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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와 감독
딛 1:1-9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1-9 / [인 사] 하나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려 뽑으신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사도로 임명되었습니다. 2) 이 진리는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입니다. 3) 그러므로 지금 그 약속대로 가장 적절한 시기를 택하셔서 이 복음을 계시하고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특권을 내게 주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세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4) 주님을 믿는 한 신앙 안에서 나의 진실한 아들이 된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5) [그레데에서 디도가 할 일] 내가 그대를 그레데 섬에 두고 온 것은 그대가 그곳에 남아 교회를 강하게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대에게 일러둔 대로 각 도시마다 장로를 임명해 주시오. 6) 장로를 선정할 때는 남들에게 좋은 평판이 난 사람들을 택하시오. 오직 한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고 그 자녀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시오. 행여나 자녀들이 그 부모에게 난폭하다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난 가정은 안 됩니다. 7) 장로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므로 흠잡힐 데가 없어야 합니다. 교만하거나 참을성이 없거나 술고래이거나 싸움꾼이기나 돈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8) 그들은 손님을 잘 대접하고 착한 일에 앞장설 줄 알아야 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모든 일에 공정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여야 하고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9) 그들은 진리의 가르침 위에 굳게 선 강한 신앙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운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그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더불어 그레데교회에 장로들과 감독이 세워져 디도와 함께 교회를 건전하게 세워나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게 맡기신 것이라(1-4) 디도서는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한 글입니다. 디도는 5절에 나오는 대로 그레데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디모데전, 후서 역시 디도서와 더불어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왜 사도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해, 그리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믿음과 진리의 지식은 영생을 소망하는 자들의 마음에서 생깁니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전도로 나타내셨습니다.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고,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같은 의미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전도의 사명을 맡겼다고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바울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이런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그의 생애 마지막 때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도와 장로와 감독(5-9) 바울은 디도에게 그리고 장로와 감독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디도는 자신을 그레데에 남겨 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울과 함께 머물렀던 그레데에는 바울이 떠나오면서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절과 11절의 말씀을 참고해서 볼 때, 그레데 지역에는 여러 부류의 이단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 헬라파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던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회의는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 지역에서는 이와 반하는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습니다. 디도는 이 일을 잘 정리하기 위해 장로와 감독을 세워야 했습니다. 일꾼을 세우는 것, 사람을 세우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했습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셔서 맡겨주신 직분과 그 직분을 통해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부르심의 목적과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다양한 성향과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일치성을 가진 곳은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목회자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배를 움직이게 하는 조타수입니다. 선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방향을 잡고 목표를 향해 항해합니다. 동시에 배에 승선해 있는 선원들도 승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합니다.
< 설 교 >
전도는 내게 맡기신 것이라
디도서 1장 1-3절 / 김민호 목사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고, 그 중에 마태, 마가, 누가, 세 개의 복음서를 일컬어, “공통된 관점이 많다”라는 의미로,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공통된 내용들은 뒤로하고, 세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은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을까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6장 20절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53절입니다.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아멘.
세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전도의 사명’을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이른 바 “지상대명령 (至上大命令,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 가장 유명한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는 구절입니다. 마가복음은, 즉시 행동에 옮기는 장면을 신속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 전파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고, 예수님이 동행하시고(성령으로) 역사하셨다는 기록입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할 증인이지만,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성령강림)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늘 성전에서 찬송하며 머물러 있는 장면입니다. 시차적인 차이는 있지만, 세 개의 복음서의 마지막은, 예수님 승천 후에, 복음전도의 명령과, 제자들의 역동적인 복음전파 사역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은 ‘복음전파’, 곧 전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절대로 멈추어서도 안 되며, 목표가 수정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까지 한 줌의 힘까지 쏟아 부어서 이루어 가야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구령사업’(求靈 事業)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도로(혹은 목사, 교사, 선교사, 직분자 등)부르심을 받은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만 온 힘을 다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한 소명과 사명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의 참 된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올해 태신자 작정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올려드린 한 영혼의 이름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힘써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은혜 받은 자로서, 태신자를 품고 기도하고, 찾아가고, 복음 전하는 일을 기쁨 가운데 적극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어낸 영혼을 매우 기쁘게 받아 보시고, 우리가 어떤 열심을 낼지를 무척 기대하고 계십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가 태신자를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과 방법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전도의 명령을 순종으로, 열매로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전도의 현장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니, 철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위기가 냉랭합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얼마나 기독교에 인식이 좋지 않은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한다는 것은 의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준비하고, 기도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신중한 과정입니다. 태신자를 품고, 전도의 명령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을 잘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도 현장은 ‘그레데’라는 섬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섬’지역에 복음전도를 한다는 것은 특히나 어려운 일입니다.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배타성이 강하지만, 반면에 독립성과 단결성이 매우 강해서, 자기들만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고수합니다. 외지인을 무척이나 경계하고, 무언가를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배타적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일반적인 곳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듭니다.
그레데 섬은,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나 되는 지중해에서도 큰 섬에 속합니다. 크기가 짐작이 잘 안 되시죠? 제주도에 비교해 보면(길이 73km, 넒이 31km), 길이는 세배, 넓이는 두 배정도 더 큰 섬입니다. 교통수단이 없고, 도보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에, 이 큰 섬에서 사역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섬에 남겨진 사역자가 오늘 편지를 받는 주인공인 ‘디도(Titus)’라는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레데 섬 주민들은 용감한 뱃사람들이었지만, 성격이 거칠고, 도덕적으로도 나쁜 편이었습니다. 1장 12절에,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선지자”는, 기원전 6세기경 그레데 섬에 살았던, 철학자이자, 예언자이자, 시인이었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를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에피메니데스가 그레데 사람이므로, 자신이 말한 대로 그 자신도 항상 거짓말쟁이니까 그가 한 이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레데 사람들은 실제로 거짓말쟁이니까, 에피메니데스의 말은 항상 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모순되는 입장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전도 현장에서 사역하게 될 디도에게,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은 무엇을 심어주고 싶었을까요? 바울은 예수님을 깊이 만난 체험과 교회를 세웠던 수많은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복음 전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두 가지를 말해 줍니다. 이 두 가지의 자세가 태신자를 품고 전도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1. 첫째는,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복음전도는 하나 마나입니다.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고, 100% 실패 합니다. 복음전도자가 마음에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는 “나는 확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실한 정체성, 곧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정체성과 믿음은 곧 성령이 충만하다는 증거입니다. 내 몸이 움직여서 전도에 나서지만, 그 일을 이루고 역사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장소를 이동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성령 충만함으로 늘 확신과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에, 복음전도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일깨워 주려고, 둘째, 진리의 지식을 깨우쳐 주려고, 셋째,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 가지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와, 그리스도의 종(복음전도자)로 해야 할 목표가 너무나도 똑 부러지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에 찬 모습이, 위대한 사도요 복음전도자의 위치에 서게 된 사도 바울의 비결이자 능력입니다.
우리는 복음전도에 앞서,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확고함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신, 이것이 곧 믿음의 증거이고, 소명이고,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제자입니다. 이 정답을 내가 믿음으로, 그리고 입술로 선포하고, 전도 현장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대답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으면 전도가 어려워집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 16절을 공동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15.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베드로 사도도, 복음전도를 위해서 “언제라도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답변은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확신입니다. 전도현장은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다. 전도자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화나게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레데 섬사람들과 같이, 거짓말 하고, 게으르고, 악한 짐승과도 같은 난폭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 복음전도의 현장 상황입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전도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무모하게 무턱대고 전도하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자신 있게 선포 되도록 답변을 잘 준비하십시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복음전도는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실 것이며, 힘과 능력을 주실 것이며, 성령의 이끄심으로 강력한 증거의 입술을 갖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기록하여 하나님께 올려드린 영혼들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을 기대 하시고 계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수고와 노력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태신자 복음전도를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도록, 예수님만이 믿음으로 증거 되도록, 성령님만이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도록, 복음전도의 사명에 적극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전도는 내게 맡겨진 것이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라는 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아멘.
바울이 말한 “때(헬, 카이로스)”는 시간의 길고 짦음에 관계없이 결정적인 시점, 적기, 기회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합니다. “자기 때”는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예수님은 정해진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자기 자신을), 전도로(복음전파, 선포)로 나타내셨습니다. 이 같은 일을 우리가 반복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전도가 내게 맡기신 명령이라고 순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종의 자세입니다.
이번 태신자 작정을 위한 전도의 다짐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명령이라는 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 그리고 현장에서 전도하는 시간이, 정해진 하나님의 때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전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만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선포하는 복음이,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완악한 사람의 마음이나, 어떤 깨지지 않는 견고한 세력의 방해가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전도를 위해 새로운 결심을 다지는 이 시간에,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고백하는, 바울의 자세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아멘. 부득불 해야 된다,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처절하게 들립니다. 꼭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부담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부담 이전에, 예수님이 얼마나 영혼들의 구원을 바라시는지를 깊은 마음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복음전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말씀하셨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재림 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죄악에서 돌이켜 돌아오게 하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때를 얻듣지 못 얻듣지 말씀(예수님)을 전파 하는 것”(딤후 4:2)입니다.
우리는 복음전도의 결과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하고야 말겠다는 결심과, 전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과정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15, 16절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태신자를 작정하는 오늘,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고 계십니다. 전도현장으로 나아가려는 우리들을 전적으로 사랑하시고, 열렬하게 응원을 해 주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들이 나아가는 전도의 현장이 그레데 섬이라는 각오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언제라도 답변할 준비를 잘 하시고, “전도는 내게 맡겨진 것이요, 지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입니다”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 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전도는 내게 맡기신 것이라는 구체적인 사명도 함께 받았습니다. 내게 맡겨진 복음전도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함으로, 내 자신의 믿음의 확신과 성장을 이루어가시고,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영혼구원의 감동을 경험하시는, 복음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좋은 교회 리더가 되라
디도서 1:10-16 / 이한규 목사
< 가짜 목사를 주의하라 >
요새 가짜 목사가 많다. 심지어는 이름까지 개명해 목사 행세를 한다. 한국의 장로교는 교파가 너무 많아 통제도 안 되고 어떤 교파는 교세를 불리려고 신학 공부도 제대로 안 한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남발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하지 공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가방끈이 길다고 목회를 잘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공부 과정을 생략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목사 타이틀을 얻으면 자기 삶의 틀을 따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목회할 것이다. 그는 진실한 삶을 가르쳐 진실한 축복으로 이끌기보다 헛된 말과 거짓말로 축복 환상을 조장하면서 심지어는 영혼과 돈과 집을 빼앗아 자기 재산을 불리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결국 정상적인 신학 과정을 이수하라는 말은 학력이 높아야 한다는 말보다는 최소한의 기본은 지키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로 영성을 과시하지만 영성은 말이 아닌 삶이 보여준다. 교인들이 대개 착하니까 말로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삐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처음에는 그의 영성 자랑을 받아준다. 알고 보면 영성을 자랑하는 사람보다 영성 자랑을 받아주는 사람이 더 이해심과 영성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영성을 자랑하면 결국 다른 교인들이 참다못해 그를 멀리하고 나중에는 말도 잘 섞지 않으려고 한다.
강자의 권력 강화를 위해 조작된 불의한 편견과 따돌림으로 혹은 선천적인 장애로 인해 소외된 사람은 힘써 살펴주라. 다만 자기 영성 자랑으로 소외를 자초한 사람은 멀리서 지켜볼 필요도 있다. 깨닫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자초한 소외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며 생각한다. “내가 영성을 자랑하니까 남의 인정을 더 못 받는구나. 앞으로는 언행을 주의하고 더 겸손하게 음지에서 선행을 실천하면서 성도답게 살자.” 그러면서 점차 사람이 되고 성도가 되고 성인이 된다.
반면에 자초한 소외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을 높여 생각한다. “왜 남들은 내 영성을 몰라주는가? 아직 아둔한 저들의 영안이 열려야 할 텐데. 세상적인 사람들이 나처럼 영성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까? 이런 세상적이고 육적인 교회에 더 이상 못 있겠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갔다가 그 교회에서도 유사한 상황을 겪고 또 떠난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면서 비로소 깨닫고 “이렇게 살지 말자.”라고 철저히 회개한다.
어떤 사람은 그때도 회개하지 않고 더 교만해져서 “우리 영성과 맞는 교회가 세상에는 없어.”라고 하면서 기존 교회와 담을 쌓고 자기 가족끼리 예배드린다. 그러면서 더 폐쇄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이 이단 교주처럼 행세한다. 자신이야 자기 영성 자랑으로 그런 소외를 자초해도 가족은 무슨 죄인가? 그렇게 영성 자랑을 하다가 가끔 상처 입어 판단력이 흐려진 고독한 영혼을 거짓말로 사로잡으면 그의 영혼과 육신과 물질과 피 한 방울까지 다 빼앗아 자기 힘을 키우려고 한다. 악한 모습이다.
그런 가족형 교주 공동체가 세를 불리면 조금씩 소문난다. 그런 소문이 세 확장에 도움이 되니까 처음에는 좋아보여도 사실은 좋지 않다. 그 교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피해자들이 모여 인생과 영혼이 털린 것이 너무 억울하니까 검찰에 고소하고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곳에 제보해 그 실체가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이단 교주가 가는 곳은 최종적으로는 지옥이지만 그 전에 이 땅에서 감옥에 갈 때도 많다.
어떤 사람은 영성 자랑으로 소외를 자초하다가 교회를 떠난 후에는 스스로 목사라 하거나 군소 교단에서 속성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나 기도원을 차린다. 그러면 대개 허언과 거짓말로 목회한다. 그런 허언과 거짓말에 상처 입은 사람이나 잘 믿는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이 속아서 미혹되면 그들을 대상으로 영성 있는 목사처럼 행세한다. 결국 과정을 생략해 목사 타이틀을 얻은 사람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 인생에서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리더를 잘못 만나면 인생 전체가 털린다.
< 이단들의 입을 막으라 >
사도 바울은 회심 후 평생 복음 전파자와 개척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한 곳에서 교회를 세운 후 다른 곳에 가서 또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떠날 때 자기 대신 리더를 세웠다. 때로 교회를 굳게 세울 필요성이 있으면 동행자를 그 교회에 리더로 남겨두기도 했다. 그처럼 그레데에 디도를 남겨두었다.
당시 그레데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이단이 있었다. 바로 할례파였다. 할례파 이단은 예수님을 믿어도 이방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레데 이단은 육체의 할례를 고집하며 허언증도 심했고 거짓말을 잘했다(10절). 그런 이단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했다(11절). 그 말은 책망해도 듣지 않으면 출교시키라는 말이다. 사랑이 없는 모습 같지만 교회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레데 이단은 사람을 진리로 이끌지 않고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잘못된 것을 가르쳐서 수많은 가정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단이 강조하는 헌신도 교주 자신의 왕국을 위해 순수한 영혼의 돈을 탈취하려는 수단이다. 그런 낌새를 느끼면 물질을 그런 곳에 함부로 바치지 말라. 이단 교주는 신자가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물질과 집을 빼앗고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가슴에 빨대를 꼽아 빨아먹는 것이 이단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치유를 내세워 명백히 사기를 치고 몸과 재물을 빼앗으면 반드시 당국에 신고해 추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종교 사기를 막으려는 것은 종교 자유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레데 이단을 엄히 꾸짖으라고 했다(13절). 잘못된 길로 갈 때 엄히 꾸짖는 것도 사랑이다. 왜 그렇게 꾸짖는가? 첫째,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14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는 유대 영지주의를 뜻한다. 그들은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영성을 과시하면서 진리를 배반하는 길로 갔다.
영성주의자들은 말만 들으면 최고 영성을 가진 겉 같지만 그들은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자들이었다(15절). 또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 같지만 언행을 보면 하나님은 부인하는 자로서 가증하고 복종하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버렸다(16절). 그들은 영성을 자랑했지만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단으로서 하나님을 믿지는 않고 예언, 신비, 체험을 앞세워 영혼을 미혹해 자기 더러운 이익을 취하고 자기 왕국을 쌓았다. 그런 이단에 미혹되지 말고 그런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도 주의해야 한다.
< 허언에 미혹되지 말라 >
이단 교주는 대개 거짓말쟁이거나 공상 허언증이 있다. 그런 비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인이 숭배하다가 같이 멸망의 길로 빠지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공상 허언증 환자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특히 “치유를 일으켰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 치유를 주고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다급한 사람이나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을 미혹한다. 그런 사기에 속지 않으려면 분별력을 잃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욕망을 잘 조절하라.
암호 화폐, 다단계, 부동산투자, 주식투자로 단기간에 수백억 원을 벌었다는 사람의 말만 믿고 투자했다가 돈을 다 날리고 비로소 현실을 깨닫고 자기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사기꾼 중에는 돈을 벌지 못했으면서 벌었다고 하고 앞으로 자기 말이 거짓말이 될 줄 거의 알면서도 사기 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공상 허언증이 문제다.
보통 사람은 “그가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런 허언을 할까?”라고 여기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공상 허언증 치료에는 지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설적으로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마.”라고 하기보다 지혜롭게 현실을 깨우쳐주고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그와의 만남을 자제하거나 남이 그와 만나는 것도 자제시키는 것이 좋다. 요새는 개인도 영상과 사진 편집을 쉽게 하기에 눈에 보이는 것도 사리에 어긋나면 너무 믿지 말라.
허언증도 결국은 거짓말이다. 거짓말과 달리 허언증은 병증이니까 이해하자고 하면 안 된다. 폐해가 크기 때문이다. 사기가 별 것 아니다. 거짓말과 허언을 내세워 돈을 받고 나 몰라라 하면 사기다. 확인도 없이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하나님만 믿으라.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닌 믿어줄 대상이다. 믿음을 주는 사람은 “나를 믿어!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라고 말하지 않고 말이 아닌 삶으로 믿음을 주려고 애쓸 뿐이다.
사람을 무조건 믿으면 꼭 피해를 본다. 은근히 부를 과시하고, 모든 분야를 다 아는 듯이 말하고, 초면인데 형님, 누님, 어머님, 아버님 소리를 하고, 이성에게 처음부터 적극 들이대는 사람은 잘 걸러내라. 문제는 그렇게 걸러내면 대부분의 사람이 걸러진다는 것이다. 진짜 돈 벌고 내실 있는 사람은 말이 없듯이 진짜 신실한 영성을 가진 리더는 영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모든 행동이 그의 영성과 사람됨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 좋은 교회 리더가 되라 >
가장 큰 문제는 허언증에 걸린 종교인 문제다. 그는 인생 자체가 거짓과 허언이다. 진실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다. 남의 말과 간증도 자기 말과 간증처럼 만든다. 허언증 증상자는 뇌 검사를 해도 이상이 없게 나온다. 결국 그 허언증을 인지한 지인이 지적해줘야 하는데 보통은 상처가 되고 싸움이 될까봐 못하고 공상 허언증을 가진 사람을 외면한다. 그래서 더 수렁에 빠진다. 공상 허언은 대부분 양치기소년의 말로 밝혀진다.
공상 허언증은 미디어에 너무 노출되어 생활수준과 기대감이 높아지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커지면서 생길 때가 많다. 소득이 적은데 비싼 차를 할부로 사고, 허세와 허언으로 이성을 속이고, 금수저 아닌 것을 억울해하고, 노력도 없이 잘 살려고만 하니까 공상 허언증이 생긴다. 인물 된 사람이 얼마나 고독한 공부시간을 가졌고 메달을 딴 사람이 얼마나 처절한 훈련을 견뎠으며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나도 멋지게 남의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라는 생각이 공상 허언증을 낳는다.
공상 허언증에 사로잡힌 이단 교주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기초 원리로서 자기 과시가 심한 사람인지를 보면 된다. 정말로 잘난 사람은 과시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들이 다 알아보기 때문이다. 또한 잘난 사람은 깎아내리려는 풍토가 있고 돈이 많으면 돈 냄새 맡은 사람이 들러붙기에 성숙한 부자는 오히려 자신의 부를 감춘다. 진짜 영성이 있는 사람은 영성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꼭 기억하고 영성을 광고하고 자랑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찬란한 꿈을 품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미래를 예언하고 사람 마음을 투시하고 놀라운 은사와 능력을 준다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지는 말라. 조금 더 삶과 언행과 열매를 살펴보라. 그러면 진실은 드러난다. 역사는 대개 진리와 진실 편에 선다. 혹시 잠깐 역사가 왜곡된 편에 서도 하나님은 결국 공의롭게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충성과 진실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 리더가 되라.
다시 읽는 디도서
딛 1:1-9 / 지성래 목사
빛의 삼원색은 빨강색, 초록색, 파랑색이다. 무지개의 색은 일곱 가지이다. 빛은 더 자세하게 세분하면 형형색색의 아름답고 눈이 부시고 영롱한 빛들이 연출된다. 그렇게 보여 지는 것이다. 어제 토요일 날씨는 봄의 기운이 완연하였다. 공기도 그런대로 맑았다. 햇살도 곱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가물었다. 겨울이 춥고 눈도 적당히 와서 강설량이 좋아야 그 해 농사가 잘 된다는데 지난겨울은 눈도 비도 별로 내리지 않고 무척 가물었다. 우리 영혼도 가물면 좋지 않다. 해갈될만한 양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최근에 내린 비로 땅이 적당이 적어 있어서 흙먼지가 사라졌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을 덧입고 살아가야 한다. 1
83장 찬송 ‘빈들에 마른 풀 같이’의 2절 가사는 이렇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다가올 봄과 함께 이런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겪으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항상 날마다 좋은 일만 계속되는 이도 없고 그렇다가 어렵고 험한 일만 계속되는 이들도 없다. 중동 사람들의 속담 중에는 “날마다 햇볕만 내려 쪼이면 주변이 모두 사막이 되고 만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조차도 이 땅에서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방문하셨다. 예수는 고향에서 맞이한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고 강론하셨다.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힘을 모아서 예수를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서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어려차례 이곳저곳에서 배척도 당하시고 무시 받고 따돌림 당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예수는 그를 대적하는 가야바 대제사장이 앞장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세한 상태에서 체포되었다. 그날 아침 유대 지역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재임 AD26-36)에게 넘겨져서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러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탄생하였다. 그 시작은 11제자들을 포함한 120여명의 성도들이었다. 그 후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3천명, 5천명 그 이상의 수 만 명의 무리들로 부흥하였다.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이들을 몹시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변해서 사도 바울이 된 것은 주님의 크나 큰 구원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사도 바울에 의해 쓰인 13편의 서신들은 그가 복음을 전했던 혹은 전하고 싶었던 지역과 도시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들이다.
디도서는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던 디도에게 편지한 사도 바울의 목회 서신이다. 그레데 섬은 그리스 남부의 지중해 한 편에 있는 큰 섬이다. 주로 산악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에게 해 남쪽을 가로질러 지중해에 놓여 있는 그레데 섬은 동서의 길이가 250km인 무척 큰 섬이다. 섬의 넓이는 11~56km로 다양하다. 제주도 크기의 4배반이나 되는 큰 섬이다. 그런데 그레데 사람들은 지중해 지역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역사학자 에피메니데스(BC 600년)는 그들을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불렀다. 바울은 역사적인 그런 소문을 디도서 1장 12절에서 인용하였다. 주전 5세기의 레오니데스(BC 488년)는 "그레데 사람들은 항상 도적질하고 노략지라며 불의하다”고도 말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인 AD 1세기경에도 그레데인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레데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거짓말쟁이'란 뜻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디도서는 바울 곁에서 동역자로 쓰임 받았던 디도에게 보낸 목회 서신이다. 그 당시 디도는 그레데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그레데 섬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30여명은 일 년 전 즈음에 주일 오후 시간마다 모여서 ‘커피 브레이크’ 말씀 묵상 분량으로 디도서를 대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다시 읽는 디도서’라고 정한 것이다. 디도서의 시작 부분인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使徒)인 바울.
디도서의 시작은 누가 쓴 편지인가를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다. 종이 어떤 존재인가. 주인이 따로 있고 그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출입하고 행하며 사는 자가 종이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종은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 주인을 만족하게 하고 주인을 기쁘게 하고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였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에게서 부여 받은 사명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제 맘대로, 제 멋대로, 제 고집대로, 제 좋은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면 안 된다. 사도의 삶이란 마치도 대사와 같은 것이다. 상대국가에 파견된 대사는 그를 상대국에 대사로 임명하여 보낸 자기 국가의 통치자에게서 위임 받은 외교적인 소임에 충실한 일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가정 형편 가운데서 태어났다. 서로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성장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르다. 서로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살아가는 환경과 수준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은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자기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야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 반대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나는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할까.
바울은 자기 자신이 사도된 부르심에 대하여 풀어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도 했다.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씀도 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영생이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 구태여 하나님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을까. 맞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고 흠과 티가 없으시고 죄가 없으시며 진리이신 분이시다. 영생이란 그러하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영원 전부터 약속해 주신 약속이시란 강조이다.
3절 말씀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제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사도들의 선포를 통하여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것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사도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오늘 날 우리들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가져야 하는 사명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직업이 다 다르고 하는 일이 다 다르지만 우리의 교회 안과 밖에서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점점 전파되어 가도록 하는데 충실하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묵상하는 월간 묵상집인 <생명의 삶> 2월 호 130면에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사는 김경수 성도의 이런 간증이 실려 있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퇴근하시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서 윷놀이를 하고 막걸리를 드셨다. 어린 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들어 버린 아버지를 손수레에 실어 집에까지 모셔 온 적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셨다. 근 1년간을 꼼짝을 못한 채로 병원에 계셔야 했다. 퇴원 후에도 차도가 별로 없어서 1년 정도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면서 나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대 기업에 입사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계속하였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긴 했지만 하나님보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주식 투자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는 부모님의 돈, 동생들의 돈, 친척들의 돈까지 빌려다가 주식 투자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강남의 그 비싼 대형 아파트 두 채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이미 주식 투자에 중독 상태였다. 헤어나기가 쉽질 않았다.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회사에서는 명예퇴직 대상으로 분류되어 퇴직하고 말았다.
실의에 빠진 나는 3년을 백수로 지냈다. 취업도 쉽질 않았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하였다. 무거운 철근을 들고 뙤약볕 아래서 일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서도 그 때 날마다 하던 일과 중의 하나가 ‘성경 말씀 아침 QT’였다. 잠언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언 28장 20절에서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았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는 말씀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 왔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직장을 잡게 되었다. 과거에 대 기업에 다닐 때에 비하면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세상 권세를 누릴 수 있는 화려한 자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에 평화가 임하고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성공과 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일상의 소중함이 너무나도 감사하였다. 과거에 크게 잃어버린 돈과 젊은 날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때면 다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그 때 내 삶이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이 내 욕심과 죄에 있었음을 다시금 기억하고는 한다.
내 힘으로는 좋은 남편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의 본분을 가르치고 구원의 길에 앞장 설수 있게 되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남은 인생,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겸손히 행하는 종이 되고 싶다.
사도 바울처럼“오늘 날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 앞에서 진지하게 대답을 찾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참아들된 디도.
사도 바울이 위대한 복음 전도자요 선교사요 목회자였다면 디도 또한 바울에 버금가는 훌륭한 복음의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 대하여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된 디도”라고 인정하는 표현을 서두에 담고 있다.
여기 “같은 믿음”이란 이 표현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렇지 않나. ‘koinen pistin' 즉 ‘같은 믿음’이란 이와 같은 표현은 성경에 이 곳에 단 한 번 나오는 너무나도 소중한 표현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그 당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자신과 디도 간의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두텁고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처럼 서로 간에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와 비슷한 내용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조금 더 보면 이렇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4-16)
이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때이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는 주간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어렸을 적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옷핀으로 손수건을 길게 접어서 왼쪽 앞 가슴에 달도록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한 줄로 반 어린이들을 데리고 다니셨다. 요즘처럼 급수 시설이 열악하던 때에 어디가 우물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인지, 어디가 화장실인지, 화장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선생님들이 근무하시는 교무실은 어디인지, 교장 선생님 사무실은 어디인지를 자세하게 안내하여 주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쓰던 어린 아이들이 커서 청년이 되고 군대에도 가고 산업의 전선에 나서고 지난 50년 동안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손꼽던 가난하고 못 살던 나라에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전시켜 왔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믿음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도우며 서로를 세워 나가야 한다.
디도는 디모데와 함께 사도 바울의 총애를 받던 동역자들이었다. 나이는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디도는 젊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주목 받던 사역자였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디도에 대하여 ‘나의 참아들’이라고 말하였다. 바울 사도와 디도의 관계가 아름답지 않나. 디도의 이름은 사도행전에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디모데 후서 등에 12번 언급된다. 디도는 헬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디도는 사도 바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분쟁에 휩싸여 성도들간에 큰 갈등을 겪을 때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직접 받아 들고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인물이 디도였다. 이처럼 디도는 단순히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의 편지만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교회의 혼란을 수습하는 평화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디도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후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도록 했던 탁월한 행정가요 목회자였다. 실로 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준 믿음의 동역자였다. 고린도후서 7장 6절과 13-14절에 보면 디도는 사도 바울과 주변의 성도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안식을 주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동역자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생활을 함께 하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다 보면 매사에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있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아굴라, 브리스가’와 같은 신도들의 이름이 나온다. 저들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사역의 열매요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그들 중에 부부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어 놓을 정도의 충성된 동역자들이였다.
그러나 간혹 그 반대인 경우의 교인들을 대할 때도 없지 않다. 사도 바울의 곁에도 가시와 같은 그런 교인들이 없지 않았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구리세공업자였던 사업가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큰 해를 입히고 떠나 버린 교인들 중에 한 사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언급한 빌립보서 4장 2절의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여신도는 빌립보교회의 골칫거리요 사도 바울의 근심이 되는 여성 신도들이기도 하였다.
그런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하며 디도의 인격을 언급하고 있다. “나의 참아들된 디도”라고 하였다. 이 짧은 표현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우리 이왕 예수 믿는 것 서로에게 그런 끈끈한 신뢰의 관계를 가꾸어 가자. 이런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그레데 섬에서의 남겨진 사역.
사도 바울은 그처럼 깊은 신뢰 관계를 갖고 지내던 동역자 디도에게 ‘나의 참아들’이라고 말하며 무슨 사역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부하고 있나.
함께 그레데에서 사역하던 당시의 남은 사역들을 잘 정리하라.
평소에 명한대로 그레데의 각 성에 장로(長老)들을 세우라.
장로(長老)될 자들의 신앙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그 당시 5절의 ‘장로’ 혹은 7절의 ‘감독’이란 사도 바울이나 디도에 버금가는 목회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세움 받는 교회의 일꾼들을 언급한 표현들이다. 저들은 모두가 교회와 성도들을 든든하게 세워 나가기 위하여 검증된 지도자들이었다. 장로나 감독의 한결 같은 특징과 공통점은 ‘청지기’여야 한다는 점이다. 7절의 ‘하나님의 청지기’란 표현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의 일을 맡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란 말씀이다.
저들의 자질과 수순과 영적 상태는 어떠하여야 한다고 했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 가정을 잘 세워나가는 자여야 한다.
방탕하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부모여야 한다.
감독(A church leader)은,
하나님의 집의 일을 잘 맡아서 일하는 ‘청지기’여야 한다.
저들은 책망 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
급히 분내는 자들이어서는 안된다.
술을 즐기지 아니해야 한다.
구타하지 않아야 한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나그네를 잘 대접할 줄 알아야 한다.
선한 행실을 좋아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의롭고 거룩해야 한다.
절제해야 한다.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굳게 잘 지키는 자라야 한다.
9절의 마지막 부분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래야 그는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을 영어 NIV 성경으로 읽다가 보면 ‘must'라는 단어가 무려 여덟 번이나 나온다. 무슨 말인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분명한 강조이다. 올해도 성경 말씀에 기준해서 훌륭한 신앙의 진보를 갖는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주 안에서 자랑스러운 신자가 되길 축원한다. 아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믿음의 삶
딛 1:1-9 / 이수영 목사
디도서는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그가 위탁받은 교회를 지도하는 데 필요한 목회적 지침을 주거나 권면하는 편지입니다. 디모데가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그리스인이었던 것과 달리 디도는 순전한 이방계 그리스도인 출신으로서 처음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때로부터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15일 간 본 후(갈1:17-19) 10여 년이 지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갈2:1). 그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 까다로운 사명을 떠맡아 바울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안겨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고후7:6-7, 13). 그는 또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수행하는 임무도 위임받을 만큼(고후8:6, 16-17, 23, 12:18) 바울의 신임이 두터운 귀중한 조력자였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본문 1절과 2절 머리 부분에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합니다. 여기서 “경건함”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믿도록 이끌고, 그들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치며,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쓰기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본문 2-3절)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것은 영원 전부터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쓰실 때가 되자 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따라 자기가 영생의 약속인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하고 가르친 모든 것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당시의 전형적인 편지 형식을 따라 편지의 수신자를 밝히고 문안합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그런데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고 한 글에서 우리는 자기처럼 디도가 믿음을 지키며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바라는 바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아들 된 디도”라고 한 것은 디도가 바울의 친아들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가 전적으로 바울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말입니다.
본문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도가 자기에게서 받은 임무가 무엇인지를 상기시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하는 것입니다.
“그레데”는 오늘날의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에게 해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입니다. 그리스 본토로부터 27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그레데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고 지중해 전체 안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섬인데 사도 바울 당시 많은 유대인이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 로마에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 두 번째로 로마에 갇히기 전 디도와 함께 잠시 여행하며 그레데에 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레데를 떠나야 했을 때 그곳의 교회를 돌보도록 디도를 거기에 남겨두고 왔습니다. 그곳의 교회들은 아마도 바울이 디도서를 쓰기 30여 년 전에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그레데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다니며 여러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곤 했는데 그곳 교회에도 복음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과 함께 마을마다 장로를 세우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레데는 해적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에는 로마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거칠고 이교적 영향이 아주 강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본문 조금 뒤인 12절에 보면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레데의 교회는 강한 영적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하도록 바울은 디도를 그곳에 남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은 일을 정리”한다는 것은 바로 그레데 섬의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는 등 교회조직을 완성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에 남아서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하게 한 사도 바울이 그에게 어떤 사람들을 장로로 세워야 할지를 일러주는 것이 본문 6-9절의 내용입니다. 먼저 6절을 봅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윤리적으로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장로는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녀들을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잘 양육한 모범적인 신앙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이 교인들의 본이 되지 않는 사람은 장로로서 교인들을 바르게 지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울 것인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계속됩니다 본문 7-9절을 계속 봅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5절에서는 “장로”라는 말을 썼는데 7절에서는 “감독”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을 사도 바울 당시만 해도 같은 직책을 지칭하는 말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굳이 차이를 둔다면 “장로”는 직분자의 성숙함과 경험 같은 인격적인 품성을 더 가리키는 말이고 “감독”은 그 장로의 역할이나 책임을 더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주인 행세를 하려는 자는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인의 뜻을 따라 집안 살림을 잘 관리하는 것이 청지기가 할 일입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 그의 교회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재산관리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잘 해야 합니다. 내 돈 아니라고 교회 돈을 흥청망청 써 대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장로로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함께 교회를 섬기는 제직이나 교회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 다루듯 하며 막말을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악한 청지기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여 남녀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던 청지기를 주인이 와서 엄히 때리고 벌한다는 말씀입니다(눅12:45-46). 그렇게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경청하고 존중하며 더 좋은 대안을 모색할 줄 알아야 장로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급히 분내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회와 교회 전체가 험악하고 살벌해지지 않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타하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이성적으로 부드럽게 인내하며 설득할 줄 모르고 툭하면 폭력이나 완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장로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않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다 말아먹거나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맙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중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위태로워집니다.
의로운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의롭게 행하지 않아서 교회 전체가 욕먹게 만드는 사람은 절대로 장로 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아무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장로가 됨으로써 교회를 명예와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회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을 장로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도 않고 그런 의지도 없는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교인들이 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장로로 세워야 하는 이유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바른 교훈”이란 건전한 교훈을 말합니다. 장로는 모든 일에 그 자신이 모범이 됨으로써 교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믿도록 이끌고, 그들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며,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은 곧 그의 전도와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믿는 것이고,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며, 영생의 소망을 갖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 그의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실하게 살지 않는 사람, 영생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장로가 될 만한 사람의 덕목으로 나열한 모든 것은 꼭 장로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들이 교인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교인이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장로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오늘 본문 6-9절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가정적으로 성실한 아내와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이 잘 믿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제 고집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급히 분내지 않아야 합니다.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구타하는 습성이 없어야 합니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행을 좋아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삶을 살도록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택하심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바울과 디도 Paul and Titus
디도서 Titus (1) 1:1-4 / 손영만 목사
도입 Introduction: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Yet not even Titus, who was with me, was compelled to be circumcised, even though he was a Greek” (갈라디아서 Galatians 2:3).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이렇게 세 권을 사도 바울의 목회 서신이라 부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디도에게 각자 섬기는 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쓴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 안에는 사도 바울이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이 로마제국의 감옥에서 임박한 순교를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그래서 이 세 서신의 연대순은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디모데전서 전체 6장을 17회에 걸쳐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디도서를 나눕니다.
디도는 비교적 잘 안 알려진 인물입니다. 디도서도 역시 잘 안 알려진 성경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주어진 정보를 통하여 우리는 최대한 사실에 근접한 디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디도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마칠 즈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열어보세요.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여행에 파송합니다. 이 둘의 선교여행의 자세한 이야기는 13장과 14장에 나옵니다. 그 둘은 먼저 13:4-12를 보면, 배를 타고 바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을 방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키프로스에서 교회를 세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13:13-52까지는 오늘날의 터키 남쪽 해안까지 배로 이동하여 육로로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1-7까지는 이고니온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14:8-19까지는 루스드라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14:20-21까지는 더베에서 교회를 세웁니다.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 총 네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네 도시를 포함하는 지역을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갈리디아는 도시 이름이 아니라, 여러 도시를 포함하는 오늘날 터키 중부지방을 부르는 당시 이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4:21을 봅시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며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바울과 바나바는 한 도시에서 먼저 유대인 회당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여 유대교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고 다음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돌아갈 때는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디시아 안디옥의 역순으로 이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23절을 봅시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를 세운 후 즉각 지도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각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은사와 사명을 가진 지도자가 드러날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며 교회의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이 일을 마친 후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27-28절을 봅시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회당을 통하여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임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3:16-41이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에서 나오는 회당 설교의 전형입니다. 이 중에 한 절만 본다면, 39절을 봅시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유대교 회당에는 주로 유대인 출신 유대교도와 이방인 출신 유대교도가 있었습니다. 이방인 출신 유대교도는 할례를 받은 정식 신자와 할례는 받지 않고 예배만 참석하여 말씀을 듣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에는 유대교 회당에 있던 이방인 유대교 신자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15장을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형제들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우리는 유대에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방인 출신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한 이 사람들을 “유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출신 제자에게 가르친 것과 정확하게 반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안에 많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에게 보내기를 결정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도록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합니다.
그 반응이 무엇일까요? 5절을 봅시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파에도 속해 있고 동시에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예, 사도 바울도 바리새파 출신 사도입니다. 그러나 이 유대주의자들과 바울의 입장은 분명하게 달랐습니다. 이러한 다툼과 혼선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지도자들의 회의를 엽니다. 그리고 결정사항을 편지로 써서 바울과 바나바와 일행이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그 편지의 핵심 내용은 28절에 나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즉, 몇몇 음식 규정을 지킬 것과 음행을 피할 것 외에는 어떠한 유대교 율법의 짐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인 출신 제자들에게 지울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디도는 언제 나오나요? 디도가 언제 사도 바울과 처음 만났는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15:2에서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그중 몇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고 했지요? 이제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5장의 회의 후에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직전에 갈라디아의 네 교회, 즉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의 제자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보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이 안디옥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지방까지도 와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기에 그에 대한 시급한 대응을 편지로 써서 보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7절은 35년경에 다마스쿠스에 거의 다다른 도상에서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가던 사람이 예수를 만나 그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2:1을 봅시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여기 십사 년 후는 35년에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그의 사도가 된 후 14년이 흐른 49년을 의미합니다. 제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세 번째로 방문하여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게 된 사도행전 15장의 이야기를 반영합니다. 15:2에서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그중 몇 사람을 보내기로 했다고 했지요? 그 몇 사람 가운데 바로 디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갈라디아의 네 교회에 디도를 꼭 집어 이야기할까요?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1차 선교여행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했음을 말합니다. 3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한 생생한 예로 디도를 예루살렘 회의에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아마 디도는 안디옥 교회 출신이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자체가 최초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결과로 탄생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1:19입니다.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 유대교도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이 상태로만 끝났다면, 오늘 우리는 이 복음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키프로스 섬 출신 그리고 키레네 출신 유대인이었던 그리스도인이 처음으로 인종의 벽을 넘어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교회에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도 바울을 불러와 안디옥 교회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디도는 이 안디옥 교회의 배경으로 회심한 순수한 이방 헬라인 출신 그리스도교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왜 디도에 집중해야 할까요? 디도는 신약성경에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 순수한 이방인 출신 사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의 혼혈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유대인 세계에 접근하기 좋도록 자신의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누가는 순수한 헬라인이었지만, 그는 아마도 할례를 받은 헬라인 유대교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디도는 분명히 할례를 받지 않았기에, 유대교 회당에 참석하던 이방인,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안디옥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교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왕국은 인종이라는 벽을 넘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몇 주일 동안 디도서를 나눕니다. 오늘은 디도서 1:1-4에서 “바울과 디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 “Paul, a 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1-2).
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1 Paul, a 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for the faith of God’s elect and the knowledge of the truth that leads to godliness -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에 나오는 대로 로마 황제에게 항소한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합니다. 이때가 60년 초 정도입니다. 처음 2년을 자기 돈으로 세를 내고 머무는 집에 구금됩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고 유죄가 인정되어 황제의 감옥에서 죄수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죄수 생활은 그렇게 길지 않아, 62년경에 석방됩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디모데 그리고 디도와 함께 사역합니다. 그는 에베소 지역의 교회를 위하여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둡니다. 그리고 그에게 쓴 편지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입니다. 이 기간에 또 바울은 디도와 함께 크레타섬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디도를 그곳에 남겨둡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처음 만난 해가 48년경이고, 그와 함께 크레타 선교를 한 것이 64년경이라면 이 둘의 관계는 이 시점까지 16년 이상 지속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디도서 1:5를 봅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크레타섬은 여러 도시가 발전한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단원 가운데 디도를 크레타섬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제1차 선교여행에서 적용했던 원리를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교회 안에서 은사와 소명을 따라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을 장로, 즉 목회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디도서는 디도를 크레타섬에 남겨둔 사도 바울이 그에게 할 일과 마음가짐 그리고 주의 사항 등을 서신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제 1절을 봅시다. 편지를 보내는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먼저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고 또 전하는 복음의 군사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로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것,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 영생의 소망을 주는 것으로 깨달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과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으로 인하여 믿음이 서고, 경건한 지식을 배우고, 영생의 소망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 지식, 소망의 단계적 발전을 어느 정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고 배우고 바라는 것입니다.
2. 영생이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2 a faith and knowledge resting o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does not lie, promised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이제 2절을 봅시다. 우리가 갖는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창세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가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나의 믿음과 신뢰를 예수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택하심이 원인이고, 내가 믿는 것이 결과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세 전에 택하셨음이 바로 내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자신에게가 아니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 둡니다.
2.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 “the preaching entrusted to my by the command of God our Savior” (3).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3 and at his appointed season he brought his word to light through the preaching entrusted to me by the command of God our Savior.
이제 3절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구주 하나님께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한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에게 전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됩니다. 전도는 예수 이야기를 하여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하나님 왕국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하나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의 지혜를 굴복하고, 자신이 미련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복음이 곧 전도의 미련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이 혐오하고, 헬라인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주 하나님은 먼저 전도로 구원한 사람이 전도하게 하여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십니다. 우리도 이 연쇄적인 전도, 구원, 전도,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3.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 “Titus, my true son in our common faith” (4).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4 To Titus, my true son in our common faith; Grace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Savior.
이제 4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의 편지를 받은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고 부릅니다. 이로 보건대, 디도도 디모데처럼 사도 바울과 한 세대 정도 나이 차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육신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불렀고,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고 불렀습니다. 전도와 구원과 지식과 소망을 공유하고 주 안에서 사도와 제자의 관계를 형성한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디도는 이렇게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이가 있고, 우리가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바울은 누구이며, 우리의 디모데와 디도는 누구입니까? 이 영적인 재생산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 이 영적 재생산의 생장점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Conclusion: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The reason I left you in Crete was that you might straighten out what was left unfinished and appoint elders in every towns, as I directed you” (디도서 Titus 1:5).
사도 바울과 함께 크레타섬에 방문하여 함께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사람 가운데 바울이 디도를 지목하여 사명을 주고 그곳에 남겨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디도는 그만큼 바울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디도는 그만큼 능력과 사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세월 속에서 바울과 디도 사이에 그만큼의 신뢰가 쌓였다는 것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오늘 여기서 저와 여러분을 신실하게 여기셔서 맡기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한 주간이라는 삶의 여정을 이동할 때, 우리가 살아내는 삶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는 삶입니까? 인간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의 지혜에 순복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영생의 소망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왕국 백성의 삶입니까? 이제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과 삶으로 드러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겠다는 귀한 고백을 드립시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을 돌려주라
딛 1:1-4 / 박조준 목사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고 자손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고향 을 찾는 것은 귀소본능(歸巢本能) 이라 하고 자손을 찾는 것은 자기 연장(自己延長)의 본능(本 能)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자손은 없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바 울의 육신의 자손에 관한 아무런 단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바울에게 영 적인 자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에 육신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기를 때 쏟는 정성 이상으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영적인 자녀 들을 통해서 그의 신앙을 계승하는 일이 바울의 생애 가운데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유산 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바울 은 여기서 디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참아들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 이 나의 아들 , 참 믿음의 아들 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디도 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의 편지 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1장 2절을 보세요.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10절을 보세요. 바울이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오네 시모입니다. 이 오네시모를 바울은 어떤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 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이 성장하도록 양육한 사람들을 이렇게 자 기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문자 그대로 전 세계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한편, 바울은 자신이 특별하게 신앙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 의 사역은 그의 사후에도 영광스럽게 계승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계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를 생각하면서 저 분은 내 믿음의 어머니셨는데. 저 분은 나의 믿음의 아버지 였어. 라고 말할 분이 우리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냥 형식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신앙이 그 들에게 충격과 감화를 주어 저절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그에게 전도하고 신앙적인 격려와 권면을 아끼지 말아야 합 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의 신앙을 전폭적으로 전수받아 그들을 가리켜서 가히 내 믿음의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계승입니다. 믿음의 계승은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디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 하게 되는 디도서 1장 1-4절은 말하자면 디도서의 서론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누리던 삶의 특권에 대한 바울의 자부심과 그 특권을 계승시키고자 했던 디도에 대한 바울의 기대와 부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의 특권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하 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 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 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그 어마어마한 신분상의 특권이 담겨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종 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 이 이 편지를 쓰던 때는 전 세계가 말하자면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많아서 로마에서만 해도 노예의 수가 로마시민의 네 배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종 들이 흔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종의 신분이면서도 누구의 종이냐 하는 데 따라서 신분 이 결정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카이사르의 종쯤 되면 어깨에 힘을 주고 돌아다닐만 했습니다. 이런 때에 바울은 자기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살 아계신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의 종이다.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종 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 게 유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은 자기 자신의 인권이나 자유를 몽땅 박탈당하고 주인에 의 해서 조종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나는 하나님의 종 이라고 말할 때 이 종이라는 말을 자기 비하의 의미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대단한 자부심에서 하나님의 종 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 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한 자입니다. 억지로가 아니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 의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자원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것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그 분을 대표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신(使臣) 인 것입니다. 다른 데 보면 그리스도의 대사(The ambassador for Christ) 라고 했습니다. 이것 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엄청난 신분상의 특권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대사라면 그 특권이 얼마나 큽니까. 그 나라, 그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입 니다. 가령 우리 나라와 국교를 맺은 여러 나라의 대사가 와 있습니다만 어느 나라 대사가 가 장 우리 나라에 영향력을 크게 끼칩니까? 그것은 물론 미국대사입니다. 왜요? 가장 관계가 깊 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미국의 대사 정도가 아닙니다.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바울 은 이것을 특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특권도 특권이지만 이와 같은 특권이 어떻게 바울에게 주어지게 되었나 하 는 것을 오늘 주신 말씀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바울도 그 재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사울이란 사람에서 바울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바울 이 말하는 재산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믿음의 재산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모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 는 같은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주신 말씀에서 자신의 믿음을 자기만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택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계승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래 서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4절에 보면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 리로 하여금 복음 앞에 응답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 로 믿게 한 그 믿음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계승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복음에 기초를 둔 믿음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가질 수 있는 재 산인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믿음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식의 재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그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경건함에 속 한 진리의 지식 이라고 바울은 밝혔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다 우리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식이 진리의 지식이어 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식을 진리의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만 족치 않아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이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의 뜻에 더 가깝게 말하려 면 경건함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 이라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지식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이 목회서신에서 경건 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진리의 지식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경건에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지식입니다. 경건은 구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경건 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경건이라고 말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세속에 빠지지 아니하 는 사람의 생활을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한자(漢字)가 우리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한 것 같습니 다. 영어에서는 경건이란 말을 godliness 라고 하는데 하나님 같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닮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은 인격, 혹은 삶이 바로 경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 리의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 그 분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를 해야 하는 그런 진리의 지식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경건을 강조 합니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바로 이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7절에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고 말했습니다. 셋째는, 영생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이 소유한 재산 중에 이보다 더 큰 재산 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당신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 세상을 떠나도 하나 님 앞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교만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요? 영생을 얻고 못 얻는 것은 하나님이나 아실 일이지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 1서 5장 13절을 펴 보시겠어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 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 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곧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가진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고 성경 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 더 교만합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믿고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 중 에 하나가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이 영생의 소망을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 나님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아 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나의 참아들 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디도를 얼마나 사 랑하고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계승하려 면 사람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나의 디도, 나의 디모데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 를 택한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선택이었나 하는 것은 디도서를 공부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 바울은 그의 다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에 게 권한 이 믿음은 너에게만 머물러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렇게 디모데에게 물려주었던 그 믿음 이 디모데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또다시 물려주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했습니다. 전도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하지만 제 자로 훈련하는 것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충성되지 못한 사람에게 정력을 쏟아 양육해 보았자 그것이 오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디 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디도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 바울은 그레데섬에 있던 교회를 디도에게 맡 겼습니다. 교회를 맡길 정도로 바울은 디도를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디도와의 관계를 알아보면 바울은 처음부터 디도를 아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서 2장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 상당한 시간이 흘러 본격 적으로 전하게 된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절에 보세요.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했습니다. 바울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자고 했습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사도 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떳떳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신임을 묻기 위한 중요한 여정에 바나바와 디도를 동반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디도를 신뢰했 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디도는 바울이 전도해서 처음으로 믿게 된 사람이었을 거라고 말합 니다. 바울이 그렇게 신임할 수 있었던 디도에게 사역을 맡겼던 것처럼 우리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믿음이 제대로 계승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 요한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신임을 받아 하나님이 마음놓 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디도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을 믿지 않으 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 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디도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 일에 중재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면 양쪽을 왔다갔다하면서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치고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과 고린도 교 회 사이에서 아주 아름다운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3절을 보세요.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 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했습니다. 디도라는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왔다는 기록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 말이 위로 라는 말과 기 쁨 이라는 말입니다. 디도는 위로의 사신이었고 기쁨의 사신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풀어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도가 있으면 모든 일이 기쁨과 위 로의 사역으로 아름답게 변해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디도는 매사에 긍정적이었습니 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사람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3. 디도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6절 이하를 보세요.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는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 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다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을 걷는 일을 위해서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그 일을 잘해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가서 돈을 부탁 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헌금을 하게 하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일이면서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일을 디도가 자원해서 한 것입니다. 어려운 일, 남이 피하는 일을 자원할 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디도를 특별히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이 그레데 교회의 사역을 디도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도는 복음 사역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요구됩니다. 이처럼 믿을 만하고, 긍정적이고, 용기있는 디도를 향한 바울의 기대 또한 컸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라고 했습니다. 그레데 교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잘되는 부분도 있었고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방면에 관해서는 그 부족한 것을 바로잡아 교회가 더욱 온전해지고 성경적인 교 회로서 나갈 수 있도록 애써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디도서에서는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많 이 담겨있는 것은 볼 수가 있습니다. 왜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두었습니까?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 당시 장로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를 같이 불렀 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도자가 한 번 잘못되면 그가 이끄는 교회가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이렇게 중요한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책임을 디도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성경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디 도서 1장 16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그 행위가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는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기도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보면 그들 이 고백한 신앙과는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입술로 시인한 하나님을 행위로 부인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실제적 무신론자가 교회에 얼마 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인은 많은데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디도 서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선한 일 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얼마만큼 선한 일에 자신을 드리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말 주님의 선한 일에 예비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 해야겠습니다.
영생의 소망으로 인내합시다
딛 1:2-3 / 강성찬 목사 / 새문안교회
어느 주일날 아침에 한 젊은 소경이 '나 그대 위해 기도하네'라는 아름다운 독창을 했습니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 회중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께서 그 젊은이가 소경된 이유를 말해주셨습니다. 그가 열 살 때 예수를 믿지 않던 그의 아버지는 주일 날 그를 데리고 사냥을 떠나면서 "주일날 사냥 간다고 나뿔건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한 곳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아들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쫓던 다람쥐꼬리를 보자 총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람쥐꼬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람에 날리는 자기 아들의 머리카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쏜 것입니다. 아버지는 크게 놀라 울부짖는 아들을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의 생명은 건졌으나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만일 내가 주일날에 사냥을 가지 않았으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을!"하고 한탄했습니다. 그 아들은 부흥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으며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 아들의 감화로 말미암아 41명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소경된 것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면 나는 소경으로 살아난 것이 기쁘다."그 소년은 자기 눈을 희생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갈보리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예화뱅크- 영생)
영생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최종 종착지로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천국의 삶을 말합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는 한 해를 살면서 이달은 영생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달입니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짓이 없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거짓이 없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합니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경건은 영생으로 인도하여 주며 영생에 대한 소망과 확고한 기대를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그의 신실한 약속에 전 소망을 두고 있는 믿는 자들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히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합니다.
펜실베니아의 창설자인 윌리암 펜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매우 친했습니다. 인디언들에 대한 호의와 친절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은 농담으로 하룻 동안에 도보로 통과하는 모든 지역을 다 그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펜은 해가 지평선에 떠오르자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늦게 까지 걸었습니다. 그의 여행이 끝나자 인디언들에게 찾아와 그 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그 말을 진지하게 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가 통과한 땅들을 모두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필라델피아시의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윌리암 펜은 단순하게 인디언들의 말대로 실행하므로써 광대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예화 뱅크-인디언들의 신실한 약속)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한 말씀이라도 어기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분명히 허락 하실 줄 믿습니다.
영생은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짓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영생의 복을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히 계십니다.
(눅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합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영생이 약속의 확실성과 그 약속이 오래 전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즉 오래 전에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살후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고전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2차 대전 때에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큰 죄를 범했는데 거기 숨은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2차 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히틀러는 만반의 전쟁준비를 갖추고 먼저 유대인들을 예비 구속했다고 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갇혀 있는 곳에 히틀러가 나타났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죽인다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공포에 쌓여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웃었습니다. 히틀러가 "너는 왜 그렇게 웃느냐?" 했습니다. 그 노인은 나이 많은 랍비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을 죽이려는 시도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유대인을 멸절하려 했으며, 70년에 디도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멸절하려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앞으로도 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반드시 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히틀러 역시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그 예언을 한 때로부터 꼭5년 끝에 히틀러는 베를린의 포위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살아남아서 주후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유대인들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던 그 랍비의 말대로입니다.
영생은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니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영생은 자기 때에 전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십니다.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에 약속하시고 이루셨으나 우리 개개인은 복음을 듣고 거듭 날 때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오래 전에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습니다.
자기 때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생애를 통해서 인류에 대한 구원 계획을 계시 하신 결정적인 때를 말합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적에 희미하게 윤곽만 제시하셨던 그의 약속을 때가 되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습니다.
자기의 말씀이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신 구원에 관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 하시면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정해진 특정한 시간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은 바로 그의 사도들을 통한 전도였습니다.
소위 미련한 방식으로 일컬어지는 복음 선포로 구원의 진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합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하이오 주의 한 도시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들은 675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읍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85% 정도의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선한 일생을 살므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런가 하면 단지 성경을 읽음으로써 천국에 갈수 있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더우기 무엇을 믿든 간에 자기가 믿는 것을 굳게 지킨다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대답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거듭남” 곧 갈보리의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못 박아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통이라고 하는 분만실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신자니까”라고 하는 식으로 교회 일원이라는 분만실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선행이라는 분만실에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태어나는 것은 갈보리에서입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믿음 가운데 서서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 탄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전도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존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말씀을 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 하에 있었을 때 평야 네거리에 매일 같이 나타나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처럼 "예수 믿고 천당"을 외쳤던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최 봉석 목사로 어떤 날 서문통 거리에서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는데 교통순경이 "왜 밤낮 떠들고 야단이냐?" 하며 전도를 제지하려 했습니다. 이때 목사는 "나만 떠듭니꺄? 자동차들도 떠들고 있지 않소?" 하며 맞장구 쳤습니다. 그러자 교통순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동차는 사람들 치지 않으려고 경적소리를 내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이에 목사님은 "나는 사람들 지옥가지 말라고 전도하는 거요"라고 했다. 교통순경은 그를 경찰서롤 데리고 갔으나. "귀챦고 시끄럽고 할 수 없는 영감이니, 속히 내보내라"고 하는 상관의 말에 따라 그냥 보내주었다고 합니다.(예화뱅크)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구원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총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총살시키기 전에 "너는 위대한 그리스도인 설교자다. 죽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한 번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 농담조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45분간 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공산주의 병사들은 다 가버리고 그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풀려났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말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고 그리스도교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병 같은 무서운 피부병에 걸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부인이 그녀의 집에 와서 "예수님이 당신 집에 찾아 오셔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병을 치료해 주시고 당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말을 하고 그 집을 도망치듯 떠나갔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 말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아들에게 이 부인에게 가서 좀 더 말을 해 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회심하였습니다.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3일 만에 피부병이 나았고 5일 만에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에 감동 되어서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사랑스러운 유능한 아내는 약 2백 명의 농아들이 있는 농아학교를 대구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여인이 병 걸린, 눈이 안 보이는 여자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 여인이 회심을 하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본 그녀의 아들이 회심하였습니다. 그가 자기를 쏘아 죽이려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담대하게 거침없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자들이 그의 설교에 사로잡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농아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합니다. 한 겁 많은 여인의 전도가 이러한 결과를 이루어 놓았습니다.(예화뱅크)
구원의 역사는 영생의 열매입니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신실히 이행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도 신실히 이행합니다.
미국 하워드 장군은 신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가 서부 해안 지구 사령관을 맡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전을 축하하는 환송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초대장을 보냈고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모든 준비를 다 끝내 놓고 맨 마지막에 그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난 후 그들은 장군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선약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사실은 수요일 밤에 다른 약속을 미리 해두었네.""하지만 이 사람아, 이 날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할 테니 다른 약속을 취소하게." "나는 기독교인이며 교회 신도중 한 사람이네. 내가 교회와 일체가 되었을 때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는 꼭 주님을 만나겠다고 약속했다네. 세상에서 이만큼 중요한 약속을 깨뜨리게 할 자는 없네."하는 수 없이 친구들은 만찬회를 하루 연기하여 목요일 밤에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을 존경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그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기도의 비밀을 알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받았습니다.(예화뱅크)
영생은 거짓이 없으니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으로 개개인은 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들으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영생의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디도서 1:4-5)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케네디가 저격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인상 깊은 연설이 있습니다. 케네디는 그 연설에서 우리 모두가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둘째, 당신은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셋째, 당신은 당신의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넷째, 당신은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을 하였습니까?”
그는 이 연설에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는지, 아니면 타협하면서 비겁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명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내가 맡은 일에 성실을 다했는지, 그리고 그 일에 전적인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를 물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는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처한 상황에서 용기있게, 지혜롭게, 성실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하며 섬기는 사명자들을 사용해서 역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힘들고 어렵다 하여 불평하고, 피하거나,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2. 믿음의 아들 디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환경에 홀로 남겨진 채로 사명을 부여받는 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디도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디도서는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 디도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디도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었지만,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또한 바울의 믿음 안에서의 양육을 통해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향해 오늘 본문 4절에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디도는 바울이 힘들고 어려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줄곧 따라 다니며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종 그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바울이 특별히 어려울 때에 늘 그와 함께 동행 한 사람이 바로 디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에도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그 회의에 참석을 하였고(행전 15장),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꾸짖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디도를 통해서 그 중요한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 2:4).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방지역에 있던 교회들의 구제헌금을 모아 어머니 교회(mother church)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하는 일도 역시 디도에게 맡겼습니다(고후 8:16-17).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디도는 분명히 바울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8:23에서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디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디도는 바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3.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그런데 이토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보내면서 바울은 그 보낸 이유를 오늘 본문(딛 1:5)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1) 그레데란 어떤 곳인가?
부족한 일을 바로잡다니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바울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레데라는 곳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레데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오늘 디도서 1장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레데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헛된 말을 하는 자가 많은 곳이라 했습니다(10절). 속이는 자가 많은 곳이라고 했습니다(10절). 특히 할례당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곳이었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1절). 뿐만 아니라 가정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11절). 한마디로 그레데는 악명 높은 곳이요, 참으로 골치 아픈 곳이요, 문제가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술꾼들이요, 무례하고 거만하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이고, 거짓말을 잘하는 자들이고, 탐욕스런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 “크레티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거짓말하다” “속인다”는 뜻인데, 그레데가 바로 이 “크레티조”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그레데라는 호칭 자체에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만 보아도 그레데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딛 1장 12절에서 말하기를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 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대의 저술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탐욕과 허세가 그레데 토양에 본래부터 뿌리 내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어떤 식으로 수입을 얻든 상관하지 않는 유일한 백성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일한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레데의 현실을 볼 때 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디도야, 내가 너를 그 문제 많은 곳에서 데리고 나온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맞을 것 같습니다. “디도야, 내가 너를 그 악한 곳에서, 그 골치 아픈 곳에서 데리고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정 반대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고, 문제 많은 그곳에 너를 남겨 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도 이것에 대해서 불순종하거나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왜 이런 곳에 둡니까? 좀 좋은데 두지” “왜 나를 이렇게 골치 아픈 곳에 두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문제 많고 힘든 곳에 두십니까?” 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오늘 아침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오늘 칭찬과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세상의 악한 것들, 더러운 것들만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그곳에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그레데에)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2) 그레데에 남겨두신 이유
남은 일을 정리하기 위함(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디도는 문제 많은 그레데 섬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둔 데는 이유가 있는 데, 그것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언젠가 그레데 섬을 방문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데에 있는 교회는 여러 가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고, 미완성된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남은 일이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레데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9-10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에는 우선 처리해야 할 거짓 교사들과 할례당의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14절)를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14절에서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그레데 교회는 교회를 계속해서 든든히 세워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기둥 같은 존재들인 장로들, 즉 교회의 지도자(leadership)들을 세우는 일도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고 곧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아직 세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곳에서 장로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한다(6절). 혹은 감독(오늘의 목사)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7-9절)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1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레데 교인들 가운데는 믿음의 실천을 가르쳐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지적하는 바대로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16)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16)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도는 바로 이런 부족한 모습들, 남겨진 문제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문제 많은 그곳에 남겨진 것입니다.
3) 우리의 그레데: 조국,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가정과 일터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조국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와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무게중심을 잃어버린 체 흔들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와 사상 면에서 온 나라가 좌우로 양분되어 6.25 때보다 더 심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저 이북에서는 세계현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3세대 부자세습을 위하여 계속해서 장거리 미사일과 핵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20대 태반이 백수(이태백)로 지내고 있는 청년실업문제를 비롯하여, 계속되는 경제 불안으로 인하여 우리는 지금 모두 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도 매일같이 35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 많은 한반도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바로 그레데가 아닌가요?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교회까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실망을 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큰 교회들은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세습을 하면서 교회를 마치 목사 개신의 사유재산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큰 교회들이 리더십의 바톤 터치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power 게임을 하다가 분란이 생겨 교회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다 못해 교인들끼리 서로 폭력을 가하는 모습이 TV 등의 언론매체에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가 되어 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는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중보기도를 해도 부족할 판에, 교회는 오히려 자기모순과 자기만족에 빠져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는 가정과 일터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의 실직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들로 인하여 한숨짓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 젊은이들은 진로문제로, 직장문제로, 직장에서는 인간관계로 인하여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가족 간의 불화로, 가족 가운데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누워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우리 집에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탄식하며 한숨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미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오늘 문제 많은 가정에, 일터에, 한국교회에,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께서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악한 것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한 곳에, 아들처럼 사랑하는 디도를 남겨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음성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통해 문제 많은 곳에,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곳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정의 아픔과 일터의 문제와 한국교회의 문제와 이 나라와 민족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바로 이곳에 부르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그레데의 현실에서, 즉 한반도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 가정의 어려운 상황에서, 나의 문제 많은 일터에서, 그리고 내가 처한 문제 가운데서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는가?”라고 원망도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문제 많은 곳에 나를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문제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가 있으면 회피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부담이 되면 먼저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히려 문제 가운데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연, 아니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사상을 철저히 믿고 고백하는 청교도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 속에서, 그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이 내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곳에 두셨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어려운 상황에 두셨는지를 오히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간에, 문제 많은 그곳에서 그 문제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곳에 두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명의식이 있는 자를 우리 가운데서 부르고 계십니다.
4. 주기철 목사님의 예
하나님께서 나를 고통스러운 곳에, 문제 많은 곳에 두신 이유가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온갖 종류의 고난과 시련을 견디고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고문 끝에 순교하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닙입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실로 문제 많은 그레데에 남겨진 디도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일제의 강점 아래서 7년간 5차레 감옥에 드나들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순교하셨습니다.
일제의 형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목사님에게 매질을 하였고, 매질이 지루해지면,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둘러 때리면서 “비행기 타는 맛이 어떤가?”(비행기 타기) 물으며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전기 고문에 고추가루 주전자를 강제로 들이붓기, 손톱 발톱을 대나무 바늘로 후벼 파기 등의 온갖 종류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언젠가 저의 선친께서는 할아버님께서 할머니에게 하소연 하듯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고 제게 말씀해 주셨는데, 할아버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잠을 안 재우며 괴롭히는 고문이요(정신이 몽롱해져서 신사 앞에 절을 하겠더라는 것), 또 하나는 사람을 널빤지 위에 눕혀 놓고, 사지를 묶고, 아랫도리를 벗긴 다음 알코올에 적신 탈지면을 심지로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는 고문이었다고 합니다. 주 목사님은 그런 고문을 당하실 때에는 살이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도리를 저며 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와서 기절을 하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주님, 차라리 제 생명을 빨리 거두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통증에 소변을 잘 볼 수가 없어서 감옥 안에서 변기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문은 계절도 없이 7년간 계속되었는데, 특히 겨울에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세월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할머님이 면회를 가셨는데, 솜을 두둑히 넣은 저고리와 바지를 받으시다가 목사님이 낯을 찡그리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발 옷 속에 솜을 넣지 마시오”
“그러면 이 추위에 솜 두지 않은 옷으로 어떻게 견디시려고 하십니까?”(할머니)
“내가 일일이 설명을 해야만 알겠소? 입을 열면 엄살이 될 것 같아서 말하기 싫었소. 고문이 끝난 뒤에 돌아올 무렵이면 내 옷은 피에 흠뻑 젖는 게요. 그 피가 두툼한 솜에 스며들어 마르지를 않소. 피에 젖어 축축한 옷 밑에서 터진 살이 자꾸 곪으면 고름이 흐르고, 피와 고름이 섞여 얼어붙으면 그것이 칼처럼 다시 살을 찢어서 그래요. 고문 끝에 기절하면 일제가 양동이로 찬물을 끼얹는데, 그 찬물이 옷에 배어서 피와 고름이 함께 얼어붙으니 나는 옷 얼음판 위에서 떨게 되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마시오.
내 한 마디 더하리이까? 고문 끝에 감방으로 돌아가면 간수가 하루 두끼 밥을 넣어 줍니다. 손바닥 만한 식구통에다 밥을 끼어 주면 그것을 내려다가 먹어야 해요, 때때로 단식을 해서 목숨을 단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기에 그럴 수도 없었소. 그러나 그 밥을 먹으려면 뭉그러진 내 육체를 바로 세울 수가 없어서 언제나 기어서 다가가야 하오. 그럴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쓸리는, 피가 엉긴 체 얼어서 뻣뻣한 옷이 내 상처를 다시 쑤셔 놓아 그것이 터지고, 피고름이 흘러서 밥을 먹는 고통이 또 하나의 고문이 되고 마는 거요.
그러니 제발 솜을 넣지 말라는 것이오. 솜을 넣지 않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 버릴 것이고, 그들이 물을 끼얹어도 나중에 쉽게 마를 테니,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것이 나을 것이오. 미안하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했건만 당신이 여기 형편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득불 설명을 했소”
목사님은 평소에 감옥에 있을 때에도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수갑이 채워지고, 그 수갑에다가 쇳덩어리를 달아 맨 쇠사슬이 매어있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도 쇠사슬에 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쇳덩어리가 매어 달린 쇠사슬은 천근 무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움직이려면 뼈만 남은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이 되어 식구통에 끼워 주는 밥 덩어리를 먹으려면, 그 무거운 쇳덩어리와 쇠사슬로 묶인 몸을 이끌고 문이 있는 자리까지 기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그 고통 중에 어느 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배고픔을 견디는 편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굶는 편을 택하려고 했던 자신의 생각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아직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쇳덩어리의 무게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메어 달려 겪으신 고통의 무게에 비하랴?”
그래서 그는 한 뼘 또 한 뼘 그렇게 콩밥을 향하여 앞으로 갔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단축하려는 내 의자가 있었다면 그것도 주님 앞에는 말할 수 없는 죄악이다. 이 밥은 일본이 주는 밥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밥이다. 이 밥을 먹는 것이 성찬이다. 이 시간은 일본이 내게 주는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시간이다. 이 밥을 먹고서야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는 기념하라’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주님의 뜻은 주님께서 겪으신 모든 것을 잊지 말고 간직하라는 뜻이다. 예수님, 그분이 겪으신 수치를 기억하기 위하여 나는 이 밥을 먹는다. 예수 그 분의 참혹한 처형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내 영혼과 내 몸에 새겨 넣기 위하여 나는 이 쇠사슬을 이끌고 밥을 향하여 나아가며, 개처럼 혹은 다른 더 천한 짐승처럼 이 밥을 먹어야 한다.
오, 주님, 나 같은 것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다니...나 같은 것이 주님의 그 치욕에 감히 참여하게 하시다니”
이렇게 고백하며, 그 분은 쇠사슬과 쇳덩어리에 짓눌려 뼈를 으스러뜨려 가면서 밥 덩어리를 입으로 물고 한입 한 입 베어 물어 눈물과 함께 그것을 씹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생애를 더듬어 자신에게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한번은 일제가 회유작전으로 3일간 가석방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할머님께서 목사님에게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승리하셨겠지요?” “사흘 말미 뿐이오”
“그러시면 다시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어머님, 아이들 걱정은 마시고 다시 가셔서 신앙을 지키시고 순교하십시오. 목사님은 조선 교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맡으신 일은 그 뿐입니다. 조선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실 의무를 주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조선교회가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결코 살아서 이 붉은 벽돌을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언젠가 할머님께서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저희 선친께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내가 말하고 있었으나 내 귀에 들리는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준비된 말도 아니었다. 마치 누가 시켜서, 써 준 문장을 읽듯이 술술 흘러나오던 그 말은 내 의사요, 내 뜻이 아니었다”
성령님께서 그 순간 할머니를 통해서 목사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때 할머니께서는 울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다만 몇 일이라도 제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이 곤욕을 대신 치르고 싶어요, 목사님,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내일 모레 다시 들어가셔야 한다면 다시 가셔야지요. 목사님이 일본 앞에 두 손을 드시는 것은 산정현 교회의 패배요, 조선교회의 항복입니다. 아니지요. 조선 그리스도인 전부의 항복입니다. 이제는 누가 무어라 하여도 목사님은 일본 천황과 영적 전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아 싸우십시오”
그리고 목사님도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고백하시고, “내 결코 살아서 이 빨간 벽돌을 나가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셨고, 마침내 그는 7년 동안의 모든 고문과 고난을 견디고 순교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분의 시신을 모시고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는데, 그 때 저의 할머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기도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나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그리고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만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해 가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만 할 시간에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죽음을 택한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우리가 당당히 누리려면 이제부터 정작 기도해야 합니다.
조선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소리내어 울지 마십시오.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과 오정모 사모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장에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곳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너져가는 조선교회를 끝까지 떠받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힘들다고, 무섭다고,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고 고백하고, 그 길을 따라 감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나를 여기에 남겨두신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문제 많은 곳에서 도피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디도처럼,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이신 주기철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5.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문제 많은 우리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 조국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은혜들을 바르게 간직하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통해서 부족함을 채우시기 위함이다”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사명자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사명자가 되어 부족함을 채우는 자들이 됩시다. 그 결과 모두가 다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새문안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부족함이 채워지고, 남은 일이 정리되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말미암아 할일 많고 문제 많은 우리 조국과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다시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있어 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 교회 성도들이, 너희는 나의 동료요, 나의 동역자요, 교회의 사자요, 나(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고 말입니다.
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
디도서 1:4-6, 사무엘하 16:9-14 / 안효관 목사
한 해경 함정에 12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12명 중에 한 명은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함정이 바다에 나가 있을 때에도 홀로 새벽제단을 쌓을만큼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배를 타는 승무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결국 승무원 12명 중 10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가질만큼 열심이 있었고, 매 주일마다 목사님을 초청해서 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해경 본부에서 그들 모두에게 전근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헤어진다는 섭섭함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좌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기도한 자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갚아주시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근하지 얼마 되지 않은 1974년 6월 28일에 기가 막힌 사건이 터졌습니다. 해경 813함정이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해경 813함정은 바로 그 10명의 승무원이 몇 일 전까지 근무했던 바로 그 함정이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배치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종종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당할 때에는 왜 그 일을 내가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디도'도 그랬을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언제 디도와 함께 '그레데'라는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지, 그리고 디도를 그곳에 남겨두고 언제 그 섬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바울이 어디로 갔는지, 이런 것들은 밝힐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과 디도가 그레데 섬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지자 바울은 그레데의 모든 일을 디도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레데에는 디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레데는 지중해 한 가운데에 있는 제법 큰 섬입니다. 그런데 그 섬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섬이라 하더라도 섬은 섬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곳도 아닙니다. 비록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하더라도, 디도가 그곳에 남게 되었을 때에는 상당히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왜 바울 사도가 나를 이곳에 떨어뜨려 놓았는지?" "사도 바울이 평소에는 나를 아들처럼 사랑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나를 미워해서 귀양아닌 귀양을 보낸 것은 아닌지?" 아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차에 사도 바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에서 '왜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 놓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 '네가 미워서 그 섬에 남겨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를 그레데 섬에 남겨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란다. 너 밖에는 그레데 교회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너를 그곳에 떨어뜨려 놓은 것이란다.'
다시 말하면 디도가 그레데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거기에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 좋은 곳에 있기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봉사하는 곳, 내가 섬기고 있는 그 자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맡겼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게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자리나 이 일보다도 다른 일이나 다른 자리가 자신에게 더 맞을 것같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 곳에 서게 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를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를 "참 아들"이라고 부를만큼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를 믿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8:23절에서는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디도를 '동무'라고, 또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표현할만큼 신실한 일꾼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만큼 디도는 바울에게서 많은 사랑과 신임을 받았던 신실한 주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도를 그곳에 남겨둔 것입니다.
그러면 디도가 그레데 섬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디도가 해야 할 일은 첫 번째로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레데 교회는 아직 교회가 제대로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거기에 남아서 그 일들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믿을만한 디도를 그곳에 남겨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모두가 다 불완전한 교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가 없습니다. 제도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요, 아무리 조직적으로 잘 움직이는 교회라 하더라도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세워가기 위해서 교회에 여러 직분자들이 있고, 일꾼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도라는 직분자를 주시고, 선지자나 복음전하는 자를 주시고, 목사나 교사를 주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선지자나 목사나 교사만이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일꾼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일꾼들)이 함께 한 마음으로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의 몸된 이 제단에 속하여서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집사님은 집사님으로서, 권사님은 권사님으로서, 장로님은 장로님으로서, 교사는 교사로서,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 사도회 회원은 사도회 회원으로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진진하게 물어야 합니다.
▷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여기에 서게 하셨는가?
▷ 왜 내게 건강을 주셨고, 믿음을 주셨으며, 우리 후포중앙교회로 인도하셨는가?
여러분,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외국의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교회학교 예배를 마친 후에 교육관 복도는 수많은 아이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공과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자기반 공부실로 가려는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한 자그마한 부인이 복도 한 가운데 서서 아이들에게 어디로 가야할지를 자세하게 지도해 주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처음 나온 학생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에, 이 아주머니는 아주 상냥한 얼굴로 그들을 잘 인도해 주고 있었습니다.
가냘픈 여인이 호루라기나 마이크도 없이 수없이 쏟아지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교인이 아이들이 다 사라진 후에 그녀에게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호루라기나 마이크도 없이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자 가녀린 부인은 "아닙니다.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일을 즐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가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여기가 내가 봉사할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여인의 말을 듣고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가는데, 뒤에서 "철커덕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니, 조금 전까지 아이들을 상냥하게 인도해주던 그 부인이 목발을 집고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걸어가는데, 그녀의 발에는 쇠로 만든 보조다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리 하나를 읽어버리고 쇠로 만든 보조다리를 해 가지고 목발을 집고 걸으면서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복도에 서서 아이들이 자기 반을 찾아가는데 안내는 해줄 수는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기쁘게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사람만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교회를 세우도록 위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약하면 나약한 대로, 믿음이 작으면 작은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연세 드셨으면 연세 드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위한 삶,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길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 놓은 두 번째 이유는 "각 성에 장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절에서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는 일이고, 두 번째는 각 성에 장로를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레데 섬 교회는 무엇보다도 장로를 세우는 일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있어서, 그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에 있던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본장(1장) 10-11절에서 이렇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진리에 복종치 않을 뿐만 아니라, 헛된 말로 속이며, 거짓 교리를 가르쳐서 교회(집들)를 엎드려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에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고후 2:18)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교회 안에 몰래 들어와서 거짓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해서 믿음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려는 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거짓 교사들이 그레데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로를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장로라는 말은 감독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서시대에는 목사와 장로, 감독과 장로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감독 그러면 장로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디도는 넓은 그레데 섬에 있는 모든 교회를 자기 혼자서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 성에 장로라고 하는 감독을 세워서 각 성에 있는 거짓 교사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는 각 성에서 사도 바울이나 디도를 대신해서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고, 또 말씀을 가르치고, 잘못된 것을 치리하고, 성도들을 믿음 안에서 훈련시켜 바른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빠지지 않고 바른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돌보아주고,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믿음에로 자라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일꾼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디도는 그레데 섬 교회의 목회자로서 그레데 섬 전역에 있는 성도들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자기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각 성에 장로를 세워서 그들과 합력하여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울 사도가 디도를 그레데 섬에 떨어뜨려 놓은 이유였습니다.
여러분, 목사나 장로님만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의 일을 하는 직분입니까?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거나, 이웃사랑위원회에 소속되어야만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제사장은 백성들의 영적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대신 지고 짐승의 피를 제물삼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대신 그들의 죄에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게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왕같은 제사장'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자신을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백성을 위한 직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도와 각 성에 세워질 장로들은 바로 그런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디도는 바로 그 직무를 위해서 그레데 섬에 남겨진 것입니다.
디도와 장로들이 거짓 교사들의 유혹으로부터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보다 연약한 자들을 돕는 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믿음의 자리, 구원의 자리, 영생의 자리로 불러주신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이웃을 위해 뭔가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의 연약함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바로 이 자리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믿음이 연약하고,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이웃이 보인다면, 그들의 그 약함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 몸된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기꺼이 고난을 받겠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건 또한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라면 내 평안함과 안일함을 버리고, 주님이 당하신 그런 고난의 길을 가겠노라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위해서 그레데 섬이 남아 있는 디도에게 이렇게 축복해 줍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역을 아름답게 감당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이 말씀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성하는 모든 믿음의 일꾼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때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 삶이 평탄하거나 형통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순간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말씀에 보면 다윗 왕이 소개됩니다. 지금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쫓겨가는 신세입니다. 자식에게 배신을 당해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겠노라고 쫓겨가는 아버지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합니까? 초라한 모습으로 도망가고 있는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서 뒤에서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며 이렇게 외쳐댑니다. "사울 왕의 왕좌를 빼앗고 왕이 되더니만, 그것 보아라. 결국 네 놈도 네 아들에게 쫓겨나는 처량한 꼴이 되지 않느냐? 잘 되었도다. 저주받은 자여." 한번 그렇게 하고 그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다윗 일행의 뒤를 따라오면서 그렇게 저주를 퍼부어대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윗이 왕입니다. 비록 쫓겨가는 신세이긴 하지만 왕의 위엄과 체통이 있습니다. 왕인 다윗이 그런 저주를 듣는다는 것이 여간 기분 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과 함께 가던 다윗의 신하들이 "왕이여 당장 저 개만도 못한 놈의 목을 베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진언하자, 다윗 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만 두어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사울 왕을 따르던 저 사람이 그렇게 저주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원통함을 알아주실 것이다. 그것이면 됐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그 놈을 당장 잡아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배신당하고 쫓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지금 다윗보다 더 억울하고 더 힘든 길을 걷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다윗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까?
아무리 힘든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하신 것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고, 고통스러운 자리라고 불평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뜻을 발견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사역을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의 복"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레데에서의 목회
딛 1:5-16 / 김철한 목사 / 오목천교회
디도는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바울의 목회 서신을 받는 수신자로서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는 디도는 갈2:3을 볼 때 헬라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디모데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혈통을 가진 혼혈아였다면 디도는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그 디도를 향해 참 아들이라 하였다. 얼마나 정이 가는 표현인가? 그리고 디도는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이라 하였으니 이 믿음은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을 거듭나게 한 믿음과 똑같은 일치의 믿음임을 알게 해준다.
바울은 디도를 신뢰했다. 디도에게 잘못된 교인을 향한 책임과 해야 될 목회 사명을 맡겼다. 특별히 고린도후서에 보면 디도의 이름이 9번이나 나오고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를 디도에게 부탁한다. 디도는 또 그레데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때 받은 편지가 디도서이고 디도서는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교회와 가정 그리고 세상에서의 의무를 잘할 것을 권면받고 있는 책이다. 디도서는 디모데전후서 뒤편에 숨겨진 듯 있어서 이 말씀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제도화되는 교회의 목회와 그 목회의 주의사항을 엿보는데 있어서 아주 유익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레데에 남겨 둔 디도의 사역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는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 남은 일을 정리하는 일이다.
딛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남은 일’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그 일을 다 하지 못해서 그 나머지를 마져 하려는 것으로 읽히기 쉽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RSV) ‘흠이 있는 것을 고치라’는 것이다. 흠이라는 것은 고쳐서 완전한 사람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딛2:14) 본래 그레데인들은 어떠했는가? 지중해 남쪽에 위치한 이 섬은 길이가 250Km, 폭은 11~56km에 이르는 섬으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이 섬 사람들의 품성은 좋지 않았다.
딛1:12을 보라.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이 선지자는 누군지 모른다. 고대 교부들은 이 선지자를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라고 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이 증언이 참되다”고 바울도 동의한 것이다. 이곳 그레데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행2:11을 보면 오순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마가의 다락방 경험을 목격한 이들 중의 하나인 듯 하다. 성령의 역사를 기이하고 놀라워하며 당황하며 바라본 사람들, 자신들의 언어로 들려지는 성령의 말하게 하시는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그레데인들에게 그 분이 옮겨붙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레데인의 모습은 꾸짖음 받기에 합당한 모습이었다. 악한 짐승이라는 말 속에 먹기만 탐하고 정욕적인 삶을 사는 그림이 보여진다. 그러므로 디도의 사역,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이것을 고치라는 것이다.
딛1:13을 보라.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 디도는 고치고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세우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딛1:16을 보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리스도인의 무능이 여기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입술로는 인정한다. 그러나 행위는 하나님 없는 자와 똑같다. 디도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삶을 고쳐야 한다. 말은 그리스도인인데, 행동은 넌그리스도인인 이 삶을 고쳐야 할 흠, 바꿔야할 흠으로 보고 그레데에 머문 것이다.
교회의 목회란 쉬운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을 일치시켜야 하겠기에 힘든 사역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의 가르침을 듣고 성경공부에 나온다. 나 자신의 묵상과 기도, 여러 가지로 자신의 껍데기 신앙을 고치고 성숙해가는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말과 행동도 따로 놀고 내 안에 짐승 같은 탐욕들이 올라오기가 태반이다. 말만 그럴 듯 하게 늘어놓고 뒤에서 딴짓을 한다. 선한 일을 하지 못하는 성도된 우리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된 예수님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도 Yes로 순종했고 행위도 Yes로 순종했다. 오직 예수님은 순종하고 순종하셨다. 목회가 정말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게 하므로 흠을 고쳐서 목회자와 성도 모두 선한 일을 하는데 말과 행위가 일치된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디도는 이 언행일치의 사역을 위해 그레데에 머문 것이다.
2. 각 성에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이다.
딛1:5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런데 딛1:7에 보면 감독의 자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디도가 해야 할 일은 장로를 세우고 감독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각 성에 지도자를 세워 교회를 돌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장로(presbuteros)와 감독(epskopos)이란 단어는 같은 사람에 대한 호칭을 뜻한다. 지도자에 대한 호칭이 다른 것이다. 행20:17, 28, 벧전5:1~2을 보라. 바울은 장로를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그들을 부를 때 감독이라 불렀다. 베드로도 양무리를 치라, 즉 감독으로 장로들을 불렀던 것이다. 장로란 단어인 presbuteros는 유대적 뿌리를 갖고 있으며 교회의 목회에 연장자란 말이다. 감독이란 단어인 epskopos는 헬라적 뿌리를 갖고 있으며 목회자의 사역 중 감독하는 측면을 나타낸 말이다. 즉 전자는 위엄을 나타내며 후자는 기능을 나타낸다. 그런 의미로 같은 사람에게 장로로 또는 감독으로 칭한 것이므로 교회 제도가 생겨난 이후에 등장한 감독, 장로, 집사의 별개 개념으로 봐서는 안된다. 디도서는 2세기 편지가 아니고 1세기 편지이기 때문이다.
디도는 교회를 이끌 지도자를 세워야 했다. 각 성마다, 마을의 가정마다 지도자가 세워져야 책망할 자를 책망하고 교회가 세상에 책망을 받지 않도록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자 장로, 감독으로 세워질 이들의 자질은 이렇다. 딛1:6~9 “책망할 것이 없고”로 시작하여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사랑만 주는 자가 아니다. 때론 책망을 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본인이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인 아넹클레토스(?ν?γκλητο?)란 비난 받을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일하는 지도자들, 오늘날로 말해 목회자, 장로, 권사들은 수치스러운 일로 손가락질 당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평판이 중요한 것이다. 딛1:6을 보라. 그 비난 받지 않는 삶의 모습이란 이렇다.
① 가정 생활 - 가정 돌봄이 잘 되어야 한다.
딛1:6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고 하였다. 가정에 있어서 책임을 잘 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교회를 돌볼 수 있다는 말이다. 자녀를 잘 돌보고 방탕을 모르는 가정 목회를 해야 교회 지도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② 청지기 정신을 가진 생활 ? 섬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딛1:7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품성이 온전히 예수님께 붙들려 청지기, 교회를 지키고 돌보고 세우는 스튜어드(steward)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청지기 즉 하나님의 머슴이다. 고집도 내려놓고 분냄도 내려놓고 절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시대 청지기직은 시간과 물질 관리에 집중된다. 시간과 물질 관리의 기본이 주일 성수와 십일조 드리는 생활이다. 안식의 시간을 바쁜 시간 속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 소득 가운데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되돌리는 것, 이것이 되는 사람은 비난을 받지 않고 칭찬을 듣는 지도자의 모습이 된다.
③ 말씀 준수 생활 ? 영성이 개발되어야 한다.
딛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내 맘대로 가감하면 안된다. 어떤 상황, 환경 중에도 오직 성령, 오직 말씀에 대해 그대로 지켜야 한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지사충성(至死忠誠),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요 감독이다.
3.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이다
디도의 목회 현장에도 이단들이 있었다. 딛1: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는 것이 디도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딛1:10을 보면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았다. 이런 자들은 딛1:11을 보면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렸다. 이것을 보고만 있으면 안된다. 딛1: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바른 권면으로 교훈하고 또는 꾸짖고 책망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소유케 하는 것, 그것이 교회를 위한 디도의 책임이었다.
건강한 믿음으로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디도를 그레데에 머물게 한 것이다. 바울의 아들로서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의 편지를 받아들고 디도는 이 세 가지 책임과 목회 앞에서 최선을 다했다. 디도는 바울에게서 배우고 본 그대로 충성을 하였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
딛 1:5-9 / 박봉수 목사
살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즘 스마트폰 때문에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제법 전문가 뺨치듯 잘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작품으로 전시할 정도의 사진은 아무나 찍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다이어트 한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마다 몇 킬로그램을 빼보겠다고 나름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목표만큼 살을 빼고, 또 그대로 계속 유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최근 주식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기존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젊은이들도 대거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식투자로 바라는 만큼 수익을 냈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또 특별한 준비와 노력을 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를 잘 믿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보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섬기며 사는 일 또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해 보고 싶어하는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더더욱 영적인 리더로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끄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가끔 기도하기 위해 청계산기도원을 찾곤 합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다. 입구부터 플래카드가 늘어서 있습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신학교의 학생모집 광고입니다. 무인가신학교들이 학생모집을 위해서 광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문제시하는 것은 과연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을 저런 식으로 모집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정식 교단신학교들은 목사가 되려고 입학하려는 학생들을 철저하게 검증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은 받았는지, 목회자로서 인성은 올바로 갖추었는지, 신학을 공부할 실력은 되는지 등을 따져봅니다. 그리고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불합격시켜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런 무인가신학교는 학교 운영을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학생을 모집하려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수준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심지어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까지 학생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아무나 신학생으로 받아서, 아무나 목사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아무나 영적인 지도자가 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모를 사람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고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윤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고, 영적 지도자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평신도지도자가 세워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철저한 검증 없이 선택됩니다. 그리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채 임직을 받습니다. 나아가 지속적인 영적 훈련 없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는 ‘아무나 목사’가 제일 문제이고, 다음으로 ‘아무나 장로’, ‘아무나 권사’, ‘아무나 안수집사’들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누가 영적 지도자로 세워져야 할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누구를 어떻게 세우셨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은 물리치셨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대상자를 찾으신 후,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본인이 원하거나 사람들이 추천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택하시고 훈련하신 뒤 세우신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교회는 영적 지도자로 누구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영적 지도자를 세우도록 위임하셨지만, 직접 누구를 세우라고 그 명단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아무나 영적 지도자로 세울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사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례가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행 6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최초로 평신도지도자를 세우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사도들이 평신도지도자를 세울 때 교회가 따라야 할 기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영적 지도자로 세울 사람은 교회 안에서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교인들의 눈에 신앙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에 앞장서고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목회자가 됐든지 평신도지도자가 됐든지, 교인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어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것과 다른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 지도자를 세우려고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기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밖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본문 6-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에서 “책망할 것이 없고”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책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기준에서는 누가 칭찬하느냐 할 때 교회 안의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는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을 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개봉되어 화제를 낳았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주인공의 명대사로 유명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안 보고를 떠나 이 말은 유행어가 되어 당시 널리 쓰여 졌습니다.
그런데 이 대사는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이상한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존댓말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킵니다. 그러면서도 반말을 함으로써 경멸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이 아팠던 것은 영화에서 주인공이 이 대사를 던지는 대상 때문입니다. 주인공 금자씨는 13년 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전도하며 도와왔던 전도사가 두부를 들고 찬양대와 함께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수고했다며 앞으로 죄짓지 말고 잘 살라고 덕담을 던지는 이 전도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비수처럼 던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도와주었는데 이게 할 소리인가 하는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 주인공 금자씨 눈에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어떻게 비쳤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를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이 대사는 이 시대 세상 사람들이 교역자들과 교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잘 산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는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세울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세울 때 적어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너나 잘하세요!”라고 조롱받을 사람은 세워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교역자들, 그리고 장로님들을 비롯하여 평신도지도자들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밖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는 어떻게 비쳐질까요? 혹시 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속으로라도 ‘너나 잘하세요!’ 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적 지도자가 두 가지 점에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 개인생활입니다.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 지도자는 적어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책망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책망 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우선 법적으로 문제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회통념상 손가락질을 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에 대한 나름대로 어떤 기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기들과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딱히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 어떤 그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라고 말합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절에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직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구나”라는 말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분명합니다. 바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현대를 대표하는 기독교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프란시스 쉐퍼는 그가 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의 문제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바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행복만을 추구하고 거룩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룩을 찾는 자들에게는 행복도 주어질 것이지만, 행복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기심과 쾌락이 인생의 종국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책망할 일이 없는 삶을 살려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교회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고 책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며 살 때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길버트 체스터톤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식사기도는 물론 연주회와 오페라를 볼 때에도 기도하고, 책을 펼치기 전에도 기도하고, 스케치, 그림 그리기, 수영, 펜싱, 권투, 산책을 할 때에도 기도한다. 그것은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이 감사한 일이며, 일상의 삶이 모두 거룩한 것이며, 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려면, 늘 기도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할 때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 가정생활입니다.
6절을 보면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영적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가정문제 때문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정을 평안하게 잘 이끌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일부일처제가 법적으로 확립된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반드시 일부일처제여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도 않은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성경말씀대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가정을 평안하게 잘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 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영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대표적으로 분업을 고안해서 생산에 적용시켜 자동차를 대량생산해 냈습니다. 그래서 고가의 자동차를 싼 값으로 사서 탈수 있도록 해서 자동차의 대중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사업가로도 존중을 받습니다. 사업 성공으로 얻은 많은 수익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올려줘서 함께 잘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중산층이 형성되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은퇴 후 한 모임에서 대담을 하게 됐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일생 동안 많은 성공을 이루셨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성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포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정입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이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아도 가정에 헌신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자 그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고, 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가정인 우리의 가정은 더더욱 평안해야 합니다. 그래야 든든할 뿐 아니라 영적 지원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드처럼 가정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에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가정 때문에 책망받기 보다는 가정 때문에 존경받고 칭찬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밖에서 책망할 일이 없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영적 지도자로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선 개인생활에서 책망할 일이 없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늘 기도하며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가정생활에서 책망할 일이 없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장로와 감독 Elder and Overseer
디도서 Titus (2) 1:5-9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Here is a trustworthy saying: If anyone sets his heart on being an overseer, he desires a noble task” (디모데전서 1 Timothy 3:1).
교회는 하나님 왕국의 대리기관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구주와 주로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인간 역사가 계속하는 동안 교회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왕국이 완성되기까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의 수는 계속 증가할 것입니다. 교회의 최소 단위는 주님을 믿는 두세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가 회원을 징계하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 한 사람에 다른 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더해질 때, 그때 비로소 하나의 교회가 탄생합니다.
성도 사이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성도 사이에는 은사에 따른 직분과 직분에 따르는 사역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마치 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계급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각자의 삶을 통하여 가정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합니다. 교회에도 지도자들과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용법대로 편하게 말하자면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에 한 교회의 목회자는 주로 장로, 감독, 목사 등으로 불렸습니다. 장로가 가장 일반적 호칭입니다. 감독도 상당히 많은 수로 등장합니다. 목사는 두 곳에서만 나옵니다. 목사라는 호칭은 종교개혁 이후에 새롭게 발굴되어 많이 사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좀 더 신약성경의 근거에 맞게 목사를 부르자면, 장로 혹은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등 사도는 어느 한 교회나 어느 한 지역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말씀으로 주님 이야기를 함으로 제자를 얻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를 세우고, 그 지역을 떠난 후 편지로 그들을 가르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편지가 남은 것이 신약성경의 주된 서신서 부분을 이룹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 부르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느 정도 의심의 눈길로 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도를 따르려면 신약성경을 부지런히 그리고 자세히 그리고 신실하게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감독과 장로에 대하여 자세하에 말씀하여 줍니다. 바울은 사도죠? 그러면 디모데와 디도는 누구입니까? 이 둘은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경이 있지만, 그들이 저자는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입니다. 디모데와 디도는 사도를 도와서 사도와 동역한 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20에서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교회가 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사도와 동역한 이들입니다. 신약성경의 저자 가운데 마가나 누가처럼 사도가 아닌 이도 있습니다. 또 디모데나 디도처럼 사도와 동역하며 교회를 세운 이들도 있습니다.
주보에 써드린 디모데전서 3:1을 봅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나 디도에게 준 주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각 교회에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지금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을 감독으로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사도를 대신하는 디모데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디모데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마음을 준 사람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감독으로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원리가 바로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만 있다고 해서 다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독의 자격 조건은 2절부터 7절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마음이 삶으로 입증된 사람을 감독으로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같은 일을 위임합니다. 디도는 크레타섬의 여러 교회에 장로와 감독을 세워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도서 1:5-9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1.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 “The reason I left you in Crete” (5).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5 The reason I left you in Crete was that you might straighten out what left unfinished and appoint elders in every town, as I directed you.
디도를 포함하는 사도 바울 일행이 크레타섬을 방문하여 선교하고 교회를 세운 때는 65년경으로 추정합니다. 그 전에 교회가 이미 크레타섬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가능하면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을 찾아가 교회를 세운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에 보낸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보낼 때는 57년경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제3차 선교여행의 에베소 사역을 마칠 즈음이었습니다.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고, 그는 수도 교회의 후원으로 스페인 지역까지 선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15:28 참조). 그러니까 기존 교회의 도움을 받지만, 사도 바울의 선교 원칙은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의 팀과 함께 크레타섬을 방문했을 때에 그곳에는 교회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아주 약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얼마간의 사역 후에,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크레타섬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그는 디도를 그 섬에 남겨둡니다. 남겨둔다는 것은 디도가 그에게 주어진 일을 마치고 그도 그 지역을 떠나 바울과 합류한다는 암시가 있는 표현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먼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라고 디도에게 씁니다. 그 일을 하는 데 몇 주, 몇 달이 걸릴 수 있습니다. 몇 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일을 마친 후에 디도는 바울과 다시 합류합니다. 남은 일은 무엇일까요? 디도는 사도 바울이 씨를 뿌려 싹이 난 것을 자라도록 물을 주고, 자라도록 보살펴야 했을 것입니다. 그 핵심 사역은 말씀으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바울이 디도에게 맡긴 일은 무엇입니까? 5절 뒷부분을 봅시다.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장로는 한 도시나 지역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한 교회마다 장로를 세워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17을 봅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니라” 장로가 하는 가장 큰 일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는 교회를 다스리고,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성도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일을 직접 하지 않고, 디도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크레타섬의 교회는 아직 이런 장로가 될 수 있는 지도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디도는 그들을 가르치고, 그러면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디도는 어떤 사람을 각 성에 있는 교회에 장로를 세워야 할까요? 6절을 봅시다.
2. “책망할 것이 없고” “An elder must be blameless” (6).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두 자라야 할지라
6 An elder must be blameless, the husband of but one wife, a man whose children believe and are not open to the charge of being wild and disobedient.
장로의 자격 조건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성도입니다. 이 책망은 교회 안으로부터나 교회 밖으로부터나 둘 다를 의미합니다. 세상을 떠난 교회는 없습니다. 이 땅 위의 교회는 세상 가운데 구별되어 있습니다. 교회로 모일 때, 말씀을 듣고, 양육 받으며, 세상으로 흩어질 때, 사랑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영적 싸움을 싸웁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성도는 세상의 책망을 받으면 주님의 영광과 복음을 가로막습니다. 그 책망은 주로 윤리적인 내용에 해당합니다. 물론 무고한 비난, 즉 예수를 믿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책망받지 않는 장로로 세워지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이 둘은 모두 그의 가정과 관련됩니다. 첫째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동시에 두 여인을 아내로 둔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중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장로가 될 수 있을까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바울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도로 사역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한 사람도 지도자가 되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을 했다면 한 아내에게만 정절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거론한 장로의 자격은 그의 자녀에 관한 말씀입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니라” 이는 그 장로의 자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 자녀는 믿는 자녀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자녀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되고, 불순종하는 자녀이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4-5에서 감독의 직분을 받을 사람의 조건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즉, 이는 장성한 자녀를 먼저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는 사람이 교회의 장로 혹은 감독의 직분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그러니 목회자와 그의 자녀는 교회와 세상에서 더 드러나는 존재입니다. 목회자나 그 아내나 그 자녀가 책망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목회자와 그의 가정은 교회와 세상에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도 교회와 세상에서 드러납니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다 함께 성도이고, 성도는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에서 다 함께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지며 삽니다.
3.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Since an overseer is entrusted with God’s work, he must be blameless” (7-9).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7 Since an overseer is entrusted with God’s work, he must be blameless – not overbearing, not quick-tempered, not given to drunkenness, not violent, not pursuing dishonest gain.
이제 사도 바울은 7절부터 9절까지 감독의 직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직분이었을까요? 신약성경 시대가 끝나면 한 도시의 교회를 다스리며 그 도시를 포함하는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목회자를 감독(overseer) 혹은 주교(bishop)라고 했습니다. 그 지역의 여러 도시를 하나씩 맡아 다스리는 이는 장로(elder/presbyter) 혹은 사제(priest)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에는 아직 장로와 감독의 구분이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5-6에서 장로는 간단하게 자기 집안과만 관련하여 책망이 없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감독은 훨씬 더 책망이 없을 내용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미 신약성경 안에서 장로와 감독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감독을 하나님의 청지기 즉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세워진 자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충성스럽게 여기셔서 하나님의 집안일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도 책망받을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 책망받을 일이 없는 내용을 사도 바울은 먼저 7절에서 다섯 가지 부정적 표현으로 열거합니다. (1)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지도자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한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합니다. 목회자를 통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목회자는 자기 욕심대로 사역하기 쉽습니다. 어떤 일의 결정을 내리고, 어떤 사람을 세우고, 어떤 곳에 돈을 사용하는 등 교회의 일을 목회자 혼자의 결정으로 하고, 모든 일은 성도가 따르고, 더 나아가 그 목회자는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 목회자와 그 교회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목회자는 반드시 성도 전체와 함께 상의하며 교회를 섬기고 다스려야 합니다.
(2)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감독이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분을 낸다면, 그는 이미 감독으로 세워지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려는 마음이 있으면 분을 내게 됩니다. 지상에서 가장 온유하다는 평가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분을 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가리켜 바위가 물을 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의 백성은 그의 백성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백성을 자기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백성으로 착각했습니다. 또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이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이때 만일 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그때 반석에서 물이 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20:12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감독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엄밀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냅니다.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술에 중독된 성도는 교회의 감독으로 사역할 수 없습니다.
(4) 구타하지 아니하며: 감독이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여 배우자, 자녀, 종, 성도 등을 구타한다면 그는 이미 자격을 잃었습니다.
(5)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감독이 자기의 직분을 이용하여 성도나 그 누구에게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감독의 직분을 유지할 자격을 잃었습니다.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8 Rather he must be hospitable, one who loves what is good, who is self-controlled, upright, holy and disciplined.
이제 8절에서 사도 바울은 감독이 긍정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품을 여섯 가지로 열거합니다. (1)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독은 가정을 열어서 성도와 나그네를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호텔(hotel), 병원(hospital), 그리고 환대(hospitality)는 모두 “손님을 맞아들이는 주인”을 의미하는 “호스트”(host)에서 왔습니다. 나그네와 성도를 대접하여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오늘날처럼 호텔과 병원이 발달하지 않았던 1세기의 상황에서는 훨씬 더 감독이 갖추어야 했던 덕목입니다. 교회는 처음 300여 년 동안은 가정교회로 모였습니다. 가정을 개방하는 것이 교회가 모이는 방식이었고, 그 가정은 주로 장로와 감독의 가정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선행을 좋아하며: 선행은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여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이렇게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선행을 한다는 것이 무책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으로, 자기가 쓸 수 있는 시간과 힘과 돈으로 선행을 하는 것이 책임 있는 행동입니다.
(3) 신중하며: 감독은 선행을 좋아해야 하지만, 덤벙대서는 안 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공동체와 함께 가야 합니다. 좀 더 천천히, 좀 더 신중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4) 의로우며: 감독을 바라야 합니다. 사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조정하고, 강요하고, 압박해서는 안 됩니다.
(5) 거룩하며: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지도자인 감독은 더욱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지만, 세상에서 거룩함으로 다르게 드러나야 하는 존재가 성도이며 감독입니다.
(6) 절제하며: 감독은 훈련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훈련은 좋은 습관을 습득하여 그 루틴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과 신학 서적, 신앙 서적, 인문학책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훈련이 몸에 배어 루틴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이 몸에 배어 루틴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고, 따스하고, 미소로 대해야 합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기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 모두 잘 아시죠? 저도 아직 이러한 루틴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목사임을 고백합니다.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9 He must hold firmly to the trustworthy message as it has been taught, so that he can encourage others by sound doctrine and refute those who oppose it.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감독의 조건을 먼저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대로 살고 또 성도를 그대로 가르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군대에 처음 들어가면 훈련소에 갑니다. 훈련소는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관과 조교가 있습니다. 교관은 교육, 즉 이론을 가르칩니다. 조교는 그 이론을 몸으로 시범을 보임으로 훈련병이 그대로 따라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훈련병은 교관의 말은 머리로 숙지하고, 조교의 행동은 몸으로 훈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험한 무기를 다루는 단체 생활에서 사고를 내지 않고 유사시에 적과 교전할 때, 자신과 부대를 지키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교회도 교관 따로 조교 따로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의 교관도 시범을 보여 조교를 길러냅니다.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무슨 뜻이죠? 교회의 구성원이 감독이나 장로나 목사의 설교나 가르침을 들을 때, “목사님이나 잘 하세요!”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목사는 이론으로 가르치는 교관이며, 삶으로 시범을 보이는 조교로 나눌 수 없는 거죠. 목사는 교관이며 조교입니다. 코치이며 선수입니다. 교사며 학생입니다. 목사이며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일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성숙한 성도로서 목사는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매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성도의 삶, 목사의 삶입니다. 목사가 교회와 세상 앞에 가지는 거룩한 부담을 성도도 교회와 세상 앞에서 가집니다.
결론 Conclusion: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할 함이니” “If anyone speaks, he should do it as one speaking the very words of God. If anyone serves, he should do it with the strength God provides, so that in all things God may be praised through Jesus Christ.” (베드로전서 1 Peter 5:11).
제가 주보에 써 드린 대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11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했습니다. 목사나 성도나 설교를 하든 섬김을 하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나 성도가 드러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목사나 성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제 반주해 주시는 동안 이 한주도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 안에서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목사와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다 함께 기도합시다.
당신은 영적 리더입니까?
딛 1:5-9 / 유영설 목사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한 연구에 의하면 리더와 보통사람의 차이는 혈액 중에 셀로토닌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셀로토닌은 신경의 신호전달 물질의 한가지로 뇌나 신경의 움직임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셀로토닌이 수면의 리듬을 조절하는 멜라토닌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들은 원숭이 무리의 혈액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원숭이 우두머리의 혈액 속에는 일반 원숭이의 2배가 되는 셀로토닌이 함유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실험은 대학의 동아리 활동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학생과 일반 학생들에 대해서도 했더니 결과가 똑같았다고 합니다. 원숭이나 사람은 모두 보통사람이 리더가 되면 셀로토닌의 양이 점차로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리더가 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교회의 영적 리더로서 세워지기 위한 자신의 영적 셀로토닌은 무엇입니까?
1. 건강한 자화상이 있는 리더
건강한 “Self-image"를 품고 있어야 다른 사람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자화상이란 스스로 보는 자신의 상을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은 초대교회시대의 교회의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직무를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권면과 책망”은 칭찬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생활의 모범이 되고 영적으로 권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은 칭찬 듣기를 좋아하지만 칭찬에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잘못했어도 권면과 책망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권면과 책망은 도덕적, 윤리적, 성품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없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 리더들의 인격과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로와 감독에게 요구하고 있는 항목들이 영성인데 이런 영성이 자화상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리더는 어떤 상황도 잘 소화해 낼 뿐 아니라 섬기는 자로 리더십을 나타냅니다. 건강한 자화상이 있는 사람이라야 더 잘 섬깁니다. 영적 리더는 밝고 긍정적인 자화상이 필요합니다. 그런 자화상에서 나오는 책망과 권면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반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절제 훈련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
오늘 읽은 본문에 근거해보면 교회의 영적 리더들인 장로와 감독에게 절제훈련이 요구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인격의 영성은 모두 절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절제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라는 의미입니다. 영적 리더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겸비하려면 내 안에 있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분주하고 몰입했던 것을 중단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성경의 리더들이 실패한 원인은 절제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모세, 다윗, 솔로몬, 삼손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능력이 있었으나 절제에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것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영적 리더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해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하고자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때에 따라 금식도 하고 검소한 생활에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절제한다는 것은 감정과 생각, 본능, 육체를 다스린다는 것인데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3. 하나님께 구하는 리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리더십은 내가 가진 영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영적으로 서 있는 리더인지 묻고 내가 가진 영향력을 공동체에 나타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리더들은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리더는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정받고 있는 유능한 그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저자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리더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은 하나님 없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목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적 리더가 되려면 성령 충만이 필수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예렘 33:3) 셋째, 기도의 보상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기도졸업장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영적 리더의 사역은 하나님께 구할 때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리더로 직분을 주시고 공동체에 책임을 맡기셨는데 내 재능과 힘으로 사역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적 자질이 온전해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리더로 세우실 때는 누군가를 위해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리더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성장에 대한 기대와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영적 성장을 가져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를 도운 사람은 역시 영적으로 훌륭한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리더로 부름 받은 사람, 영적 리더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영적 리더의 자질을 겸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공부, 예배, 봉사, 기도, 교제, 겸손을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리더가 먼저 영적인 풍성함과 즐거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직분자들
디도서 1장 5-9절 / 서화평 목사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마다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신을 받고, 충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찾는 명예와 다릅니다.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은 직분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고 신앙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저 인간적인 욕심과 의욕만 불 탈뿐이지 전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샘물교회가 시작 된지 6년 반이 되면서 교회의 처음 일군을 선택하는 공동의회를 갖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처음 일군들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기도의 사람, 온갖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선택되면 정말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기 위하여 먼저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기도로 준비해왔습니다. 결코 마귀가 장난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온전히 주의 사람으로 세워지며, 혹시 금번 기회에 피택 되지 못했어도 더 열심히 충성하며 주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기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과 여러분을 통해서 피택되는 분들은 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그런 분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그 집에서 기둥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둥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디도에게 그레데 섬에 있는 교회들을 부탁합니다. 그 부탁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고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복된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기둥 같은 큰 일군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거룩한 직분자들로 합당합니까?
1. 성도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기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집의 얼굴입니다. 기둥이 곧아야 집이 튼튼합니다. 우리 교회에 일꾼을 세우게 되면 성도들이 먼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권사, 안수집사는 먼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매 공적인 예배는 물론이고 늘 기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또한 남들보다 앞서 충성하고, 헌신하며, 봉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목사가 실족하면 많은 영혼이 실족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잘못하면 많은 영혼들이 상처를 받고 낙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무나 지도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약3:1절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도자는 그만큼 책임감도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책임과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직분을 받는 것만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앞장서는 사람이 책임적인 일군입니다. 우선 거룩한 직분을 맡은 일군들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교회는 더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일군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 직원을 선택했는데 충실하게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그로 인해 고민할 것이며, 곧 그만두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직원은 월급을 더 주고서라도 계속 일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직분자들은 먼저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을 보이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헌신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일군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일하는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2. 거룩한 직분자들은 짐을 지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기둥은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기둥이 약하면 지붕이 내려앉고, 집이 무너집니다. 교회의 직분은 무거운 짐을 잘 감당하라고 세우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도록 세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의 부친은 아직 믿음생활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루는 그분이 친구들에게 우리 아들이 금번에 직장에서 상을 받고 중국여행을 공짜로 하게되었다고 자랑 하셨답니다. 그리고는 우리 아들이 교회에서 집사인데, 조금 있으면 장로로, 목사로 승진할 것이라고 말하더랍니다. 이 분은 직장에서처럼 교회에서 열심하면 승진하는 것으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주의 일을 맡은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을 마치 승진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은 하지 않고 말만합니다. 이러한 일군은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로서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결코 기둥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직분은 짐을 지라고 세우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영광과 존경은 책임과 의무를 다한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짐을 지는 사람은 반드시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는 일꾼이라야 합니다. 교회가 큰 일을 할 때에 먼저 짐을 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를 대접하고 교사를 대접하고 성도들 섬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3. 거룩한 직분자들은 교회가 어려운 때에 목숨 걸고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수백명의 성도가 있어도 충성하며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미래가 달라집니다. 기둥은 그 집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 집의 운명이 다할 때까지 그 기둥은 자기 위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항존직은 평생 가지는 직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피택되는 안수집사, 안수권사는 주님과 같이하고, 샘물교회와 운명을 같이해야 합니다. 새신자들은 멀리 이사가면 가까운 교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존직은 쉽게 교회를 옮기면 안됩니다. 멀리 이사 가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이 곳에서 평생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선택하는 항존직은 우리 교회의 일군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시면 다시 선출해야 합니다. 우리 안수집사 두 분과 권사 한 분은 이미 다른 교회에서 임직을 하신 분이지만, 오늘 다시 신임을 뭍게 됩니다. 그동안 협동으로 계시다가 오늘 신임을 얻게 되면 우리교회의 시무권사, 집사가 됩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며 땀을 흘리신 분은 결코 교회를 멀리하지 못합니다. 또한 앞장서서 일을 하다보면 칭찬보다도 비방과 비난도 있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기둥이 서있으면 "기둥감이 좋다"는 칭찬도 있지만 비바람도 맞게 됩니다. 사실 가만히 있으면 비방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이 비방도 받고 오해받기도 합니다. 배가 앞으로 항진하고 속력을 높이는 만큼 파도와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격려와 칭찬만 계속 받으면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주의 사람에게 겸손하도록 때로는 비방과 비난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다듬어 나가며,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저도 실수하고 잘 못할 때도 많이 있겠습니다만, 성도들을 향하여 축복하고 간절히 늘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감정과 입장에 따라 비난하고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땐 속상하고 인간이 이럴 수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확인되지 않은 것 가지고도 쉽게 말하지만 목사는 확인된 것 가지고도 말을 못합니다. 아니 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웁니다. 여기서 위로 받습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잘못이 없으셨는데도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고초를 당하셨습니까? 이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며 충성하는 사람이 복되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목사에게도 묵묵히 일하는 바나바와 같은 일군, 옆에서 협력하고 뒷받침하는 아론과 훌과 같은 협력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을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피택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장서서 아멘하고, 긍정하는 일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충성하고 헌신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받아 집사, 권사, 장로로 선출됩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질됩니다. 처음의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군을 선택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만류합니다. 그만큼 변질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샘물의 일군들은 변함 없이 주께 충성하는 신뢰감이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인 교회의 일군은 먼저 가정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을 남에게 비방 받지 않도록 신앙으로 잘 키워야 합니다.
둘째, 책망할 것이 없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선 청지기는 성격이 원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아야 합니다. 잘 부딪치는 사람은 고집이 세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급히 분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분을 낸다는 것은 그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비어 있고 그릇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빈 항아리는 조금만 두드려도 소리가 납니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는 두드려도 소리가 안 납니다. 특히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은 물질 관계도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직분자들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의 일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언제 나타납니까? 어떤 문제 앞에 섰을 때에 믿음이 나타납니다. 좋을 때는 모두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교회가 은혜로울 때는 모두 훌륭한 집사님들 같이 보입니다. 여러분, 구정물통을 아십니까? 구정물통을 가만히 두면 물이 맑아 보입니다. 그러나 좀 흔들어대면 속의 것이 올라옵니다. 이처럼, 교회의 시험과 환난과 역경이 다가 왔을 때에 그 때 정말로 믿음이 있는 자인지 아닌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좋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사울 왕에게 늘 쫓겨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사울을 단 칼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부하들이 "사울 왕을 당장 죽입시다." 할 때에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 손으로 해하지 않겠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친히 도우셨습니다. 사울을 전쟁터에 나가서 죽게 하시고 마침내 다윗을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모든 일을 할 때에 바로 이런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넷째. 거룩한 직분의 사람들은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섬겨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예배 후 진행되는 공동의회는 축제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기를 원합니다.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손으로 선택되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피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그들을 잘 따르며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관계 속에서 주의 큰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또한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도 서리집사님으로 묵묵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의 모임 속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직분자들을 선택하는 이 귀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충성된 일군들이 배출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