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에 대한 예의
김제숙
의도하진 않았지만 길을 헤매곤 하는데요 사람 숲에 갇혀서 허둥대곤 하는데요 난해한 말의 바다에서 덤벙대곤 하는데요
한 생을 산다는 건 하루를 사는 거죠 청춘의 성급한 걸음 중년의 맹렬한 걸음 잠시만 멈춰주세요 호흡을 다독여요
오늘은 내일의 전조, 친절한 예문이죠 건성 대충 말아요 다정하게 대해줘요 예문에 정성을 쏟아요 본문이 잘 읽혀요
그믐에서 보름 사이
김제숙
순식간에 딸깍, 스위치가 꺼졌다 구백 톤 파편 속에 일상이 묻혀버렸다* 막장이 막장이 되어버린 밥을 캐던 일터다
두 눈을 감고도 훤히 알던 길인데 더 깊은 어둠으로 어둠을 덮어야 할지 한 모금 단맛 커피로 두려움을 속인다
생의 빛나는 함의에 내 몫은 없는가 죽음이 차라리 풀기 쉬운 방정식일까 매몰된 생존의 거처를 묻고 또 묻는다
그믐이 지나면 어김없이 보름이 온다 위대한 우주의 순환에 온몸을 맡기자 저만치 빛이 보인다, 스위치가 켜진다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 사고(2022.10.26)
백자 달항아리
김제숙
칼바람 맞거나 어둠 속 헤매거나
구설에 베이거나 막다른 길 몰리거나
목울대 타고 오르는
뜨거운 울음 한 근
힘이 센 삶의 파도 잦아들지 않을 때면
맨 처음 온기 찾아 왔던 길 돌아간다
어머니 둥근 가슴에
가만히 안긴다
역설
김제숙
본능보다 더 질긴 장수 비결 넘치는 정보 하수들 제치고 무림고수 백수白壽 할아버지
하나만 많이 먹으면 돼
나이라는 당의정
ㅡ시조집 『예문에 대한 예의』(여우난골,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