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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1월, 정문부가 지휘하는 함경도의 조선군은
길주 장평 전투의 승리를 바탕으로
길주성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섬멸하고자 하엿습니다.
이리하여 정문부가 조직한 3위의 군사 3000여명은
길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중위장 정현룡,우위장 경원부사 오응태,좌위장 고령첨사 유경천 등이
이긴 승세를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여
길주성을 2차례 밤낮으로 공격하였는데
길주성벽 위에 일본군 400여명이 성머리에 늘어서서
조총을 맹렬히 쏘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조선군은 이에 맹렬한 사격으로 대응하니
쌍방 모두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에 정문부가 말하길
[이제 만일 급히 뺏으려 하면 군사들이 많이 상할 것이니,
군사들을 영동으로 옮겨서 먼저 울타리 안에 있는 적을 치는 것만 못하다.
울타리 안에 있는 적이 평정되면
길주성 안의 적은 형세가 외롭고 구원병이 끊어져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잡을 수 있다.]
라고 하고 길주성 밖에서 수백보 쯤 떨어진 곳 4~5개 지점에
복병을 둔 다음,
자신은 3위의 주력병력을 이끌고 영동 방면으로 이동 하였습니다.
1592년 11월 정문부와 그의 조선군이 영동 방면으로 이동하던 날,
(기록에 의하면 이 날이 12월 10일 이나 12월 25일이라고 하지만
그시점에 정문부는 대장직에서 해임된 상태라 믿을 수 없습니다.)
영동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 400여명(200명 이라고도 합니다.)이
목책에서 나와 길주 임명에 진출하여 마을을 불지르고 약탈을 하였습니다.
이때 좌위장 고령첨사 유경천 휘하의 복병장 길주 토병 김국신이 이를 보고
먼저 자신의 군사들로 일본군과 맞서싸우며
한편으로 정문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엔 좌위장 고령첨사 유경천이 일본군의 약탈을 알고
복병장 김국신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정문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이에 정문부는 3위의 대군으로 하여금 일제히 일본군에게 돌격하게 하니
6진의 정예병들이 칼로서 일본군을 치자 일본군은 패하여
쌍포를 거쳐 영동의 목책으로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도망치는 그들 뒤에서 조선군이 활을 쏘며 추격하여
일본군을 많이 사살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훗날 쌍포 전투
(정문부의 장계엔 길주 임명 전투로 되어 있습니다.)로 명명되어
그림으로 그려져 후세에 전해졌으며
이날 쌍포 전투에서 죽인 일본군의 수와
이때까지 길주성 인근에서 매복하면서 죽인 일본군의 수를 합치니
조선군에게 죽은 일본군의 수는 100여명 정도 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쌍포에서 죽인 일본군의 시체들의 성기를 훼손하고
그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그 끔직한 주검들을 10리(혹은 15리,20리 라고 합니다.)에 늘여놓았고
정문부는 격문을 써서 그것을 화살에 묶고 영동의 일본군 목책에 쏴서
일본군 장수가 격문을 보게 하니
그 격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장평에서 무수히 목이 잘린 왜놈들은 죽어서도 달아나기만 할 놈들이고
쌍포에서 거세당한 왜놈들은 살아있었을 때에만 남자 구실을 한 놈들이다.'
이무렵, 정문부가 거병하여 반역자들이 소탕되고 일본군이 격파되어
함경도에서 조선의 질서가 바로잡히자
그동안 함경도의 백성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서울에서 피난온 장사꾼들과 사대부들이 활개를 쳤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과 일본군이 함경도를 장악했을때
함경도 백성들에게 약탈을 당하여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뺏기기도 했었는데
질서가 바로잡힌 이후, 그들이 백성들을 수색하며
옛날의 죄들을 들추고 빼앗긴 재물들을 되찾는데 고심하여
함경도 백성들이 두려워하니 이에 정문부가 말하길
[반역자들을 진정시키는데에 처음부터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라 하고 이를 금지시켰으며
사대부들과 장사치들의 청탁을 일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대부들과 장사치들이 정문부 다음 가는 지위에 있는
중위장 회령부사 정현룡에게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정현룡은 1592년 10월 16일 조정에서 회령부사로 제수하였고,
이는 11월 이후에 전달 되었습니다.)
정현룡이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이니
이 사실을 안 정문부가 정현룡을 엄하게 꾸짖고
마침내 사대부들과 장사치들의 복수를 엄격히 금하게 하니
이 일로 종성부사 정현룡은 정문부에게 앙심을 품어서
정문부를 헐뜯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에 정문부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사대부와 장사치들이 합세하고
함경감사 윤탁연이 가세하여 마침내 조정에까지
이 소문을 전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쌍포 전투가 끝난후, 정문부는 일본군 시체에서 베어낸 귀 100여개를
함에 넣어 봉하고 장차 장계를 써서 함께 보내려고 했는데
이때 함경감사 윤탁연의 공문이 도착하니
공문의 내용은 병마평사가 감사의 허락 없이
임의로 장계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 이었습니다.
또한 쌍포 전투 이후 11월 21일까지
함경감사 윤탁연이 정문부에게 4차례 공문을 보내어 추고하니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병마평사는 순찰사의 지휘를 낱낱이 실행하지 않고
군중의 기밀사무도 진작 보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북도 오랑캐의 난리도 역시 낱낱이 보고하지 않았다.
지금 모집된 병사들은 모두 길주 목사 정희적이 소집한 군사요,
공로는 모두 사절동권관 고경민의 공이거늘,
전투에서 패한 장수인 원충서를 녹공에 참여시키고
정희적,고경민은 공로자로 아뢰지 않았다.]
그리고 윤탁연은 명천현감을 시켜서
정문부가 군대의 기강을 그르쳤다하여
이에 대한 다짐을 받아내려고 하였습니다.
윤탁연은 당시 조선의 임금인 선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당대 8문장가에 꼽힐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명종실록 편수에도 참여하였고
선조 즉위 이후, 선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서 계속 승진시켜
경상감사, 형조판서, 칠계군 등의 작위를 내렸는데
그가 경상감사로 있을때엔 축재를 많이하고
백성들로부터 면포를 긁어모아 `속목대감'이란 칭호를 얻었으며
이때부터 사간원에서 그를 비난하며 파직을 주장했고
윤탁연이 형조판서로 있을때엔 아기를 밴 임산부에게 매를 가하여
유산시킴으로서 파직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윤탁연을 계속 아꼈고
정여립의 역모사건때는 정난공신 3등에 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5월에 선조가 피난을 하면서
임해군을 함경도로 보내되,
임해군의 수행원으로 윤탁연을 배치 하였습니다.
1592년 7월, 가토 기요마사 군이 함경도로 진입하자
임해군과 수행원들은 마천령을 넘어
회령으로 도주 하였는데 이때 왕자의 일행이 마천령에 이르니
윤탁연이 병을 핑계로 왕자 일행에서 빠져 나와서
갑산을 거쳐 별해보에 가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왕자 일행이 일본군에게 붙잡힌 이후,
선조는 윤탁연을 함경감사로 임명하였고
이때부터 윤탁연은 함경감사로서 의병을 모으는 한편,
일본군에게 붙잡힌 왕자들을 구출하려고 하였으나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정문부가 길주 이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이루자
이에 시샘을 한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지역으로
정문부가 조정에 보내는 사자가 지나가면
붙잡아 공문과 수급을 담은 함을 빼앗아
공문은 사실과 반대되거나 공로를 축소시키는 내용으로
작성하여 조정에 바치고
수급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이 공을 세운 것처럼 꾸몄습니다.
또한 정문부가 자신의 공문에 손종하지 않자
군법을 동원하여 정문부를 죽이려고 정문부의 휘하 보좌관을 잡아서
고문을 시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지만
정문부의 보좌관은 정문부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592년 11월 21일, 정문부에게 함경감사 윤탁연의 공문이 또 왔는데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병마평사가 스스로 대장이라 일컫고
겸하여 종사관을 거느리니
극히 해괴하다.
북평사를 그가 맡고 있는 대장직에서 갈고
회령부사 정현룡을 대장으로 정한다.
북평사는 도망병 잡는 장수로 정했으니
마천령과 단천 등지에서 군관을 거느리고 진주하여
도망하는 군사를 잡아라.]
이에 정문부는 정현룡에게 휘하 군사 3000여명을 넘겨주었지만
길주와 영동에 일본군이 아직 남아있는데
도망병이 남으로 내려갈 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마천령으로 가서 도망병 잡으라는 임무를 거부 하고
이제는 정현룡이 지휘하는 조선군 군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한편 군사들은 모실 대장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문부를 동정하여 그를 따랐습니다.
정문부가 윤탁연의 추고에 대응하여 조정에 장계를 올리던 무렵,
함경도 북병사가 정문부에게 공문을 보내니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북평사는 6진을 순행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겸하여 오랑캐들을 진압하라.]
정문부는 이 명령에 복종하여
군관과 부하 50여명을 데리고 6진으로 갔습니다.
정문부는 먼저 경원에 가서 백성들을 효유하고 여진족을 접대하고
피난온 사대부와 장사치들이 죄를 묻고
재물을 되찾으려고 하는 보복을 일체 금지 시켰습니다.
그 다음으로 회령에 갔는데,
그곳은 왕자를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겼던 고을로서
백성들이 반역자로 연루될까 두려워 태반이나 달아나니
정문부가 말하길
`큰 괴수는 이미 죽였으니
위협에 못 이여 따라갔던 자는 죄를 묻지 않겠다.'
라고 하며 부드럽게 타이르니
그제서야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 다음 종성과 온성으로 갔는데 그곳의 민심은
반역자 색출에 대한 불안과 여진족의 침략으로 인해
정문부의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또한 경원에는 반역자가 남아있었습니다.
경원좌수 정사기와 그의 아우 정사봉은 일본군이 함경도로 쳐들어 올때
함경도 병사와 휘하 관리들을 잡아 일본군에게 투항하고자 하였고
그들이 경원을 장악한 이후,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경성을 장악하여 6진에서 군대를 징병할 때에
그들은 8차례나 징병령을 받았지만 끝내 영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문부는 인심을 진정시키고 여진족을 막기 위해
길주에서 싸우던 부령부사 김범을 회령겸관으로 임명하여 회령에 보내고
동관첨사 이응성,유원첨사 이희량,훈융첨사 김자, 온성판관 이눌,
경원판관 오희량을 각 소속 진에 보내서
6진의 인심과 여진족을 진정시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사기는 군노 사령에 자신의 휘하 무리를 많이 심어두어
경원판관도 감히 그를 건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문부가 6진 순행으로 경원에 이르러
마침내 정사기와 정사봉, 그리고 정사기가 조직한 당의 우두머리인
경흥 토병 최송을 잡아서 모두 목을 베어 조리 돌리고
또한 종성 통사(통역관) 안억수가
전쟁 이전부터 여진족 마을에서 도둑질하다가
전쟁 이후 질서가 무너진 것을 틈타 고을 내에서도 도적질을 많이 하여
이때에 정문부가 잡아오게 하니
그는 정문부 앞에서 변명을 하면서
여진족들이 하소연 하는 것을 거짓으로 번역하여 전하니
정문부가 그의 기색을 보고 수상히 여겨
여진족 중간 우두머리인 하량개를 불러 조선어로 문답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길
[6진에서 왜변이 일어난 이후 토병들의 토색질로
변방의 걱정을 만들어낸 것은 대개 같은데
그 중에서 안억수가 가장 심했습니다.]
라고 하니 정문부가 곧 안억수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조선인을 고발한 여진족 하량개를 신뢰할 수 없었고
또한 여진족이 보는 앞에서 처형한다면 나라의 체면을 손상될 것이라 여겨
안억수를 부령으로 보내 가두게 하고 윤탁연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정문부가 6진을 순행하며 여진족을 살펴보니
회령 방면의 여진족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종성 방면의 여진족은 겉으로는 조선과 친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조선을 멀리했지만
도적질을 별로 하지 않았고
온성 방면의 여진족은 일본군이 함경도에 들어온 이후에도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여진족이 끌고간 백성들을 돌려보내니
정문부가 여진족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술과 고기를 먹이고
소금과 장을 주었으며 공이 있는 여진족에겐
그들만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술을 더 먹이고
소금과 장도 더 주며 약속하기를 전쟁이 끝난 후에 서울에 가서
상과 벼슬을 각각 따로 시행할 것이라 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타일렀습니다.
경원에선 두두족 추장 10여명이 때때로 와서 인사하며
조선에 복종할 것 처럼 행동했지만
이미 경원 인근의 여진족들은 서로 짜고 오가며
도둑질을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문부가 북방을 돌때 정문부의 명령을 들으러
여진족 추장 학생이 자신의 무리 200여명을 데리고 귀순하여 오니
정문부는 그들의 허물을 들추어 죄를 내리는게 마땅치 않다고 여겨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물품을 주며 당부하기를
[도둑 오랑캐들이 너희들 사는 곳에서부터 침입해 올 경우,
국가가 문죄할 때에 함께 화를 입을 염려가 있으니
너희들은 지키고 고하는 일을 각별히 조심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경흥에선 정문부가 함덕후의 전공을 가상하게 여겨 정장으로 삼고
회령 해창에 있는 쌀 100석을 경흥으로 보내어 군량미로 쓰게 하였습니다.
예전에 일본군이 함경도를 석권한 이후에
함덕후가 서수라일보(서수라에 있는 군사기지) 첩입군과
조산보 백성들과 토병들을 지휘하여 경흥성을 지키서
여진족 도둑들로부터 성을 4차례나 방어해냈고
오히려 빈틈을 노려 여진족 부락 한 곳을 역공격하여
불태워버렸던 것 이었습니다.
정문부는 경흥에서 그 관내인 조산,무이,아오지를 살피고
또한 경원의 건원과 아산보를 살펴보니
그곳은 일본군이 함경도를 장악한 이후
여진족이 처음으로 침공하였던 곳 이고,
또 지키지 못하여 마침내 여진족 도둑들이 다니는 길이 되었고
경흥의 해촌(갯마을)과 경원으로부터 도둑들이 침입하여
산골의 백성들과 가축을 약탈하고 납치 했는데
이곳은 일본군이 지나면서 무기를 없애버리고 말을 빼앗아
말 타며 활 쏘던 군사는 말 없는 군사가 된 상황 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문부는 성 밖에 사는 백성들을 모두 알려서
성안에 들어와 살게 하였습니다.
정문부는 길주의 일본군이 위축된 이후에
6진의 여진족들이 쳐들어오는 정도가 점차 심해지자
여진족들로부터 6진을 방어해낼 방략을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출처:농포집(권 3~7)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광해군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