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남북]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거 알기나 할랑가?”
흥행 중인 영화 ‘한산’에서 격군들에게 눈길이 붙잡혔다
어떻게 지켜낸 나라인지 이름없는 영웅들이 웅변한다
지난 6일 재개장한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출근길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던 행인 중 몇몇이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모드를 실행했다. 가림막을 걷어내고 재개장한 광화문광장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박원순 시장 때 서울시는 장군을 정부서울청사 앞으로 옮기는 방안을 발표했다가 여론에 부닥쳐 무산됐다. 충무공 동상은 1㎜도 움직이지 않았다. 태산처럼 고요하게 서 있었다.
한산대첩을 그린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누적 관객 500만을 넘어섰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명량’은 극장에서 1760만명이나 관람했다. 이순신 이야기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다. 내년에는 이순신 삼부작에 마침표를 찍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한다. 장군도 결국 최후를 맞겠지만 그 장엄한 엔딩을 눈에 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이순신 이야기는 왜 꾸준히 대량 소비될까. 나라와 백성이 절체절명의 낭떠러지에 몰렸을 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영웅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명량’이 흥행한 2014년 여름엔 세월호 사건으로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팽배했다. 누군가 나타나 엉망인 꼴을 바로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자아냈다. 당시 반일 감정도 영화 흥행에 기름을 부었다.
한국인은 밥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충격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2022년 여름은 2014년과는 다른 이유로 어지럽고 무력하다. 감염병의 기세는 꺾이기는커녕 반등하고 있다. 물가와 금리가 올라 살림은 팍팍하다. 폭염에 물난리까지 날씨도 사납다. 정치는 지리멸렬이다. 내일은 또 어떤 충격이 들이닥칠까. ‘한산’은 그래서 속이 뻥 뚫리는 영화다. 거북선이 적진을 돌파하고 사방으로 포탄을 날릴 때 쾌감이 폭발한다.
영화 '한산'에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격군들 /롯데엔터테인먼트
‘한산’과 ‘명량’을 다시 보는데 이름 없는 격군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붙잡혔다. 판옥선이나 거북선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수부(水夫)들 말이다. 바깥 형세를 가늠할 수 없는 밑바닥에서도 그들은 치열했다. 전진, 후진, 선회 등 명령이 내려오면 팔이 부서져라 노를 저었다. “격군들을 보강하라” “더 힘차게 저어라” “격군들을 독려하라” 같은 대사가 크게 들렸다.
‘널빤지 밑이 저승’이라고 뱃사람들은 말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나라와 백성의 생사(生死)가 달려 있었다. 영화 속 격군들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내연기관 같았다. 왜군이 배에 올라타면 백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발밑이 저승이니 죽기 살기로 싸웠다. ‘명량’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격군이 말한다.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거 알기나 할랑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순신 이야기는 각성제다. 어떻게 지켜낸 나라인지 주기적으로 일깨워주기 위해 이 영웅 서사는 존재한다. 이순신과 장졸들 외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를 저은 격군들, 후방에서 전함을 만들고 물자와 군량미를 댄 백성들이 있었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더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영웅으로 정의했다. 한산대첩은 충무공과 이름 없는 영웅들의 승리였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는 난중일기의 어록이 적혀 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지휘관은 이 말로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영웅은 가슴에 품고 가는 등대 같은 존재다. 어둠은 빛을 더 빛나게 하고 빛은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든다. 영화 ‘한산’에 끌린다면 현실이 어둡고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이순신 이야기는 고통을 가라앉히는 진통제다. 오늘 만나는 사람 모두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최다 관객 기록을 보유 중인 영화 '명량'
박돈규 기자 coeur@chosun.com
빛viit명상
●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당당함에 최고의 운이 담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훗날 정오의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서 떠올라 따사로운 햇살을 가득 담아 풍요로움으로 일굴 수 있는 공명정대한 바른 마음, 그것이야말로 큰 운을 불러들이는 진정한 내면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다소 힘든 일이 있더라도 3.1목의 풍요로운 운을 불러들이는 환한 빛마음으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어떤 일에 있어 모든 것을 환하고 명명백백하게 밝히고자 할 때 반응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부끄러울 것 없이 떳떳하다면 환영할 일이고, 그 반대의 경우라면 조금이라도 덮어서 숨기기에 급급해진다. 그래서 한역팔목의 3.1목은 언뜻 보면 크게 좋은 듯 하면서도 도리어 크게 잃을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녔다. 아주 중요한 대운大運 정오의 태양처럼 강렬하게 대지를 내리쬔다. 평소 거리낄 것 없이 명쾌하게 그 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전레없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운이 주어져도 무언가 뒤에 감추고 싶은 것이 있고 부정한 일을 숨기고 있다면 역으로 큰 화를 입게 된다.
2000년 8월 어느 날이었다. 미국 아칸소 주정부가 당시 문희갑 대구 시장을 통해 나를 공식 초청하고 싶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이 공문을 받고 대구시는 다소 당황했다고 한다. 정작 자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빛viit명상을 미국에서 어떻게 알고 공식 초청장까지 보냈느냐는 것이다.
인연의 발로는 책 한 권이었다. 그들이 나를 알게 된 것은 미국 워싱턴의 한 국립도서관에 꽂혀있던 책, 『행복을 나눠주는 남자』를 통해서였다. 누가 그 책을 그 먼 곳까지 가져다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책을 본 한인교포 변호사 엘리자베스Elizabeth가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던 미국 태권도협회American Taekwondo Association 의 이행웅 회장을 살릴 방도로 빛viit명상을 제안한 것이다.
이행웅 회장은 한국전쟁 직후 맨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이후 아칸소를 거점으로 미국 전역에 태도도를 알린 장본인이다. 그는 태권도를 현지화하여 생활스포츠로 자리 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아칸소주는 태권도의 주가 되었다. 매년 열리는 태권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미국에서 하위권에 뒤쳐져 있던 아칸소 주 지역경제도 크게 살아났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되기 전 아칸소 주지사로 재직하던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행웅 회장을 특별히 모셔 태권도를 배울 정도였다고 하니 이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할 만도 하다.
그런 태권도 영웅도 말년이 되자 현대의학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의식을 잃고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측근들은 대체의학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고, 결국 빛viit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경비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은 물론 대구시를 통한 외교적 공식 초청이었기에 명예로운 자리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행웅 회장의 상태가 위중한 만큼 무게와 책임도 함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리 전 먼저 한역팔목에 답을 구해보았다. 고요히 빛viit명상을 한 후 어느 쪽으로도 마음이 치우치지 않도록 평온한 마음이 되었을 때 목을 두 차례 뽑았다. 3.1목, 큰 기회임과 동시에 위기 일 수도 있는 오묘한 목, 하지만 공명정대하게 온 천하에 드러나면 전례없이 큰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정직하고 진솔한 목이였다. 결심이 섰다.
며칠 후, 이행웅 씨가 있는 아칸소 주 리틀락 시에 밤 비행기로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숙소도 들르지 않고 곧장 이행웅 씨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병실로 향했다. 현지 의료진은 물론 모든 가족들과 측근들이 기대 반 의심 반 표정으로 내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이행웅 씨에게 빛viit을 주었다.
그리고 물을 가져오라 하여 그 물에 빛viit을 봉입해 초광력超光力수를 만들었다. 의식이 없는 까닭에 이행웅 씨의 목이 마치 거미줄을 친 듯 꽉 막혀 있었다. 이를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 초광력수를 이행웅 씨의 입속으로 흘려 넣어주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북한에서 가져온 500년 된 산삼을 달인 물도 못 마시던 분이….’ 하며 놀라워했다.
이 모든 것을 하기까지 불과 십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빛viit은 어차피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므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최선을 다했으니 추이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제 최선을 다 했으니 추이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사람들이 방문을 두드렸다. 이행웅 씨가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행웅 씨는 이후 몇 차례 빛viit을 더 받는 과정에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이를 보고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현지 의료진들이었다. 자신들로서는 큰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데 빛viit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받고 하루 밤 만에 깨어나다니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빛viit은 모든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기적만을 일으키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닌 까닭에 이행웅 씨에게 남은 시간 동안 편안하게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이행웅 씨는 뜻밖에 맞이하는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닌 빛viit과 함께하는 편안한 죽음, 웰다잉(well-dying)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지켜본 아칸소 주정부는 나를 종신 명예대사와 리틀락 시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현지의 미국인들에게도 빛viit과 빛viit명상을 전할 수 있는 소종한 기회를 마련 할 수 있었다. 또한 신비로운 인연의 이끌림으로 네이티브 아메리칸 최후의 추장, 하워드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선조들의 정신이 담긴 원광석元光石도 얻게 되었다.
단순히 빛viit 이 몇몇 사람들의 오해나 의심처럼 눈속임이나 가벼운 트릭 정도였다면 이와 같이 큰 기회가 왔을 때 결과가 명쾌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경께서 어린 시절 나를 처음 보시고 바로 이 3.1의 목을 얻고는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오더라도 잘 이겨내고 지나가면 환한 빛viit 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격려하신 적이 있다.
돌이켜 보건데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새삼 가슴 깊이 되새기게 된다. 무릇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큰 운, 좋은 운이란 그저 아무런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눈앞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훗날 정오의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에 떠올라 따사로운 햇살을 가득 담아 풍요로움으로 일굴 수 있는 공명정대한 바른 마음, 그것이야말로 큰 운을 불러들이는 진정한 내면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러니 고통스럽고 다소 힘든 일이 있더라도 3.1목의 풍요로운 운을 불러들이는 환한 빛viit마음으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정광호 著 2015/03/12 초판 1쇄 P. 111 ~ 115
한역팔목은 단순히 눈앞에 닥친 소소한 개인사 정도를 물어 답을 구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앞날과 미래가 걸린 중대하고 위급한 선택의 순간에 보다 지혜롭고 현명한 방향으로 캄캄한 앞날을 열어갈 수 있는 등불이다.
내면의 감각은 답을 알고 있다
오늘날의 의사결정학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합리화된 의사결정 모델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 활용도가 과연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기업의 고위급 임원들 중 상당수가 논리적 분석보다는 ‘직관’이나 ‘느낌’, ‘육감’ 또는 ‘내면의 소리’를 따른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부 학자들은 성공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이성뿐만 아닌 ‘인간적 감성과 느낌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른바 ‘제7의 감각’이라 불리기도 하는 인간의 직관력, 예지력, 통찰력은 중요한 의사결정 순간에 유용하게 사용되어왔으며, 동서양 모두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점占을 치는 것인데, 점이란 본래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도의 감각을 깨워 앞날을 예측하고 더 지혜로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방법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 동전을 던져 의사결정을 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위기의 순간 점성술을 이용해 미래를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행위 모두 점占의 일종이다.
동양에서는 아예 이 부분을 학문으로 체계화시켰는데 역학易學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역학은 오늘날의 반도체 기술에 비할 바 없는 고급 정보학문이었기 때문에 기득권 계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학문을 가능한 한 어렵고 익히기 힘들게 만들어 두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했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가 바로 『주역周易』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14차례에 걸쳐 척자점을 뽑아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병사들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앞날이 걸린 중대한 의사결정을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처럼 정체절명의 선택을 앞에 두고 고도의 예지력과 통찰력에 먼저 답을 구하고 이후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다해 현실에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뿌리 깊은 점占의 전통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대에도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번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국내 역술인은 50만 명에 이르며, 시장규모도 3조원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에서도 운명을 점치고 앞날의 행운을 기원하는 전통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고도의 감각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는 현상일 것으로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면의 감각을 제대로 발현시켜 앞날을 예측하고 그때가 다가왔을 때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역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무척 어렵다. 국내에 역술시장이 커지는 만큼 선무당이 사람 잡고,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속담의 주인공이 혹 자신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14차례에 걸쳐 척자점을 뽑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정광호 著 2015/03/12 초판 1쇄 P. 46~48
“물고기는 강을 만나고
배는 순풍을 만나서 앞으로 나아간다.
빛viit 은 필요한 시운時運을 끌어들이는 힘이다.
빛viit 과 함께하면
한역팔목은 최고의 운으로
최상을 돕는다.”
운명과 숙명사이
1597년 5월 12일 이순신 장군의 참모 신홍수申弘壽가 원균의 운세를 놓고 ‘1.5목의’ 답을 구한 바 있다. 그 결과에 따른다면 원균은 군사를 절대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숨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선조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전 함대를 출동시켰고, 결국 대패하여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흔히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곤 하는 ‘운명運命’과 ‘숙명宿命’이라는 단어 사이에는 사실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내려갔다가 이내 곧 올라가게 마련이다. 비록 좋지 않은 운명의 시기에 와 있다 해도 이내 좋은 운으로 돌아설 수 있다. 빛viit마음에 지혜를 구하고 진심을 다해 노력한다면 어려움을 조금은 수월하게 넘어갈 여지 또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숙명은 그렇지 않다. 불가항력적이며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 작용한다. 따라서 불가피한 필연이 바로 숙명이다. 일례로 1597년 5월 12일 이순신 장군의 참모 신홍수申弘壽가 원균의 운세를 놓고 ‘1.5목의’ 답을 구한 바 있다. 그 결과에 따른다면 원균은 군사를 절대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숨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선조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전 함대를 출동시켰고, 결국 대패하여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원균은 스스로도 자신의 출전이 목숨을 건무모한 도박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그 숙명을 저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어 도저히 거스르기 힘들 만큼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숙명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온 존재인 이상 누구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다가오는 초자연적인 힘, 숙명 또한 맞이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숙명이 존재한다 하여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숙명 앞에서 인간의 존재를 되돌아보고 보다 겸허한 자세를 가지면 된다. 빛viit마음으로 돌아가 순리에 맞게 순수한 복을 짓는다면 그 결말이 보다 아름다울 것이며, 나 자신은 물론 후손에게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물려줄 수 있다.
출처 : 행복예보 생활한역 정광호 著 2015/03/12 초판 1쇄 P. 131~132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의 마음으로 담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