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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전제 : 일본 6대 신문사는 아사히, 닛케이, 요미우리, 마이니치, 산케이, 도쿄신문으로 정했습니다.(사견)
요미우리 신문과 산케이 신문은 사설에 게재하지 않았을 뿐, 일반 기사에는 게재를 하였습니다.
오역 또는 혼역이 있을 수 있사오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 일본 신문사 사설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올 해 3월부터 거의 매일)
* 노무현 대통령 서거 관련 사설(아사이, 닛케이, 요미우리) -> http://blog.naver.com/ffwasr/120069278983
blog.naver.com/ffwasr 에 방문하시면 읽어보실 수 있으니 방문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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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HI
김대중 씨 서거 - 일한의 신시대를 열고
일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 정치가였지 않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이웃나라로부터 보면, 김 씨는 자국의 민주화와 북한과의 평화공존과 함께, 또는 그에 더해 일본과의 화해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인상이 깊다.
역사문제에서 일본의 정치가들이 부적절한 발언을 하여, 한국은 심한 반일 내셔널리즘으로 돌아갔다. 응어리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 관계를 김 씨는 잘라내고 싶었다. 식민지 지배를 직접 체험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진상을 피부로 알고 있다는 강한 자부와 신념에서 그것을 스스로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한 98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당시 아부치 수상과 교환한 파트너십 선언에, 그 생각은 결실을 이루었다. 아부치 씨가 말한 과거의 반성과 전 후 일본의 행보를, 한국의 대통령으로써 처음으로 문서로 평가하고, 미래지향의 관계구축을 읊었다.
한국 내에 신중론이 강한 와중에,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에도 발을 디뎠다. 문화가 활발히 교류되어 서로 이웃 나라에의 관심이 높아져, 일본에서의 한류붐으로도 이어졌다.
월드컵의 일한공동개최를 거쳐 사람의 왕래는 매우 많아졌다. 65년 국교정상화시의 연간 1만명이, 지금은 '500만 시대'이다. 경제 결합도 강해지고, 이미 하루만에 갔다오는 출장권이다.
임기 후반에 당시 고이즈미 수상이 계속 했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교과서문제에서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일한의 관계가 질, 양 모두 매우 깊어진 것은 틀림없다. 김 씨가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이룬 역할을 마음에 새겨두고 싶다.
신념의 추구는, 분단국가의 남북관계에서도 발휘되었다. 때로는 너무 융화적이라는 비판도 받아가면서, 북한을 바꾸는 데는 교류와 협력을 되풀이하여 관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일관되었다.
"성공에는 '서생적인 문제의식'과 '상인적인 현실감각'이 필요하다.". 본지와의 회견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 씨의 정치자세는, 그것을 정말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집념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일찍이 정적이던 사람과 손을 잡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 직전에 북한에 5억달러를 부정송금한 것이 후에 밝혀졌을 즈음, "북한의 정권은 법적으로는 반국가단체이지만, 화해협력의 대상이기도 하다. 비공개로 법의 틀 외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해명했다.
한 편, 현실의 벽의 높이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김 씨의 기대에 반해,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하고, 해결의 전망 또한 열지 않는다. 일한관계도 역사와 영토문제에 따라 보통 방법으로는 뜻대로 다룰 수 없다.
내년은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한 '한국합병'으로부터 100년. 이웃 나라와의 역사를 기원하는 기회이다. 김 씨가 개척한 길을 힘껏 딛고, 앞으로의 양국관계를 응시하고 싶다.
NIKKEI
한국을 바꾼 김대중 씨를 애도한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은, 도쿄 중심부 호텔로부터 납치된 충격적인 사건과, 한국과 북한에 의한 첫 남북 정상회담이다. 김대중 씨는 두 개의 역사적인 성과의 당사자였다.
투옥, 암살미수, 사형판결.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써 많은 고난을 넘어, 대통령에 올라섰다. 한국에서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재국가로부터 민주적인 국가로 한국을 바꾼 정치가로서 현대사에 이름을 남겼다.
1973년 8월, 김대중 씨가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된 사건은, 납치를 계획한 한국중앙정보부(KCIA)와 박정희 군사정권의 악명을 높였다. 한국은 무서운 국가라는 인상이 불붙은 사건이기도 했다.
사건의 진상은 일한정부의 정치결착으로 어둠에 묻어졌지만, 각광을 받은 김대중 씨는 민주화의 리더로서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였다. 80년 민주화 운동 '광주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사형판결을 받은 때에도, 국제비판의 고양이 김 씨를 구했다.
그런만큼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 다음 해 2월에 '국민의 정부'라 이름 붙인 정권이 발족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정착을 상징하는 전기가 되었다.
대통령 취임은 금융경제위기가 한창인 때였다. 지원을 청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하에서, 재벌의 개혁과 금융기관 개혁을 단행, 정계와 재벌의 유착해소에 노력했다. 불투명한 유착구조는 해외의 불신을 불러, 위기를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의 계기가 된 2000년 6월의 김정일 총서기와의 첫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조선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통일의 실현에 주도적 역할을 질 의사를 표시했다.
퇴임 후에는 북한에의 부정자금 의혹에도 얽혀, 김대중 씨가 진행시킨 포용(태양)정책에의 평가는 갈렸다. 역대 대통령을 배출한 경상도가 아닌, 빈곤했던 전라도 출신으로, 출신지 대책을 우선한 정권운영이 지역간 대립을 조장했다는 비판도 강하다.
최근에는 역대 대통령의 인기도 조사에서 숙적이던 박정희 씨와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고도경제성장을 궤도에 올린 독재자의 치적을 숭배하는 것은 얄궂지만, 한국에서는 지금, 어떤 정치가도 국민이 자유로이 비판 가능하다. 이것도 김대중 씨의 공적일 것이다.
MAINICHI
김대중 전 대통령 - 격동의 한국을 체현(구체적으로 실현함)했다.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난과 영광이 교착된 일생을 끝냈다. 본인이 '행동하는 양심'을 자임하는 한 편, 일본우로부터는 보기 힘든 엄격한 평가도 한국에는 있다. 하지만, 발군의 자질을 가지고, 이 국가의 격동의 현대사를 체현한 아주 드문 정치가였던 것은 틀림없다. 명복을 빌고 싶다.
36년 전, 도쿄의 호텔에서 서울로 납치된 사건에 의해 김 씨는 일본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한국인이 되었다. 이 사건이 한국정보기관의 조직적 범행이고, 일본에의 주권침해에 해당하는 것은 명백했지만, 정치결착에 의해 유야무야되었다. 일한 쌍방의 정부가 불성실했다.
하지만 김 씨는, 자신의 대통령 재임중에는 이 문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07년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의 발표를 받고 가까스로 한국정부는 일본에 대한 주권침해에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외교적으로는 결착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조사당국에 의한 용의자 조사는 실현되지 않았다. 사건의 대단원을 맞지 않은 채 김 씨가 이 세상을 떠난 사실은, 역사에 새겨두어야만 한다.
특히 김 씨는 대일 외교에서는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대통령으로서 98년에 내일하여 당시 아부치 수상과 합의한 '일한 파트너십 선언'은, 사상최량이라고도 평가된 일한 우호의 시대를 구축했다. 김 씨는 심혈을 기울여 한국에 있어서의 반일감정을 억제하고, 이른바 '일본대중문화'의 해금도 진행시켰다. 일한문화교류의 융성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김 씨는 한편, '햇볕정책'을 들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도 힘을 다했지만, 공과 죄가 서로 반반이 되어, 평가는 정해지지 않았다.
00년 김정일 총서기와의 첫 남북정상회담은 화해무드를 넓혔다. 남북이산가족의 재회도 일부이지만 실현하고, 금강산 관광과 북한에 한국기업을 진출시키는 구상도 진행했다.
하지만, 이 융화노선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개발 의혹의 부상을 계기로 모순이 드러났다.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 정권은 대북지원을 크게 늘렸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강행으로 한국여론이 얼어붙어, '햇볕정책'은 옳지 않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김 씨는 이를 우려하고, 입원 전에는 북한에 타협하지 않는 이명박 정권의 자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주요 이유로써 김 씨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색이 바래고 말았다. 한국에서 체포되어 일본인 납치를 자백한 인물을 북한에 송환한 것도, 일본에 있어서의 김 씨의 명성과 인망을 적잖이 손상시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의 김 씨에 대한 평가는 높을 것이다. 민주화의 투사로서 사형판결도 받고, 4번 째 도전에서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불굴의 드라마. 그 박력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때리지 않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TOKYO
김대중 씨 서거 - 햇볕정책은 공과 죄 반반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민주화와 인권확립에 신념을 바친 생애였다. 북한과의 융화를 목표로 한 '태양정책'을 전개했지만,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고, 다음 세대에 과제도 남겼다.
옥 중, 자택연금, 망명은 계 15년여에 이른다. 내란음모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형의 집행은 정지되었다. 몇 번이나 사선을 넘어서 복권한 것은, 일본 등 해외에서 강한 지원이 있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이상을 내세운 철학자의 마음과, 권모술수에 뛰어난 냉철한 정치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엄청난 독서가, 공부가이기도 했다.
대통령 시절의 상징이 햇볕정책이다. 북한에 원조를 하여 군확대 노선을 포기시키는 개혁, 개방을 촉진하려고 했다. 김정일 총서기와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키고,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적대해 온 남과 북이 화해하고, 공존을 향해 공정표를 만들고, 미국과 일본, 중국이 이를 뒷받침했다. 이것이 김대중 씨가 그린 구상이었다.
북한은 수 년간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고 핵개발도 동결했다. 남북의 경제, 인적교류도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한국국민이 북한의 실정을 알 기회도 늘어났다. 햇볕정책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은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핵과 미사일로 무장하는 '선군국가'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원한 상당 부분이 대량파괴병기 개발에 유용된 것은 아닌가. 현재 이명박 정권은 이렇게 보고, 일방적인 원조정책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크게 키를 돌렸다.
북한의 강변자세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 햇볕정책은 공과 죄 반반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햇볕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충분히 검토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단념시키는 새로운 개방유도책은 구축 불가능할까.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등 주변국도 임해야만 하는 무거운 과제이다.
일본인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인 중 한사람이었다.
1973년에는 체재처인 도쿄도 내 호텔에서, 한국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어 서울까지 연행되는 '김대중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으로서 일한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일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 개방에 발을 디뎠다. 한국인의 대일감정이 호전되고, 역으로 한국의 문화도 일본에 발신되게 되었다. '한류'붐을 낳은 숨겨진 아버지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두요, 잘 읽었네요.
저도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