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천방중핵교 동창일기
조정래 (14회 동문)
1964년...
안동-예천-점촌 간판을 단 완행버스가 운보천방중핵교 앞 신작로를 달리면 노리뽀오얀 흙먼지가 크게 일었고, 그러면 등교하던 우리들은 앞이 잘 안 보이는 신작로 흙먼지를 덮어쓰기 싫어서 논뚝길섶으로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다.
양옆으로 늘어선 미루나무 가로수도 완행버스가 일으키는 먼지를 덮어쓰고 희뿌연 몰골로 서 있고, 질펀하게 무꾸밭이 깔린 풍산들은 건너편 병산서원 길까지 뻗혀 있고, 남쪽으로는 소백산이 토하는 모래들이 낙암정을 휘돌아 풍산들섶에 옥양목을 깔아 놓은 듯 휘돌아서 어락정 소를 만들어 땅이 비옥하다지만, 집집마다 7-8남매들이라서 늘 먹는 것이 부족했고, 풍산 학교도 자식들 다 보내지 못하고 통지표에 그래도 나름 우 아니면 수를 받아야 보낼 정도로 참으로 궁핍한 세월에 궁핍한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동창 중에 키 작은 한 친구는 어느 날 등교길에서 동전 하나와 몽당연필 하나 주운 이후로 항상 등하교길에 고개를 길바닥을 보고 다녔는데, 혹여 동전이나 몽당연필이라도 다시 주울까 해서란다. 그 당시 동전 한 닢은 밍밭에 배차 뿌래이보다 더 반가운 사건이다.
신작로는 흙길이라서 여기저기 움푹 파였고, 비가 오면 물이 고여 큰 트럭이 지나가면 흙탕물이 튀어서 흰옷 입고 장가던 사람들 옷을 버리기도 하였고, 어쩌다 안동 장에 버스라도 타고 가면 신작로 길이 너무 덜컹거려 키카 큰 이들은,
"쫌 살살 가시더. 대갈통 다 깨지니더!"
엄살 떨 정도로 차가 흔들렸었다. 그 당시 완행버스는 신작로 아무데나 서서 손을 들면 다 세워 주었지만, 나는 등하교 십리 길 버스를 타 본 적이 없는데, 그건 건산진서 다녔던 김하진도 마찬가지고 중리서 먼길 다니던 광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당시 시골 완행버스 돈 주고 탈 동창은 아마도 하회마을 쌍둥이 혜정이와 혜영이 정도였을 것이지만, 중2학년 때인가 ... 그 둘 쌍둥이도 겨울 칼바람이 이는 그 넓은 풍산들판을 걸어서 다니는 모습이 내 머리속 추억의 사진 앨범속에 남아 있으니 ...
부모가 부자인들 다들 완행버스 타 보는 일은 요즈음으로 치면 비행기 타고 동남아 여행 가는 수준으로 우리들의 운보천방중핵교 시절은 가난에 쩔었다.
박통의 산업경제 폭발로 이젠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자가용에 매끼 푸짐한 식사 하고 돈 만 원으로 품질 좋은 수입 바지 사 입고 멀쩡한 옷도 마구 버리지만, 우리들은 미군 밀가루 마다리 포대를 검정물 들여서 입었던 ... 참으로 생활 수준이 어려웠다. 바지 하나로 한겨울 등하교 길 덜덜 떨면서 다니던 동창들!!
허긴, 돈이 하늘 같은데 우째 그 비싼 버스를 탈 것인가! 설사 동전 몇 푼 있다한들 풍산 장터에서 눈까리사탕 하나 사 먹고 건상진이나 중리까지 걸어서 가지 버스 타고 다닐 아이들이 아니다.
일년 내내 사과 하나 입에 넣지 못하고 동열이하고 나는 새역마 사과밭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고 그걸 솎아 내는데, 속아 낸 작은 방울의 사과는 익지 못해 시구럽고 하여 먹을 수 없지만, 몇 십 원어치 사서 갱변 모래 속에 묻어 두고 그 다음날 하교길에 꺼내면 시구럽던 애숭이 사과가 살짝 단 맛이 나서 그도 허겁지겁 막 먹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아껴 먹었던 가난의 일기가 등하교 길에 목숨명줄처럼 깔렸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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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60년이 흘렀다.
비록 농촌 중핵교라지만 입학시험에 떨어지는 아이도 있었고 혹은 송아지 한 마리 값으로 보궐로 들어온 동창도 있었는데...
다들 60년 열심히 살다가 요즈음 자주 카톡으로 소통하거나 즐거운 만남을 하며 사는데, 새삼 운보천방중핵교 동창들이 훌륭하고 자랑스러워 이 아침에 글로 남깁니다.
다들 서울 올라올 때 문전옥답 팔아서 올라온 친구는 한 명도 없다.
필자도 가을 끝무렵에 나오는 해골초(희제난 고추라고도 한다) 10근 팔아서 안동서 완행열차 타고 서울 청량리역에 내리니 오가는 사람은 인산인해였지만... 당장 잠잘 곳 없어서 멍하니 청량리역 광장서 낙심했던 기억이 일평생 가슴에 지워지지 아니한 채로 ...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랬던 운보천방중핵교 동창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동열이는 필자가 10년 넘게 살았던 유럽을 들락거리고,
어느 날 작은갱하이는 수출업자가 회사에 방문하는데 통역을 해달라 하니, 너무너무 자랑스러웠다.
이젠 다들 풍족하게 사는 세월이다.
하여, 지난 주도 소산 큰경하이, 설못 갱하이, 동열이, 하진이, 안용근, 그리고 이 쪼데기 조정래, 이렇게 6명 모여서 식사 맛있게 하며 즐거운 시간 보냈고, 그저께는 포천 갈비 먹으로 갔다왔지만...
먹을것이 없어 등하교 길에 운보천방에 피는 "뽀삐"라는 풀까지 다 뽑아먹고, 개랑 가시덤불에 있는 "찔레순"도 꺾어 먹고, 미처 익기 전 돌복숭아도 따서 삶아 먹고, 등하교 길에 개울섶이나 밭두렁에 많았던 "김"(고염)은 떫은 맛이 크고 씨가 커서 먹을것도 없지만 그도 늦게 서리하면 다른 아이들이 전부 따 먹으니 덜 익은 김을 따서 처먹고는 속이 다려서 마카 천방뚝에 주저앉아서, 목을 길죽이 빼고 떫은 맛에 속이 다려서 침을 질질 흘릴 망정 토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아 당분 섭취를 했던 눈물의 새싹들이다.
거름이 부족하면 열매도 작은 것이 자연법칙인데, 우리 세대는 보리가 익을동말동한 그 당시 풍산장날 인사가,
"그 집도 요새 언가이 쪼치니더."
실제로 곡기가 떨어져서 미처 보리싹이 덜 익은 것도 낫으로 몇 단 먼저 베어서 배고픔을 막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 입에서,
"사능 기 언가이 골물니더! " 이런 대화가 있었다.
그러니, 그 당시 제대로 먹었다면 키가 10센티는 더 자라고도 남을 배고팠던 싹들이다.
그런데도 역경을 이겨내고 하나같이 훌륭하게 사회생활 하고 가정이루고 자식들 다 잘 키우다니, 천지개벽을 이룩한 동창들이라는 생각이다.
훌륭한 동창들이 많치만, 지난 주 만남식사를 한 동창만 간단히 언급해 본다.
cj그룹에서 별을 단 김하진이!
사회생활 열정적으로 하여 한때 강남에 건물이 두 채였고 친구들에게 항상 웃음으로 소통하는 박동열!
그리고 우리가 핵교 댕길 때 작은갱하이 작은갱하이 했지만 지금은 등소평보다 더 크게 보일 정도로 큰 기업가로 우뚝 선 설못 작은갱하이!
그리고 내가 운보천방중핵교 출신 중 으뜸 안동 양반으로 치는 소산 원김 본동 출신 큰갱하이!
그리고 중핵교 소년 미소를 칠십 넘어도 그대로 간직한 여자지 아래 순흥 안씨 큰 기둥 안용근이!!
하나같이 훌륭한 운보천방중핵교 동창들이다. 영국 속담으로 친구들을 산출한다면, 그날 모임은 무려 10억짜리 모임이다.
완행버스는 탈 꿈도 못꾸던 우리들이 이젠 10억 가치의 오래된 친구로 노후의 삶이 행복한 만남이 된 것이다.
나도 미국 큰 기업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이사 진급은 못했는데 ... 운보천방중핵교 나와서 cj그룹에서 별을 단 하진이 능력은 자랑스럽고 상당하다는 것을 새삼느끼는데... 지난 주 작은 일이지만 그가 그렇케 사장 자리까지 오른 이유를 알게 된 작은 이야기로 글을 줄일까 한다.
다름이 아니고, 이 쪼데기가 몇 년 전부터 가끔 골프 스코어가 마이너스 기록도 하고, 늦게 물미 터질 수도 있다 하여 매주 골프에 미쳐서 원주 레스피아 cc로 가서 죽기살기로 노력한 결과, 드디어 -6 즉 18홀 72타 이븐도 힘드는데 66타를 기록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는... 김하진이가 가장 크게 칭찬을 해주었다.
사람 심보는 사람마다 그 크기가 다르다. 간장종지 크기를 갖은 사람들은 골프 골짜만 나와도 시기하는데, 66타 골프 스코어 카드를 보고 하진이는 대단하네 대단하네 하였다.
사람이란 칭찬의 그릇이 대접 같아야 출세를 하지, 간장종지 같으면 절대 출세를 못하게 된다. 그런 능력은 3년 같이 핵교 다녀서는 모르는데 대기업 계열 사장자리 오른 김하진 사장 능력은 우리가 몰랐던 부분이라서 더욱 값진 발견이다.
나도 칭찬의 그릇은 있지만 김하진이보다 작다. 크기는 대접과 간장종지 중간 정도이니 진급을 못했다는 것을 동창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늘 소통하는 기업인 작은 갱하이도 내 골프 실력 늘 인정하고,
"그래, 사는 것처럼 살아라!" 칭찬해 주는 대통한 동창이다.
그래서 나도 친구들에게 배웠으니, 그날 모임에서 마래서 중리로 이사간 이광희가 상당히 인문학적인 동창이라고 칭찬을 쏟았다.
아아... 알토란처럼 솟은 봉데미산 아래 있던 풍산중학교 일명 운보천방중핵교 출신들이 이렇케 훌륭한 인물이 있는것에 이 아침 소나기가 쓸고 지나간 새벽에 맑은 공기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들에 감사하면서 고맙고 훌륭한 운보천방중학교 동창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칭구들아
칭구들아
운보천방중핵교
칭구들아
우짜든동
90줄에도
늘 즐거운 만남 갖기를 소원합니다
2023년 소나기 내린 다음날 조정래가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