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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1,57-66.80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아기의 탄생은
예나 지금이나 큰 축복이며 기쁨입니다.
특히,즈카리아와 엘리사벳처럼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를 그것도 생물학적으로는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에 아이를 낳았으니
그 기쁨은 상상하고도 남을듯 합니다.
이 기쁨을 나누고자 아기의 할례식에 모여든 이웃과 친척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아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하자 엘리사벳은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60)라고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히브리전통에서 아이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사람의 정체성과 미래를 암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주님 오실길을 준비하게 하는..그러기에 어려움들을
겪게 될것이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길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구약을 신약을 잇는 위대한 예언자가 되실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요한의 부모는 망설임없이
오롯이 하느님 뜻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루카 1,67-79 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참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도 노래하지요.(찾아서 꼭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대축일이지만 요한의 부모님의 신앙이 마음을 건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안에(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기를 바랄까요?
아니면 내뜻이...?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1,60)
(정 루치아나 수녀님)
6월24일 [요한 세례자 탄생 축일]
루카 1,57-66.80
착해지는 유일한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한 아이, 요한의 탄생이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 안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고 외칩니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 지음으로써 닫혔던 입이 열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요한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그분’을 향한 삶, 그분께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묵상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조건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은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나뿐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행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의의 중심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자기 평판, 자기 만족, 자기 이익이 그 뿌리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뿐인 사람’의 선함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상황,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그 안에 숨어 있던 이기심이 반드시 분노와 원망의 모습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해?”라며 세상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결코 온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선함은 언제나 ‘상황’이라는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던 세월호 참사는 이 ‘나뿐인 사람’의 모습과 그 반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남긴 채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위급한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나’라는 한 글자만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보다 ‘나뿐인’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의 중심이 될 때, 인간은 이토록 비참하고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옥 같은 배 안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구하려다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탈출하는 길을 알려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다독이다 함께 스러져간 그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아이들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왜 나만 희생해야 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아이들이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저마다 남을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필리 2,3-4)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나뿐인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독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이 그 답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요한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셨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마태 3,11)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이것이 바로 ‘나뿐인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 될 때, 내 삶의 의미는 나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내가 가리키는 그 ‘목적지’에서 나옵니다.
길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길의 영광은 오직 그 길의 끝에 있는 목적지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길’이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다른 이가 더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만 남기 때문입니다.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길’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들린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불렀습니다.
연필은 스스로 무언가를 쓸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쓰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모든 활동이, 오직 하느님께서 사랑의 메시지를 쓰는 도구,
즉 ‘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가 만난 가난하고 죽어가는 이들은 그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났습니다.
만약 마더 데레사가 자신의 명예나 인정을 바랐다면, ‘나뿐인 사람’이었다면, 가장 더럽고 비참한 이들을 평생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길’ 그 자체가 되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녀의 겸손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기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가는 길이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부모는 자녀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기쁨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본당의 모든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을 보며 이렇게 예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에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루카 1,76)
이 사명은 세례자 요한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한 ‘길’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삶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나뿐인 사람’이 되어, 내 안의 상처와 이기심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누구에게로 가는 길인가?” 내가 길이 되어주고자 하는 그 사람, 그분을 떠올리십시오.
그분을 위해서라면, 그분이 빛나실 수만 있다면, 나의 이 감정쯤은 기꺼이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청하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기꺼이 작아짐으로써 그리스도를 크게 드러내는 삶, 나 자신이 목적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가는 겸손한 ‘길’이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이르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 루카 1,57-66.80
우리 역시 바람잡이일뿐입니다!
언젠가 초보 수도자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수도자들에게도 문화 예술 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젊은 형제들 열 명과 함께 혜화동으로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우왕좌왕 길을 헤매다가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되었는 데...열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갑자기 우르르 들어가니, 주로 커플 위주의 관객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본무대가 펼쳐지기 전에 한 재미있는 청년이 무대 위에 등장했습니다.
퀴즈도 내고, 선물도 주고, 참신한 개그도 펼쳐놓고, 한바탕 관객들을 재미있게 해주고는 쿨하게 퇴장했습니다.
이른바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 무대 막이 오르기 전에 관객들에게 기쁨도 주며 주 무대에 앞서 호응을 유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분위기 메이커이지 결코 무대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연극 주 무대의 서막을 알리는 안내자 역할에 충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경축합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교회 전례력 역시 그의 큰 존재감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 뜬 날을 축일로 잡아 기념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죽음뿐만 아니라 탄생일까지 챙겨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성인 중에서도 대성인에 속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토록 큰 인물, 대성인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신원 의식, 놀라운 겸손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항상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의 오실 길을 닦는 선구자라는 것을.
나는 절대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바람잡이요 분위기 메이커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져, 어느 순간 소멸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주님께서 그를 특별히 총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최후가 참담하고 쓸쓸했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벽하게 수행한 그에게 주어진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잠시였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남긴 불멸의 덕행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바람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저분이 주님이시다, 저분이 영생과 구원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하며 용감하게 외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강론>
(2025. 6. 24. 화)(루카 1,57-66.80)
<주인공은 ‘예수님’과 ‘나’, 그리고 ‘우리’입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57-66.80).”
1) 우리 교회가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 세 번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12월 25일), 성모님의 성탄절(9월 8일),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탄생 축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날이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은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해서 여섯 달 앞으로 정한 날입니다(루카 1,26).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했다면 6월 25일이 되어야 하는데, 그날은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과 겹치기 때문에 하루 앞당겨서 6월 24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준으로 해서 정한 대축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이 그날입니다.
이 모든 날들의 핵심 주제는 단 하나, ‘메시아 강생’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도 ‘메시아 강생’을 경축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 예수님의 탄생 외에 유일한 탄생 축일이라는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틀렸습니다(매일미사. 2025. 6. 오늘의 묵상).>
2)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일은(루카 1,13-17), 사실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한 일이고, 세례자 요한의 출생 후에 즈카르야가 부른 찬미가인 ‘즈카르야의 노래’도 ‘메시아 강생’을 찬양하고 찬미하면서 감사드리는 노래입니다(루카 1,68-79).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나’, 그리고 ‘우리’입니다.
<‘구원’은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런 ‘나에게’ 오셨기 때문에 바로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3)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사람마다 그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각자 생각하는, 또는 원하는 ‘구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병고’에서 해방되는 것을, 또 어떤 사람은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생각들과 희망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생각들과 희망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모두 ‘구원의 시작’일 뿐이고, ‘구원의 완성’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가난, 굶주림, 병고, 정치적 억압 등에서 벗어나는 것, 또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까지 포함해서,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참되고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그 구원이 완성되는 때가 종말이고, 그 구원을
완전하게 또 영원히 누리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길’과 ‘문’을 보여주는 것까지만 하시고, 그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사람들 가운데에는 현세의 복만, 즉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만 바라면서, 내세, 구원,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미신을 믿는 이들도 많은데, 바오로 사도는 그들을 ‘바보’ 라고 부릅니다(로마 1,22).
‘참 지혜’의 반대쪽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현세의 복’만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1코린 15,19).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섰으면서도 구원은 보지 않고, 구원이 아닌 하찮고 허무한 것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