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다리 때우는 법(2)
내 평생 소원은 기절 한번 해 보는 것이다. 정말이다. 그 때도 나는,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절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좀 어지러워졌다. 응원단의 함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나는 현실로 돌아와, 충돌 순간에 질끈 감아버렸던 눈을 번쩍 떴는데, 이상하게도 선수들을 비롯하여 땅바닥과 꼴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해딩’은 되었는지, 공은 오른 쪽으로 약간 삐딱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적진으로 날아갔다. 그러니까 공은 내 오른 쪽 이마 근방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른 쪽 이마와 오른 쪽 안경테 윗 부분을 동시에 강타하였다. 안경테 그 부분이 깨지고 안경은 제멋대로 찌그러졌지만 가까스로 코에 걸린 채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조 이병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방향도 잡지 못하고 겁먹은 눈을 굴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대 용어로, 똥, 오줌 못 가리고 서 있었던 것이지.
이제 문제는 부러진 안경테를 수선하는 것이다. 외출해서 양평 읍내 안경점에 들르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었지만, 이등병은 외출도 안 된단다. 그렇다고 외출하는 고참에게 안경을 맡길 수도 없는 것이,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맨 눈으로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맨 눈이 되면 어지러울 뿐 아니라 멀미가 나기도 한다. 뛸 때에는 알이 빠져나갈 위험이 있어서 안경을 벗어 손에 들어야 했으므로, 새벽 어스름에 구보를 할 때에는 맨 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 일인지는 안경잡이들은 다 알 것이다.
이 때 은인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그 때쯤 막 상병으로 진급하였던 김 상병이었다. 이 사람은 “새끼”, “시키”, “쌔끼” 등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야, 조영태, 너 쌔끼, 사제 담배 한 갑하고 아세톤 ― 매니큐어 지우는 약 말이야, 그것 한 병 하고 구해와. 쌔끼 말이야. 알겠어? 그러면 내가 때워줄게.” 담배 한 갑하고 매니큐어 지우는 약이라고? 나는, 사제 담배 한 갑은 수고비겠거니 하고 생각하였고, 아세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둘을 서둘러 구해서 가지고 갔다. “잘 봐 두란 말이야, 시키들아. 나중에 졸병들에게 써먹으라고.” 이러면서, 빙 둘러 서서 구경하는 졸병들에게 담배 ― ‘청자’였을까? ― 한 개피씩을 권하고 자기도 한 대를 피우면서 김 상병은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업은 아주 간단하였다. 담배 필터를 아세톤으로 녹이면 접착제가 된다. (화랑 담배의 필터는 종이로 되어 있어서 아예 녹지가 않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필터 접착제를 성냥개비에 묻혀서 안경테 부러진 곳에 발라주고 붙여 놓으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본드 같은 것하고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접착력이 강했다. 정말로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지?
나는 안경으로 해딩을 한 감투정신(?)과 필터-아세톤 접착제 덕분에 순조롭게 군대 생활을 해 나가서 어느 새 고참이 되었다. 그 사이에, 부대가 연천으로 이동을 하는 등 크고 작은 변화가 많이 있었지만, 통신과 대 수송부의 축구 시합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한 동안은 내가 ‘정신 교육’을 책임졌었다. “잘 알겠지? 악으로, 깡으로 말이야.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거야. 알겠지?” “일본하고 할 때 지면 되, 안 되? 북한하고 할 때 지면 되, 안 되? 그렇지? 안 되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것야.” “몸으로 때우는 거야. 알겠나? 몸으로 때우는 것이 제일 확실한 거야. 알겠나?” 내가 이러면, 옛 일을 알고 있는 역전의 전우들은 “잘들 들었지? 얘들아, 몸으로 하라신다. 누구처럼 안경은 사용하지 마라. 킥킥. 안경으로는 보기만 하고, 해딩할 때는 꼭 머리로 하거라.”라면서 나를 놀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때쯤 나는 내 졸병을 위하여 필터-아세톤 접착제를 사용할 기회를 얻었다. 이제 내 시대가 온 것이었다. 바로 야맹증 김영진이가 안경 다리를 분질러 먹은 것이었다. 야맹증까지 겹쳐 있었으니 이 친구는 안경 없이는 한 시(時)도 생활할 수 없었다. 나는 역시 예전의 내 고참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갔다. “어이, 김영진이, 그렇게 급하면, 사제 담배 한 갑하고 메니큐어 지우는 약 한 병만 구해와 바.” 그리고는 구경꾼들에게 담배 한 개피씩을 돌렸으며, 잘 봐 두었다가 나중에 써먹으라는 말까지 그대로 따라 하였다.
< 밑의 사진에서 앉아 있는 친구가 야맹증 김영진이다. 이 친구는 항상 앉아서 찍어. 조영태는 알아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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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내가 찍었다. 제일 왼 쪽의 상병이 인천 짠물 이경수. 아, 그리운 얼굴들. 뒤의 안테나가 RC-292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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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경을 때워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그 고참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지낼까? 그 고참은 제대를 한 후 군에서의 주특기 ― “도로로쓰쓰, 도로로쓰쓰” 하는 CW 병 ― 를 살려 서울 시경(市警)에 취직하였었는데...... 김영진이는 어떤 아저씨가 되어 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에, 항공대를 다니다 왔으며, 비음이 많이 섞인 목소리를 가졌으나 노래를 참 잘했었는데...... ‘인천 짠물’은 고향에서 살고 있을까? 축구, 삽질, 새끼꼬기에서부터 사격, 태권도 등 뭐든지 다 잘했었는데...... 205 본부 포대에서는 요즈음도 통신 대 수송의 추구시합이 열리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앙숙 관계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을까? 그리고 필터-아세톤 접착제의 비법은 아직까지 통신과에 전수되고 있을까? 그 모든 일들이 그립고, 그 모든 사람들이 보고 싶구나.
수송부 놈들만 빼고 말이야. 갈아 마셔도 시원찮고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공연히 이러는 것이 아니거든. 그리고 안경테 사건 하나만 가지고 이러는 것도 아니거든. (그 쪽에서 공을 그렇게 위험하게 차 보내지 않았으면 내 안경테는 부러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내 말이 맞아, 틀려?) 수송부가 고참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기간에는 통신과 쪽에서 곡소리가 나는 거다. 그러다가 그들 고참들이 우루루 빠져 나가면 그 다음에는 우리 측에서 수송부를 패 주는 거지. 어떻게 해서건 트집을 잡아서 말이야. 언젠가 수송부의 악질 하나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너희 통신과 놈들 다리 한 쪽 부러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야. 감귤 나무 한 그루만 팔면 다 해결할 수 있거든. 알겠어? 제주도 우리 집에 감귤 나무가 몇 그루 있는지 알아?” 그 그루 수대로라면, 통신과는, 선임 하사 두 사람과 통신 장교까지 포함해 전부가 다리 병신이 될 참이었다. 나는 수송부의 한 녀석과 술 취한 상태에서 멱살잡이를 한 적도 있다. 키가 185는 됨 직한 시커먼 녀석이었는데, 내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더니 자기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툭툭 찍는데, 그 순간 하체에 힘이 쭉 빠지더라고. 나는 ATT (병진이 병장 말로는, Artillery Training Test) 도중에 수송 장교한테 신나게 얻어터진 적도 있다. 차량에 탑재된 무전기를 충전시키려면 차량에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그 일에서 내가 뭔가를 잘못하였던 것이다. 수송부 졸병들 보는 앞에서 얻어터지는데 얼마나 창피하였던지. 이래도 내가 수송부를 갈아 마시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흐흐흐흐, 수송부를 갈아 마시겠다는 말은 물론 농담이다. ATT 도중 차량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주저 앉았는데, 하필 사단장이 보는 데에서 그렇게 되었고, 그 바람에 운전병은 영창을 가고 수송 장교는 징계를 먹었었다. 그래서 수송 장교는 악에 받쳐있었는데, 바로 그 때 내가 걸렸던 것이었다. 185짜리 운짱과는 멱살잡이 이후 도리어 친해져 버렸다. 그 전에는 소 닭 보듯 맨숭맨숭한 사이였었는데 말이야. 통신과 전체를 병신 만들 수 있었던 제주도 출신 악질은 유행성 출혈열로 후송을 갔다가 왔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서 돌아 왔다. 우리에게 싸움도 안 걸고, 욕도 안 하고, 심지어 말도 안 했다. (그 병이 그렇게 무서운 거더라고.) 그러니 수송부를 갈아 마실 이유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고, 잘근 잘근 씹어 먹을 이유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가 약간 남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대를 하면서 다 잊어 버렸다. 전통적인 라이벌 의식이야, 나를 포함한 통신과에도, 또 수송부에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통신과건, 수송부건, 자기 병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내무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그랬던 것이겠지. 지금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들었는데, 어쩌면 수송부 쪽에서는 우리 통신과를 라이벌로 여기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 쪽 군기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것이잖아. 우리가 RC-292 안테나로 맞을 때 그 쪽에서는 오함마(5파운드 짜리 해머) 자루나 곡괭이 자루로 맞았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20명 정도밖에 안되었음에 비해 그 쪽은 30명이 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우리를 라이벌로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진짜로 성질나는데......(끝)
첫댓글 역시 사진 올리는 일이 어려워. 창연 주인장에게 SOS를 치려고 하는 중에, 하여간 어떻게 되었네. S는 도도도, O는 쓰쓰쓰. 그래서 "도도도 쓰쓰쓰 도도도" (이런 소리 영화에서 많이 들어 보지 않았나?) 는 바로 조난 부호야.
오랜만에 군대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어제가 명진이와 군대간 지 딱 31년 된 날이었는데...
군 시절 이바구는 언제나 흥미진진..군대 갔다온 친구들은 영태 야그가 어제 일처럼 생생할끼야..글구보니 나도 76년에 입대했으니 어언 30년이 넘었네 아이구 양구에 있는 보병 제2사단 32연대...군 시절엔 정말 지긋지긋했는데..지금 거긴 어케 변했을까?? 전우들 소식도 궁금해지고...아~ 옛날이여~~
악으로, 깡으로... 요런말 영태교수한테 영~ 안어울리는 말.ㅋㅋ 글과 사진을 같이 올릴 경우의 요령~1.맨위에 첫문장 정도를 미리 씀(사진부터 올릴시 맨위 글쓸 공간확보의 어려움), 그다음 엔터치고 커서아래로 내린다음 사진올리기 후 "등록" 2. 문장과 사진간의 간격은 "엔터"로 간격 벌리며 글 올림--- 요게 단데..어렵나?
아, 역시 그렇게 해야 하겠구먼. 사진을 두 장을 연속적으로 올렸다가 그 사이를 띠우지 못해서 애를 먹기도 했네. 그러니까 역시 한 장 올리고, 엔터를 이용해 띠우고, 다시 한 장 올리고 -- 이렇게 해야 하겠구먼. 사진을 자주 올리지 않으니 자꾸 잊어먹어. 도도도는 짧은 것. 쓰쓰쓰는 긴 것이야. 즉 ...---... 이런 식이지.
아 그런데 조이병이 안경테 까지 부러뜨려 가면서 분투한 그 축구 경기는 결과가 어떻게 됐나 ? 우리 같은 부대는 하도 산골짜기라서 축구는 커녕 배구 할만한 공간도 없었는데....
그 결과가 기억이 나지 않아. 졌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니, 155미리 포대였다면서? 아, 대대 본부가 아니라, 포대에 있었다고 했지?
ㅋㅋ 군복입었을때와 사복입었을때 사람이 어케 변하는지 울 카페장은 모르는가베~~~ 글구 영태야 안경알이 빠졌을때는 어케하는거냐?? ㅋㅋ
나는 야구도 해 봤는데... 혹시 그시절 (1978년) 군대에도 야구 글러브가 보급품에 있었다는 걸 아시는 분이 있을까? 물론 군복 천 같은 걸로 대충 박아서 만든 거기는 하지만...원통의 12사단 본부대에서 근무 중 어느날 갑자기 사단장이 본부대와 통신대 야구 시합을 하라고 해서 나는 그거 끼고 해 봤는데...
같은 시기에 같은 3군단에서 근무 했네요. 3군단 직할 3공병여단 111야전공병대대...인제 현리 밑 상남에 있었죠.
영욱이도 참...... 애교있는 질문이기는 한데...... 내가 어떻게 아냐? 안경점에 가야겠지, 뭐.
ㅋㅋ 기건 창연이가 잘 알고 있슴다~~ 교수님!!
야!!영태~~~내 비록 병과는 찬엽이 고참이지만 수송부 출신인거 몰랐냐?ㅎㅎㅎ
아, 그랬구나. 끝까지 수송부를 했어야지. 그 큰 덩치들을 가지고 의무대가 뭐야, 의무대가.
ㅎㅎㅎ 재미있네 친구들 군대 경험담 한가지씩만 올려도 책 한권 만들수 있을걸? 이름하여 "군대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