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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곧 대 환란 원문보기 글쓴이: Daniel
이번 글에서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적국가 이란과 이라크의 역사와
이슬람의 종교 조직 구조를 알아 보고자 합니다.
재미있고 쉽게 다루었으니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이란의 역사
*고대 페르시아 시대 - B.C.559~
*파르티아 제국- B.C.250~
*사산조 페르시아- 226~
*이슬람화 - 651~
*몽골의 침입으로 일한국으로 편입 - 1256~
*몽골의 후예 티무르 제국의 지배
*이슬람의 사바피 왕조가 이스마일 1세에 의해 건국 - 1502~ 1736
*카자르 왕조가 세워져 현재의 이란의 모체가 형성 됨 - 1794~ 1925
*팔라비 왕조가 쿠테타에 의해 세워짐 - 1925~ 1979
*국호를 '이란'으로 바꿈 - 1935년
2.석유의 기원과 유전의 성립
땅 속에서 천연으로 나는 탄산수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가연성 기름의 검은 갈색을
띤 석유는 증류하여 휘발유, 경유, 등유, 중유, 석유 피치, 아스팔트 따위를 얻는다.
이 석유는 동력의 연료와 공업용 연료 등에 널리 쓰이는데,
석유는 메소포타미아, 터키 등에서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성경에서는 '역청'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석유가 인류문명에서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이다.
석유는 처음에는 불을 밝히는 정도로 사용되었으나,
경제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용도가 다양해졌고
선박, 자동차, 비행기, 전기 등등에 쓰이게 되었다.
3. 영국과 러시아의 유전 개발 허가
러시아는 중국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려다가 '러일 전쟁'으로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눈을 돌렸다.
당시 영국도 인도를 점령한 뒤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이란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프카니스탄을 놓고 영국과 전쟁을 치뤘다.
이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독립했고,
영국도 이란으로 눈을 돌려 러시아와 경쟁을 벌였다.
처음 영국은 전쟁이 아닌 외교로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했다.
당시 세계 외교는 만일 자국에서 보낸 대사의 요구 대로 통상에 협상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이란은 영국의 군사력에 의해 요구하는 통상에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요구는 이란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 팔 수 있게 해주고, 영국 사람이
제약 없이 이란을 드나들 수 있도록 요청했다.
1896년에 이란에서 '모자피르 웃딘샤'가 왕위에 올랐는데,
영국의 '윌리엄 놋스 다시'에게 이란에서 유전 개발 허가를 내주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으면서 이란의 거의 모든 땅을 파서
석유가 묻혀 있는 곳을 독점하도록 허락하였다.
모자피르 웃딘샤는 나라를 다스릴 줄 모르던 왕이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받은 돈으로 궁전 장식과 거창한 파티, 최고의 옷과 보석을
사는데 돈을 탕진하였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돈을 더 빌려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의 윌리엄 녹스 다시는 이란에서 어마어마한 유전을 발견하고는
이것들을 영국 정부에 팔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영국 정부가 이란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영국은 산업 혁명으로 다방면에서 기술이 발달하였고, 이란의 석유를 부지런히
퍼 날라 영국 해군의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란에서 영국의 석유회사는 나중에 '브리티시 페트롤리움'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란은 샤(국왕)가 혼자서 모든 권력을 쥐고 다스리다가,
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입헌군주제로 돌아섰고, 국왕 위에 헌법이 있게 되었고,
1935년에 국명을 '이란'으로 바꾸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립국이 되었다.
1953년 이란을 다스리고 있던 샤(국왕)는 '모하마드 레쟈 샤 팔라비'였고,
총리는 '모하마드 모사테크'라는 사람이었는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흔히 성질이나 행동이 유별난 사람을 기인이라고 하는데 모사테크가
그러한 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잠옷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도 했고,
의회를 여는 방에 침대를 갖다 놓고서 거기에 드러누워 연설을 하는가 하면,
갑자기 까닭 없이 엉엉 울어재끼기 까지 하는 등 이상한 행동들을 했다.
그런 그가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의회에서 석유는 이란의 중요한 재산이라고 외치면서
영국이 왜 이란 땅에서 퍼 올린 석유를 제멋대로 주물러야 하냐면서
석유 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고,
이란의 의원들은 옳다고 찬성하면서 영국과 마찰을 빗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석유를 퍼 올리기 위해서 자신들이 이란에 투자한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느냐면서 반박했고,
이에 모사테크는 그 대신에 영국이 수백 배의 이익을 챙겨갔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라며 받아쳤다.
영국은 영국 나름대로 이란이 그렇게 나온다면 이란의 석유는 한 방울도
사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때 마침 다른 중동 나라들이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석유를
펑펑 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중동에는 석유가 남아돌고 석유를 사는 외국 손님은
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이란은 큰 고객인 영국이 석유를 사가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자, 석유 판매 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이 되었다.
이란 경제에는 먹구름이 끼었고, 모사테크의 인기는 이란에서 뚝 떨어져버렸다.
이를 기회삼아 팔라비 왕은 모사테크를 총리 직에서 끌어내리려고 했지만,
모사테크는 이 상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모사테크 같은 기인이 그정도 쯤으로 무서워할 리가 없다.
오히려 모사테크를 지지하던 군중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팔라비는 외국으로 망명을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모사테크는 영국과 미국의 음모로 얼마가지 않아서
권력이 끝장나고 말았다.
영국은 모사테크 총리가 영국 석유 사업에 걸림돌이 되니까
이란에서 뽑아내고 말 잘 듣는 팔라비 왕을 다시 이란의 권좌에 앉혀서
석유를 손아귀에 두고 휘두르고 싶어 했고,
미국은 모사테크가 소련과 가깝게 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였다.
하지만 모사테크는 소련이 이란의 석유를 탐낼 때에도 딱 거절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모사테크의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 작전의 이름은 '아이아스 작전'이었는데, '아이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영웅의 이름으로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40명의 장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이란 밖에서 반란군을 몰래 훈련 시켜서 이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모사테크를 반역죄를 엮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이어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팔라비가 의기양양하게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란 국민들은 영국에게 석유 판 돈을 사적인 호주머니로 집어넣는
팔라비에게 등을 완전히 돌렸다.
게다가 팔라비는 이란을 서구화 시키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슬람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슬람의 세력의 힘을 빼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회도 없애버리고, '사바크'라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공포 정치를 폈고, 국민들은 사바크에게 물 샐 틈 없는 감시를 당했다.
이슬람을 다스리는 영은 공산주의의 영과 같다.
또 금서를 읽다가 발각되면 가차 없이 잡혀가서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팔라비 정권이 금지한 책의 목록 중에는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사람의 책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란 시아파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대 아야톨라'였다.
그래서 그를 '아야톨라 호메이니'라고 불렀다.
아야톨라라는 직위에 대하여는 아래쪽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호메이니'는 서양 사상과 외국세력의 입김에서 이란을 구해 내어
완벽한 이슬람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고, 이란 국민들은 그런 호메이니를 따랐다.
그래서 팔라비가 가장 두려워 헸던 사람이 호메이니였다.
1960대 초에는 호메이니가 국민들 앞에서 팔라비를 직접 공격하자,
그를 체포하여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왜냐하면, 이란은 시아파이고, 사담후세인은 수니파였다.
호메이니는 이라크로 가서 14년 동안이나 머무르다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떠나 줄 것을 요구하자, 프랑스 파리 근처로 옮겨갔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설교를 녹음한 테이프를 이란으로 보냈는데,
그 내용은 팔라비의 반 이슬람적인 '백색(서방) 혁명'을 거부하라고
이란 국민들을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이란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팔라비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거리를 메운 수만 명의 이란 사람들은 팔라비를 물러나라고 외쳐댔고,
마침내 팔라비는 1979년 1월 16일 여러 나라를 거쳐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것을 '이란혁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해 2월 1일에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돌아왔고, 그를 최고 지도자로 하는
혁명 정부가 나흘 뒤에 세워졌다.
이어 국민투표에서 새 헌법이 통과되어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이제부터 이슬람 종교법으로 다스리는 '신정 청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란에서는 서양의 음악과 음주, 도박이 금지 되었고,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이 구별되었다.
여성은 다시 투표권을 잃었고, 모든 사람이 이슬람교의 법을 따라서
옷을 입어야 했다.
여자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히잡 등으로 머리를 가려야 했다.
이 시기부터 이슬람권의 여성들의 인권이 억압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호메이니의 혁명은 이라크 국민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4.이라크의 역사
수메르, 앗수르, 바벨론 등의 고대 국가들이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흥망하였다.
이후, 페르시아, 헬라 시대를 거쳐 7세기 중엽부터는
아라비아 반도에 출현한 이슬람 세력의 침범으로 아바스 왕조부터는
바그다드가 그들의 수도가 되어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1세기 이후부터는 셀주크 튀르크와 몽골, 티무르의 지배를 받았고,
153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이르기 까지 400년간 터키에서 발흥한
오스만 제국의 속주가 되었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 후에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이라크'가 탄생하였고,
승전국인 영국이 고른 사람을 국왕으로 1950년대까지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1958년에 이라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세력은 이라크의 국왕을 처형하고, 이라크가 공화국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이어 1963년에 '바트 당'이라는 정당이 이라크 정권을 잡았고,
'바르크'라는 인물이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었었다.
이때 이 정당에 몸담고 있던 '사담 후세인' 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이라크의 부통령이 되었다.
5. '이란 이라크 전쟁'- (1980~ 1988년)
오랜 세월 동안 이라크와 이란은 영토 다툼을 벌여 오고 있다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지점인 '아랍 강'을 두고 다툼을 시작하였다.
이 강은 두 나라의 국경선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여기서 배를 타면 이라크의 '바스라 항구'와 이란의 '아바단 항구'를 거쳐
페르시아 만까지 곧장 간다.
그래서 두 나라는 아랍 강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1975년 두 나라는 이 강을 둘러싼 다툼을 끝내려고 협정을 맺었다.
결국 이란의 팔리비 왕 정권 시절, 이라크에서 부통령으로 있던
'사담 후세인'이 협정에 사인을 했다.
협정 내용은 '아랍 강'은 이란의 땅임을 다시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랍 강'은 이란의 소유로 두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호락호락하게 이것저것을 타국에 그냥 먹히도록
그냥 두고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사담 후세인이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이룬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서방국가의 반발을 각오하고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 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유조합의 국유화는 후세인의 의도대로 성공하였으며,
기존의 고객과 새로운 고객이 더하여 수출처는 늘어났고,
이라크 국고는 70년대 고유가 정세를 타고 황금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근대화를 개시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쿠르드 족의 분포도)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의무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아랍에서 문맹률이 최저인 국가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바크르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부통령의 뛰어난 성과,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그의 예의바른 행동 등을 통해
후세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후세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측근들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바크르는 표면적으로 건강과 가족들의 죽음 등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부통령 사담 후세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며
순순히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이 당시 이란에서는 '이란혁명'으로 팔라비가 쫓겨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던 무렵이다.
이라크에서도 이란 혁명의 영향으로
1979년에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이 된 것이었고,
후세인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바벨론의 영광' 재현을 부르짖으며
낙후된 국가였던 이라크를 아랍 산유국 가운데 손꼽히는 군사강국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반체제 세력을 가혹하게 처단해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외교에 있어서는 전통적으로 '친소 반미, 반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점점 타락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세인도 공산주의 독재를 장악한 영과 같은 영을 받았다.
(사담 후세인)
1980년대의 후세인은 극도로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보였는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고,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아첨의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을 우상화도 하여 이라크 전역에
후세인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했으며,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다.
처벌도 귀를 베고 전기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도록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이라크 내에서 고문이 합법적이어서 이라크 경찰서에는
강간 실까지 두고 사람들을 고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담 후세인 재임 기간 중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50만 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어쩌면 사담 후세인은 부통령 자리에서 조력자의 역할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한 위치였고,
바르크 대통령과도 주력자와 조력자의 죽이 척척 맞아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었던
최상의 상황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생기면 야망도 커지고, 최고의 권좌에 앉고 싶어지고
독재로 지배하고 싶어지는 맘이 발동하는 자리가 그 자리이다.
이후 후세인은 이란이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아랍 강을 빼앗고
독차지 하여 세계에 이라크의 위력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때마침 이란에서는 '영국의 석유 개발 허가권'을 무효화 시키면서
석유는 자국의 것이라고 외쳐댔고, 반영국, 반미국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도와서
이란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였다.
미국도 이러한 독재 정권을 도와서 자국이 이익을 취하려 한 것이다.
이라크는 20만 군사와 소련제 무기와 탱크,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
건너온 총으로 잘 무장하고 미국이 이란과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공격하는 것을
발 벗고 도와주었다.
그러나 기습 공격으로 빌빌 거릴 줄 알았던 이란 군의 저항이 여간 거세지 않았다.
이란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이란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대항해 갔고, 잠깐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이 전쟁은
8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의 폭격들이 이란의 유정을 마구 폭격했고,
이란의 폭격기들도 이라크의 유정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8년간 양국에서는 약 50만 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 나라는 유정뿐만이 아니라, 송유관도 멀쩡한 것이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승패도 없이 1988년 전쟁을 중지하는데 동의하고, 아랍강은 이란의 영토로
두기로 하였다.
1975년 협정한대로 말이다.
유정이 폭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래 걸프 전 이야기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전쟁은 세계 지도자들의 안목 없는 무식하고도 어리석은 전쟁이었다.
6. 페르시아 만 전쟁 = '걸프' 전쟁(1991년~)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란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만에 터진 전쟁이다.
걸프의 뜻은 영국에서 페르시아 만을 부르던 명칭으로 '만'이라는 뜻이다.
이라크는 이란과 전쟁을 치를 때, 무기를 사들이고 병사들의 월급을 주느라
있는 국고를 탕진하고도 여러 나라한테 돈을 꾸게 되었다.
그 바람에 이라크는 전쟁에 끝났을 무렵에는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갚을 돈은 땡전 한 푼이 없었다.
이라크에게 돈을 꾸어 준 나라 중에는 쿠웨이트가 있었는데,
쿠웨이트는 페르시아 만을 끼고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이다.
그런데 이 조그만 나라의 사막의 모래 밑에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1/10이 묻혀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벌어들인 쿠웨이트에서는 국민들의 학비, 의료비도
공짜이고 소득세도 없었다.
그런데 '이란 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 만에 1990년 8월 2일에
이라크 병사들이 사담 후세인의 명령으로 쿠웨이트에 침공한 것이다.
그 이유는 쿠웨이트가 이라크에게 빚 독촉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사담 후세인은 돈이 없는데, 쿠웨이트가 기다려 주지도 않고
돈을 갚으라니 화가 났고,
돈 갚을 능력도 없으니까 차라리 쿠웨이트를 먹어버리자고 작심을 한 것이다.
따라서 침략 구실로 쿠웨이트가 이라크 국경에서 석유를 마구 퍼갔다며,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도둑질이라고 텀터기를 씌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쿠웨이트의 석유 절반은 이라크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게다가 쿠웨이트가 OPEC에서 정해준 양 보다 더 많은 양의 석유를 퍼 올려서
석유 값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쿠웨이트가 다른 산유국의 호주머니를
털고 있다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이란 이라크의 유정은 지들이 다 파괴시켜 놓고 말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결정적인 것은 쿠웨이트가 원래 이라크의 영토라는 것이다.
사담 후세인, 이 사람의 배짱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쿠웨이트로 진격해 들어갔던 이라크 병사는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싸웠던 병사들로
전투 경험이 많고 전투력이 우수한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식은 죽 먹기 식으로 하루도 안 걸려서 쿠웨이트를 거의 다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8월 8일에 쿠웨이트를 병합한다고 선언하였다.
정말 배짱 두둑하고 용기 있는 사담후세인이었지만,
그 반면에 그의 무모한 용기는 강탈에만 치우쳐져 있었고,
자국의 국민들이고, 다른 인간들이고 간에 생명에 대한 존엄은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자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즉시 이라크에게 경고했다.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보복하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미국은 다국적군으로 이라크를 까부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1월 17일 미국, 서유럽, 이집트,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33개의 나라에서 모인 70만 명(미군이 54만)의 다국적군이 후세인 벌주기에
총력을 다 했다.
이 국가들이 다 모인 이유는 '석유' 때문이었다.
후세인이 석유를 쥐고 중동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며,
흔드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후세인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침공하여 장악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를 팔아서 돈 많은 부자라 성능과 기능 좋은 무기는 많이
수입하였으나, 그 무기를 다스릴만한 전투력은 갖추지 못한 나라였다.
다국적군은 몇 주에 걸쳐서 이라크의 공장들과 군사기지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도 '바그다드'까지 공습했다.
또 이라크 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도로를 폭파하고,
식량과 마실 물을 구할 수 없도록 농토와 수원지까지 폭격하였다.
게다가 유엔은 이라크에 대하여 '무역 제한조치'까지 내려서 어느 나라라도
이라크에 식량과 의약품을 제외한 아무것도 보낼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배짱으로 후세인은 계속 버텼고,
2월 말, 유엔에서는 다국적 지상군을 투입하여 사흘 뒤에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몰아내었는데,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군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못 먹는 것은 남도 못 먹게 한다는 식으로,
후퇴하면서 쿠웨이트 유정에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유정에 불이 붙으면서 그 순간부터 수백 미터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불기둥이
몇 달 동안 계속 타 올랐다.
이러한 불기둥이 700군데나 타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주변의 열기로 모래판이 뜨거워졌고,
매연과 열기로 사람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기침을 하고
온통 폐병에 걸릴 정도였다.
이에 화가 난 다국적군은 이라크 영토로 진격하여
이라크 군을 몰아내었다.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완패였지만,
유정의 불기둥을 끄는 데만 9개월이 걸렸고,
하늘로 치솟은 석유의 검은 그을음은 검은 비가 되어 땅에 떨어졌다.
온 사방에는 기름 웅덩이가 생겼는데, 웅덩이의 깊이가 2미터나 되는 곳도 있었다.
양들은 풀을 뜯어먹다가 쓰러져 죽었고, 샘물들도 온통 검은 비로 뒤덮였다.
게다가 곤조통 이라크의 후세인은 페르시아 만에다가 4천2백만 리터나 되는
석유를 쏟아 부었다.
석유 값을 급등시켜서 세계를 골탕 먹이려고 말이다.
그 바람에 페르시아 만에는 30㎝ 두께의 기름띠로 온통 뒤 덮혀
수많은 물고기와 새들까지 죽어나갔다.
이렇게 후세인이 후질러 놓은 기름띠를 제거하는 데만 자그만 치 70억 달러라는
비용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이라크에도 국민들이 굶어 죽고, 더러운 물을 마시다가 죽은 사람이 엄청났고,
게다가 폭격을 맞고 죽은 사람들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 세계에서는 후세인이 또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하니
이참에 아예 후세인을 제거하자는 여론 일어났지만,
아랍 국가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후세인은 운 좋게 한동안 권좌를 지킬 수 있었다.
7. 미국 이라크 전쟁(2003~ 2011.12.15 종전 선언)
미국은 1979년 '이란 혁명'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였으며,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 당시에도
이라크에 최신무기와 생화학무기의 원료 등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후세인이 반미정책과 군비 확장에 힘을 기울이자,
미국은 중동의 안정적인 석유공급에 불안을 느꼈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계기로 후세인 축출에 나서게 되었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이라크를 불량 국가,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였으며,
후세인을 '제거대상 1호'로 설정했다.
아울러 미국은 '2001년 9·11 테러사건' 이후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 으로 규정하였다.
2001년 9월 11일 일명 911테러가 발생했는데,
미국 뉴욕의 110층 짜리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건물에 항공기가 동시 다발로 뚫고 들어가
자살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이슬람의 테러 단체가 감행한 사건으로
90여 개국의 2,800~3,500여 명의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항공기에 탐승한 전원 266명도 사망하였고, 경제적 피해는
세계무역 건물의 가치 11억 달러,
재난 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 등이다.
이 테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사마 빈라덴'이 주동한 것으로
이라크가 그를 숨겨주고 있다고 결론을 짓고
미국이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의 숨은 의도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석유 자원 확보와
유명 석유 회사들의 이익 확보였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정부 인사들 대부분이 석유 회사나
군산복합체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속셈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라크가 과거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를 밝힌바가 있고,
또 여전히 그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을 가망성이 있어서
이라크가 세계 안보의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는 구실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압정을 제거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려고 한 것이다.
2002년 8월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WMD) 폐기 등 요구하고 정권교체를 언급하였다.
이후 이라크가 유엔의 무기사찰을 수용하였으나,
미국은 2003년 2월 유엔 안보리에 이라크 침공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결국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위력적인 첨단 무기들을 동원해 한 달 여에 걸친
공격 끝에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후 미국과 영국의 점령군이 이라크에 들어섰으나 후세인의 체포는 실패했다.
그러다 2003년 12월 티크리트 인근 한 외딴 농가에서 은신하고 있던 후세인을
미군의 '붉은 새벽' 작전으로 생포하였다.
군산 복합체는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
하지만 중동 전체와 전 세계에서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미국과의 게릴라
전이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라덴'은 반미 감정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알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을 만들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미국과 유대인을 적대시 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많은 테러 이후에 2011년 5월 파키스탄의 외곽에 있는
한 가옥에서 미군의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8.참고 사항
시아파: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하는 이슬람의 파벌이다.
종교 최고 지도자 자리인, 칼리프 자리를 무함마드의 혈통 '알리'로 세우려고
한 파벌로 현재 무슬림의 1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나라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이란과 옛 바벨론 제국의 이라크와
그리고 바레인이다.
알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로
무하마드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또 그는 탁월한 용맹성과 지혜를 가졌으며 무하마드의 곁에서
성실하게 그를 보필했다.
632년 무하마드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알리의 추종자들은 예언자의 혈육이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는 아부 바크르(632~634)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했다.
슈라에서 만장일치 합의제(이즈마)로 칼리프를 선출하는 방식은
초기 이슬람 사회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2대 칼리프 우마르(634~644),
3대 칼리프 오스만 = 우스만(644~656)이 이 방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우마르와 오스만 모두 예배 도중 반대세력에 의해 무참히 피살됐고
이후 알리가 4번째 칼리프로 등장했다.
이란89%, 이라크63%, 레바논45%, 시리아(정부)26%,
요르단11%, 사우디10%, 이집트8%, 예멘(반군), 바레인(국민)70%,
수니파: 칼리프는 혈통보다는 높은 인품과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파벌로,
'알리' 대신에 '무아위야'를 칼리프에 자리에 올려야 한다며 시아파와
대립하여 알리를 살해한 파벌이다.
이슬람은 후덜덜한 종교이다.
수니파는 현재 이슬람의 9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에 대표적인 나라가 사우디이다.
하지만 수니파에서 '칼리프' 제도는 없어졌다.
종교 의식을 이끄는 '이맘'이 있을 뿐, 시아파에서 '이맘'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우디90%, 이집트92%, 요르단89%, 터키, 아프가니스탄
레바논55%, 바레인(정부)30%, 이라크27%, 이란 11%, 오만, UAE, 예멘(정부)
시리아(국민) 74%, isis는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 단체,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XXX3
(ISIS의 실체)
이슬람 국가들 가운데, 두 종파 중 국민이 지지하는 종파가 수니파의 비율이 높아도
국가 정권을 거머쥔 사람의 종파가 시아파이면, 그 국가는 시아파 쪽으로 정치를 하고,
국민이 시아파를 지지해도 수니파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그 국가는 수니파 지향 쪽으로
정치를 한다.
따라서 두 파벌의 비율이 그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어떤 파벌이
잡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칼리프; 무함마드에게 직접 교리를 배운 사람들로 무함마드의 후계자였으나,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라짐.
그후 칼리프 자리는 다마스쿠스의 14명의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와,
바그다드의 38명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승계되었다.
아바스 왕조는 1258년 몽골족에 의해 멸망했으며,
이후 맘루크 왕조의 통치기에 아바스 왕조의 후손들이 명목상의 칼리프직을 맡았으나,
1517년 마지막 칼리프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에게 사로잡혔다.
그 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칼리프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나,
1924년 3월 터키 공화국이 이를 폐지했다.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후손이 아니면
합법적인 칼리프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맘: 이맘은 '규범' 또는 '지도자', '신의 증인', '지식의 사람'
'계시'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기독교의 목사처럼 쿠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키고,
유대교의 랍비처럼 이슬람 샤리아 율법학자인 대(大)이맘이 있지만,
시아파의 이맘과 같은 파워는 갖지 못한다.
그러나 시아파에서의 이맘은 '알리'의 자손으로서
'시아파의 최고 지도자'라는 의미로 알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이끌라는
임무를 위임 받는 존재이며,
이슬람 성법상의 문제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고,
과실이 없는 지도자로 인식한다.
시아파에서 이맘의 수는 '알리'를 포함하여 12명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아파 내의 주류파를 '12이맘 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아파는 12번째 인물이 '숨은 이맘'이라고 하는데, 그 이맘이
네다섯 살 때 신의 뜻에 따라 행방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숨은 이맘의 본명은 '무하마드 알 문타자르 마흐디'라고도 부르고,
그가 언젠가 이 세상으로 돌아와 거짓이 없는 풍요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시아파에서는 이 12번째 이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는 '메시아'라고 생각한다.
(알리를 죽이고 수니파 무아위야가 칼리프가 되었었음. 이후 시아파에서 이맘 등장)
즉, 시아파는 다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지는데,
후계자 계승을 누구로 하느냐에 따라 크게 12이맘파와 7이맘파로 나뉘고,
12이맘파가 시아파 전체의 약 85%에 달하기 때문에
7이맘파를 포함한 나머지 시아파 안의 소수 종파 이슬람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이슬람의 3%에도 못 미친다.
'이스마일파'= '7이맘파'란
이슬람의 12이맘파의 분파로 과격 시아파 6대 이맘인
'자파르 무하마드 웃사디크(699년경~765년)는 장자 이스마일을 후계 이맘으로
임명하였는데, 이스마일이 음주 등의 나쁜 습관으로 임명이 취소고,
이스마일의 아우인 무사(745년~799년)가 7대 이맘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일부사람들은 이스마일만이 7대 이맘이라며 이스마일을 이맘으로 세워
12이맘파에서 갈라져 나와 '7대 이맘파' 즉 '이스마일파'를 성립시켰다.
한편, 이스마일의 사후, 이맘의 전승은 아들 무함마드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일파가 나타나 무바라크파(Mubārak)라고 불리며,
이 파가 '이스마일파'의 주류가 되었다.
수니파는 내부에서 교단 분열은 사실상 없고,
대신 이슬람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5가지 정도의 법학파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의 약 90%가 이 수니파에 속한다.
아야톨라: 이는 이란에서 시아파의 고위직 종교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말하는데,
이 호칭은 '신의 징표'라는 뜻으로 20세기 초 1905년경에 새로 도입된 것이고,
성직자 지도자에게 명예스러운 명칭을 수여하고자 한 것이다.
이란에서 아야톨라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교황과 같은 존재이다.
아야톨라들은 학술 및 종교 활동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넓히는데,
그 중 특별히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서 마땅히 추종할 만하다고 인정된 사람은
마르자에 타끌리드(Marja-i Taqlid)라고 불리게 된다.
마르자에 타끌리드란 "모방의 원천"이란 뜻이며, 이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이 바로 대(大) 아야톨라(Ayatollah Uzma)이다.
이후 '마르자에 타끌리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을
"유일한 마르자에 타끌리드"로 추대하며,
그는 열두 이맘파 전체에서 유일한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大아야톨라는 66명이 있다.
새로운 아야톨라들은 기존 아야톨라의 승인과 동의를 전제로 신자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