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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와 김대중의 역학관계 | ||
광주는 김대중을 떨쳐내고 역사 앞에 바로 서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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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형식 논설위원, reverend1@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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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김대중을 스승으로 받들며 광주는 김대중이라는 등식을 제공했다. 광주는 역사적으로 동학의 발상지인 고부(정읍)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혁명 혹은 야당의 출발지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반골문화의 진원지라는 뜻이다. 제네바가 평화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듯 광주는 야당의 산실로 인식되었다. 광주에서 일어난 5.18 사건은 광주가 반골의 도시라는 확고한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동안 김대중은 광주를 발판으로 정치활동을 해왔으며 광주의 의미를 동학혁명의 진원지로 특정하고 민주화 운동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고 선동해 왔다. 그러나 실상 민주화 운동은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산과 부산 대구 등 경상권에서 먼저 일어났다. 이 불꽃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있는 전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광주로 옮겨 붙은 것에 불과하다. 이를 김대중은 철저히 포장하고 동학혁명의 발상지라는 이름으로 마치 모든 민주화 운동은 광주에서 일어난 것처럼 위장시키는데 주력했을 뿐이다. 여기에 더하여 민주화 운동은 광주가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고 선동해왔다. 1. 빛고을 광주와 김대중의 역학관계 김대중이 광주를 토대로 정치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광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광주는 동학의 발원지인 정읍과 동일권역이다. 정읍에서 일어난 동학은 세가 불어남에 따라 대도시로 진출하게 되었고 광주와 순천 여수 등지로 확대되었다. 광주시민은 동학난을 제압하기 위해 힘없는 조정이 일제의 힘을 빌어 연합하여 전라도민들을 학대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6.25이후 마지막 빨치산의 거점으로 공비소탕을 위해 이승만 정부에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전라도에서 소탕작전을 벌임으로 원하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 당연히 피해의식이 타도에 비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배경을 가졌다. 이 피해의식은 실상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전라도에 왜구가 출몰하여 약탈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곡창지대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남해안쪽으로는 곡창지대가 없어 인기가 없었고 경상도 쪽으로는 해안의 경사가 급하고 곡창지대는 내륙 안쪽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약탈이 쉽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전라도 지역은 해안의 경사가 완만하고 웬만하면 배로 강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뛰어났다. 해안에서 곡창지대까지의 거리도 짧아서 치고 빠지기에 그만이다. 접근성은 뛰어나고 위험성은 가장 작다. 물때만 잘 맞추면 성공성이 보장된 곳이기 때문에 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빈번했는데 관에서는 뒷북만 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관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으며 곡창지대라는 이유로 세금이 많았던 것도 국가에 대한 불만으로 작용되어 항거의 정신이 키워졌다. 전라도민은 추수기에 어김없이 출몰하는 왜구의 약탈로부터 자신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가 단합해야 했고 관군이 도착하기까지 왜구와 싸워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전라도민이 단합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단합정신으로 이어졌다. 왜구야 적군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관에서 빼앗아 가는 세금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소작료, 태풍으로 인한 소출 감소는 전라도민의 삶을 황폐화시켰고 일년내내 긴장하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은 타도민으로서는 그 고단함의 정도를 속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전라도민 만의 억울한 속사정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전라도민은 타도에 비하여 월등한 단결력과 애향심 그리고 항거의 정신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 고부현감이 만석군이라는 비를 세우고 저수지의 물로 물세를 추징하려고 하니 참고 있던 관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왜구들의 후손인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상처입은 자존심까지 누르며 살고 있던 전라도민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더하여져 분노가 탱천하며 일시에 폭발했다. 이것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전국에 흩어져 산발적으로 항거하던 의병들이 연합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따라서 동학군이 가는대로 흩어져 있던 의병들이 모여 들어 그 규모가 군대를 능가할 정도까지 확산되어, 조정에서는 일본군대의 힘을 빌어 간신히 진압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러한 상처를 담고 살고 있는 전라도민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야욕의 제물로 삼았다. 이 증거는 5.18 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원 700명이 남파되어 광주시민을 무참히 살육하여 폭동을 유발시키고, 진압군과의 교전을 통해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공작했다는 귀순용사들의 증언에서 밝혀졌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기자회견을 통해 5.18 사태 발생시 북한군 1개대대 병력 700명이 남파되었고 이들을 안내한 자들이 있었다고 고발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은 12월 20일자 데일리지에 실렸다. 기자회견시 북한군 대위 출신 최중현씨의 증언 내용을 요약해 본다. 최중현씨는 북한군 특수부대 정치군관으로 15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위해 총폭탄이 되어 죽을 각오로 충성했다 한다. 이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귀순했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의 핵실험이 있고 난 뒤에도 남한의 태도에 불안을 느껴 기자회견 자리에 나왔다고 증언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소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를 전해 들으며 20여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2는 희생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귀대했다”고 증언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과 김일성 관련설. 5.18 광주사태와 5.18 민주화 운동자들에 의한 대통령 후보 추대 문제, 김대중 대통령 방북과 5억 달러 현금지원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시중에 떠돌던 소문의 진상이 시원하게 풀린다. 김대중은 광주시민의 선생님이 아니다. 그는 상처투성이의 광주시민을 사지로 몰아 넣은 원흉일 뿐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야욕의 화신이 되어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이 되어주고 끝까지 선생님으로 모셨던 광주시민을 제물로 바친 자이다. 원래가 빨갱이인 김대중은, 광주시민을 5.18항쟁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고 북한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광주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과 대한민국 정부와의 총격전을 벌이게 만든 천인공노할 만행자이다. 이 전투로 인해 희생된 광주시민은 김대중으로 인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 대한민국의 세금으로 위로금을 내어주고 재직시에 8차례의 보상협의를 진행하도록 지시함으로 5.18 사태로 희생된 광주시민은 민주화 유공자로 처리했고 당시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었던 북한군의 시신은 행려자로 처리했다. 행려자로 처리한 것은 외지의 사람이 5.18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위장시키기 위함이다. 2. 사기꾼 김대중 김대중은 자신을 경제의 대가로 자처했다. 그는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을 스스로 저술했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실상은 박현채 교수가 대필했다는 사실로 밝혀졌다. 이 사실을 폭로한 교수는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이다. 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 刊)에 실린 논문 ‘조국근대화론 대(對) 대중경제론’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대필’ 문제가 학술 논문을 통해 공론화되기는 처음이다. 김대중씨의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 ▲경희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1969) ▲‘신동아’ 기고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1969)는 모두 박현채씨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하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김대중의 경제론을 써 준 박현채는 어떤 사람인가? 박현채는 처절한 공산주의자이다. 박현채 교수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자신의 경제론은 막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경제론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밝힌 사람이다. 시민발전 대표인 박승옥은 박현채의 공산주의 사상은 조정래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태백산맥’이 저술되었다고 밝혔다. 조정래는 친북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시 남한의 문학 대표자의 한명으로 초청을 받았다. 노무현에 의해 초대되었고 김정일에 의해 방북이 허락되어 평양을 방문했다. 조정래 뿐만 아니다. 사기꾼 김대중과 페러독사 노무현이 심어 놓은 친북좌파들은 한국의 각계 각층에서 둥지를 틀고 선생 대접을 받으며 유형 무형으로 친북사상을 퍼뜨리고 있는 중에 있다. 3. 광주의 스승인가? 인간 말종인가? 광주의 스승으로 받들어져 있는 김대중의 행적을 비판해 보자. 과연 그가 광주의 스승인가 아니면 인간 말종인가를 분별해 보자. 문익환 옹이 타계했을 때 김대중은 문익환 옹의 빈소에 찾아 눈물을 흘리며 평생의 동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이 말은 문익환 옹과 사상의 맥과 배짱 그리고 뜻이 맞았다는 방증이다. 문익환 옹은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네이버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김대중의 평생동지인 문익환옹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서 충성을 맹세할 당시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총재로 야당을 이끌었고 당시의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네이버 사전에 등재 되어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김대중은 문익환 방북사건과 임수경 방북사건의 배후자이다. 또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익환 옹이 사망했을 때, 빈소를 찾아 평생의 동지를 잃었다고 눈물을 흘렸던 김대중은 대통령(1998년~2003년) 대통령 재임 당시 일어난 서해교전 사태로 6명의 전사자와 19명의 부상자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빈소조차 찾지 않았다. 이 사건은 김대중이 햇볕정책을 고수하고 있던 1999년과 2002년에 거듭 발생한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역사에 치욕으로 남아 있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의 행위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북한 쪽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과연 김대중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가? 김대중이 연루되어 있는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사례를 일례로 들어 보았다. 4.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김대중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제단이며 친북좌파의 대부로 분류되며 한국의 근대사의 모든 민주화 운동에는 이들이 개입되어 있다. 김성욱 정치평론가는 삼성폭로에 앞장선 '정의구현사제단' 정체를 폭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3가지 중대 강령을 올곧이 주장해 온 좌파성향의 사제단이라고 밝히며 3가지 중대 강령은 국보법폐지, 미군철수, 연방제 실시를 말한다. 이 중 국보법폐지는 대한민국을 친북좌파의 활동무대로 만들기 위한 공작으로, 미군철수는 6.25 동란 직전의 남로당의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남로당의 국회의원 프락치 사건으로 미군철수가 가결되었고 1949년 5월까지 미군철수가 이뤄지고 난 1년뒤 6.25 동란이 일어났다. 따라서 미군철수 문제는 6.25의 역사와 연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연방제 통일론은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 제도는 그대로 두고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동수의 대표들로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의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연방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이다. 국호는 이미 김정일에 의해 “고려연방민주공화국”으로 정해져 있다. 그동안 친북좌파들이 “고려”라는 단어를 자꾸 끄집어 내고 고려에 집착하고 있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김정일의 뜻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이다. 김성욱 정치평론가는 親北•反美선동에 앞장서 온 사제단의 이번 「삼성의혹」폭로 배경에는 좌파들의 국면전환 의도가 깔려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명박•이회창 두 보수 후보와 汎좌파 후보를 각각 『부패』와 『反부패』의 구도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1)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명칭은, 1974년 결성된 사제단의 공식 명칭이다. 특이한 점은 87년 민주화 이후 국가보안법폐지-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하는 정치적 단체로 변질되어 남한에서 김정일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송두율 입국과 석방에 앞장서 국보법폐지는 사제단이 주장해 온 첫 번째 사업이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 폐지국민연대」참여단체로서 在獨간첩 「송두율」 입국•석방 및 利敵단체 「한총련」 비호에 앞장섰다. 사제단은 2003년 8월 송두율 입국을 위해 결성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을 주도했고, 한국에 온 송두율이 구속되자 「宋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2002년 7월18일과 2003년 4월8일에는 각각 「한총련의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선언」과 「양심수와 정치수배 전면해제 촉구선언」에 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대거 참여, 한총련 합법화와 수배해체를 주장했다. 3) 미군이 물러가길 예수의 정의로 결단! 사제단은 이미 1989년 6월6일 「민족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에서 『민족의 삶에 배치되는 군사동맹 해체』와『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주장했다. 2000년 8월2일 「불평등한 SOFA전면개정과 매향리 폭격장 폐쇄촉구 서명」에서는 『미군이 물러가는 진정한 민족통일의 그 날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로 결단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사제단은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비롯해 매향리•직도•평택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反美집회에 참여해 「미군철수」를 주장해왔다. 이 단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대책위(평택범대위)」와 「이라크파병반대범국민행동」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4) 고려연방제 연구하고 논의하라 촉구 6•15선언 실천을 주장해 온 사제단은 2002년 2월18일 「한(조선)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 6•15선언이 한(조선)반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방안임을 인정한다』며 『북의 고려연방제와 남의 국가연합제(남북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대중적 논의를 통해 한(조선)반도에 필요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 신부들의 입장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각종 反美• 親北단체에서 「맹활약」을 해왔다. 反美선동 앞장서 온 사제단 신부들의 활동과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1)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는 2000년 주한美공군의 공대지사격 훈련장인 경기도 화성군 매향리 사격장 폐쇄를 주장하며 만들어진 (매향리범대위)의 상임대표였다. 2005년 4월 매향리사격장 폐쇄가 결정되고, 대체(代替)기지로 직도사격장이 거론되자, 이번에는 문정현 신부의 동생인 문규현 신부가 나섰다. 같은 해 5월 직도사격장 폐쇄를 위해 (직도대책위)를 결성, 문규현 신부가 상임대표를 맡았다. 2005년 2월22일 만들어진 (평택범대위)에는 문정현 신부가 친북인사인 오종렬, 홍근수, 정광훈, 한상렬, 문경식 등과 함께 상임대표를 맡았다. 2) 문규현 신부 문규현 신부는 △89년 임수경 방북사건에 동행해 국보법위반으로 징역5년형을 선고받은 데 이어 △98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해 金日成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 방명록에 『金 주석의 영생을 빈다』는 글을 남겼던 인물이다. 3) 함세웅 신부 사제단의 또 다른 유명인사는 함세웅 신부(現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함 신부는 최근까지 친북단체인「전국연합」 상임지도위원으로 홈페이지에 이름이 올라있던 인물이다. 함 신부는 2004년 10월9일 평화방송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과 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국보법폐지반대를 『성서에 대한 문자적 맹종』,『인간을 법체계에 예속시키는 현대판 우상』등으로 비유하며 『그런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구체적 사례』라고 주장했다. 함 신부는 같은 해 9월16일 「9•9국가원로시국선언」에 대응, 소위 「민주화원로71인선언」을 갖고 『보안법 고수론자들은 일제와 독재의 잔존세력』이라며 『지금이야말로 보안법 폐지를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04년 3월25일에는 함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당시 구속수감 중인 송두율에 대해 제3회 안중근평화상을 수여했다. 기념사업회는 송두율을 수상자로 선정한 사유로 『송두율 선생의 고난이 민족고난의 현장을 상징하는 한 지표』라며 『송두율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과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정신을 체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또 『부디, 시대성숙에 힘입어서, 우리 민족문화와 사상의 한 횃불이자 민족의 갈림을 잇는 데 기여할 한 「진정한 접점」으로서 송두율 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자유롭게 견인할 그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5. 광주는 김대중과 결별해야 한다 인간 말종 김대중이 광주의 선생님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광주는 언제까지 대한민국의 반골도시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동학의 발상지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반골도시, 반역 도시로 출발한 광주의 이미지를 벗어나야 한다. 김대중을 떨쳐내고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한다. 친북좌파의 대부인 김대중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김대중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김대중 왕국”인 광주는 김대중이 어떻게 광주를 손아귀에 넣었는지 그 공작의 순서를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광주의 지성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광주를 김대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김대중은 광주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가당찮은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지역색깔론을 부추켜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역색깔 강조는 옛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수많은 전투와 백제가 신라로 인해 복속되어야 했던 과거의 역사로부터 추출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구분하여 전라도를 자신이 발판으로 고착화시키려는 김대중의 논리의 핵심을 이룬다. 광주가 근대사에서 점하고 위치는 동학난의 중심지라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김대중은 이를 민주화 운동의 발상지로 특정하고 광주시민과 전라도민의 자긍심에 불을 지폈다. 유언비어도 퍼뜨렸다. 경상도 대통령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전라도민을 다 죽이고 있다는 유언비어도 퍼뜨리며 선동했다. 이 선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정권에서 극점을 이룬다. 유신정권 치하로 들어가자 권좌에서 멀어진 김대중은 유신정권을 독재로 규정하고 전라도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색깔론을 펼치며 유신정권과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라고 선동했다. 김대중의 말에 상처를 입은 전라도민이 유신정권인 박정희 정권과 맞서서 시위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계의 좌파적 지식인들과 북한의 지령을 받은 한총련이 가세하여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 중심에 김대중이 있다. 김대중의 곁에는 언제나 친북좌파로 변질된 “천주교정의구현실천사제단”이 있었다. 6. 김대중을 청문회에 세우고 심판해야 한다. 김대중은 자신의 친북정체성을 민주화로 위장한 사특하고 간교한 자이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의 이적행위는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김대중은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 바른 역사는 잘 못 된 역사를 바로 잡고 잘 된 역사는 계승해야 역사관을 통해 국가관이 바로 서게 되어 있다. 김대중을 심판해야 할 이유는 3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이유는, 김대중의 정체가 친북좌파로 이적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자신의 야욕인 노벨상을 받기 위해 5억불을 현금지원함으로 북한이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근본 원인자인 역도이기 때문이다. 셋째, 김대중의 망명성 도피 비자금에 대한 혐의는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비자금으로 확인되면 국고로 환수 조치 되어야 한다. 김대중의 비자금에 대한 혐의는 뉴욕 ‘정의사회실천시민연합’이 작성한 ‘DJ정권 비자금 뉴욕 유입조사 보고서’를 공개함으로 공식화 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2월 뉴욕시 플러싱에 거주하는 건축업자 모씨(52)가 지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고 정실련에 제보함으로써 조사팀을 구성, DJ 비자금을 추적조사해 밝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김대중 비자금 미국유출 및 방북규탄 특별 기자회견’이 2006년 6월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500여 명의 청중들과 취재진이 모여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뉴욕 ‘정희사회실천시민연합’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은, 김대중씨의 측근들 재산…찜질방 주인인 홍성은씨 재산 1억2763만 달러, 생선가게 했던 이의건씨 재산 1억668만 달러, 8년 전 파산선고 받았던 다니엘 리씨 재산 1억2266만 달러로 밝혀졌다는 보고 및 자료 공개로 이어졌다. “김대중 비자금을 國庫로 환수하라!” 는 구호로 시작된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자료공개에 이어 '안경본' 고문인 서석구 변호사는 “우리 단체가 김대중과 김홍업을 고발하는 고발장 접수할 예정”이라며 “우리는 김대중의 측근들이 빼돌린 비자금을 조사하는, 용기있는 미국 정부를 박수로 응원한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김대중씨는 뇌물 공여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정치자금법, 항적죄, 형법 상 일반이적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함과 동시에 노벨 평화상 또한 반환되고 비자금은 국고에 환수돼야 한다. 김대중씨는 구속수사를 해야 함은 물론 출국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 일을 계기로 김대중을 벌하는 투쟁에 모두 동참하기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내용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의 행보에 대한 궤적은 있으나 동선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정일과 어떤 체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김정일과 김대중을 연결시키고 있던 컨넥터가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야당 총재시절 무수히 떠돌아 다녔던 소문들도 그가 대통령으로 등극하고 난 뒤에는 사라졌다. 과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IMF라는 국가적 위기가 오히려 김대중에게는 막강한 호재로 작용되어 IMF의 장막 뒤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일은 없다. 역사가 진실이라는 가치를 가지려면, 가려져 있던 일들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스스로 양심선언을 하고 광주를 대한민국의 광주로 되돌려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국민은 김대중을 청문회에 세워서 단죄를 해야 하고 김대중의 죄상을 낱낱이 파해쳐 공개함으로 광주와 김대중의 고리를 끊어 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남겨야 하는 중대한 숙제를 안고 있다. | ||
(인터넷신문의 선두주자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 |
첫댓글 ~잘읽었어요~감사~!!!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한다.
옛부터 생각은 했지만 이 글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됨니다. 앞으로도 진실에 입각한 좌파들의 실상을 더 많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