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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촉망(可憐觸網)
불쌍하게 그물에 걸렸다는 뜻으로, 그물에 걸린 참새의 가련함에 빗대어 욕망을 쫓다가 죄를 범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나무라는 말이다.
可 : 옳을 가(口/2)
憐 : 불쌍할 련(忄/12)
觸 : 닿을 촉(角/13)
網 : 그물 망(糹/8)
출전 : 고려사(高麗史) 卷71 志 卷 第25 악부(樂府) 장암곡(長巖曲)
이 성어는 고려사(高麗史) 지(志) 卷 第二十五악부(樂府) 장암곡(長巖曲)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암(長巖)
平章事杜英哲, 嘗流長巖, 與一老人相善.
평장사(平章事) 두영철(杜英哲)이 일찍이 장암(長巖)에 유배(流配)되었는데, 어떤 노인과 서로 잘 지냈다.
及召還, 老人戒其苟進, 英哲諾之.
유배를 마치기 전에 돌아가게 되자 노인이 그가 구차스럽게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였더니, 두영철이 그 말을 따랐다.
後位至平章事, 果又陷罪, 貶過之.
후에 두영철의 지위가 평장사에 이르렀으나 끝내 또 죄를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老人送之, 作是歌以譏之.
노인이 그를 배웅하며 이 노래를 지어 그를 꾸짖었다.
李齊賢作詩解之曰,
이제현(李齊賢)이 시를 지어 풀이 하였다.
拘拘有雀爾奚爲(구구유작이해위)
觸着網羅黃口兒(촉착망라황구아)
眼孔元來在何許(안공원래재하허)
可憐觸網雀兒癡(가련촉망작아치)
잡혀있는 참새야, 너는 어찌 된 일이냐?
그물에 걸려있는 참새 새끼[黃口兒]구나.
눈구멍을 원래 어디에 두었는가
가련하게도 그물에 걸린 어리석은 참새여.
가련촉망(可憐觸網)
불쌍하게 그물에 걸렸다는 말이다.
고려 때 벼슬을 하던 두영철(杜英哲)이 있었다. 어떤 일에 연루돼 충청도 서천군(舒川郡) 장암진(長巖鎭)으로 귀양을 갔다. 그곳에서 어떤 노인과 친하게 지냈다.
다시 불려 조정으로 돌아가게 되자 노인이, “앞으로는 구차하게 벼슬에 나가려고 하지 마시지요”라고 말하자, 두영철도 “그래야지요”라고 대답하고 돌아왔다. 귀양살이하는 동안 갖은 고생을 한 두영철은 벼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얼마 동안 지냈다.
그러자 다시 임금이 괜찮은 벼슬로 불렀다. 출세욕도 작용했겠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노인과의 약속을 잊고 다시 벼슬에 나갔다. 승승장구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평장사는 오늘날의 부총리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이다.
그런데 또 죄에 얽혀 다시 귀양을 가게 됐다. 지난날 귀양살이하던 장암을 지나가게 됐다. 그 노인이 나와 전송하면서 이런 시를 지어주었다.
拘拘有雀爾奚爲(구구유작이해위)
觸着網羅黃口兒(촉착망라황구아)
眼孔元來在何許(안공원래재하허)
可憐觸網雀兒癡(가련촉망작아치)
움츠린 참새여 너는 무엇 하려는가,
그물에 걸린 참새 노란 부리여.
눈 구멍은 원래 어디 있는가,
가련하다 그물에 걸린 어리석은 참새여.
본래 우리말로 부른 노래인데, 고려 후기 학자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번역한 한시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표면적으로는 먹이를 탐내다가 그물에 걸린 참새의 상황을 불쌍히 여겼지만, 실제로는 벼슬 좋아하다 죄에 빠져 처벌받는 사람의 신세를 풍자한 작품이다.
대한민국에 지금 전문대학 교수까지 다 포함해서 교수 노릇하는 사람이 5만명 정도 된다. 그런데 가끔 교수 가운데서 국무총리도 나오고 교육부장관 등 장관도 나온다. 정부 부처의 국장으로 가는 사람도 가끔 있고, 심지어는 과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국회의원에 당선돼 활약하는 교수들도 있다.
별 영향력이 없던 자리에서 무슨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를 얻어 가서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런 교수를 부러워하는 교수도 많다. 한자리 하다가 돌아온 교수들은 학내에서 거물급 인사로 대우를 받는다. 근래 들어서 유독 교수들의 발탁이 많았다. 그 방면에 특출한 능력이 있어서 발탁돼 일을 하면 자신도 떳떳하고 나라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대부분은 연줄·청탁을 통해서 한자리를 얻는 경우가 많다.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된 이후로 교수 출신의 고위직들이 구속되거나 청문회에 불려나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소속 대학에서는 학생들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먹이를 탐내다가 거물에 걸린 불쌍한 참새의 모습과 흡사하게 됐다. 한때의 출세를 위해 덤벼들었다가 몰락한 지금, 그들은 교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교수들이 부러울 것이다.
새로운 '장암' 노래를 불러야 할 때
고려사 악지에는 장암(長巖)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유래가 이렇다. 두영철(杜英哲)이 장암에 귀양을 왔다가 해배(귀양을 풀어 줌)되어 돌아가는데 친하게 지내던 노인이 그에게 구차하게 영달(지위가 높고 귀하게 됨, 출세)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영철은 평장사에까지 오르며 계속 영달을 추구하다가 또 귀양 가는 신세가 됐다.
예전 그 노인이, 자기 말을 안 듣고 관직에 나갔다가 다시 귀양 가는 두영철을 그물에 걸린 참새에 빗댄 노래가 '장암(長巖)'이다. '장암'은 노랫말이 전해 지지 않지만 이제현이 그 내용을 소악부로 옮겼는데 이를 소개한다.
拘拘有雀爾奚爲(구구유작이해위)
觸着網羅黃口兒(촉착망라황구아)
眼孔元來在何許(안공원래재하허)
可憐觸網雀兒癡(가련촉망작아치)
구구한 새야, 너는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물에 노란 입이 붙어 있으니.
눈구멍은 원래 어디에 두고,
불쌍하게도 그물에 걸려드느냐 못난 참새야.
두 눈이 있는데도 무슨 욕심으로 그물에 걸리는 신세가 됐느냐는 질책이 사뭇 따갑다. 두영철이 실제로 죄를 지었는지 혹은 헐뜯음을 입은 것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무리 높은 직위에 있어도 영어(囹圄 감옥)의 몸이 되는 것이 또한 영달한 고관이다.
영달한 자리가 이렇다면 평범한 사람보다 몸가짐을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청렴에 대한 금과옥조가 있다. '율기육조(律己六條)' 청심(淸心) 편에서, 육구연(陸九淵)의 '상산록(象山錄)'에 있는 청렴의 세 등급을 인용했는데 이를 소개한다.
청렴에 세 등급이 있는데 나라에서 주는 봉급 이외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설령 먹고 남은 것이 있더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며 돌아가는 날에는 쓸쓸하게 한 필의 말만 남는 것이 옛날의 이른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록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되 바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것이 중고 시대의 소위 염리라는 것이다. 가장 아래로는 무릇 이미 선례가 서 있는 것은 비록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 도 먹되 아직 선례가 서 있지 않는 것은 제가 먼저 시작하지 않고 향(鄕)이나 임(任)의 벼슬도 팔지 않으며 재앙을 핑계로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와 옥사를 돈으로 처리하지도 않으며 세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착복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소위 염리라는 것이다.
'장암'의 두영철도 나라에서 주는 봉급만 쓰고 쓸쓸하게 한 필의 말만 남겼다면 아마 두 번이나 귀양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구차하게' 영달의 자리를 얻고 또 지키려고 했기에 그물에 걸린 참새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도 여전히 구차하게 영달을 구하다가 참새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비리에 연루됐으면서도 직(職)에 연연해하는 인물, 능력은 없으면서 친인척의 뒷배로 승승장구하다가 낙마한 인물, 자신 의 직위를 이용해 뇌물을 받았다가 구속된 인물 등, 정의와 청렴을 잊은 채 자신과 일족의 영달만 붙좇는 인물들이 있다.
구차하게 영달을 구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따르지 않은 두영철에게 노인은 '장암'을 지어 '눈구멍은 어디에 두고', '참새 못난이야' 식의 날선 비판을 했다. 이 비판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널리 회자됐기에 이제현이 소악부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또 새로운 '장암'을 노래해야 할 때인 듯싶다. 지금의 '장암'을 노래하며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펼쳐 보일 때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8.1.28 ~ 1367.8.24)
이제현(李齊賢)은 고려 후기의 시인, 문신, 성리학자, 역사학자, 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생애
백이정의 문인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연경궁녹사, 예문춘추관, 사헌부규정을 거쳐 1319년 충선왕의 초빙으로 원나라로 건너가 만권당에서 연구하였으며,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간하여 1323년 석방되게 했다.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에 책록되었고, 그 뒤 밀직사, 정당문학, 삼사사 등을 거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작되었고,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기철 등 친원파 암살 사건을 중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사직하고 은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 저술에 몰두하였다.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공민왕의 후궁 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와 조선의 사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생 목은 이색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길재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겼다. 백이정, 권부의 문인이다.
출생과 가계
익재 이제현은 1287년 검교정승인 임해군 이진(李瑱)과 부인 진한국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이며 경순왕의 사위인 이금서(李金書)와 형부상서 이주좌의 후손이었지만 5대조 이선용의 대에 말단직인 군윤이 된 이래 하급관료를 전전하다가 아버지 이진이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아버지 이진은 과거에 급제하여 신흥관료로서 크게 출세함으로써 다시 가문을 일으켜세웠으며,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그의 처음 이름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인데 뒤에 제현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일찍 조숙하여, 서를 즐겼고, 글을 잘 지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지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일찍이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뒤에는 후일 장인이 된 권부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
1301년(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관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환로에 들었다. 이해에 당대의 대학자며 권세가였던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부인 권씨는 일찍 사별했고, 박거실(朴居實)의 딸 박씨와 재혼했다가 나중에 서중린(徐仲麟)의 딸 서씨를 삼취로 맞이하였다. 또한 몇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의 첩에게서 두 딸을 얻었다.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에 임명되고 1308년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09년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되어 귀국하자 왕을 따르던 원나라 여인이 따라왔다. 왕은 연꽃 한 송이를 이별의 징표로 주어 되돌려 보냈다.
고려에 돌아온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원나라에 가서 그녀를 만나보게 하였다. 이제현이 갔을 때, 그 여인은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는 지경이었다. 겨우 붓을 들어 시 한 구절을 썼다.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엔 붉더니,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그러나 왕을 염려한 이제현은 이 사실을 숨기려다가 보고한다.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충선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여인이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고하였다. 충선왕이 노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 더러운 여자라는 뜻이었다.
다음해 임금의 생일에 이제현이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대죄하였다. 충선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이제현이 여인의 시를 올리며 그때 일을 말했다. 충선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때 이 시를 보았더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돌아갔을 터인데, 공이 나를 사랑해 일부러 다르게 말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그 뒤로 이제현은 충선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1311년(충선왕 복위 3년)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을 거쳐, 1312년 외직인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파견되었다.
관료 생활
원나라 체류 시절
1314년(충숙왕 1)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상왕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른 이제현을 부르자, 연경(燕京)에 건너갔다.
연경을 방문한 그는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趙孟頫),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원나라 체류 시 만권당에서 고전을 연구하며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 염복(閻復) 원명선 조맹부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원나라에 체류 중일 때에도 그의 신분은 고려의 관리였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이제현의 직책을 유지해줄 것을 알려왔고, 충선왕, 충숙왕의 특별 배려로 만권당에 에 체류하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여행과 귀국
1316년 스스로 자청하여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하여 출발하여 대신 제사를 지내고, 3개월 동안 서촉을 왕래하였다.
그 뒤 귀국했다가 1319년 다시 출국하였다. 1319년 원나라에 가 1319년에는 충선왕과 함께 절강성의 보타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1320년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벌을 받고 토번에 유배되자 귀국한다.
그러나 그는 충선왕의 방환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유배지를 토번에서 타마사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충선왕의 석방을 적극 청원하여 1323년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렸다.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의 타마사를 방문해 또 한 번 중국의 외진 절경과 문화재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 같은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귀국과 외교 활동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 가자 그곳에 따라갔으며, 밀직사사(密直司使) 첨의평리(僉義評理) · 정당문학(政堂文學) · 삼사사(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성(浙江省)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하여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1320년 귀국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에 책록 되었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1320년 겨울, 충선왕이 왕고와 친밀한 원나라 관료들의 비난을 받고 국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죄명으로 유배되면서 귀국하였고, 원나라 체류는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와 동시에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를 직할로 다스려야 된다는 주장이 논의되었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도 나타났다. 이때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의 일파의 왕위 탈환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1320년말 다시 출국했으나 아버지 이진의 상으로 다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치고 1323년 출국, 다시 원나라에 되돌아갔다. 1323년(충숙왕 10) 유청신(柳淸臣) · 오잠(吳潛) 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省)을 설립하여 원나라의 제성(諸省)과 동등하게 하려고 청하자(입성론) 고려 편입 반대론을 주장하며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상소문은 실전되었지만 그 내용이 현재 전해진다. 이제현은 도평의사사에도 글을 올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이 문제를 철회케 하였다.
동시에 그는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석방, 환국 운동도 벌였다. 그의 노력으로 직할통치론, 입성론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석방되지 못하고 토번에서 타사마로 이배되었다.
마지막으로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하여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일각에 의하면 이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먼 여행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시각이 있다.
귀국과 정치 활동
이후 원나라 체류 중 지밀직사에 임명되었고, 1324년 귀국하였다. 그해 밀직사사에 임명되었고,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정승 조적(曺頔)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 등과 꾀하여 모역(謀逆)하다가 사형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여 충혜왕의 복위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조적의 무리가 연경에 많이 남아 있어 인심이 매우 동요하자 이제현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건너가 잘 절충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조적의 여당(餘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였는데, 관직에서 떠난 동안 '역옹패설'을 저술하였다.
한동안 그는 조적파의 힘에 밀려 정계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초야에 묻혀 역옹패설 등을 저술한다. 그가 다시 정계에 복귀한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면서부터이다.
개혁 활동
충목왕이 즉위하자 복직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피봉 되었다. 그 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그는 개혁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예의와 염치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들었다. 그는 특히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후 무신정변 이후 정치기강이 문란해졌음을 지적하고,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사회를 바로잡으며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민생구휼책과 세금 감면, 그리고 새로운 시책을 주장하며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관료생활 외에 여가시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색(李穡)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색은 후에 정몽주와 정도전, 조준, 권근, 길재 등을 길러냈고, 이들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자들로 학맥이 이어진다.
생애 후반
공민왕 재위 초반
1348년 충목왕이 사망할 당시 그의 서자는 갓난아이였으므로, 그는 원나라에 가서 황숙인 강릉대군 왕기(王祺, 후일의 공민왕)가 왕으로 적합하다는 뜻을 원나라 조정에 알렸으며 강릉대군을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원나라에서는 그 진의를 의심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1351년 그의 뜻대로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문하시중이 되었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군되었고, 그해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 35인을 합격자로 뽑아 들였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즉위할 때 우정승에 임명되고 정동행성사(征東行省使)를 맡자,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시기함을 알고 그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후에 조일신의 난 때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57년(공민왕 6) 벼슬을 떠났다.
은퇴와 죽음
1356년 친명파와 신진사대부 일각에서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반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그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1357년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제현은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시대를 거치며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후 관작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성리학자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공민왕과 우왕은 그를 수시로 불러들여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주로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만년에는 백문보, 이달충 등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료들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국사를 집필하였다.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만년에는 집에서 지내면서 공민왕의 명을 받고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고, 종묘(宗廟) 위패(位牌)의 서차(序次)를 정하였다. 한편 공민왕이 불교 승려 출신 신돈을 총애하는 것에 반발하여 신돈의 골상 등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책인 '국( 國史)' 편찬하면서 그는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이달충(李達衷), 백문보(白文寶) 등과 함께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유고는 후일 조선건국 초기 고려사 편찬의 자료로 활용되었다. 1367년에 사망하니 당시 향년 80세였다.
사후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죽은 뒤에 경상북도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 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책들 중 현전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4권, 습유 1권이 전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후손 이사균에 의해 충청북도 청원군 수락영당(水洛影堂)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1546년(명종 2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 후손 이반기에 의해 영호사(靈湖祠)가 건립되었으며, 그 뒤 전라남도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전라남도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 등에도 배향되었다.
사상과 신념
작품성과 도덕적 교훈
문학에 있어서는 '도와 문을 본말(本末)의 관계로 파악하여 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도 도의 전달에 상대적인 비중을 두는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산문의 작품성은 전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 저서인 '익재난고'의 소악부(小樂府)에는 고려 민중들 사이에 돌던 민간 가요를 7언절구로 번역한 17수가 특별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역사서 편찬
유교 성리학적 지식 외에 그는 당시 국내의 역사 지식도 풍부하였다.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역사서 편찬과 감수, 증보 등을 주관하기도 했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성리학 발전에 기여
그는 성리학을 소개,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와 정몽주, 정도전으로 그의 학통(學統)이 이어진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단순히 성리학에만 깊이 빠지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온건 개혁론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고려의 자주국론을 주장하는 세력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였으나, 원나라의 속국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엄연한 현실로 인식하였다. 그는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평가 기타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그는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관풍기속(觀風記俗)·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는 평가가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시각도 있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후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그의 국사에 실린 사론이 종종 인용되었다.
그의 사후 이색이 그의 묘갈명을 쓰기 위해, 그의 집안에서 사람을 시켜서 경주이씨 족보를 싣고 오던 도중 유실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비교적 근래의 선조인 신라 소판 이거명부터 세대를 계산하게 되었다.
저서와 작품
저서 '익재난고' : 17수의 고려가요를 한시로 번역하여 실렸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국사(國史: 미완성의 유고), 운금루기 등이 있다.
작품 기마도강도
시
黃雀何方來去飛(황작하방래거비)
참새야 어디에서 오고가며 날고 있는 것이냐?
一年農事不曾知(일년농사부증지)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鰥翁獨自耕耘了(환옹독자경운료)
늙은 홀아비가 혼자 밭을 갈고 맸는데
耗盡田中禾黍爲(모진전중화서위)
밭의 벼와 기장을 모두 없애다니
拘拘有雀爾奚爲
움츠린 참새야 너는 어이하여 그물에나 걸리는 황구아가 되었느냐
觸着網羅黃口兒
그물에나 걸리는 황구아가 되었느냐
眼孔元來在何許
보라는 눈은 어디에 두고서
可憐觸網雀兒癡
그물에 걸리는 가엾은 새가 됐나
鵲兒籬際噪花枝
까치는 울 옆 꽃가지에 지저귀고
喜子床頭引網絲
희자는 상 머리에 그물을 치네
余美歸來應未遠
우리 님 오실 날 멀지 않겠지
精神早已報人知
그 정신 미리 사람에게 알려주네
浣沙溪上傍垂楊
완사계 언덕 위에 버들이 늘어지고
執手論心白馬郞
백마랑 손잡고 심중을 터놓았네
縱有連簷三月雨
처마에 쏟아지는 삼월 비라도
指頭何忍洗余香
차마 어이 내손의 향기야 씻어낼까
脫却春衣掛一肩
봄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呼朋去入菜花田
친구 불러 채마밭에 들어갔다네
東馳西走追蝴蝶
동서로 쫓아가며 나비잡던 일들이
昨日嬉遊尙宛然
어젯날 놀이같이 완연하구나
新羅昔日處容翁
옛날 신라의 처용 늙은이
見說來從碧海中
바다 속에서 왔노라 말을 하고서
貝齒赬唇歌夜月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鳶肩紫袖舞春風
솔개 어깨 자주 소매로 봄바람에 춤췄다
木頭雕作小唐鷄
나무 끝에 조그마한 닭을 조각하여
筯子拈來壁上棲
젓갈로 집어다 벽위에 놓았네
此鳥膠膠報時節
이 새가 울면서 시간을 알려오니
慈顔始似日平西
어머님 얼굴이 비로소 지는 해 같네
縱然巖石落珠璣
바윗돌에 구슬이 떨어져 깨지긴 해도
纓縷固應無斷時
꿰미실만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與郞千載相離別
님과 천추의 이별을 하였으나
一點丹心何改移
한 점 단심이야 변함이 있으랴
憶君無日不霑衣
매일같이 님 생각에 옷깃이 젖어
政似春山蜀子規
흡사 봄산에 자규새 같네
爲是爲非人莫問
옳고 그릇됨을 묻지를 마오
只應殘月曉星知
응당 새벽달과 별만은 알리라
* 충북 보은의 이모본 영정
1504년(연산군10) 이제현의 후손인 조선 전기의 문신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 1471 ~ 1536)은 연산군의 폐비 윤씨 추존 건의를 반대한 죄로 보은에 귀양 와 있을 때 영정을 모사하여 내려와 사당을 세우고 영당(影堂)에 봉안하였다. 이 영정은 조선시대 이모본(移模本)으로 크기나 채색, 제발(題跋) 등이 원본의 옛 모습과 거의 유사하여 충북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되었다.
*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영정
1319년 중국 원나라의 화가 진감여가 그린 그의 원본 영정은 이제현 생전에 한번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일이 있다. 원나라에서 받은 영정을 그는 한때 잃어버렸다가 뒤에 되찾게 되었는데 이제현은 1364년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와 중국 원나라의 진감여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외모의 차이점을 본 뒤 감회를 느껴 시를 한 수 지었다고 한다.
장암곡(長巖曲) / 이익(李瀷)
長巖不負人
장암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人負長巖何
사람은 어이하여 장암을 저버렸나.
休言物頑然
사물을 아둔하다고 말하지 말라
勝似心周羅
모두 차지하려는 인심보다 훨씬 낫다오
長巖屹臨去來途
가고 오는 길 장암이 우뚝이 내려다보니
往者銘肝今掩面
갈 적엔 명심하더니 올 적엔 부끄러움뿐
曾收楚澤滋蘭手
초택(굴원이 걷던 곳)에서 난초 기르던 손을 거두어
去把雲霄補衮線
궁궐로 가서 임금을 보필하였네
野翁慣見傾奪速
촌로가 앞다퉈 빼앗는 인심을 익히 알았기에
贈行非輕一言儆
떠날 때 준 한마디 경계가 가볍지 않았네
燕雀拍拍那免罟
참새가 파닥댄들 어찌 그물을 벗어나랴
猛虎耽耽終墮穽
맹호가 노리는데 결국 함정에 빠졌구나
我願君心涅不緇
그대 마음이 물들지 않기를 바랐더니
君道長巖是息壤
그대는 장암을 식양이라 하며 맹서했지
人間何限迷津者
세상에 길 잃은 자가 어찌 한둘이랴
平地驚風與駭浪
평지에도 풍파가 일어나는 법이라네
塞馬焉知禍
새옹지마가 어찌 화복을 알겠는가
磨驢踏陳迹
연자방아 나귀처럼 갔던 길을 맴돈다네
君行更千里
그대는 다시 천리 먼 길을 유배 가니
有指不可齰
이제 와서 맹서해도 소용없는 일이라
吾看太行險
나는 보았네 험난한 태항산 산길이
步步前車覆
걸음걸음 앞 수레 엎어진 자취인 것을
寄語夸毗子
아첨이나 하는 소인에게 말하노니
聽此長巖曲
장암곡 이 노래 한번 들어 보아라
- 이익(李瀷) 성호전집(星湖全集) 제8권 해동악부(海東樂府)
(註)
🔘 장암곡(長巖曲) : 고려사 권71 악지 속악에 속악 24편 중의 하나로 실려 있다. 장암은 충청도 서천(舒川)의 서천포(舒川浦)이다. 고려 시대에는 장암진(長巖津)이라고 하였다.
🔘 식양(息壤) : 중국 전국 시대 진(秦)나라 무왕(武王)이 장군 감무(甘茂)를 시켜서 한(韓)나라 의양(宜陽)을 치게 할 때에 감무가 다른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끝까지 신뢰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며 출정하려 하지 않자, 무왕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할 것이다. 그대와 맹서를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식양에서 무왕이 감무와 맹서를 하였다. 감무가 의양을 공격했는데, 5개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무왕이 공손연(公孫衍) 등의 말을 듣고는 감무를 소환하니, 감무가 말하기를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息壤在彼)” 하니, 무왕이 “맹서한 적이 있다.” 하였다. 이에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감무를 시켜 공격하게 하여 드디어 의양을 함락하였다. 이 내용은 사기 권71 감무열전(甘茂列傳) 등에 실려 있다. 이후로 식양은 맹서의 장소, 징표의 뜻으로 쓰였다.
🔘 연자방아 … 맴돈다네 : 소식(蘇軾)의 송지상인유여산(送芝上人游廬山) 시에 “돌고 도는 것이 마치 방아 끄는 소와 같아, 걸음마다 옛 자취만 밟는구나(團團如磨牛 步步踏陳跡).”라고 하였다. (東坡全集 卷20) 후세에는 같은 일이나 행동을 반복하여 결과적으로 마치 제자리를 맴도는 듯이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 태항산(太行山) :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사이에 있는 태항산맥(太行山脈)을 말한다. 험준하기로 유명한데, 특히 이곳에 있는 구절판(九折坂)은 험준함의 극치라고 한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태항로(太行路)에 “태항산 산길이 험하여 수레를 부순다고 하지만 님의 마음에 견주면 이는 평탄한 길이고, 무협의 강물이 거칠어 배를 뒤엎는다고 하지만 님의 마음에 견주면 이는 잔잔한 물이라오(太行之路能摧車 若比君心是坦途 巫峽之水能覆舟 若比君心是安流).” 하였다.
🔘 아첨이나 하는 소인 : 원문의 과비자(夸毗子)는 큰소리를 치거나 남에게 아첨하여 빌붙는 자를 가리킨다. 시경 판(板)에 “하늘이 노여워하고 있으니 과장하거나 아첨하는 짓을 못하게 하라(天之方懠 無爲夸毗).” 하였다. 그 주석에 “과(夸)는 크다(大)는 뜻이고 비(毗)는 빌붙는다(附)는 뜻이다. 소인은 타인에 대해서 큰소리를 치면서 과시하지 않으면 아첨하는 말을 하여 빌붙는다.”라고 하였다.
▶️ 可(옳을 가, 오랑캐 임금 이름 극)는 ❶회의문자로 막혔던 말이(口) 튀어 나온다는 데서 옳다, 허락하다를 뜻한다. 나중에 呵(訶; 꾸짖다), 哥(歌; 노래) 따위의 글자가 되는 근본(根本)이 되었다. 또 나아가 힘드는 것이 나갈 수 있다, 되다, 그래도 좋다,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可자는 ‘옳다’나 ‘허락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可자는 곡괭이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可자는 본래 농사일을 하며 흥얼거린다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였다. 전적으로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던 농사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이겨내고자 흥얼거리던 노래가 바로 농요(農謠)이다. 그래서 可자는 곡괭이질을 하며 흥얼거린다는 의미에서 ‘노래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可자가 ‘옳다’나 ‘허락하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입을 벌린 모습의 欠(하품 흠)자를 결합한 歌(노래 가)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可(가, 극)는 (1)옳음 (2)좋음 (3)성적이나 등급 따위를 평점하는 기준의 한 가지. 수,우,미,양,가의 다섯 계단으로 평점하는 경우에, 그 가장 낮은 성적이나 등급을 나타내는 말 (4)회의(會議)에서 무엇을 결정하거나 어떤 의안을 표결할 경우에 결의권을 가진 사람들의 의사(意思) 표시로서의 찬성(동의) (5)…이(가)됨, 가능(可能)함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서 동작을 나타내는 한자어 앞에 붙음 등의 뜻으로 ①옳다 ②허락하다 ③듣다, 들어주다 ④쯤, 정도 ⑤가히 ⑥군주(君主)의 칭호(稱號) ⑦신의 칭호(稱號) 그리고 ⓐ오랑캐 임금의 이름(극)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이다. 용례로는 할 수 있음을 가능(可能), 여러 사람의 의사를 따라 의안을 좋다고 인정하여 결정함을 가결(可決), 변화하거나 변경할 수 있음을 가변(可變), 움직이거나 이동할 수 있음을 가동(可動), 대체로 합당함을 가당(可當), 가능성 있는 희망을 가망(可望), 두려워할 만함을 가공(可恐), 하고자 생각하는 일의 옳은가 그른가의 여부를 가부(可否), 얄미움이나 밉살스러움을 가증(可憎), 불쌍함이나 가엾음을 가련(可憐), 눈으로 볼 수 있음을 가시(可視), 나눌 수 있음이나 분할할 수 있음을 가분(可分), 어처구니 없음이나 같잖아서 우스움을 가소(可笑), 참고할 만함이나 생각해 볼 만함을 가고(可考), 꽤 볼 만함이나 꼴이 볼 만하다는 뜻으로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비웃을 때에 이르는 말을 가관(可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는 뜻으로 흔히 편지에 쓰이는 말을 가가(可呵), 법령으로 제한 금지하는 일을 특정한 경우에 허락해 주는 행정 행위를 허가(許可), 옳지 않은 것을 불가(不可), 인정하여 허락함을 인가(認可), 아주 옳음이나 매우 좋음을 극가(極可), 안건을 결재하여 허가함을 재가(裁可), 피할 수 없음을 불가피(不可避),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될 수 있는 대로나 되도록을 가급적(可及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가시적(可視的), 현상이나 상태 등이 실제로 드러나게 됨 또는 드러나게 함을 가시화(可視化), 침범해서는 안됨을 불가침(不可侵), 의안을 옳다고 결정함을 가결안(可決案), 옳거나 그르거나를 가부간(可否間), 불에 타기 쉬운 성질을 가연성(可燃性), 높아도 가하고 낮아도 가하다는 가고가하(可高可下), 동쪽이라도 좋고 서쪽이라도 좋다는 뜻으로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다는 말을 가동가서(可東可西), 머물러 살 만한 곳이나 살기 좋은 곳을 가거지지(可居之地), 어떤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감지인(可堪之人), 그럴듯한 말로써 남을 속일 수 있음을 가기이방(可欺以方) 등에 쓰인다.
▶️ 憐(불쌍히 여길 련/연, 이웃 린/인)은 형성문자로 怜(련), 怜(련)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粦(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憐(련, 린)은 ①불쌍히 여기다 ②가엾게 여기다 ③어여삐 여기다 ④귀여워하다 ⑤사랑하다 ⑥동정(同情) ⑦사랑 그리고 ⓐ이웃(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불쌍할 휼(恤)이다. 용례로는 가엾어 함이나 불쌍히 여김을 연민(憐憫), 불쌍히 여기며 아낌을 연석(憐惜), 불쌍히 생각하여 사랑함을 연애(憐愛), 불쌍히 여겨 용서함을 연서(憐恕), 불쌍히 여겨 살핌을 연찰(憐察), 애석하게 여기고 뉘우침을 연회(憐悔), 썩 불쌍하게 여김을 연살(憐殺),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김을 연도(憐悼), 불쌍히 여겨 물품을 내어 도와 줌을 연휼(憐恤), 불쌍함이나 가엾음을 련(可憐),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김을 애련(哀憐), 사랑하여 가엾이 여김을 자련(慈憐), 딱하고 가엾음을 민련(憫憐), 서로 가엾게 여겨 동정함을 상련(相憐), 가엾게 생각하여 돌봄을 수련(垂憐), 불쌍하고 가엾음을 긍련(矜憐), 돌보아서 귀여워함을 권련(眷憐), 가엾게 여기어 사랑함을 애련(愛憐), 근심하고 아낌을 읍련(邑憐), 특별히 불쌍하게 여김을 우련(優憐), 같은 병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 개가 꼬리 치는 것처럼 남의 동정을 받으려 애걸하는 가련한 모습을 요미걸련(搖尾乞憐), 거지가 하늘을 불쌍히 여긴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는 걸인연천(乞人憐天) 등에 쓰인다.
▶️ 觸(닿을 촉)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뿔 각(角; 뿔)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벌레가 잎에 들러붙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蜀(촉)으로 이루어졌다. 뿔을 갖다대어 찌르다, 전(轉)하여 犯(범)하다, 닿다의 뜻이 있다. ❷형성문자로 觸자는 ‘닿다’나 ‘찌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觸자는 角(뿔 각)자와 蜀(벌레 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蜀자는 ‘애벌레’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觸자는 뿔로 무언가를 들이받는다는 것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로 본래의 의미는 ‘찌르다’나 ‘받다’이다. 뿔이 있는 동물들은 심한 자극을 받았을 때 사람이나 동물을 들이받는 행위를 한다. 그래서 觸자는 ‘찌르다’라는 뜻 외에도 무언가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觸(촉)은 ①닿다 ②찌르다 ③느끼다 ④받다 ⑤범(犯)하다 ⑥더럽히다 ⑦물고기 ⑧물고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을 당하여 충동이나 감정 따위를 유발함을 촉발(觸發), 피부의 겉에 다른 물건이 닿을 때 느끼는 감각을 촉각(觸覺), 무엇에 닿았을 때의 느낌을 촉감(觸感), 법으로 금하는 데 저촉된 물건을 촉물(觸物), 일을 범하여 일으킴을 촉사(觸事), 더러운 짓을 범함을 촉오(觸汚), 웃어른의 마음을 거슬려서 성을 벌컥 내게 함을 촉노(觸怒), 자극하여 움직임을 촉동(觸動), 추운 기운이 몸에 닿아서 병이 일어남을 촉상(觸傷), 차디찬 촉감을 냉촉(冷觸), 맞붙어서 닿음을 접촉(接觸), 손으로 만질 때의 느낌을 감촉(感觸), 서로 충돌함이나 서로 부딪침이나 서로 모순됨을 저촉(抵觸), 손을 대어서 건드리지 아니함을 불촉(不觸), 사소한 일로 서로 싸우는 일을 만촉(蠻觸), 집적거리어 비위를 거스름을 도촉(挑觸), 격렬하게 대들어 맞섬을 격촉(激觸),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마다 슬픔을 자아 내어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촉목상심(觸目傷心), 가서 닥치는 곳마다 낭패를 당한다는 말을 촉처봉패(觸處逢敗),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만씨와 촉씨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시시한 일로 다툼을 이르는 말을 만촉지쟁(蠻觸之爭), 어미 없는 송아지가 젖을 먹기 위해 어미를 찾는다는 뜻으로 연고 없는 고독한 사람이 구원을 바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고독촉유(孤犢觸乳), 숫양이 무엇이든지 뿔로 받기를 좋아하여 울타리를 받다가 뿔이 걸려 꼼짝도 못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진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저양촉번(羝羊觸蕃) 등에 쓰인다.
▶️ 網(그물 망)은 형성문자로 罓(망), 罒(망)과 동자(同字), 网(망)은 간자(簡字), 罔(망)과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그물의 뜻인 옛 글자 그물망(网, 罒, 罓; 그물)部에 '가리다'의 뜻과 음(音)을 나타내는 亡(망)을 더한 罔(망; 그물)으로 이루어졌다. '그물'의 뜻이 있다. 그래서 網(망)은 (1)그물눈처럼 그 조직이 널리 치밀하게 얽혀진 체계(體系) (2)어떤 명사(名詞)와 결합하여 그물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3)끈이나 새끼 따위로 그물같이 얽어 만든 커다란 망태기 (4)그물처럼 만들어 가뼉 두거나 치거나 하는 물건의 통틀어 일컬음, 등의 뜻으로 ①그물 ②포위망(包圍網) ③계통(系統) ④조직(組織) ⑤그물질하다 ⑥그물로 잡다 ⑦싸다 ⑧덮다 ⑨가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날짐승을 잡는 그물이란 뜻에서 널리 빠짐없이 모음 또는 모두 휘몰아 넣어 포함 시킴을 망라(網羅),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오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 모양의 물건을 망건(網巾), 안구의 가장 안쪽에 있는 시신경이 분포되어 있는 막을 망막(網膜), 그물같이 생긴 모양을 망상(網狀), 그물을 뜨는 데 쓰이는 실을 망사(網絲),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치는 곳을 망기(網基), 그물에서 빠져나갔다는 뜻으로 범죄자가 잡히지 않고 도망하였음을 이르는 말을 망루(網漏), 그물로 물고기나 짐승을 잡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망부(網夫), 그물을 설치하여 고기잡이를 하는 배를 망선(網船), 이익을 독차지 함을 망리(網利), 새를 잡는 데 쓰는 그물을 나망(羅網), 물고기 잡는 그물을 어망(漁網),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강물이나 바닷물에 원뿔꼴로 쫙 펴지도록 던지는 것을 투망(投網), 철사를 그물처럼 엮어 만든 물건을 철망(鐵網), 물고기가 그물에 걸림을 이망(罹網), 들고 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행망(行網), 칼과 그물을 씌운다는 뜻으로 남을 속박하거나 구속함을 이르는 말을 겸망(鉗網), 그물을 들면 그물눈도 따라 올라간다는 뜻으로 주된 일이 되면 다른 일도 그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망거목수(網擧目隨), 그물이 새면 배도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법령이 관대하여 큰 죄를 짓고도 피할 수 있게 됨을 비유한 말을 망루탄주(網漏呑舟), 그물의 한 코라는 뜻으로 새는 그물의 한 코에 걸려 잡히지만 그물을 한 코만 만들어 가지고는 새를 잡지 못한다는 말을 망지일목(網之一目),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썩은 새끼로 범을 잡는 다는 뜻으로 터무니 없는 짓을 꾀함을 이르는 말을 초망착호(草網着虎),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긴 듯하지만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늘이 친 그물은 눈이 성기지만 그래도 굉장히 넓어서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을 천망회회(天網恢恢), 게도 그물도 다 잃었다는 뜻으로 이익을 보려다 도리어 밑천까지 잃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해망구실(蟹網俱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