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꽃
/ 문정희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 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늙은 호박
/민현숙
펑퍼짐한 엉덩이
땅바닥에 내려놓고
가을볕을 쬐는
늙은 호박
이름 부르기 좋아
늙은 호박이라지만
실은 씨앗 아기
잔뜩 품고 있는 새댁이다
이제나저제나
반으로 쩍 갈라져
품고 있던 씨앗 아기
와락 쏟아 내고 싶은
뚱뚱보 엄마다.
늙음/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늙어 가니 좋다
/신정식
늙어 간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야
가을 하늘 비워가고 맑고 청명해서 좋다
봄꽃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향기지만
곱기로 하면 빛나는 단풍만 하랴
늙는다는 것은 고운 아름다움이야
돌아볼 수 있는 넉넉함에 여유가 좋다
살 만치 살아 봤고 가질 만치 가져 봤다
욕심을 놓고 보니 편안해서 행복하다
만화의 주인공도 사장이나
부모 역할도 모두 다 벗어 놓고
나로 돌아오니
좋다 좋은 것은 즐거운 것이고
어울리는 것은 행복한 것이지
늦게 출가해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
/류시화
어떤 꽃도
거짓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새도
절반의 마음으로 날개 짓 하지 않는다
어떤 번개도
건성으로 파열하지 않는다
어떤 강도
마음에 없이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어떤 바다도
절실함 없이 파도 치지 않는다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일체가 되기 위해
다 걸어야 한다
아무런 작은 기회라도
온몸을 던지는 씨앗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