지금 92세가 된 유명한 저자 피터 드러커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와 자기 아버지 친구와의 대화를 들었대요. 서로 주고받는 말에서 그 아버지 친구라고 하는 분은 조지프라고 하는 분인데, 자기가 보기에도 아버지보다 그 친구되는 분이 더 잘났더래요. 인물도 잘났고, 머리도 좋고, 훌륭해 보이는데 그 친구간에 아버지가 조지프에게 물어보기를 “자네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온 유럽에 모든 처녀들이 흠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 그리고 유명한 승마가, 그리고 정치가, 저술가, 교수, 뭐 이런 사람이 되겠다고 그러니까 아버지 말하기를 “그렇게 될 수 있을 걸세” 하더랍니다. 이제 아버지 친구가 65세가 되었어요. 이제 2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바로 그때쯤 됐을 때 또 다시 서로 만나 가지고 아버지가 그 친구에게 말하더랍니다. “자네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했더니 그때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무 소원도 없고, 내 뜻을 알고 나로 인해서 변화된 사람, 내뜻을 알고 나로 인해서 변화된 사람, 다섯 사람만 있으면 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여러분 나로 인해서 변화된 사람, 나로 인해서 바른 길을 찾은 사람, 내 마음을 이해한 사람 다섯사람만 있으면 그건 성공입니다. 보세요. 돈을 얻었는데 자식을 잃어버렸어요. 출세는 했는데 마누라도 잃어버렸어요. 마음이 다 산산조각이 났어요.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그것이 없어요. 그건 실패올시다.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신다고. 그것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생활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진실한 만남. 거기에 천국이 있습니다. 거기에 성공이 있습니다.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
말 4:1-6 (3:19-24) / 이삼규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의 여섯 번째 설교의 계속입니다. 히브리 성경(맛소렡 사본)은 4장이 없습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 나오는 4장 1-6절 말씀이 히브리 성경에는 3장 19-24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도 역시 히브리 성경을 따라서 3장으로 끝납니다. 4장을 구별한 것은 70인경(LXX)과 벌게이트(Vulgate) 역 등에 의한 영향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어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되고, 아낌을 받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의 편에서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에도 심판을 받을 사람들과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1. 심판을 받을 사람들(1절)
말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극렬히 타는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종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때에는 불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장면은 쉽게 심판 때의 장면인 것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 때에 타는 풀무불 가운데 있게 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교만한자와 악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교만한자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이미 앞 절에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말 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말라기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잘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교만한자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 이런 사람들이 잘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가 비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의 방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름 아닌 교만한 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둘 저들의 방법을 따르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교만하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신앙인으로서 과연 합당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공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시든 그것은 별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의 방법을 배우고 저들의 삶을 모방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의 말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두 가지 사실에 비교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1)초개와 같이
먼저 이들은 초개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개란 지푸라기나 검불을 말합니다. 여러분 마른 검불이나 지푸라기가 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떻던가요? 불 속에 넣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말로입니다.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결국 이렇게 허망하게 다 불탈 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합니까?
부귀 영화를 누리던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개와 같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재물이 불타 없어지는 것 때문에 뒤를 돌아다 본 롯의 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작년 9.11 테러 사건 때 기억하십니까? 인간이 쌓아올린 바벨탑이 그토록 허무하게 망가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를 때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는 초개와 같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2)뿌리와 가지 제거함 같이
두 번째로 이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뿌리와 가지입니다. 자 여기 수양버들이 있습니다. 나무가 너무 커서 가지를 잘라 냅니다. 그러면 그 나무가 죽습니까? 아닙니다. 얼마의 가지를 잘라낸다고 해서 그 나무가 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좀 아프기는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다시 예전과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나무가 뿌리째 뽑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기서는 이렇게 이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욥 14:7-9) 그렇습니다. 나무는 웬만큼 가지가 상한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즉, 내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뿌리째 나무가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아야 합니다. 마침내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풀무불이란 그 어느 불보다도 뜨거운 불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평소보다 7배 뜨거운 풀무불에서 구원받았지만 교만한자와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단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까? 망하는 길입니까?
2.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2-3절)
1절과는 대조적인 장면이 2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그러나"는 완전히 상황이 반전되는 "그러나"입니다. 한편에서는 심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리들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3:15에 있는 말씀을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줄 압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자 이 구절에 의하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교만하면서도 잘 되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출세보다는 성공보다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여길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렇게 사는 이들이 당시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아마도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졌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보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심판의 그 날은 분명히 두려운 날임에 틀림이 없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경건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서 뿐이요 하나님을 섬기며 그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평화로운 새 아침, 의로운 태양이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2 절은 좀더 다르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해가 치료하는 날개를 달고 떠오를 것이다."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선이 날개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날개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성경은 자주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이 날개에 비교해서 설명을 합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날개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 줄 알고 그리로 피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를 보십시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날개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또 한군데 더 볼 까요?
사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
그렇다면 여기서 이 날개는 바로 보호하심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보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치료와 더불어 보호하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를 하는 것일까요?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이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당시 햇빛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서 방사선을 비춥니다. 바로 그와 같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의 의로운 해를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아물게 하고 보호할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신실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있기는 하였지만 저들의 마음은 많은 상처들을 입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해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생긴 상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그래 그것은 아니야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음에 응어리진 것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모양 저 모양의 상처들을 치료하시고 싸매 줄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적인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영적인 상처 인격적인 상처 이 모양 저 모양의 상처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처들은 여러 가지 통로들을 거쳐 우리들에게 옵니다. 인간관계에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고 물질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고 일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상처를 입은 채 치료받지 못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 의로운 해를 떠오르게 해서 이렇게 상처 나고 찢겨진 저들을 위로하고 싸매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누가 이런 놀라운 위로를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상처를 치료받고 나니 힘이 넘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이 장면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여러분 송아지가 뛰노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소를 많이 키우시니까 자주 보셨을 것입니다. 송아지들이 외양간에서 나오면 얼마나 잘 뛰어 다닙니까! 바로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계속 3절을 보십시다.
말 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실패를 하는 것 같고 패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결국은 누가 성공을 합니까? 누가 승리를 차지합니까? 경주는 끝까지 달려봐야 합니다. 그래야 누가 이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 이 두 장면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첫 번째 장면은 불타오르는 심판의 장면입니다. 초개와 같이 불타 없어지되 가지와 뿌리까지 모두 태워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소망도 없고 위로도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괴로움, 허망함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장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장면의 주인공이 되시고자 하십니까?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되시렵니까? 아니면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렵니까?
3. 하나님의 권고를 받는 사람들(4-6)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5,6절을 읽습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두 번째 보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심판 전에 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엘리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야란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그가 와서 무엇을 할 것이라 말합니까?
6절을 보십시다.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6절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돌이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닫기 전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돌이키는 사람을 보낼 것이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한이 왔을 때 어떠했습니까? 당시 사람들이 돌이켰습니까? 예, 처음에는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결국 돌이키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던 어리석음이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사랑의 메시지를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또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과연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이 있나를 살펴보고 돌이키십시오.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시는가를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말 4: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구약성경에서 저주로 끝나는 성경이 말라기 외에도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등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마지막의 저주의 끝맺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사야서는 66:23절을, 예레미야 애가서는 5:21절을 전도서는 12:13절을 끝에서 한번 더 복창하도록 그들의 성경에 지시되어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4:5절의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아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70인경에서는 오늘 본문을 4절을 제일 뒤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즉, 1-3,5,6,4 순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4절을 구약 성경의 제일 끝에 위치하게 한 것입니다. 상당히 생각이 있는 재구성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4절이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과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의 장면입니다. 그리고는 돌이키는 자를 보내겠다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말씀하십니다. 기억하라고요? 무엇을 요? 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억하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에서만 잊지 않고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두 번째 장면의 주인공 즉 "심판을 이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여 심판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말 4:2 / 최성규 목사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로 약 5,193회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약 3,584회나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 이름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 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당신께서 “엘 샤다이” 곧 “전능의 하나님”임을 계시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1). 또한 출애굽할 때는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영원히 승리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5)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보고, 그 이름의 능력으로 사는 우리가 모두가 됩시다.
첫째, 하나님 이름의 뜻을 알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섬세하게 돌보시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이름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이름의 뜻을 기억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즉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창 22장).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준비하셨다가 가장 좋은 때에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증거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 15장).
그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이전보다 더 강건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고 약속하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닛시”, 즉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출 17장). 솔로몬 왕은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0-31)고 선포합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샬롬”, 즉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삿 6장).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조건과 환경에 따른 평화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샬롬입니다(빌 4:7).
다섯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찌드케누”,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렘 23장).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치십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겔 48장). 하나님은 임마누엘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나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일곱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라하”, 우리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 23편).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부요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창1:28-30). 목자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요케 하시며,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적임을 가르치셨습니다(마 6:9).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레 24:16).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는 생명과 축복을 누립니다.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삶으로 경외해야 합니다. 어떻게 삶으로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잘 모르면 다윗에게서 배워야 합니다(시 34:11).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며, 선을 행하고, 이웃과 화평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시 34:13-14).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자
사람이 자랑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아들 자랑뿐입니다. 부와 권세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것만 말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렘 9:23; 고전 3:21상).
우리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24)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도록 우리를 택하셨습니다(출 9:16).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전원입니다(벧전 2:9).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명령이전에 성도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 자랑했습니다(행 16:25).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면 우리 마음이 천국이 됩니다. 성경은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10)라고 말씀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세상은 조그만 연줄이 있어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더 큰 능력인 여호와 이름의 능력이 있습니다.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자랑하는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고 자랑해야 합니다(시 20:7).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시편 91:14하).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아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망대입니다(잠 18:10). 우리는 하나님 이름의 능력으로 원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시 118:10; 막 16:17-18).
축복의 광선
말 4:2-3 / 최명남 목사
성경 말씀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오실 예수님,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고, 신약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복의 개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성공도 복이고, 실패도 복이고, 잘되는 것도 복이고, 잘못되는 것도 복이고, 형통도 복이고, 불통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도록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라고 했습니다. 그 의로운 해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복이라는 말에 대해서 원어로 뜻을 잘 표현해 놓았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아사헬'이라고 합니다. '아사헬'의 의미는 바로 '기쁨''예배''감사''겸손'의 뜻이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복종의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마음껏 찬송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고, 더욱 이 주일예배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복에 대해서 헬라어의 원어를 살펴보면 '마라'와 '카이로'의 두가지 합성어인 '마카리오스'라고 합니다. '마라'라는 원어는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이로'의 원어는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이란 무엇입니까? '큰 기쁨'이 바로 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유라기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참 복이 있다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이 복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처럼 앉아서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서서 들었습니다. 그것도 세 시간 이상씩을 말입니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아멘''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복을 주시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랬습니다.(말4:2)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의로운 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르킵니다. '공의로운 해' 대신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떠오르는 것은, 그건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온 인류와 이 세상에 가장 큰 복이 있다면 '의로운 해' 대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1. 광명의 복
우리에게 있어서, 온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 가장 큰 은혜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의로운 해'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광명의 축복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해가 떠올랐다는 말의 뜻은?
1)어두움의 세상에 새 희망을 주셨다는 뜻이다.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에 이 세상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캄캄했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여기에 어두웠다고 하는 것은 죄악의 어두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환난 시련의 어두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절망의 어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떠올라 주셨습니다. 절망의 어두움 속에 희망의 빛을, 사망의 어두움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어두움 속에 참 삶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지옥의 어두움 속에 영원한 천국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 기쁨과 즐거움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절망 중에 빠져 있던 인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2)성장과 발전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의로운 해가 떠올라"하는 것은 광명의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바로 성장과 발전을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떠오르게 될 때 그곳은 다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국가들은 모두 선진국입니다. 잘 삽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또 미국을 보십시오. 그러나 불교를 믿는 국가들, 모슬렘을 믿는 국가들, 샤머니즘을 믿는 사람들, 그런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대부분 잘 살지 못하고 낙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예수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곳에는 성장과 발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한참 경제적으로 흥왕할 때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한국교회가 가장 부흥했을 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고 교회가 흥왕할 때 그곳에 경제가 발전하게 되고, 문명이 발전하게 되고, 잘 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앙이 낙후되고, 타락하고 부패되고 교회가 쇠퇴해질 때 경제적으로도 쇠퇴해지고, 문화 문명도 쇠퇴하는 것은 오늘 인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높은 신분과 지도적 위치를 말합니다.
다음에 광명의 축복은 어떠한 축복을 가르쳐줍니까? 바로 높은 지위, 지도적인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의의 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니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위치가, 우리의 신분이 높아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구더기 같던 우리를, 어두움에 처해있던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재물이 없어도, 때로는 몸이 아파도, 지위가 없어도, 우리는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신분은 가장 높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의 신분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바로 하나님의 권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치료하는 광선의 복
1)진실대로 밝히는 복
두 번째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치유해 주시는 복입니다.
여러분, 광선이라고 하는 것은 특징이 있는데, 어떤 특징이냐면 꿰뚫고 들어가서 속을 밝히는 것입니다. 광선 되시는 우리 주님이 태양으로 떠오르게 될 때에, 태양으로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게 될 때에 우리 심령을 꿰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내가 제일 잘 나고, 내가 제일 똑똑하고, 내가 제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치료하는 광선인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부끄럽고 악한 죄인인지, 아무 것도 내세우고 자랑할 것 없는 추잡한 죄인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녕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치로하는 광선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와서 환히 우리의 속을 비추어 주게 되고, 그 전에 몰랐던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내 죄를 내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을 깨닫는데서부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데서부터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2)치료의 복
여러분! 치료하는 광선은 글자 그대로 치료하게 됩니다. 태양의 적외선은 짧은 파장을 가지고 있는 광선인데 이것은 물질대사를 촉진하는 작용을 합니다. 또한 색을 피착시키는 작용을 하고, 또 살균하는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디 그뿐입니까? 태양에는 자외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외선도 있고, X선도 있고, 방사선도 있고, 라듐도 있습니다. 오늘날 의학에서는 이런 많은 광선을 가지고 우리의 건강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 주님은 치료하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 죽었던 자리에 깊이 빠져 있다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용서해주시고 죄 가운데서, 영원한 질병 가운데서 우리를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3)공급과 제공의 복
여러분, 여기의 치료하는 광선은 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제공해주고, 광선을 발하여 주시어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십니까? 공기로도 주시고, 태양으로도, 물로도 주시고, 비로도 주시고, 자연 현상을 통해서도 주시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응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치료하는 광선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3. 자유의 복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는 "너희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랬습니다. 실제로 외양간에서 나와서 뛰는 송아지의 모습은 그렇게 활기차고 밝다고 합니다. 아마 송아지는 다른 동물에 비해서 특별히 자유를 더 간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그 외양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속박을 의미합니다. 억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죄의 노예로 있던 우리를, 사탄에 종속되었던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노예에서 외양간 같은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어서 마음껏 뛴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말합니다. 자유의 해방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구속을 받은 구속의 절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기서 '뛴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께로 나아와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뛴다는 것은 또 어던 의미가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봉사하는 모든 행위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 주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4. 승리의 복
다음, 절대 승리하게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으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절대 승리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요한1서5:4) 보면 하나님께서 절대 승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승리를 약속해주셨고, 그 승리는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여러분!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는데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당면한 환난 시련을 승리하고 정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시는가?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십니까? 본문을 보니까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공의의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떠올라서 우리에게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주시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우리를 마음껏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이제 절대 승리자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축복의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의 일생동안 승리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 양의 보혈
말 4:5-6 / 이익환 목사
어린 양의 보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 4:5-6)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번 주부터 핵가족이 아닌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했다. 유월절 기간에도 현재 한 집에 살고 있는 가족과만 절기를 보낼 수 있다. 집 안에서도 개인간 간격을 유지해야 하고, 친척집을 방문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온 가족과 친지들의 잔치가 되어야 할 유월절이 올해는 참 낯선 시간들이 될 것 같다. 오늘은 4월 4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4자가 들어가서 좋아하지 않겠지만, 오늘은 ‘위대한 안식일’, “샤밧 하가돌(הגדול שבת)”이라고 불리는 날이다. 유월절이 있기 바로 전 안식일이 바로 샤밧 하가돌이다. 이 날이 왜 ‘위대한 안식일’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사실 ‘샤밧 하가돌’은 유대인도 잘 모르는 날이다. 언제부터 유월절 전 안식일을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그 명칭의 기원은 오늘 하프타라(haftarah) 본문인 말라기서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기서 ‘크고 두려운 날’을 히브리어로 ‘욤 아도나이 하가돌 베하노라(והנורא הגדול יהוה יום)’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하가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돌’은 ‘크다’라는 말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시작하실 큰 구원의 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큰 구원의 날이었다. 대략 250만명의 유대인이 구속받은 날이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행동하신 날이었다.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고, 그의 백성들을 노예에서 자유로 해방시키신 날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하신 날이다. 이 유월절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모형이 되는 사건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원수를 멸망시키시고, 그의 백성들을 최종적으로 구속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여호와의 구원의 날은 장차 온 인류에게 임할 크고 놀라운 날이 될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에 일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날에 앞서 한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출 12: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니산월 10일에, 그러니까 유월절 5일 전에 어린 양을 잡으라는 명령이었다. 여기서 ‘잡으라’는 말은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라하크(לחק),’ ‘취하라’는 말이다. 각자의 집으로 양을 데려와 준비해 놓으라는 말이다. 양을 죽이는 날은 니산월 14일 저녁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니산월 10일인 토요일,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에 일년된 숫양을 준비하라고 하셨을까?
이 날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도 나도 양을 자신의 집으로 끌고 오는 장면은 애굽 사람들 눈에는 아주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기 원했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요청했을 때, 바로는 그간 아홉 가지 재앙을 겪고서도 그 요청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경고하신다. 마지막 열번째 재앙을 선포하신 것이다. 출 11:5-6,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열번째 재앙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애굽의 장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연히 죽기 싫었을 것이다. 이것이 유월절이 시작되기 바로 전 안식일의 분위기였다. 자신들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그 집에 머물지, 아니면 그 집을 넘어갈지, 그야말로 크고 두려운 심판과 구원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낙 사원의 스핑크스. 숫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 숫양이 바로 아문(Amun)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각자의 집으로 끌고 왔다. 당시 애굽사람들에게 양은 신으로 숭배되던 동물이었다. 이집트신들 중 하나인 ‘아문(Amun)’이라는 신은 양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르낙 사원의 스핑크스는 숫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 숫양이 바로 아문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숫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이겠다고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애굽사람들에게는 큰 모욕이었다. 2세기 갈릴리에 살았던 랍비 요세(Jose the Galilean)는 이것을 ‘과거와의 결별’로 이해한다. 즉 양을 잡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숭배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출애굽 때 다른 아홉가지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이 열번째 재앙 역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거짓신보다 뛰어남을 보여주시려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레위기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 때 그들 역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숫염소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서 확인해보자.레 17:7, “그들은 전에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유대인의 미드라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Shemot Rabbah 1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신들을 숭배하는 한, 그들은 구속되지 못할 것이다. 가서 그들에게 악의 길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거부하라고 말하라. 우상 숭배에서 손을 떼고, 어린 양을 취하여 그것에 의하여 애굽의 신들을 학살하여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라.” 이 구절들을 보면 니산월 10일에 양을 준비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영적 변혁을 준비하는 행동이었다. 즉, 과거의 문화, 과거의 우상과 결별하겠다는 공개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버려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신으로 섬기는 양을 잡는 것은 애굽인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 내 인생의 주인으로 알고, 오직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출 12: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제물로 드려질유월절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데려온 10일부터 14일까지 대략 4일간 그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야 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이 어린 양은 장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 양이 준비된 날이었던 니산월 10일에 예루살렘에 오신다. 그리고 다음 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슨 흠이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빌라도 역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는 유월절 희생제물로 준비되신 것이다.
출 12:6-7,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니산월 14일, 해가 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죽였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이 피가 발라져 있다면 그것이 표적이 되어 너희를 넘어가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그들의 집 문에 바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장하게 피를 바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문 왼쪽 기둥, 그리고 문인방, 그리고 문 오른쪽 기둥을 피로 발랐다. 어떤 표시가 나올까? 그것은 히브리문자 헤트(ח)다. 이 문자는 하이(חי)나 하임(חיים)과 연결된 문자다. 하이는 ‘살다(to live)’, 하임은 ‘생명(life)’이란 뜻이다. 믿음으로 피를 바른 자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헤트(ח)는 또한 여덟번째 문자이기 때문에 8이라는 숫자값을 가졌다. 성경에서 8은 구원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숫자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명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7일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여덟번 째 날이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숫자 8은 새로운 생명과 구원, 부활,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의미한다.
니산월 14일, 양의 죽음과 함께 애굽 전역에는 장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양의 피가 발라진 집에는 죽음의 권세가 유월(pass over)하는 은혜가 있었다. 그래서 이 날이 ‘유월절(Passover)’인 것이다.레위기서는 말한다.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나님은어린 양의 생명으로 이스라엘 장자들의 생명을 대신한 것이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함으로 이스라엘 장자들이 죽임을 면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약속한다. 우리가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한자어로 의(義)는 ‘양 양(羊)’과 ‘나 아(我)’가 결합된 단어다. 양(羊) 아래 내(我)가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나 아(我)’는 또 ‘손 수(手)’와 ‘창 과(戈)’가 결합된 단어다. 종합하면, 내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그 아래 있는 모습이 바로 ‘옳을 의(義)’자인 것이다. Under the blood, 어린 양의 보혈 아래 있는 것, 누군가 나의 죄로 인한 죽음을 대신 해서 피를 흘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 6:53-54,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 바른 자는 살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어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전세계가 죽음의 공포로 가득하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가 어느 집에 머물지, 어느 집을 넘어가게 될지 모두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크고 두려운 날들이 지나고 있다. 나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 재난은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큰 두려움으로 절대자를 바라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죽음의 공포, 그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말라기 선지자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처럼, 지금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때이다. 잘못된 문화와 이 시대의 우상들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이켜야 할 때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로 땅을 치실 때 함께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보혈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큰 구원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천년 전 유월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을 통해 전 인류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여러가지 뉴스로 마음이 어지러운 이 때에 우리는 이 큰 구원의 역사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보혈 아래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구원은 구약 역사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구원은 신약 역사의 전부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사탄의 세력을 이긴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고 약속한다.
이제 유월절이 다가온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다.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누구든지 이 피를 믿고, 이 피를 마음에 뿌리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가득 드리운 이 때에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길 바란다. 더 원하고 기도하는 것은 사망의 세력을 넘어가게 하는 보혈의 능력이 이 유월절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고백으로 선포되어지길 원한다. 그리하여 사망의 두려움으로 우리를 위축시키는 코로나의 세력이 꺽이는 역전의 시간이 이 절기를 통해 시작되길 소망한다. 바라기는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 우리 모두가 돌이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