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마허

청소년시절 이미 독일의 각종 레이스을 섭렵하고 1991년 '조단'팀을 통해 F1에 입문한 그가 첫 우승을 하기까지는 불과 1년밖엔 걸리지 않았다. 급기하 94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F1세계챔피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팀 베네톤)
95년에 한차례 더 세계챔피온을 차지한 그는 96년부터는 그와 한솥밥을 먹던 로스브라운(테크니컬 디렉터),쟝토드(치프)와 함께 단체로 페라리로 건너가 당시 10%는 뒤쳐진 페라리를 일으키기 시작한다.1996년에는 너무 느려 '붉은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던 페라리경주차를 몰고 3승을 따냈으며 1997년에는 무적 윌리엄즈와 1998년엔 실버에로우(멕라렌)을 모는 하키넨과 대등하게 싸운다.
노력하는 천재인 그는 결국 1999년 페라리팀에 16년만의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안겨 주고, 2006년 브라질 GP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페라리팀을 다시금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으며 개인 자신으로도 '7회 종합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는 드라이빙뿐 아니라 F1머쉰의 개발과정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으며 페라리사의 최고 슈퍼카인 Enzo(2002)나 FXX의 개발과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어 축구,바이크레이스 등에도 아마를 훌쩍 뛰어넘는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F1의 황태자,기록제조기,서킷의 터미네이터,레인맨,외계인(?)등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현역시절에는 매년 조사되는 스포츠재벌순위 1~2위에 랭크되었던 갑부스타.
하지만 벌어들이는 만큼 자선사업에도 상당히 적극적인 편이어서 지난 아시아 쓰나미 재해당시 100억을 기부하는 통큼(?)도 보여주었다.
인간미 넘치는 슈마허지만 1997년 잭 빌르너브와의 과열된 타이틀경쟁에서의 고의충돌사건을 계기로 그해의 개인 전득점을 몰수당하면서 일각에서는 그의 비신사적인 행위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가 F1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까지 폄하할수는 없는 것이었다.
현재(2008)는 페라리팀의 기술고문직과 테스트드라이브를 역임하고 있으며 팀내 지분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다.
아일톤 세나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레이서로 꼽히는 인물이고 그의 수많은 1위 기록들은 지금도 왜 그가 최고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마이클 조던

라운드 3순위로 시카고에 입단
6번의 NBA 챔피언쉽(1991, 1992, 1993, 1996, 1997, 1998)
6번의 NBA파이널 MVP(1991, 1992, 1993, 1996, 1997, 1998)
5번의 NBA시즌 MVP(1988, 1991, 1992, 1996, 1998)
9번의 All-NBA First Team 선정(1987-1993, 1996-1997)
10번의 득점왕
11번의 올스타 선정(1985, 1987-1993, 1996-1998)
3번의 올스타 MVP(1988, 1996, 1998)
1987, 1988년 올스타 슬램덩크왕
28번의 트리플 더블 기록
1985년 신인상 수상
1984, 1992년 드림팀으로 올림픽 참가 금메달 획득
1997년 올스타 게임에서 트리플 더블 기록
99/1/13 #23 영구 결번식
총 1,071경기에 출장, 3만2,277점(평균 30.1점) 6,668리바운드(6.2개) 5,629
어시스트(5.3개) 2,514 스틸(2.35개) 893블록슛(0.83개)을 기록
싸이 영

통산 511승, 749완투(역대 1위), 76완봉(역대 4위), 7,354이닝(역대 1위)
이것이 사이영의 기록입니다..
이 선수 역시 전세계 프로야구에서 두번다시 나올 수 없는 선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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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의 분업화가 이루어진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통산 500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20승의 시즌을 최소한 25차례 기록해야 한다. 투수들의 데뷔나이가 최소 20살이라고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45살의 나이까지 꾸준하게 선발등판해야 함은 물론 한번이라도 한자리승수에 그치 경우 달성하기 힘든 것이 바로 500승의 대기록이다. 만약 이 기록에 도달하는 선수가 나온다면 그는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칭송을 받을 것이며 사이영상은 물론 MVP까지 합해 셀 수 없을 정도의 상을 수상할 것이다. 메이저리그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도저히 깨지기 힘든 기록이 몇 개 있는 바 그중의 하나인 Cy Young이 기록한 511승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남을 전대미문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전 Canton이라는 세미프로팀에서 한경기 17탈삼진과 노히트를 기록할 정도로 빠른볼을 가지고 있던 그는 Cyclone(폭풍)같은 공을 가졌다는 평가를 들으며 자신의 본래 이름인 Denton True대신 Cy라는 이름으로 메이저리그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40$의 월급으로 시작된 야구인생은 23살이 되던 1890년 NL의 Cleveland Spiders의 유니폼을 입고 등판, 정식 데뷔를 하게 되면서 데뷔 첫해 9승을 올렸고, 리그 하위권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팀이었기에 이듬해부터 바로 풀타임 선발자리를 꿰차며 +400이닝 소화와 함께 27승을 기록하였다.
Jesse Burkett의 공격력과 뛰어난 그의 피칭으로 조금씩 향상하는 모습을 보인 1892년 팀은 전년도 리그 7위에서 단숨에 2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Young역시 방어율1.93과 함께 생애 첫 +30승(36승)으로 리그 다승왕과 방어율등 거의 모든 부문을 휩쓸어 버렸다. 이때부터 그는 1898년까지 클리블랜드 소속으로 매시즌 +평균 380이닝과 +20승, 2차례의 +30승으로 데뷔 9년만에 241승을 올리는 고속상승세를 보이며 리그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고, 1897년 신시내티와의 경기에서는 데뷔 첫 노히트 경기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2,400$이라는 리그 최고연봉을 받기 시작한 1899년부터 2년간 St. Louis Perfectos(現 카디널스)에서 +20승의 시즌을 계속 보낸 이후 신생리그인 AL로 이동하게 된 그는 보스턴으로 이적하여 AL 첫 시즌인 1901년 전부문에서 생애 최고의 성적이라 볼 수 있는 다승(33승), 방어율(1.62), 탈삼진(158개)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였다. 또한 젊었을 때 가다듬어지지 않았던 제구력까지 향상되면서 BB/SO의 비율이 1:7까지 기록하면서 30대를 넘어선 나이에도 불구하고 투구수의 절약으로 자신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한 완투경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게 된다. 1902년 생애 5번째 +30승(32승), 이듬해에도 28승으로 3년연속 리그 다승왕에 등극하며 최초로 시행된 월드시리즈까지 진출시켜 당대 최고의 팀이라고 일컬어진 피츠버그를 상대로 4경기에서 34이닝을 소화, 2승을 올림으로써 월드시리즈 초대 챔피언의 영광을 보스턴 팬들에게 선사하였다.
37살이 되던 1904년에는 A's를 상대로 20c 공식 첫번째 퍼펙트경기까지 달성하며 불혹을 앞둔 나이임에도 계속해서 리그 정상을 차지하였고, 1905년에는 ML기록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15년 연속 +15승을 기록하게 된다. 1906년 잠시 부진하여 13승 21패에 그쳤으나, 이후 2년 연속 21승과 함께 1908년에는 양키스를 상대로 세번째 노히트경기를 기록하면서 Koufax에 의해 경신되기전까지 약 60년동안 개인 통산 최다 노히트경기 보유자라는 최고의 영예까지 품에 안게 되었다. 1909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여 19승을 추가하면서 역사상 유일한 양대리그 +200승이라는 대업적까지 기록한 뒤 1910년 7월 19일 Senators와의 경기에서 통산 500승째를 달성한 후 1911년 시즌 중반 자신의 5번째 팀이자 마지막 팀이 될 브레이브스에서 44살의 나이에 4승을 올리고 파란만장한 22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은퇴이후, 간혹 클리블랜드팀의 행사에 모습을 비추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80을 넘긴 나이에도 선수시절 쌓아왔던 체력 덕분이었는지 지팡이 없이 걸어다닐 정도로 건강한 체력을 보였으며, 1937년 76.12%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클리블랜드 홈구장인 Cleveland Stadium에 모습을 드러내며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본 이후 55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후 1956년 커미셔너 Ford Frick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그의 이름을 딴 Cy Young Award를 시행함으로써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펠레

스포츠 역사상 가장먼저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던 전설적인 축구선수.
월드컵 기록과 설명이 따로 필요없어서 자국리그 기록만
56/57 상파울로 29경기 36골
57/58 상파울로 38경기 58골
58/59 상파울로 32경기 45골
59/60 상파울로 30경기 33골
60/61 상파울로 26경기 47골
61/62 상파울로 26경기 37골
62/63 상파울로 19경기 22골
63/64 상파울로 21경기 34골
64/65 상파울로 30경기 49골
65/66 상파울로 14경기 13골
66/67 상파울로 18경기 17골
67/68 상파울로 21경기 17골
68/69 상파울로 25경기 26골
69/70 상파울로 15경기 7골
70/71 상파울로 40경기 9골
71/72 상파울로 36경기 14골
72/73 상파울로 39경기 30골
72/74 상파울로 27경기 10골
74/75 뉴옥 9경기 5골
75/76 뉴욕 22경기 13골
76/77 뉴욕 25경기 13골
헤트트릭 총 94회
타이거 우즈

골프는 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별히 각종 기록으로 타이거 우즈가 얼마나 대단하다를
설명하기 힘들기에 간단한 설명만 하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프로골퍼는 미국 PGA (여자는 LPGA)선수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국 영국 일본 호주 기타 유럽권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자(LPGA)는 한국이 세계 최강 이라는 사실이죠
미국 LPGA 소속 선수들 150여명 중에 50여명이 한국출신 혹은 교포 선수들이니 한국 낭자들 대단하죠.
골프는 보이기에는 굉장히 쉬운 운동이죠 하지만 골프선수가 되기위해 아무생각 없이 시작하는 사람들은
10명중 9명이 포기를 합니다.
골프가 대중화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레포츠가 되기 시작하면서 USGTF,WPGA같은 아류 단체와
티칭강사 단체가 생기고 이런 협회 소속 단체들도 서로 프로골퍼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레슨업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요즘은 아마츄어 골퍼들도 자기들끼리 김프로~이프로~ 라고 불러주는 아주 재미있는 광경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ㅋㅋ
KPGA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경비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방송에서 가끔 골프대회를 하는데 화려한 배경속에서 귀품있는 갤러리들이 구경을 하고 헬리콥터로 방송을 해주며
비싸보이는 복장을 하며 골프체를 휘두르기 까지는 5년에서 10년이상 매년 5천에서 6천만원 가량이 훈련비로 들어갔고
최소 서너번 이상은 손바닥 지문이 벗겨지고 최소 두번 이상은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들이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만큼 골프도 힘든 운동 중 하나라는 의미죠 아주 쉬운 예로 개그맨 김국진씨가 11년 동안 골프에 미쳐서
투어프로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전 재산을 모두 탕진을 하고도 세미프로도 취득하지 못했죠.
그런데 여기서 다 끝이났냐? 그게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 이런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도전하는곳이 미국 PGA 입니다. 미국 PGA 라이센스를 이런 과정으로 다시 취득해야하고 거시서 또 투어 시드권을 따기위해 땀을 흘리고 거기서 또 순위에 입상을 해야 다음 시합이 보장이 되죠.
그런 자리에서 타이거 우즈는 십수년 이상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겁니다.
우리나라의 최경주 선수가 여러번 우승하면서 이제는 대한의 사나이들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있지만
최경주 선수의 우승 기록중 아직 메이져대회 우승 기록은 단 한차례에 불과하죠
평생가도 한번도 우승하기 힘든 타이거우즈의 메이져대회포함 수상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