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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6.25回想>
(3) 피란 길 600리
- 57년 뒤(2007)에 쓴 일기-
1950년 7월 하순 ~ 8월 상순
7월 16일 용산 폭격 후 대흥동 어느 주인 없는 집에서 한 열흘쯤 지낸 듯싶다. 우리 가족은 피란을 가기로 했다. 행선지는 고향 안동. 그 동안 전선(戰線)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 북한 인민군이 안동 지역까지 점령한 무렵이다. 피란(避亂)이란 난을 피한다는 뜻인데 전선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니 오히려 난을 맞으러 가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에 더 머물러 있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우리 네 식구는 피란 보따리를 꾸려 마포에서 전차를 탔다. 전차로 서대문과 종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오는데 여러 시간이 걸렸다. 서울 상공에 유엔군 비행기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올 때면 요즈음의 민방위 훈련 때처럼 공습 사이렌이 여러 번 가쁘게 울린다. 그러면 전차가 멈추고 승객들이 모두 내려 가로변 건물의 처마 밑으로 피해 해제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기다린다. 비행기가 사라지고 해제 사이렌이 길게 울리면 다시 전차에 올라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동대문 근처를 지나는 전차 - 50년대>
동대문에서 전차를 내려 기동차 역으로 갔다. 당시 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광나루까지 기동차 궤도가 깔려 있었다. 기동차 시발역은 지금의 동대문 옆 베스트웨스턴호텔 자리였다. 기동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동대문시장에 가서 자전거를 사 오셨다. 모양이 보통 자전거가 아니고 처음 보는 미제 자전거였다. 차체(프레임)가 곡선으로 생긴 데다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이었다. 세워 놓을 때 지지대(스탠드)를 뒤쪽에서 내려 자전거를 수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뒷바퀴 옆에 붙은 막대형 지지대로 자전거를 비스듬하게 버티어 놓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기동차를 타고 광나루에 와서 어딘지 이층 마루바닥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지금은 한강 이남에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한강에 스무 개가 넘는 다리가 놓여 있지만, 그 때는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자면 용산에서 노량진 쪽으로 건너는 한강인도교와 광나루에서 천호동 쪽으로 건너는 광진교뿐이었다. 그나마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져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국도에 늘어선 미루나무 가로수>
한강을 건넌 후 광진교와 연결된 도로에 올라섰다. 미루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늘어선 큰길이다. 천호에서 광주로 연결된 43번 국도라고 생각된다. 그 도로를 조금 걸어오다가 길가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다. 갑자기 호주기 편대가 날아오더니 우리가 조금 전에 건너온 광나루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강둑에 가려서 강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행기가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올라오며 폭격하는 광경은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 뒤에 오던 피난민한테서 들으니, 그 폭격으로 곡식 가마니 같은 것을 실은 나룻배가 가라앉았다고 했다.
한강을 건너온 첫날 광주를 향해 가는 길에 하룻밤 묵으려고 길가에 있는 어느 집 마루를 빌렸다. 그날 아버지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 다시 가서 그 미제 자전거를 다른 자전거로 바꾸었다. 그 자전거는 세울 때 비스듬하게 세워야 하는데 무거운 짐을 실은 채 세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전거에는 당시 재산목록 1호인 재봉틀과 광목 두 필, 쌀 자루, 미숫가루, 고추장 등 꽤 많은 짐을 실었다. 짐도 무거웠지만 식구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자전거는 타지 못하고 주로 끌고 갔다. 어머니는 밥솥을 머리에 이고 동생을 업었다. 나는 학교에서 소풍 갈 때 메던 작은 륙색을 메었다.
피란 길을 떠나기 전 아버지는 신문(4절지) 크기의 우리나라 지도를 샀다. 그 지도를 나도 흥미 있게 들여다 보았다. 서울서 안동까지 걸어서 가기는 처음이니 지도는 요긴했다. 여정은 서울서 안동 사이를 최단으로 가는 국도를 택해 천호 – 광주 – 이천 – 장호원 – 충주 – 문경 – 예천 - 안동 길이다. 천호 – 광주 사이는 43번 국도, 광주 – 문경 사이는 3번 국도, 문경 – 안동 사이는 34번 국도였다. 도로는 모두가 비포장이다. 당시 서울 시내도 전찻길만 포장되어 있었다. 국도는 어디를 가나 키가 비슷한 미루나무 가로수가 있었다. 피난민들은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식사도 했다. 전선이 영남으로 내려갔지만 우리처럼 뒤늦게 전선을 따라 피란 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어두워지면 비행기 공습을 피하기 위한 등화관제(燈火管制)로 불을 피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잠잘 곳을 정해서 어둡기 전에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아침도 날이 다 밝은 뒤에 지어 먹었다. 가는 곳마다 시골 인심이 좋아 저녁에 빈 방이나 마루를 얻어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여름철이라 한데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았다. 잠자리뿐만 아니라 국이나 반찬 같은 음식을 내어 주는 집도 있었다. 점심은 길가의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 밥솥에 남은 식은 밥이나 미숫가루를 먹었다. 반찬은 고추장이었다. 한낮은 무척 더워 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동생을 업었고 나도 어렸기 때문에 걸음이 빠를 수 없었다. 이래저래 하루에 평균 사십 리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경기도 이천 땅 어딘가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쌔~액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호주기들이 나타나더니 기관총을 쏘아대며 폭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끌고 멀찌감치 앞서 가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얼른 길가에 있는 집으로 몸을 피했다. 방과 방 사이 헛간 같은 공간이었다. 안쪽 문 바깥으로 논이 보였다. 호주기의 기관총 소리가 계속되다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엇이 떨어졌는지 논바닥에서 번쩍 번개가 쳤다. 용산 폭격을 겪었던 터라 무척 겁이 났다. 비행기가 사라진 후 사색이 되어 한길로 나왔다. 앞서 가던 아버지는 곡식 가마니를 실은 달구지 옆을 지나다가 기관총 소리에 길옆 아카시아 숲으로 피했단다. 기관총 사격으로 바로 앞의 아카시아 줄기가 갈라지고, 가까이 폭탄이 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 썼다고 한다. 아마도 가마니를 실은 달구지를 겨냥한 듯하다. 그곳을 얼른 빠져 나와 한참 걷다가 길가에서 수박 한 덩이를 사 먹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장호원을 향해 가다가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났다. 마침 장호원 들어가기 전 고갯마루에 자전거 수리하는 곳이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수리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걷기로 했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다른 피난민과 동행했다. 장호원 읍을 지나니 날이 어둑어둑했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동행하는 피난민과 함께 장호원 옆을 흐르는 냇가 모래밭에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이 내는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으로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이다. 모래밭에는 다른 피난민들도 많이 있었다. 식은 밥과 미숫가루로 요기를 한 후 모래 위에 홑이불을 깔고 잤다.
이튿날 날이 새어 일어나 보니 모래에서 습기가 올라와 홑이불이 젖어 있었다. 내를 건너 충청도 땅에 들어섰다. 동행하던 피난민을 먼저 보내고 아버지가 오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걷기를 중지하고 길가의 어느 집 마루에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멀리 아침 안개 속에 반갑게도 아버지의 자전거가 보였다. 아버지는 자전거 수리가 늦어지고 날이 어두워져 길이 어긋날까 봐 밤을 새우고 오는 길이었다.
어디인지 확실한 기억이 없지만 아마도 충청도 땅에서 겪은 일인 듯하다. 어느 읍내를 지나는데 길에서 피난민을 검문검색하고 있었다. 피난민은 길옆 공터에 보따리를 가지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줄에 가서 섰다. 검문하는 사람이 보따리를 모두 풀어 젖히고 내용물을 꼼꼼히 검색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는 줄을 선 어른들 옆에 붙어 서서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무심코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그늘에 가서 아장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차례가 되어, 아버지가 증명서를 내어 보이고 짐 조사를 마쳤다. 증명서는 피란 떠나기 전에 만일을 대비해서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가지고 온 가짜였다. 붉은 줄이 세로로 쳐진 양면 괘지에 한글로 쓰고 인민위원장의 직인까지 찍힌 것이다. 지금도 그 증명서의 첫 구절이 생생히 기억난다. ‘이 사람들은 선량한 인민이므로…’ 라고 첫 구절이 시작되었다. ‘선량한 인민’이란 나에게 생소한 어휘가 인상 깊어 잊혀지지 않는가 보다.
검문을 마치고 다시 길을 걸으면서, 어른들은 나 때문에 검문을 무사히 마쳤다고 안도했다. 내가 검문 대열에서 빠져 나와 나무그늘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메고 있던 륙색이 검색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 때까지 나는 내 륙색에 돈이 들어 있었는지 몰랐다. 검색할 때 돈 같은 귀중품은 빼앗더라는 것이었다. 내 륙색에 넣은 물건은 책 두 권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깔깔학교’ 라는 유머 책과 ‘수수께끼’ 책이었다. 집에 있던 교과서나 어린이 잡지나 만화책보다 이 두 책만은 보물처럼 꼭 가지고 오고 싶었다. 유머가 무척 재미 있었고 수수께끼도 참 좋아했다.
충주 가까이 와서 길에서 약 백 미터쯤 떨어진 시골 동네에 있는 어느 기와집을 찾아 들어갔다. 친척집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의 당고모 댁이 충주 부근에 있었다. 그 집에서 모처럼 미역국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서울서 자전거에 무겁게 싣고 온 재봉틀도 그 집에서 처분했다. 짐이 한결 가벼워진 자전거에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오던 밥솥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어머니는 땡볕에 동생을 업고 뜨거운 밥솥을 이고 오느라 무척 고생스러웠다. 등화관제 때문에 매일 늦은 아침을 해 먹고 길을 나섰으니 밥솥이 식을 겨를이 없었다.
충주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충주 못 미처 우측으로 빠져 지름길을 택했다. 달구지가 겨우 다닐 만한 논둑길이다. 어느 마을 앞을 지날 때였다. 충주 시내에서 나는 듯한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자전거를 몰고 논길을 계속 걸었다. 그 때 동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보고 몸을 피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자전거를 세웠으나 주위가 논이라 피할 데가 없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해제 사이렌이 울리자 동네에서 또 고함소리가 났다.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동네 가운데 대청 높은 집 마당에 불려 갔다. 대청에 책걸상이 놓여 있고 완장을 찬 걸 보니 아마도 마을인민위원장인 듯하다. 공습 사이렌이 불었는데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호되게 야단맞았다. 우리 때문에 동네가 폭격 당할까 봐 그런 것이다. 사또 앞에 끌려 온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름길이 끝나고 다시 3번 국도로 들어섰다. 산 모롱이를 왼쪽으로 돌아서는데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처음 맡는 냄새였다. 어른들이 송장 썩는 냄새 같다고 했다. 아마도 주변 숲 속에 전사한 국군 아니면 인민군의 시체가 썩고 있었는가 보다. 충주를 지나니 피난민들이 보이지 않는다. 길에는 우리 가족뿐이다. 모두들 경기도나 충청도까지만 오는 피난민들이었는가 보다. 우리는 피란 길의 절반 이상을 온 셈이다. 이제 소백산맥을 넘으면 경상도다. 팔월 초순의 햇볕이 따갑다. 뽀얀 한길에 미루나무 그늘이 선명하고 매미소리가 요란하다. 매미소리가 여러 가지라는 걸 처음 느꼈다. 공습 사이렌처럼 맴맴맴맴매애앰 숨가쁘게 우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해제 사이렌처럼 찌르ㄹㄹㄹㄹ 길게 한 번 뽑는 것이 있고, 2분의 2박자로 쌔애롱쌔애롱 한없이 울어대는 것이 있다.
문경새재(이화령)를 오르는 날이다. 오르는 데 20리, 내리는 데 20리란다. 아주 힘 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높은 산맥을 넘는다는 호기심으로 약간 흥분되기도 했다. 산 모롱이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는 3번 국도엔 우리 네 식구 외엔 아무도 없었다. 적적한 고갯길에 이 날 따라 더욱 맑게 들리는 매미소리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고개 중턱쯤 올라가고 있을 때 왼쪽 비탈 숲 속에서 무장한 군인 서너 명이 풀쩍풀쩍 뛰어내리더니 길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자전거에 달려 있는 밥솥을 보고 쌀을 줄 테니 밥을 좀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밥을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어른들은 군인들한테 계속 끌려 다니면서 부역(賦役)을 강요당할까 봐 걱정했단다. 어른들은 재 너머 문경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아이들 데리고 해 저물기 전에 재를 넘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곤란하다는 핑계를 댔다. 군인들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더니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사실은 자전거에 달려 있는 밥솥에 아침을 해 먹고 남은 밥도 있었다. 참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인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전선은 대구 가까이 내려갔는데 소백산맥 속에 왜 남아 있었을까? 혹 낙오된 국군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러고 보니 군인 복장이 국군 복장 같기도 했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마침내 고갯마루를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내리막길 중턱에 군용트럭이 오른 쪽 비탈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고 길바닥엔 군화 한 짝이 뒹굴어져 있다. 아마도 비행기 공습을 당했는가 보다. 피란 길에 폭격 당한 인민군 탱크가 길옆에 처박혀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트럭은 처음이다.
6.25 때 폭격맞아 길가에 처박힌 북한군 탱크들
문경을 지나 점촌 쪽으로 가는 길이다. 길 양쪽에 막대기를 세우고 줄을 쳐 놓았다. 줄 한가운데에 ‘지뢰’라는 표지를 달아 놓고 통행을 금지시켰다. 오른쪽은 철로와 가파른 산이 있고 왼쪽은 길뚝 아래 내가 흐르는 곳이다. 국군이 길바닥에 지뢰를 묻어 놓고 후퇴했다는 것이다. 지형으로 봐서 좌우가 막혀 있으니 지뢰를 묻을 만한 곳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 길을 다니면서 ‘아, 여기가 6.25 때 지뢰 묻었던 그 길이구나!’ 하고 감회가 깊었던 길이다. 우리는 길을 비켜 왼쪽으로 길뚝을 내려서 내를 건넜다. 지도를 보니 이 내 이름이 영강이다. 강이라고 하기엔 폭이 좁았으나 물이 어른의 허벅다리까지 차 올랐다.
내를 건너 첫 마을 어느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양식이 떨어져 주인집에서 쌀을 사려고 했다. 주인은 쌀은 가진 게 없고 보리와 감자가 있다고 했다. 하기야 팔월 초순이라 햅쌀이 날 때가 가까웠으니 작년에 수확한 쌀이 지금까지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당시 농촌에서 쌀은 유월 햇보리가 나기 전에 다 떨어져, 해마다 햇보리 나기까지 먹을 거리가 궁한 어려운 고비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그런데 주인집에서 구한 보리가 찧지 않은 겉보리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 집 디딜방아에 보리를 손수 찧었다. 나는 디딜방아가 신기해서 한번 발을 얹어 보았는데 첫 발에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그 날 저녁은 난생 처음으로 보리밥과 감자를 먹어 보았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방바닥 빈 자리에 지폐가 널려 있었다. 어제 영강을 건널 때 어머니 허리에 두른 전대(纏帶)가 물에 잠겨서 젖은 돈을 말리는 것이었다. 나는 돈이 내 륙색에 그대로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어머니가 허리에 차고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에서 검색을 당한 후 내 륙색에 넣어 두는 것도 미덥지 못해서였다.
예천 통로에 들어섰다. 서울을 떠난 지 보름이 가까워 온다. 벼가 무성한 논둑길로 농부가 소를 몰고 가면서 소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소 모는 소리였겠지만 짐승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서울 소년에게는 참 이상했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말을 듣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육백 리 길을 걸었던 다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우선 예천 하리의 고모님 댁에 들러 고향의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마침내 안동 풍산의 할아버지 댁으로 왔다. 한강인도교 폭파로 서울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네 식구들을 걱정하던 할매가 맨발로 뛰쳐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끝)
그때나 지금이나 평화롭고 정겨운 농촌 풍경
첫댓글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