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과 燕나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1. 개론
2. 燕나라에 대하여
3. 朝鮮과 燕나라의 쟁투
4. 燕·秦의 동북쪽 국경에 대한 小考
5. 燕·秦 장성의 동쪽 끝에 관한 小考
6. 진실은 무엇인가.
4. 燕․秦의 동북쪽 국경에 대한 小考
여기에서는 전국시대 燕나라의 동쪽 국경이 진개의 침략에 의한 국경으로 계속 유지되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자. 우선 진개가 동호 이외에 조선을 공략하였다는 기록의 등장이다. 史記가 쓰여졌을 당시에도 사마천은 朝鮮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朝鮮列傳」도 지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史記에는 연 장수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350여년이 지난 후 작성된 三國志에서 갑자기 《魏略》을 인용하여 진개의 조선 공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를 한 번 살펴보자.
* 三國志 卷30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傳’에서 《魏略》曰 :
“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 城, 到遼東. ”
( 燕國이 장수 秦開를 파견하여 그 (고조선) 서방을 공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얻고 滿․番汗까지로 경계를 삼으니 朝鮮은 마침내 약화되었다. 秦國이 천하를 幷合함에 이 르러 (秦國은) 蒙恬을 시켜 長城을 축조하였는데 (그것이)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
우선 진개의 조선 공략에 대한 기사의 신뢰성에 의문이 간다.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이 기록을 신봉하고 있는데, 삼사백년 전의 사건을 어떻게 그 당시의 기록에는 없는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가? 뭐, 혹자는 그 당시에는 삼사백년 전의 기록이 있어서 인용했다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史記의 기록을 우선 시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이 三國志의 기록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좀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록이 맞는다고 보더라도 위 지도를 보고 실제 연나라의 국경 변화를 살펴보자. 지도를 보면 진개의 동침에 의해 늘어난 영토는 원래 영토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연 장성이 요양, 청천강 유역으로 비정하면 3배, 4배에 달한다)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해서도 일이십년 간은 그 국경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의 반격으로 나라도 쇠약해지고, 본토의 진나라가 강력하게 압박해오고, 확장된 영토라 해봐야 연나라 백성들이 이주해 살만큼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상황이라면 연나라는 원래의 국경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명장 진개의 공격으로 동호와 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어 한 동안은 침략이 없을 것이므로, 원래의 국경으로 복귀하여 본토의 쟁패에 전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이 당시 연나라의 입장에서 어떤 정책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것은 현재나 그 당시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지금 국가의 지도자가 생각하는 정책은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국가 차원에서 이 상황을 고려해보자. 연 진개가 동침한 요서지역은 그 당시 인구 밀집지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패퇴하는 동호나 조선의 뒤를 따라 많은 종족들도 후퇴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공지가 발생하여 사실 땅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졌을 것이다. 일단 동호와 조선은 물리쳐서 한동안 위협이 사라졌다면 차지한 지역은 점령지로서의 가치는 없어졌을 것이며, 그 당시 아직은 영토의 확장에 주력한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지도자(연나라 왕)의 입장에서는 군대를 철수하여 본토 방위에 투입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연나라 말, 진나라 초에 중국 동북쪽의 국경은 대개 난하 또는 대릉하 상류유역선을 유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