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1624)년 9월 28일 맑음. 새벽 녘에 생폐(牲幣.희생과 폐백)와 서수(庶羞.여러 가지 제수)에 제문(祭文)을 갖추어 상사(上使)이하 여러 관원이 모두 검은 관대(冠帶)를 착용(着用)하고 영가대(永嘉臺.현재 부산시 범일동 358-2 소재) 위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일행의 행장이 미처 정돈되지 않아 관사(館舍)에 도로 들어왔다가 오후에 배를 탔다. 울산(蔚山)ㆍ밀양(密陽) 부사가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작별하였다. 귤지정(橘智正.일본인)이 왜(倭) 사공 12명을 보내 와서 배알(拜謁)하므로, 세 사신(使臣)이 모두 타루(舵樓) 위에서 교의(交椅.의자)에 앉아 행례(行禮)를 받고 이어서 술을 먹였다. 왜 사공 12명은 상ㆍ부선(上副船)에 각 3명, 3ㆍ4선(三四船)에 각 2명, 5ㆍ6선(五六船)에 각 1명을 분배한다고 하였다. 울산 부사ㆍ밀양 부사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어 작별하고 부선(副船)에 돌아오니, 두 아들과 홍여경(洪汝敬)ㆍ김효선(金孝先)ㆍ변윤종(邊胤宗)ㆍ안홍익(安弘翼)이 벌써 미리 와 있었다. 잠시 담화하다가 김효선ㆍ안홍익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두 아들과 작별하였다. 왕사(王事)가 지중하므로 비록 슬픈 정을 억제하고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나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두 아들도 또한 눈물을 머금고 흐느껴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자(父子)간의 정리(情理)에는 심상(心傷)하게 잠깐 이별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을 안정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 험한 바다를 격(隔)한 만 리 이역의 이별임에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혼(神魂)이 암담하였다. 변공(邊公)과 홍여경(洪汝敬)도 작별하고 돌아가고, 수행하여 배서(陪書.지금의 비서와 같음)하던 자와 마부(馬夫)들도 모두 작별 인사를 고하고 갔다.드디어 닻줄을 풀고 뱃길을 뜨는데, 고각(鼓角.북과 피리) 소리는 왁자그르하고 노소리는 빼각거리며 점차 육지와 멀어지니, 떠나는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 귤지정(橘智正)의 배가 앞을 인도하고 갔다. 초량항(草梁項)에 배를 대고 배 위에서 유숙하였는데, 방은 정결하나 습기가 스며들어 몸이 매우 무거웠다.
註: 강홍중(姜弘重)은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였는데 일본회답사(日本回答使)의 부사(副使)로 참가하였고 상사(上使)는 형조참의 정입(鄭岦)이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