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 명세서
최 병 창
여기에선 굳이 이름이 필요 없네
남의 이름 위에 내 이름을 엎고 살아도 천연기념물처럼 기억해 줄 사람
도 불러 줄 사람도 없으니 유언의 언질처럼 그 아니 편치 않은가
처음에는 이름의 색깔이 파랗다가 점점 붉어지면서 노란색이나 갈색으
로 물들었네
오래된 냄새도 냄새지만 괜한 상상들은 기척도 없이 다음에는 꼭 들르
지도 말라며 역주하고 있던 진지한 욕망을 일으켜도 보았네
가끔씩 들려주는 우편집배원 친구나 전기 수도검침원 친구가 반갑기도
하지만 마주치는 표정은 언제나 그 얼굴에 그 햇살이었네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는 구실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속도를 더디게
하네 정말로 늙어 가면 갈수록 이름이 필요 없는 것인가 이름의 정체
나 쓰임새가 모호해졌네
이 땅과 이 집 그리고 불러주는 이름은 아직도 따끈따끈한 로망처럼
적산가옥이란 옷깃으로 미망이란 이름을 붙들고 있네 백내장이 자주
속삭이면 성찰은 더욱 심해지듯이
적산가옥이란 주거명세서
재산세는 아니지만
주민세는 내고 있다니
올 데까지 와버린
여기에선 굳이
질펀한 이름을 앞세우지 않아도 괜찮았네.
< 2003. 11. >
* 적산가옥 :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주거할 당시 점유했
던 가옥으로 8.15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귀국
후 남은 땅과 가옥이 국유화되었음을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