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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에 합당한 말
딛 2:1-10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딛 2:1-10 / [건전한 교훈] 그러나 그대만은 진정한 가르침에 부합되는 건전한 태도를 신도들에게 가르쳐 주시오. 2)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신중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시오. 그들은 분별력과 참다운 믿음을 지니며 모든 일을 사랑과 인내로 해야 합니다. 3)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는 모든 일을 조용하고 정중하게 해나가도록 가르치시오. 그들은 남의 흉을 보고 돌아다니거나 술에 취해 지내지 말고 선한 행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4) 그래서 젊은 여자를 타이르고 가르쳐서 조용한 생활을 하게 하고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하며 5) 분별 있고 깨끗한 마음으로 집안 일을 알뜰히 하고 남편에게 친절히 대하고 순종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6)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조심성있게 행동하고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하도록 가르치시오. 7)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대가 진리를 사랑하고 모든 일을 진지하게 수행해 나간다는 것을 그들이 분명히 알도록 행동하시오. 8) 분별력 있고 논리에 닿는 말을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대 이론을 내세우려는 자들도 그대의 말에서 아무 것도 흠잡을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9) 노예들에게는 주인에게 복종하여 주인이 만족할만큼 최선을 다해 일하라고 격려하시오. 그들은 주인에게 말대꾸를 하거나 10) 주인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완전히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들의 행실을 보고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저절로 우러날 것입니다.
그레데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으로 권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게 하라(1-5)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교회의 성도들을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으로 권면하라고 합니다. ‘바르다’ ‘합당하다’라는 유사어를 반복함으로써 건강하고 적합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레데교회 안의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들이 그 가르침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교훈하는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공통적으로 ‘신중함’을 강조합니다. 섣불리 어떤 것을 결정하거나 행동함으로써 유익되지 않았던 일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늙은 여자에 대한 가르침 중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의 목회서신을 보면, 술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만큼 술이 직분자들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 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이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으로 권면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5). 직분자들이 세상에서 행실을 거룩하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6-10) 바울은 디도에게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이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자들과 악하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종에 대해서도 권면합니다. 종은 범사에 상전들에게 순종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9). 종들이 상전에게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는 것입니다(10). 이는 5절에서 말한 것과 병행됩니다.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가리는 자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행실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다른 이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 5:16).
적용: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빛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살기 원하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오늘날 사회에서 교회가 많은 비난을 받고 심지어 사회의 적폐 취급을 받는 이유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실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이루고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 설 교 >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
디도서 2:1-5 / 김영준 목사
제가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항상 주례사의 핵심 주제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 신랑신부를 짝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례사를 할 때 다른 좋은 말도 많이 있지만 결혼식이 아니면 아마 일평생 다시 들을 기회가 없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랑신부를 짝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결혼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참석한 하객 중에 기혼자라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는 그 이외의 말은 핵심을 빗나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당연히 행복하게 살아야지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신부가 너무 예뻐요!’ 당연하지요. 웨딩드레스와 헤어스타일과 화장에 들인 돈이 얼만데 예쁘지 않으면 돈 돌려받아야 됩니다. ‘아들 딸 많이 낳으세요!’ 그건 본인들이 결정할 문제지, 대신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그 이외의 하객들이 수군거리는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랑이 밑진다느니, 신부가 밑진다느니, 붕어빵이라느니….
결혼을 앞두게 되면 평소에는 별로 왕래가 없었던 친척들이 전면에 나서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무개 집은 신부가 예단으로 뭘 해왔다느니, 아무개 집은 열쇠 세 개를 갖고 왔다느니, 아무개 집은 신랑 부모가 어디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느니…. 여러분 그런 친척들은 결혼식에 초청하지 마세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결혼식을 너무 호화롭게 한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런 식으로 서로 요구를 하다가는 자식 결혼시키다가 부모 파산하게 생겼습니다. 자식들 키워주고 교육시켜주면 됐지, 도대체 어디까지 도와주어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딸을 둔 것이 죄입니까. 아들을 둔 것이 죄입니까. 다들 야단들이에요. 그러지 않아도 요즘에 결혼 연령이 점점 늦어지고 결혼 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결혼을 했더라도 잘못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일수록 결혼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비본질적인 것은 가지치기를 해야 됩니다. 어른들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물론 기도를 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겠지만 용기를 줘야 되고 격려해야 되고 믿음을 심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혼부부뿐만 아니라 모든 부부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은 서로 잘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서로 궁합이 잘 맞는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말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추측하기로는 결혼식 이외에는 일평생 살아도 그 말을 듣지 못하는 부부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말이 모든 부부에게 해당되는지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세상의 모든 부부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느냐. 개중에는 마지못해 결혼한 사람도 있고 실수로 결혼한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세상의 모든 부부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얘기냐.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일절 구별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구별을 하려고 했다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는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단서도 달지 않고 일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한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일괄적으로 말씀하셨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보고 결혼한 다음에는 한 눈을 감고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열심히 찾아봐야 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눈을 그렇게 크게 뜨지 말고 상대방의 좋은 점만을 극대화시키면서 살면 됩니다.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미망인 안나 해리슨은 두 번째 부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이 해로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결혼생활의 성공의 비결이 뭐냐?’ 그랬더니 안나 해리슨이 대답하기를 ‘이혼을 안 하면 된다.’고 했어요. 조지 해리슨이 살아있을 때 한번은 새벽 3시에 그 집에 괴한이 침입해서 해리슨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부엌칼을 들고 해리슨을 일곱 번이나 찔렀어요. 그때 그 부인 안나가 벽난로 불쏘시개용 쇠막대로 그 남자를 때려서 기절시켰어요. 남편의 생명을 구했어요. 이것은 용감한 아내인 것뿐만이 아니고 그 일 하나만으로도 해리슨은 장가를 잘 간 것입니다. 그게 정말로 돕는 배필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증거를 어디서 찾으려고 하십니까. 빌리그레함 목사의 부인 루시 그레함 여사에게 기자들이 물었다고 합니다. ‘이혼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루시 그레함이 대답하기를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살인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여러분과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신랑신부 당사자보다는 어른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왜 어른들은 며느리나 사위에 대해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어요. 며느리나 사위를 칭찬하면 어디 덧납니까.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어요. 한번 장가오고 시집오면 그때부터 인색하게 결점을 말하는 걸 많이 보는데 요즘 TV 프로 중에 시월드라는 게 있어서 저는 그게 무슨 돌고래 나오는 쇼 인줄 알았는데 시댁식구들을 부를 때 시월드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며느리가 말하기를 자기 시어머니를 만날까봐 죽기도 싫다고 했어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저승가면 다시 볼 거 아니냐. 죽기도 싫다는, 얼마나…. 아마 제 말을 들으시는 시어머니들 중에는 목사님이 며느리편 든다, 편을 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편을 들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다는 애기입니까. 갈등이 생기면 자식부부의 결혼생활이 힘들어진다는 것부터 생각해야 되요.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구 편이냐 이걸 따지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갈등이 생기는 한 자식부부의 결혼생활에 누가 됩니다. 힘들어 집니다.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어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식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하여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화 대부 1편을 보면 말론 브란도가 딸의 결혼식 하는 중에 자기의 대자 자니 폰테인 가수가 찾아온 자리에서 큰아들 써니를 불러놓고 자니 폰테인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자기 아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Do you spend time with your family? - 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냐?’ ‘Because a man who doesn’t spend time with his family cannot be a real man. - 자기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남자는 진짜 남자가 아니다.’ 정말 멋있는 대사입니다. 정말 멋있는 아버지에요. 멋있는 시아버지, 멋있는 남자에요. 멋진 어른이에요. 정말 대부가 될 만한 인물이에요. 그런데 아버지 중에 자기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할 만한 남자가 몇 명이나 있냐는 거예요. 자기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남자는 진짜 남자가 아니다 도대체 아버지 중에 몇 명이나 이런 조언을 해 줄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건 훌륭한 아버지인 것뿐만 아니라 훌륭한 시아버지에요.
오늘 본문 말씀 중에 교회의 늙은 여자들에게 바울이 이런 지시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젊은 여자라면 젊은 아내를 말하는 것일 텐데 젊은 아내에게 벌써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결혼을 하고 좀 세월이 지나면 김이 빠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젊은 부부일 경우에도 아내에게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까. 있으니까 이런 구절이 기록된 것입니다. 소리로 결혼생활을 비교할 때 신혼부부의 집에서는 ‘보글보글’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음식을 끓여먹느라고. 재미있게 지낸다는 얘기입니다. 한 오년쯤 지나면 ‘쉬~’ 소리가 난대요. 아기 오줌 뉘는 소리. 한 십년쯤 지나면 ‘휴~’ 소리가 난답니다. 김빠지는 소리래요. 그런데 요즘은 그 속도가 빨라져서 신혼부부 집에서도 ‘휴~’ 소리가 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곤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러줘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라, 일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젊은 여자에게 남편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자녀를 사랑하라고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다는 얘기입니까. 특별히 대한민국에서.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영화 퍼블릭 에너미를 보면 미국의 전설적인 은행 강도 딜린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딜린저와 그 일행이 감옥에서 탈옥한 후에 자동차를 몰고 어느 농가의 집에 들러서 끼니를 해결하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그 농가의 아낙네가 딜린저 옆에 다가와서 조용히 말합니다. ‘선생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런데 그 순간에 이 여자의 세 살 난 딸이 영문도 모르고 엄마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세 살 난 딸이 있는 여자가 처음 만난 은행 강도를 따라서 달아날 마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충격적인 장면이에요.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 둘 데가 없으면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처음 만난 범죄자를 따라서 도망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이 이십 일 세기가 아니고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레데는 크레타 섬을 말합니다. 아주 촌이에요. 촌사람들에게 이천년 전에 편지를 쓰면서 아내들에게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라고 말한 것은 이천년 전에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다면 이 시대에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남편 되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내가 당연히 남편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말은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고 아내의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붙잡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내가 당연히 마음이 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 어른들,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남편과 자식을 사랑하고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고등수학을 배우기 전에 더하기 빼기부터 배워야 되는 것처럼, 세엑스피어나 셀리를 배우기 전에 ABC부터 배워야 되는 것처럼 기본적인 것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기본적인 것을 건너뛰고 고차원적인 것을 가르치려는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늘의 것을 가르치기 전에 땅에 필요한 것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영적으로 희한한 것을 배우려고 하기 전에 먼저 이 땅의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시민으로서, 성도로서의 의무부터 배워야 됩니다.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예언이니, 방언통역이니, 계시니, 신유니, 이런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는 것부터 배워야 됩니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우리가 천사가 돼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천사가 되는 게 아니에요.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가르침이 사람을 들뜨게 만들지언정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갖춰주지 못합니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왜 여자들에게만 이런 것을 요구하느냐. 성경이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에. 이건 데칼코마니에요. 이쪽에게 요구하는 것은 저쪽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근신하고 순전한 데서부터 참된 영성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에요. 좌우에 날 선 검과 같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는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게 문제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 이게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훼방을 받게 하느냐. 아주 기본적인 데에서 성도들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것이 가족에게 상처가 되고 실망이 될 때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로만 들립니다. 인간은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왜 배우자 전도가 어렵고 가족 전도가 어렵고 왜 전도 자체가 어려우냐. 상대방이 마귀여서 그런 게 아니에요. 상대방이 악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문제는 저쪽에 있는 게 아니고 나에게 있을 가능성이 더 많아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아서 내가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천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는 게 아니고 고속도로가 뚫렸을 것입니다. 고속도로가 뚫려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텐데.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고 어른들이 가르치고 부모가 이것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른 교훈과 합당한 삶
딛 2:1-15 / 오목천 교회
디도서 1장은 교회에서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교사를 막아내고 성도들을 지켜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메시지였다면 디도서 2장은 디도가 올바른 교사가 되어 올바르게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딛2:1을 보라.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라고 하였다.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가? ‘바른’이란 말은 휘기아이누세스(uJgiainouv sh)로서 ‘건강하다’는 의미의 동사 휘기아이노의 현재 분사다. 여기서 파생된 형용사인 휘기에스는 ‘건강한’ 또는 ‘알맞은’이란 뜻으로 속이는 자들의 병든 가르침과 대조되는 말이다.
디도는 목회 현장에서 확립된 교훈의 체계로 건강한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 다만 그 바른 교훈에 따르는 합당한 삶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목회를 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하는 것이다. 딛2:2이하의 말씀은 올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는 내용으로 6가지 유형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다.
1. 늙은 남자의 합당한 삶 (딛2:2)
여기서 늙은 남자란 가장 나이 많은 남자들을 말한다. 교회의 회중 중에서 목회자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들은 연장자들이다. 나이 든 노인들은 경험이 많고 인생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 허나 나이 든 남자들에게도 약점들이 있다. 공자는 40이면 불혹(不惑)의 나이요, 50이면 지천명(地天命)의 나이요 60이면 이순(耳順)이요, 70이면 불유구(不蹂矩)라 하였다. 여기서 불유구란 마음에 원하는 바대로 하여도 어긋남이 없다는 말이니 얼마나 성숙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늙은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준다. 성경은 사람이 나이가 70이 되어도 지천명의 나이가 못되고 역천명의 나이가 되기에 죄 있는 인생은 나이가 곧 성숙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므로 행동이 굼뜨고 생각을 잊어버리고 자신감이 없고 소심함으로 일하고 고립과 서투름으로 넘어진다. 그래서 늙은 남자들은 위엄과 성숙을 잃지 말아야 함을 권면한다.
딛2:2上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이 세 가지는 노인의 위엄을 갖추게 한다. 신중하지 못하고 무절제하며 산다면 늙은 남자의 위엄을 훼손하게 되고 경건하지 못하면 신앙을 가르칠 수 없다. 오늘의 시대에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우습게 보고 인사도 안한다고 탓하지 말고 늙은 남자들이 더 경건해야 한다. 그리고 딛2:2下을 보니까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하였다. 신앙인으로 사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내일을 소망하는데서 오는 인내이다. 늙은 남자들은 위엄도 세워가야 하지만 온전하게 되는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나이가 많아서 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 안된다. 늙은 남자의 성숙의 수준은 믿음의 온전, 사랑의 온전, 인내의 온전이다. 온전을 위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다른 갈망을 버리고 온전을 구해야 한다.
2. 늙은 여자의 합당한 삶 (딛2:3)
여기서도 늙은 여자란 가장 나이 많은 여자들(Older Women)을 뜻한다. 딛2:3에 기록된 늙은 여자에 대한 권면은 행실의 거룩이다. 늙은 여자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했기에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
행실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딛2:3中을 보면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모함하는 늙은 여자, 술에 인박혀 술을 떠나지 못하는 늙은 여자는 선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들을 교훈해야 한다. 딛2:4과 딛2:6을 보면 젊은 여자를 가르칠 책임자는 늙은 여자들이다. 그리고 젊은 남자를 가르칠 책임자는 목회를 하고 있는 디도 자신이다. 놀랍게도 젊은 여자의 교훈 책임자가 목회자가 아니고 늙은 여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 젊은 여자들을 훈육할 수 있는 것은 늙은 여자들이다. 늙은 남자나 젊은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선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명령을 받은 늙은 여자들은 더욱 더 행실을 거룩하게 하여야 된다. 행실을 잘못되고 흙투성이인데 어떻게 선행을 가르치는가?
교회에서 권사님들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가정 원로인 권사, 연장자가 행실을 똑바로 함으로 가르칠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권사들이 교회에서 동네, 마을 구석 구석에서 험담이나 하고 다니면서 젊은 여자들을 훈육한다면 오히려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누가 존경하고 따를 것인가?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 거룩을 가져다주는 것은 말씀과 기도다. 권사들이 말씀을 날마다 양식으로 먹고 기도를 날마다 호흡으로 삼으면 행실이 거룩해진다. 롬12:8의 기록대로 권사들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로서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다.
3. 젊은 여자의 합당한 삶 (딛2:4~5)
딛2:4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자들, 그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결혼한 이들이다. 그들은 교훈을 받아야 한다. 젊은 여자들은 가정에서의 살림, 법도, 예절을 배우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젊은 여자들이 잘 배워서 어떤 모습을 갖우어야 하는가? 딛2:4을 보면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라고 한다.
사랑은 결혼의 기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희생과 섬김의 사랑이다. 젊은 여자들은 희생과 섬김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결혼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이기적인 여성을 똑똑하고 현대적인 여성이라고 말한다. 허나 성경은 남편과 자녀를 위해 손해보고 희생하라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 위에서 집안 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젊은 여자는 집안 일의 경영자다. 최고의 경영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태도다. 복종은 결코 여자의 열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복종을 받는 남편은 여자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복종하는 것이고 남자는 책임과 희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딛2;5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젊은 여자는 말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에 있다. 그것은 가정에 대한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가정 일에 대한 신중함이나 순전함이 없을 때, 집안 일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훼방을 받는다. 젊은 여자들의 사랑없음 때문에 교회와 전도,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축소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이 어린 여선교회가 희생, 섬김을 할 수 있도록 나이 많은 여자들이 가르쳐야 한다.
4. 목회자 디도의 합당한 삶 (딛2:6~7)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는 책임은 디도에게 있다. 딛2:6~7을 보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하였다. 목회자가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여주기로 가르친다. 삶의 모범은 예(example)가 되도록 하며 그 예(example)를 보는 것을 통해서 젊은 남자들은 배우고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본이 되어야 한다.
5. 젊은 남자들의 합당한 삶 (딛2:8)
젊은 남자들은 청년을 뜻한다. 청년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8절), 교훈을 부패케 하지 않는 바른 말을 하게 해야 한다.(7절) 바른 말을 하게 하려면 디도가 바른 교훈에 서야 하고 그 바른 교훈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적 은혜를 가르치려는 목회자들은 복음의 바른 말을 하여 젊은 남자들이 다 바른 교훈, 바른 말을 내놓아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진리에 서서 복음에 똑바로 서서 말을 한다면 대적하는 자가 함구무언(緘口無言)이 된다. 다른 교사, 다른 교훈으로 가정을 흔들고 교회를 흔들려던 대적자들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복음의 바른 교훈으로 서는 것은 중요한 자기 무장이다.
6. 종들의 합당한 삶 (딛2:9~10)
딛2:9~10은 종들이 자기 상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범사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은 주인을 기쁘게 한다. 종이 하지 말 것은 주인을 거슬러 말하지 않는 것이요, 주인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다. 종은 시간도 훔치지 말고 물질도 훔치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자신의 성품으로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어 충성스러운 삶을 드러내야 한다. 종이 자신의 품성으로 성실함과 충성됨으로 섬겨야 할 이유는 딛2:10에 기록된대로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보석과도 같다. 복음이란 보석이 빛이 나게 하려면 종이 자신의 자리에서 신실해야 한다. 보석을 찬란하게 만드는 광택의 길은 결국 주어진 삶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내가 연장자들이든, 젊은 사람이든, 남자이든.
복음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는 길
딛 2:1-10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앞서서 어떤 사람들을 장로로 세울 것이며 왜 교사들의 입을 막아야 하는지를 가르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안의 모든 신자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섯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한 순서대로 말하면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과 “종들”입니다. 이들은 사회계층으로 양분해 보면 상전들과 종들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다섯 부류의 교인들이 각각 유념하며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언급한 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세 차례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 하반절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고, 8절 하반절에서는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며, 10절 하반절에서는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합니다. 이 세 구절의 말을 한데 묶어 “복음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방이 난무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력들이 우리를 악하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새삼 깨우쳐주는 바가 적지 않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라 했습니다(딛1:10). 그들은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딛1:11). 그들은 “허탄한 이야기”로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딛1:14). 그들은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자들이라 했습니다(딛1:15). 그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고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라 했습니다(딛1:16). 이런 거짓 교사들에 맞서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일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먼저 디도에게 쓰기를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오직 너는”이라 한 것은 디도를 거짓 교사들과 대비시켜 하는 말입니다.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도 거짓 교사들이 행한 모든 그릇된 가르침에 대비시켜 한 말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건전한 교훈”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가 가르칠 대상으로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이들은 교회 안의 남자 어른들입니다. 본문 2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라.”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남자 어른들은 특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늙은 남자”로 번역된 말이 사도 바울에게서 정확하게 몇 살부터의 남자들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충 자녀들이 있고 그 자녀들이 또 자녀들을 가질 때가 지난 연령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절제라는 말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일차적 의미는 술취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맑은 정신으로 바른 판단을 한다는 뜻을 갖게 된 말입니다.
둘째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건은 존경 받을 만함을 의미합니다. 위엄과 품격 있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셋째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감정을 잘 통제해서 말과 행동이 경솔하지 않아야 함을 뜻합니다.
넷째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건전하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믿음과 사랑이 더 확고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젊은 때와 달리 믿음이 희미해지고 사랑이 식으면 교회의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을 말하고 나면 의례히 소망을 말할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소망 대신 인내라 합니다. 허긴 소망을 가진 이들은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우리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인내심이 약해져서 쉽게 화내고 짜증 부리고 삐치기 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젊은 사람들로부터 쑥덕거림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의 여자 어른들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젊은 여자들에 대한 가르침도 함께 줍니다. 먼저 본문 3절을 보면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합니다. 남자 어른들을 위한 가르침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자 어른들을 위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특별히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유의합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란 아마도 가정에서의 여러 가지 바른 태도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뒤따르는 본문 4절 하반절과 5절 상반절에서 말하는 것들입니다. 4-5절을 봅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여자 어른들에게는 특별히 젊은 여자들을 잘 교육하여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남편들에게 복종하게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 교인들이 예수 믿게 된 기쁨과 교회 섬기는 즐거움 때문에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집안일을 돌보지 않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권면은 특히 이어지는 말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자들이 자유와 남녀동등을 주장하며 더 이상 남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집안일도 혼자 다 담당하기를 거부하는 등 집안에서 종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되면 아내가 예수 믿더니 집안 망하게 되었다는 식의 거부반응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집집마다 아내가 예수 믿는 것을 다 꺼리고 배척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기에 복음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자들이 남편에게 더욱 더 잘 해야 할 것을 권면한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말은 결코 남녀 사이의 인격적 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존재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아내의 가족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자발적 섬김과 희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정일수록 가족 간에 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책임과 섬김의 정신이 커지고 그래서 더 행복한 가정이 되어 복음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교회 안의 젊은 남자들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본문 6-8절을 봅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젊은 남자들을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앞서 말한 “늙은 남자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젊은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늙은 남자들”이 사회적인 활동을 멈추고 교회 안에서 어른 대접을 받고 있는데 반해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연령층을 말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즉 어떤 면에서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많이 대변하는 연령층이라는 말입니다. 그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날마다의 삶 속에서 신중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다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동성애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자들과의 논쟁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뜨겁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자들은 그들이 잘못된 사고와 삶의 행태로부터 돌아서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 없는 혐오집단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쌍말로 기독교 전체를 모독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비방할 권리는 그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대학교수라 하더라도 민주사회에서 살 자격이 없는 인격파탄자들이며 사탄의 노리개에 불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진보논객이라 불리며 활개 칠 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상대로 싸우려 하기보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서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신중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는 우리가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종들에 관해 언급합니다. 그 당시는 노예제도가 공공연히 유지되고 있던 시대였으며 복음은 자유인에게나 종의 신분을 가진 이들에게나 가리지 않고 전해졌고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종으로서 교회 안의 구성원이 된 이들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9-10절을 봅니다: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반문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8:33)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사회적 신분이 종이나 노예였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에게 있는 진리를 알게 되면 곧바로 사회적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죄의 종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부터, 그리고 정죄와 죄책과 형벌과 멸망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종들도 사회적 신분상으로 자유인이 된 것으로 여기며 주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종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종들이 모두 예수 믿더니 주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과 맞먹으려 하며 주인과 동일한 권리와 자유를 행사하려 하고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종을 거느리는 모든 자유인 주인은 예수 믿는 것을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로 여겨 금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하거나 적대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게 되고 복음 전파에 큰 지장을 초래하리라고 본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오늘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종들에 관해 한 말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종들에 관해 한 말의 근본정신은 직장에서 상사를 두고 일하는 근로자들의 경우뿐 아니라 모든 직업인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근면하며 모든 일에서 참되고 신실하게 행동하며 사는 것은 복음이 비방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갈수록 커진다고 놀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2-23, 26)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요15:18-20) 예수님께서는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했습니다. 그는 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했습니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벧전3:14)이며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벧전3:17)이라고도 했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벧전4:13-14)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했으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했고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으라.”(고전4:12) 했으며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후12:10)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힘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며 그의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당하는 모욕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른됨과 젊음
디도서 2:1-8 / 이상웅 목사 / 마중물교회
지난 여름수양회때 있었던 일입니다. 프로그램중에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술래가 누군가에게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질문을 합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면 ‘그럼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다시 묻습니다. 그때 ‘이런 이웃을 사랑합니다’고 대답하면, 그 대답에 해당하는 사람이 자리를 옮겨야 하는 게임입니다. 이때 자리를 못잡은 사람이 다시 술래가 되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한분이 ‘배 나온 이웃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저는 무심결에 뛰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보다 배가 나왔다고 생각한 김 모 집사님 앞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모 집사님께서는 배에 힘을 주고 전혀 미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술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왜 나는 뛰어나갔나 하는 후회와 그 집사님의 범접할 수 없는 순간적 판단과 지혜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과거를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은 ‘젊음’의 반대말이 ‘늙음’임이 맞지만 왠지 그 표현이 건방져 들린다는 것입니다. 한 때는 노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었는데 이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르신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몇 살까지가 어르신에 해당하고, 몇 살까지가 젊은이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되신다고 생각합니까? 4, 50대의 많은 분들은 양쪽 말씀 모두에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귀를 닫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어디까지가 어르신이니 이 교훈을 따라야 하고, 어디부터는 젊은이니까 이 교훈을 따라야 한다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젊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비교급이 사용되었습니다. 어르신이냐, 젊은이냐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자녀들 앞에서는 내가 어르신이 되는 것이고, 부모님 앞에서는 내가 젊은이가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애매하신 분들은 양쪽의 권면에 다 귀기울여야 합니다.
어르신을 향한 교훈
당시 디도는 비교적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젊은 사역자로서 어르신들에게 교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제가 31살 때 신학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집안의 모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명절이나, 추도예배 때 할아버지, 할머니, 집안의 모든 어르신을 모시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마치 어르신들이 ‘저 놈이 뭐라 말하나 보자’ ‘그 놈 많이 컸네’ 뭐 이런 느낌을 스스로 받았습니다.
목사기 때문에 영적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깊은 묵상이 있는 목사라 해도 인생의 많은 문제에 대하여는 나이가 많으신 경륜의 어르신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만은 올바라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바울은 젊은 후배 사역자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하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에게 바른 교훈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의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다면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나이가 많고, 유명한 목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면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절은 남자 어르신에게, 3절은 여자 어르신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남자들에게는 절제하라, 경건하라, 신중하라,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라고 교훈하라고 했고, 여자들에게는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 모함하지 말라, 술의 종이 되지 말라, 선한 것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한 말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남자에게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여자에게는 지나치게 구체적입니다. 여자가 더 모함을 많이 하기에 모함하지 말라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술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도 여자가 술을 더 많이 마시기에 그렇게 말한 것 같지 않습니다. 술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남자들에게 훨씬 많습니다. 디도서가 쓰일 당시 여자들은 속박을 많이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1세기 들어서면서 자유의 물결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술에 여자들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남자에게 말한 내용과 여자에게 말한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존심 상해하기에 추상적으로 말하고, 여자는 구체적으로 말해야 마음에 와닿기에 구체적인 케이스로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에게 말한 것을 여자에게 반복하는 느낌도 있습니다. 절제는 술로, 경건은 행실로, 신중함은 함부로 모함하지 말라는 말과 반복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어르신에게 가르치라고 한 내용은 어른됨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앙의 연차에 관계없이, 직분에 관계없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의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보여주어야 할 어른됨에 대하여 가르치라고 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하고,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어 신속히 대처해가는 능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어른들의 경륜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패기와 불의에 대항하는 의욕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너도 애 낳고 살아봐’, ‘너도 나이 먹어봐’라는 말을 합니다. 어른들이 틀린 것 같지만 살아내지 않고,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른됨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어른됨을 절제함, 경건함, 신중함, 온전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온전함을 이야기할 때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함이며,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며, 인내함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성취될 것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른됨은 이 3가지 영역에서 성숙함을 보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른들은 세상의 지위와 재물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지 않습니까? 그것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본 어른들은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진공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내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기치 못한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두려움에 있던 자신에게 다가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어른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습니까? 어른들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알지 않습니까? 나의 만족을 위해 섬긴다고 했다가 도리어 낭패가 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섣부른 판단과 조언이 얼마나 상대방을 아프게 하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어른들은 알지 않습니까? 현실의 인생의 굴곡속에서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인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른들은 알지 않습니까?
요즘은 부모도 모르고, 어른도 모르는 사회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이드신 분이 뭐라고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요즘은 꼰데 짓 한다며 봉변당하기 쉽다고 합니다. 시대의 조류가 이렇다고 어른됨까지 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인생의 경륜이 짧은 젊은이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너그러움, 굴곡있는 많은 인생경험에서 나온 절제와 온전함을 어른들은 보여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배우고, 용기를 얻게 하는 어른됨이 마중물 안에서 많이 드러나길 축복합니다.
2. 젊은이들을 향한 교훈
4절부터는 젊은이들을 향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들에게는 누가 가르치라고 했습니까? 여자 어르신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당시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기에 그 내용이 가정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디도보다는 여자 어르신께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여성의 열등함이나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성의 동등한 가치안에서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남자의 머리됨을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로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젊은 남자들을 향한 권면은 6절에서 시작됩니다. “너는 이와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신중하라는 말은 어르신에게 한 말(2절)에도 등장하고, 젊은 여자들에게 한 말(5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어르신이나 젊은이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신중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중함이란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NIV성경에서는 이를 self-controlled로 표현했습니다. 나이드신 어르신은 나이와 연륜이 쌓일수록 자신만의 안목과 기준이 굳어져 쉽게 판단할 수 있기에 신중하라고 한 것입니다. 반면에 젊은이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지식습득이 빠르기에 경험해보지 않았음에도 쉽게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기에 신중하라고 한 것입니다. 신중하지 않은 어르신에게서는 편협함이 나타나고, 신중하지 않는 젊은이에게서는 교만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절과 8절 상반절입니다.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바울은 디도에게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교훈하는 중에 갑자기 디도에게 선한 일에 본을 보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궁극적으로 젊은이들에게 디도의 본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쉽게 잘못 판단하는 것은 알기에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기 가장 힘든 대상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들은 설교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도 이해를 합니다. 가장 힘든 대상이 신학생입니다. 학문적으로 배운 잣대를 가지고 쉽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대학생사역을 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간사가 되기 전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사역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간사가 되고 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첫 설교를 하고 났을 때의 그 당혹감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캠퍼스를 뒤집어놓으려 했다가 내 속만 뒤집혔다는 동료 간사의 말이 너무 공감이 되었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입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은 이 부분을 쉽게 간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는 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적으로 극복하고 이겨낸 실제를 보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아마 그런 본이 잘 안보인다고 불평할지 모릅니다. 본이 되는 것은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겠지만 젊은이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찾는다면 얼마든지 배울 본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정적인 본도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어른들이나 내가 뭐가 다른가 생각하는 것이 신중치 못한 젊음이요, 교만입니다. 젊은이들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마치 가본 것처럼 말해서는 안됩니다. 젊을 때는 대답을 하기 보다는 질문을 할 때이고, 판단하기 보다는 배워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를 이렇게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5절 하반절과 8절 하반절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왜 어른됨을 보이고, 왜 본을 찾아 배워야 하는가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가 대적자들에게 조차 악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속적인 사회속에서 다음 세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세대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과 젊은이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많이 다릅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잘못 살았을 수도 있고, 어른들이 교회를 복음적으로 바로 세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안함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의 길을 가보지 못한 젊은이들이 본받고 배울 어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에서 만큼은 어른들이 어른됨을 보여주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존경하고 본을 삼아 겸손하게 배우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고 참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관계가 형성되어야 어른들도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이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어깨위에서 더욱 성숙함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기
디도서 2:1-10 / 황의봉 목사
흔히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르치고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 생활이 뒤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더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행위를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란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변함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지켜라. 아니면 최소한 지키겠다고 약속이라도 하라.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세만 믿고 따르면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 후 홍해를 건너게 해주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또 신령한 만나를 먹게 하신 후에 그들을 시내산 밑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내 백성이라면 최소한 이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디도서 2:1-10의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을 골고루 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각양 그리스도인으로서 처신해야 할 삶의 자세를 제시해 주면서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교훈으로 가르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특히 당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거짓된 교사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동으로서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의 영을 만드시고, 다른 저급한 신(에온)은 육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영혼은 언제나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하였습니다. 자연히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 전혀 신앙인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가르치도록 당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름값을 하란 말입니다. 어떤 부모나 자식의 이름은 고귀하게 짓습니다. 그런데 이름대로 고귀하게 사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특히 성도라는 이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에 맞는 생활의 열매가 구석구석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 연세가 드신 남자 어르신들은 자기반성과 인생의 정리를 잘해야 합니다.
성경은 ‘늙은 남자’라고 했어요. 듣는 늙은 남자가 기분이 좋지 않겠어요. 예수 믿는 할아버지들에게 당부합니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여기 절제, 경건, 신중 그리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 온전한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것은 사실 소극적인 권면들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누구나 짐을 꾸려 하나님 앞으로 이사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특별히 끝마무리가 깨끗해야 사람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끝마무리를 아름답게 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사를 다니면서 사방에 있는 구멍가게에 몇 천 원씩의 외상값을 너저분하게 남겨놓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인격에 손상을 가져옵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절제할 줄 알고 경건과 근신의 삶을 통해 마지막 정리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 노년기가 되면 ‘이제 늙은이가 더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하면서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연세가 드신 할아버지라 할지라도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시기 전까지 늘 자신의 신앙과 건강관리에 유의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기도생활이나 말씀생활 등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됩니다. 자칫 연세가 드시면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둡다고 하여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을 귀찮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힘이 없다는 이유로 기도도 하지 않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해 글이 보이지 않으면 자꾸 교회에 나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또 성경말씀이 녹음된 것을 듣고 해서라도 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시면 새벽잠이 없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시면 몸도 건강하고 영혼도 맑아질 수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면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염려가 없다고 합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산에 올라 다닐 만큼 건강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힘껏 살아왔습니다.
2. 연세가 드신 여자 어르신들도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해야’합니다.
할머니들에게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위에 말씀드린 할아버지들에게 주신 교훈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할머니들 역시 할아버지들과 같이 인생의 마무리를 해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첨부합니다. 먼저 말로 남을 헐뜯지 말고, 선한 것을 가르치며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게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아지면 몸의 기력이 약해져 가면서 기력이 입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잘 못하면 쓸데없이 모여서 남을 헐뜯고 비방하며 이 사람 저 사람 흉이나 보기 쉽습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신앙인답게 올바로 사는 법을 가르치고, 경험이 적은 젊은 여인들을 권면하고 교훈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의 권사와 같은 일을 말합니다. 젊을 때 집사로서 교회의 온갖 일에 앞장서서 봉사하다가 나이가 들고 힘이 부치게 되면 권사가 되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권면하고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먹고 일에서 손을 놓으면 자연히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워집니다. 자연히 술로 위로를 받으려 하다가 나중에는 술의 종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위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술이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세를 맞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지난 80년간 어떻게 살아왔는가 계산한 통계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의 80년은 대개 이렇게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26년 동안 잠을 잤습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생각도 않는 시간을 어떤 일보다 많이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21년 동안을 노동에 바쳤습니다. 또 6년이라는 세월을 식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이 무려 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5년을 불안스럽게 혼자 낭비해 버렸습니다. 수염을 깎고 세면을 하는 것에 228일을 보냈으며, 아이들과 노는 것에는 불과 26일을 썼습니다. 넥타이를 매는데 18일이 걸렸고, 담뱃불을 붙이는 일에는 12일이 소모되었습니다. 그가 마음속에 행복을 누렸던 가장 기쁜 시간들을 찾고 찾아보았을 때 그것은 약 46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3. 젊은 여자들은 하나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여인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요 남편에게 있어서는 아내입니다. 대개 어느 가정이나 여자가 먼저 예수를 믿게 되는데 이럴 경우 아내의 행실여하에 따라 복음이 전파되기도 하고 오히려 복음이 막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을수록 행실을 바르게 할 뿐 아니라, 가정 식구들을 사랑하고, 집안일을 잘 돌보며, 특히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은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특히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이나 자녀라고 해서 무시한다고 하면 평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어머니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낳아 양육시키는 일은 여자만이 지닌 특권입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위대한 위인들은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의 숨은 열정과 노력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세가 그러했고, 중국의 맹자가 그러했고, 사무엘, 세례자 요한, 어거스틴, 웨슬레의 어머니가 그러했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양육하되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여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또한 아내로서 내조의 사명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잠언 14:1에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생 들릴라는 삼손을 유혹하여 실족케 만들었습니다(삿 16장). 반면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지혜로 남편의 목숨을 구했고(삼상 25:18-38),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자기 가족 모두를 구원해 내었습니다(수 2:1-24). 그렇다면 정숙한 아내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근신하여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순전하여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순결하여야 합니다. 셋째, 부지런하여 집안일을 잘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젊은 남자들도 ‘이와 같이’ 대적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도록 처신해야 합니다. 대적하는 자란 반대편에 서 있는 자라는 뜻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들(1:10-16)이 있고, 교회 밖에서는 믿음생활을 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는 옛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음의 좋은 열매를 보이지 못하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대단히 기뻐하며 목청을 돋우게 됩니다. 그러나 말에 실수가 없고, 선한 일에 본을 보이는 등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가 열리게 되면 감히 비방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비방해온 일을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남자들은 근신하여 조심스런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 충만 받아 봉사와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4. 종들은 상전들 앞에서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자유인이 몇 명 없고 종들만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잘못 이해한 일부 종들은 아예 상전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교훈을 오히려 어둡게 가리는 행위입니다. 오히려 더욱 순종하고 성실히 충성을 다하고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노예 제도 아래에서 주인의 것을 몰래 훔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주인들이 노예를 상품같이 구입하여 종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고 부려먹는 시대였기에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처우가 불리하다고 해도 그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욕심쟁이의 것을 조금 취한다 해서 나쁠 것이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그 일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성도들의 생활 원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롬 12:21). 비록 직장의 상사나 주인이 우리에게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대체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야 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는 종업원들에게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봅니다.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개역성경은 ‘떼어먹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 어떤 신분에 처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 해도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아야 됩니다.
바른 삶을 삽시다
딛 2:1-10 / 박조준 목사
우리는 그 동안 디도서 1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기초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 니다. 하나님의 일의 출발점은 바른 교훈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1장에서 가장 요긴한 말 한 마디 를 고르라면 그것은 바른 교훈 입니다. 1장 9절을 보세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바 른 교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울은 이 목회서신에서 언제나 첫번째로 바른 교훈을 강조합니다. 디모데전후서도 디도서와 마찬가지로 목회서신인데 디모데전서 1장 10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 습니다.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 음을 좇음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디모데전서에서도 바울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에게 바른 교훈을 취하도록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교훈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기 초한 교훈입니다. 이제 디도서 2장에서는 이 바른 교훈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말씀하 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을 믿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교훈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야 합니다. 바른 교훈은 바른 삶을 낳아야 하기 때문에 바울은 바른 교훈에 이어서 바른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거의가 그렇지 않습니까. 첫머리에는 올바른 교리에 대해 서 말하고 그 다음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올바른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생각하게 되는 디도서 2장에 보면 바른 생활에 대한 강조가 있습 니다. 2장 1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여기서 말하여 라는 말은 가르 치며 라는 뜻으로 보아도 됩니다. 바른 교훈과 일치하며, 조화를 이루며 바른 생활을 가르치라는 것이 2장 1절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바른 생활의 목표와 그런 생활에 도 달하는 방법, 그리고 바른 삶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른 교훈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진리에 근거해서 가져야 할 바른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말해서 왜 우리가 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른 생활의 목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극적인 목표요,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목표입니다. 소극적으로 말하 면,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1.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말씀을 믿고 올바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생활이 올바르지 못 할 때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보배로운 진리와 말씀의 가치까지도 격하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훼방받지 않고 진리의 내용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지키는 삶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바르지 못한 삶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나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살아야 할 이유는 2. 성도로서의 인격이 불신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8절을 보십시오.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마귀가 우리를 가리켜서 악하다고 정죄할 것이 없 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이 손가락질을 받게 되면 성도로서의 우리들의 인격도 불신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릇되게 살면 우리가 가진 말씀을 훼방하고 말씀의 영광을 훼손하고, 또 우리를 성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의미 로 바른 생활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과 인격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고 성도의 인격이 불신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바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야 할 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 요.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무엇이 우리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합니까? 우리의 바른 생활입니다. 여기 빛나게 한다는 말 은 헬라어 코스메오 입니다. 영어의 cosmetic(화장품) 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단장한다, 화장한다, 화려하게 한다, 아름답게 한다 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코스메오라는 말은 cosmos 라는 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cosmos는 우주라는 뜻인데 그냥 우주가 아닌 질서 있고 조화된 아름다운 우주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얼마나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까! 그래서 빛나게 한다 는 말을 표현할 때 코스메오 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절 이하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 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아내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 정한 장식은 걸고, 달고, 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름답고 온전한 심령을 소유한다는 인격적인 장식이야말로 그리 스도인 아내들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단장인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단장 이란 말이 빛나다 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빛나다 라는 말은 그냥 빛난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한다, 장식한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은 하나님의 교훈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합니다. 우리가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는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을 통해 주님의 교훈을 교훈 되게 하며 이 진리가 진리로서 증거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바른 생활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바른 삶을 사 는 이웃이 있을 때 그들을 보고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주 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하여 라 는 단어는 헬라 원문에서는 가르치라 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가 르치라 는 말입니다. 무엇을 가르치라고 했어요? 여기서 가르치라는 것은 교회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교리에 합당한 생활을 가르치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리 못지 않게 중 요한 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기초한 삶을 다루는 것을 기독교 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교리와 어 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윤리,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선 순위를 말한다면 교리를 먼저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리가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데 따라서 행동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교리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윤리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 면 교리를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교리에만 너무 집착하다 보면 그 교리에 근거해서 살 아야 할 삶을 등한히 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와 윤리는 균형있게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다 연약하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기가 쉬워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하셨습니다. 우 리는 바른 교훈에 입각해서 바른 생활을 가르치라 는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큰 성장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숫자적으로도 엄청납니다. 그런데도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원인 중에 하나가 기독교 교리에 상응하는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실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돈 관계, 인간 관계 이런 모 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것들을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바른 생활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르치 는 것만으로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생활에 도달하 기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에 본 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바른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네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바른 생활에 도달하도록 몸소 선한 일을 실천하여 본을 보이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디도를 향한 바울 사도의 적절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회자들이나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다 보면 자주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 다. 목사님,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 는 자 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가책받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저 는 다른 사람에게 모본이 되는 행동이나 모본이 될 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너희 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본을 보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본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 가운데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자 라고 있고 성숙해 가고 있다는 본을 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누구도 이 땅에서 완전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 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이와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 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다른 믿는 사람 앞에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 여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주신 말씀은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희 진보 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지도자의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 은 우리가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진보의 소망이 있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성도들에게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삶의 모습을 가지고 성숙을 위 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읽을 때 강한 도전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 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 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여러분, 바울은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너 희는 나를 본받으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본받으십시오. 라 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자녀를 아무리 바른 교훈으로 가르친다고 해도 비뚤어지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부 모가 자녀에게 나쁜 교훈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는 바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부모가 바른 모본을 보이지 못 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보다는 행동을 더 크게 주목합니다. 바른 교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진실과 정직 을 가르쳐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 그 교훈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생활이 이렇게 중요합 니다. 한 교회의 성숙의 정도도 결국 그 교회 안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 하 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드러나게 되면 그들을 본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 니다. 그러면 바른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바울은 바른 생활의 내 용을 다섯 부류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늙은 남자에 대해서는 2절에 말씀합니다.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절제는 정신 적인 면에서의 절제를 말합니다. 늙어서 제일 추한 모습은 정서적으로 자기를 다스리지 못할 때입 니다. 그리고 경건하라고 했습니다. 진지한 삶의 태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존경을 말합니다. 삶에 실패한 노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대해서 무의미하게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삶에 대하여 진지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젊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온전하라고 했습니다. 흔히 믿음과 사랑 다음에 나오는 말은 소 망인데 여기에는 인내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사실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은 소망이 가장 가까이 있는 때요, 그 소망을 향해서 인내해야 할 때입니다. 젊 어서도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을 향해 인내하며 살아야 하지만 늙은 때는 이 세 가지가 더욱 중 요합니다. 왜냐 하면 이제 그것이 완성될 때가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2. 늙은 여자에 대해서는 3절에 말씀했습니다. 행실이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언행 일치를 말합 니다. 책임질 수 있는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 거나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말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을 향한 권면에 왜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을 까요? 주 후 1세기경 지중해편 사람들에게, 특히 여자들에게 해방의 기운이 일어나 자유로워지면 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 중에 하나가 음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책없이 퍼 마셔서 아예 술의 노예가 되는 여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술의 종이 되어서는 후손에게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훈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가지고 도움을 주라고 했습니다. 3. 젊은 여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4, 5절에 말씀했습니다. 우선 남편과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 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젊은 여자들에 게 당부한 사랑은 필레오 사랑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바울이 젊은 여자들에게 자녀를 향해서 사 랑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권면하려는 생각에서 이 말을 쓴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필레오는 표현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자녀를 잘 키울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여자도 근신하라는 권면을 덧붙였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근신은 욕망의 통제 를 말합니다. 이 근신 없이 거룩한 삶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순전 함은 근신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삶의 결과입니다. 더구나 젊은 여자는 집안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젊은 여자는 집안에 언제나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책임이 여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늘 하는 말씀입니다만 교회 봉사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집안일을 소홀히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신앙 훈련 방침도 아닙니다. 여기 선해야 한다는 말은 친절 한 행동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젊은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여권이 신장되는 이 사회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구시대적인 교훈 같지만 이 것은 가정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지 아내에 대한 권리침해는 아닙니다. 4. 젊은 남자에 대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6절에 있습니다.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 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에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 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근신이란 말이 거듭 강조되는 이유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덕 가운데 자기 를 통제할 줄 아는 것을 가장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근신은 성결의 기초적인 덕목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도 이미 사용한 말과 같은 것이지만 젊 은 남자에게 경건이 요구되는 것은 사람이 너무 자신만만하다 보면 인생에 대한 진지성이 없어지 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언어 생활도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언어는 그 인격에 대한 표시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인 종들에 대한 교훈이 9, 10절에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혜택받지 못한 소외 된 삶을 살고 있던 종들에게도 순종과 올바른 언어 생활과 깨끗한 삶 그리고 충성을 요구했습니 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바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른 생활을 위해 서는 말씀이 훼방받지 않고 우리의 인격이 불신받지 않는 데 있으며 주님의 교훈을 빛내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복음을 들려주셔서 진리의 소유자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 니다. 그러나 이제 이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로서 바른 삶을 살아가며 그러한 바른 삶에 성숙하고 진보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승리한 종교개혁
딛 2:1-16 / 이근수 목사
종교개혁에 대해 계속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황의 소환장을 받은 루터
루터의 95개 조항이 로마의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졌습니다. 교황은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고 루터 소속 수도원 원장 스타우피츠 에게 루터를 잘 지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로마의 종교재판관 마쪼리니(Mazzolini)는 95개 조항을 보고 루터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존 에크(John Eck)는 루터를 이단자(異端者)라고 규탄하였습니다. 교황은 1518년 6월에 루터에게 소환장을 보냈고, 마쪼리니에게는 루터의 서적을 검열하여 ‘보고하라’고 명했습니다.
개혁에로의 점화(點火)
마쪼리니의 조사를 받은 루터는 교황권과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不當性)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그동안 로마에게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해왔기 때문에 또 면죄부를 사는 돈이 로마로 나가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루터의 말이 옳다고 지지하였습니다.
교황은 추기경 토마스 비오를 루터 심문관으로 임명 파송하여 루터의 면죄부 판매 비난을 철회하라고 다시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마침내 교황은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파면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동료 교수들 학생들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면장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선언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경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루터는 결단코 인간 교황의 파면장에 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에 교황은 독일의 카를 5세 황제에게 루터를 나라의 무법자로 낙인찍고 공민권을 박탈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황제는 루터의 공민권을 박탈하지 않았습니다.
보름스(Worms) 국회에 소환당한 루터
개혁 4년 후인 1521년 4월 17일 오후 4시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당해 황제에게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20 여권의 루터의 책 속에 있는 이단설을 취소할 수 있느냐고 심문했습니다.
루터는 황제에게 호의를 구하면서, 생각할 기회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에 해 됨이 없고 그의 영혼에도 위해가 없도록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24시간 안에 답하라는 조건으로 승낙했고 회의는 연기 되었습니다.
다음날 4월 18일,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서 다시 황제에게 똑 같은 심문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경이나 명확한 근거에 의해 승복 당하지 않는 한, 양심을 거역하여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읍니다. 하나님, 날 도우소서. 아멘.”하고 외쳤습니다.
심문은 끝났고, 루터는 귀가 조치되었습니다.
1521년 5월 26일 카를 황제는 루터의 모든 저서의 소각(消却)을 명했고, 설교를 금했고, 글을 쓰지 못하게 했고,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루터를 죽여도 법적으로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르트부르그 성에 보호 받은 루터
1067년 루드빅 백작에 의해 건축된 아이제나흐와 에르프르트가 내려다 보이는 깍아지른 듯한 산 정상에 있는 바르트부르그 성의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가 은밀히 보름스를 떠난지 8일 만에 길에서 루터를 납치하여 자기 성에 피신시켰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폭풍이 고요해질 때까지 가명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10개월간 머무르며 독서와 글을 썼습니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인쇄기로 다량 인쇄 되어 독일과 유럽 여러 나라에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늘어나 종교개혁은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개혁운동의 전개
바르트부르그 성에서 루터는 신약성경을 12주 만에 독일어로 초인적인 지력으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고, 구약 성경은 몇 사람의 동역자들과 함께 1534년에 완역 출판하였습니다. 루터가 번역한 신구약 성경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항의자 protestant
네델란드에서 자라, 독일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로마교황 편의 카를 5세 황제가 독일인의 눈에는 이방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이 황제가 내린 개혁 금지 칙령에 따르지 않고 루터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 캐톨릭파와 루터파라가 생겼습니다. 수명의 제후와 14개 도시가 천주교 편에선 카알 5세의 칙령을 거부하며 항의문을 제출하자 황제는 이들을 항의자(Protestant)라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충정
루터의 신앙 중심은 성경에서 어긋난 교리와 부패한 교회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카톨릭이 루터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잘못과 비리를 시인하고 회개하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더라면 하나님도 한분이시며, 성령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로서 신.구교로 분열하는 아픔이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그 동안 저질러 왔던 왜곡과 비리를 합리화하며 루터를 이단자로 내 몰았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유럽 민중들이 루터의 개혁안을 지지하게 되어 마침내 종교개혁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배울 것
1)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버리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은 용감하게 버리고 고쳐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2) 말씀대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딛2:7, 3:1, 3:8]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본장은 성도가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1. 늙은 남자들의 태도[2]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서 늙은 남자들은 /절제하고 경건하며 근신하고- 노인들은 노욕을 부리지 말고, 어른답게 자신을 잘 관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하라/- 타성에 젖은 믿음생활 하지 말 고 이기주의자가 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늦은 가을에 대봉시가 달콤하게 익는 것처럼 늙은 남자들도 농익은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남은 생을 매만지면서 깊은 신앙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2. 늙은 여자들의 태도 [3-8]
교회 내에 늙은 여자들은 / 남을 헐뜯거나 - 쓸데 없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술 마시고 떠들며 실수하지 말고. 경건한 몸가짐으로-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 잎 같은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본을 보이며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선악을 분별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염치와 정절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딤전2:9-10)
3. 젊은 여자들의 태도[4-5]
젊은 여자들은 어른들의 교훈을 잘 받아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며 살림을 잘하고 선한 일을 하며 / 남편에게 복종하여 질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부는 가정이 천국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4. 젊은 남자들의 태도[6-8]
바울 사도는 젊은 남자들도 순결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근신하여 정욕을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젊은 남자들은 의의 종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비방을 받으시고 교회가 욕을 먹어 전도의 길이 막힙니다. 청년은(잠1:10-11) 세상 정욕을 버리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딛2:12)
5. 종들의 태도 [9]
종은[직장 다니는 사람] 자기 상전[상사]에게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않아야 하고, 주인의 소유를 떼어 먹거나 도둑질하지 말고 선한 충성을 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부정부패를 막고, 사회정의를 실현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 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엡6:5) 성도가 순종해야 할 상전은 하나님이시지만(엡6:9) 직장 상사에게도 순종해야 합니다.
6. 성도의 삶
1) 성도는 의를 추구해야 함 [12]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정욕을 버리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경건치 않은 것을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악을 버릴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2)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망해야 함 [13]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복스러운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왕으로 오셔서 당신을 대망하는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이 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 된 성도 [14]
불법에서 구원 얻은 우리의 신분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친 백성에게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7. 사역자는 본을 보여야 함 [7-8]
바울은 사역자 디도에게 모든 일을 하나님 말씀대로 본을 보여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복음 사역자들도 본을 보여 성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선한 모범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바른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는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딤전4:12)
믿음으로 사는 자의 위기는 축복의 기회다
가까운 지인의 권고로 록펠러가 탄광에 손을 댔습니다. 조금 파고 들어가니 더 이상 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에게 봉급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광부들이 봉급을 달라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폭도로 변한 광부들이 록펠러를 갱 속에 가두었습니다. 깜깜하고 축축한 갱속에서 록펠러는 간절히 장시간 울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커다란 손이 넘어지는 그를 부축여 일으켜 세워주어 걷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어 그곳에서 쓸어졌습니다. 그때 다시 큰 손이 그를 부축여 걸었습니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큰 손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네가 있는 곳을 깊이 더 파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록팰러가 갱 속에서 나와 광부들을 설득하여 땅을 더 파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광부들은 실망 하였습니다. 그래도 록팰러는 더 파자고 했습니다. 불평하며 광부들이 더 파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속에서 검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광부들은 물이 쏟아졌다고 실망을 하며 분을 내었습니다. 록팰러는 그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검은 물을 검사해 보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것은 원유였습니다. 하나님이 광산에서 석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절대절명의 위기의 때에 록팰러의 탄광이 유전이 되었습니다. 이후 직원들은 사장의 말을 믿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록팰러는 10만 달러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10만 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록팰러에게 복을 주셔서 34살에 미국에서 제일가는 100만 장자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는 10만 불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록팰러 어머니가 세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1. 예배 시간에는 꼭 앞자리에 앉으라.
2. 십일조를 꼭 드려라.
3. 헌금 많이 한다고 절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라.
이것이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삶입니다.
꿈을 이룬 바락 오바마
미국의 44대 대통령에 47세의 흑인 바락 오바마가 당선 되었습니다. 지나온 그의 삶을 보니 고난이 많았습니다. 하와이 인도네시아 하와이 캔사스 시카고 등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너무도 가난해서 대출을 받아 공부를 하였습니다. 2살 때 어머니가 이혼을 하여 홀어머니와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하여 인도네시아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또 이혼을 하여 청소년 때에 그는 방황을 하며 마약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외조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 긍정적인 꿈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1991년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민권 변호사로 봉사하며 로펌에서 일했습니다.
가난한 흑인과 가난한 다음 세대를 위해 시카고 크리스찬 처치 교회 목사님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봉사 했습니다. 그는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이 되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리고‘희망, 희망, 희망을 가지고 다 함께 세계를 변화시킵시다.’저를 여러분의 것이라고 믿어 주십시오‘I'm asking you to believe in yours.' 저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구호로 자존심이 구겨진 미국과 어려운 세계와 다음 세대에 희망과 변화를 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도 성도는 고난의 때에 소망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
이런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모든이들에게 하는 권면
딛2:1-10 / 박종열 목사
1. 들어가는말
계속해서 디도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레데 지역에 사랑하는 제자인 디도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레데 지역에 있는 교회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레데 교회안에 유대주의 자들중에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그곳에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서 바울은 디도를 목회자로 파송을 하여서 그곳 가운데 올바른 말씀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곳에 늘 항상 상주하면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장로를 그곳에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필요가 그레데 교회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역시 바울은 계속해서 디도에게 어떻게 그레데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지 권면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2. 본문강해
디도 자신을 향한 권면
딛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디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사도들의 교훈에 합한 것을 전해야 했습니다. 디도가 그레데 지역에 파송된 사역자였지만, 계속해서 그곳에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해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디도는 그곳에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면서 장로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는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며, 또한 모든 성도들 앞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디도가 자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장로들을 세웠기 때문에 현장에서 물러 나거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디도는 마음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끝까지 감당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목회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또 한가지는 다른 영혼들을 돌아보아야할 그런 의무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주님안에서 감당해야할 의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세든 남자 성도들을 향한 권면
딛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바울은 디도에게 어떻게 사역을 해야할지?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사랑으로 권면을 많이 하였지만, 바울이 디도에게도 같은 권면의 말씀을 들려 주고 있습니다. 나이든 성도들에게 권면을 할때에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남자들은 인생을 오래 산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여러 가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절제하지 못하고, 어떤일들에 상관하기를 좋아하며, 말을 많이 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신적으로는 여러 가지 젊은 시절보다 약해집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또한 인생을 살아온 연륜이 생기기 때문에 한가지 생겨나는 현상은 젊은이들이나 여러 모임등에서 사람들 앞에서 직분이나 명예가 주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에 말이 많아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월히 흐를수록 그리고 경험을 많이 할수록 말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더욱더 조심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신중하고, 절제하라고 합니다. 젊은 이들에게나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믿음, 사랑, 인내와 온전함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본받을 만한 자들이 많지 않은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한 삶을 삶으로 인하여서 다른이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고,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어지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노년 여성들을 향한 권면
딛2:3-5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이든 여성들에게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나이든 여성들이 감당해야할 모범이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거룩해야 합니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나이가든 여성들이라면 일단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나이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든지 함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여성미를 잃어버리고, 거룩하지 못한 말과 농담이나, 세속적인 그런 모습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술취함과 여러 가지 실수들을 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안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며, 그들의 문제들에 신경을 써주며, 권면의 말을 해주어야할 책임이 나이든 여성들에게 있음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남편을 존경하며, 또한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삶 가운데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산 이후에 이러한 일들에 마음을 다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살았던 이들로서 좋은 믿음의 본을 보이며, 젊은이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씀하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들을 향한 권면
딛2:6-8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젊은이들은 신중해야 합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사는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더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적하는 자들로 하여금 먼저 이러한 삶을 삶으로 인하여서 흠잡을 수 없도록 그렇게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하였던 것은 젊은 시절에 준비해야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아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좋은 가르침과 권면을 받을 시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 좋은 가르침과 올바른 권면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 같은 그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저역시도 젊은 시절에 관심으로 저를 돌봐줄 선배들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정말 도움을 받을 만한 선배들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이 부분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 후배들에게 어떤 자들이 되어야할 것입니까? 그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돌아보고 섬겨야할 것입니다.
사환들을 향한 권면
딛2:9-10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들 종들은 자신들을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여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종들은 종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에 신분에 대해서 못마땅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그곳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노예 제도에 대해서 찬성했다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다만 그당시 사회 제도 자체에 대해서 인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말씀에 부끄럽지 않토록 행동해야 했습니다. 주인의 것을 섬길때에 정직하게 섬겨야 했습니다. 신실하게 함으로 인하여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했습니다. 모든 포지션에 모든 기관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모든 포지션에 또한 모든 지체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역할과 의무들을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섬김을 통하여서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한 섬김의 은혜로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오늘 여러 가지 세대들에게 여러 가지 성별과 위치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권면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어디에 해당하든지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더욱더 필요한 그런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가는 놀라운 능력을 더하여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섬김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섬김이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섬김으로 인하여서 영광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바라보는 대신에 우리에게 이 자리를 주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모든 것에 소망을 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