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후
푸른 나무였다가 고사목이 되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나를 본다 바위틈에 뿌리내린 들풀처럼 살다 노루 고픈 배를 채워주는 끼니가 되기도 했을 긴 시간들 몇 백 광년을 지나 당도한 별무리들도 내려와 그만 떠나지 못해 산 능선에 뿌리 박힌 원추리로 살다 일 년에 딱 한번 꽃으로 피어나는 세석 평원 다들 전생의 업보 갚느라 고도 수행을 마다하지 않듯 결어를 맺지 못한 몸으로 후생에서 다시 맞닥뜨릴 천왕봉 아래 영혼 맑아질 몸피를 벗어 두었다 천년을 표식 해놓은 눈금을 지울 때마다 또 다른 천년으로 다가올 전생을 미리 살고 있다 춘설
티브이 소주 광고에 나온 처음처럼 전생 이후 첫 순결한 마음으로 그대를 만났다 어차피 생은 죽음을 덧댄 동면에서 깨어나는 봄 산을 닮았다 죽음 같은 껍질을 벗기거나 덜 아문 상처의 딱지를 뜯어야만 올라오는 새살 같은 봄의 입들이 말하기 시작하는 4월 매번 아픔을 건너는 고행이다 굴목재 오르는 조계산 초입 눈 내릴 때 갓 눈 뗀 초록의 나무들과 잔설 비집고 핀 볕 양지꽃 노란 무리와 북사면을 뒤집어쓴 채 꽃등 내건 엘레지를 외면할 수 없다 사는 맛이 시큼한 것을 알려주듯 생강 꽃이 진달래꽃 피다가 다시 앙다문 상처까지는 알리가 없다 찰나가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세월이라면 봄 산 춘설 만난 나는 일장춘몽이 아니다 억겁의 시간을 살았던 내 환생의 상처가 된 첫 만남은 그토록 절실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