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상투스데이 <침묵은 금이로세.>
어제 지강이와 동부이촌동에 위치한 운교네 집에 들어서니..
창경이, 창경이 친구 후겸이, 그 여자친구 보라, 운교를 비롯한 6명의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청바지라도 사서 입혀 놓으면 제법 봐줄듯해서 사 준다고 해도 이 원시인이 극구 싫다는 거다.
남자는 여자한테 사줘야지 뭔가를 받으면 절대 안된단다..
그런 게 어딨어!!
형편따라 가는거지!!!!
하여간 별 수 없이 그 모양 그 꼴로 끌고 갔는데- 흠.
역시 나도 속물인가보다..
멋들어지게 뽑아 놓은 아이들 속에 지강이를 섞어 놓으니 좀 거시기하다..
근데 정작 지강이는 운교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후후후.....놀랬지?
나랑 결혼하겠다고 5년전부터 쨍알대는 운교는...이제 13세의 뽀송 뽀송한 애기다..
흐흐...애기라고 하면 운교가 버럭대기 때문에 대 놓고 말은 안하지만..
창경이와 록산이가 유일하게 마음 놓는 내 주변의 이성은 윤운교 얘 하나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지강이도 마음이 놓였나보다.
피식 웃는 폼이 그랬다.
근데... 창경이가 문제였다. 기냥 얼굴이 시뻘게져서 손에 쥔 포도쥬스 캔을 바스러트리려는
원시인 2.
에이...젠장. 몰라. 둘이 알아서 하라 그래.
그저 모른 척 하며 베란다 난간으로 나가 동부이촌동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긴 여전했다...
촌스러움을 위장한 저 쌩쌩한 불빛들...
그래도 옛날보단 고층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촌스럽다고 말하긴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난 그 시간이 되면 왜 슬퍼지나...
엄마는 자기도 10대 시절엔 이유도 없이 슬퍼지고 가라앉고 그랬다고 말씀해주셨다.
아마도 호르몬의 불규칙성 때문이겠지...
또는 질풍노도의 시기..
글쎄. 이유 없이 슬퍼지는 이런 여유 자체가 한가하다는 뜻이려나.
어제 지강이가 자기도 유세에 참가하겠다고 나섰을 때 창경이 표정은 아주 볼만했다.
그런데 지강인 의외로 사교적으로 창경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거다.
참...노력하면 뭐든지 되는 인간이 여기 또 하나 있네, 그려.
그리고 집으로 오는데... 창경이를 따돌린 지강이가 나를 데려다준 뒤 슬쩍 뽀뽀를 했다.
그리고 나는...기분이 좋아져서...가려는 지강이의 옷을 슬쩍 잡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를 골목 구석진 곳으로 잡아 끈뒤 다시 다가온 지강이의 입술...
사랑은 마법인가 보다.. 아직 이렇다라고 말하긴 어린 러브지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이
마음은 무얼까.. 그 애의 품안에 안겨있으니... 왜 그토록 지강이에게 약해졌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은...가지각색이다. 아무리 천하무적의 매력이라한들 그 것과는 무관하게 조합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보다. 음....지강이가 꽤- 아니 상당히 똑똑한 아이라는 걸 안 이후 더 그렇게
느껴진다.
남자는 능력이야...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좀...속물스럽겠지?
하지만 사실인 걸.. 일종의 브랜드처럼.
지강이는- 가다 말고 돌아보고..가다 말고 돌아 보고.. 나는 그 자리에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가다 돌아오는 지강이를 멋적은 웃음으로 반기고...그렇게 우리 둘은 하염없는 바보짓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만난 지강이. 흐흐흐..
시침 뚝 떼고 슬쩍 웃은 우리 둘을....눈치 빠른 록산이가 째리는 게 느껴졌지만-
요즘 잠이 모잘라 피곤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창경이 역시 딴 생각에 빠져 있느라
그런대로 넘어가줘서 안심.
3시 34분.
예배를 마친 후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잔뜩 사 선능으로 소풍을 왔다.
그늘 쪽에 피크닉 카펫을 깐 지강이가 내 손을 잡아 끌더니 앉힌다.
음...좀 뻘쭘하게 다리를 폈다 오무렸다 하다가 다람쥐 보는 척도 하고.. 까치를 보며 웃는
척도 하고..
그런 나를 보며 그저 미소만 짓던 지강이가 책을 휙 던진다.
"..어?"
"..읽어 줘."
"뭐?"
책을 들어 표지를 보니 어린왕자 였...는줄 알았는데..
그림만 어린 왕자고 제목은 얼짱 왕자였다.. 삐질-
"..이 게 뭐야..."
"..얼짱왕자."
그렇게 말하는 지강이를 보자니...하하하....
"..이런 책도 출판이 돼?"
"내가 만든 거야."
"엉? 니가 만들어?"
"응. 그런 서비스 있잖아. 이야기를 쓰면 책을 만들어주는- "
"뭐? 하하하하...."
그 때 슬쩍 다가온 지강이가 머리를 슬쩍 만지더니.. 등을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건드리는 거다.
이렇게 감각이 예민해졌을 땐 살짝만 만져도 이 게 의도적인 실순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단 걸 예전에는 몰랐다.
그러면서 바라보는 지강이의 눈은... 아..... 사르르 녹는다.
누군가 이렇게 바라보아 주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누군가 나를 강렬하게 원한다고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말해주길 간절히 원했었다.
그 게 누구라도 좋아..는 아니지만 왠지 지강이와 나의 만남은 운명인 것만 같다.
정해져 있는 순간인 것만 같다..
지강이는 내 뒷머리를 살짝 잡아당기더니 포도쥬스를 입에 머금은 뒤...
후후.....순간 어디서 본 건 있어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다가오는 입술에
사고는 사라졌다.
저 멀리....
지강이와 나란히 누워서 읽은 얼짱왕자...흐흐흐...정말 황당한 내용이다.
얼짱왕자는 얼굴이 너무 잘생겼었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잘해주는 거예요.
그 게 지겨웠던 얼짱왕자는 못생긴 탈을 쓰고 이 별 저 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딜 가나 쫓겨나기만 했죠. 못생겼으니까...
그치만 지구라는 별에서 만난 장미꽃만은 얼짱왕자를 마음으로 사랑해 주었어요.
하지만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얼짱왕자가 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외모의 무상함을 깨닫는다는..그래서 결국 자기 별로
돌아가 기다리던 장미와 사이 좋게 지낸다는...
마구 웃으며 여기까지 읽던 나는 왠지...슬퍼져서 읽다 말고 지강이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괴고 나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지강이는- 내 눈을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왕자는 왜 장미를 놔두고 자기 별로 돌아간건데?"
"....글쎄. 가야했으니까 갔겠지?"
"...왜-"
".....누구에게나 잊으면 안되는 두고 온 것이 있을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지강이를 보는데..
마음에 약간 찔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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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2.
[ 장편 ]
중요한 건 지구야, 이 바보야- 12
개나 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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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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