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설교 |
6월2일 |
딤후4:1-8 |
면류관을 향하여 |
신앙생활에서 충성의 중요성 |
주님 앞에서의 성적표 |
6월9일 |
에4:9-17 |
죽으면 죽으리라 |
중동전쟁 |
현충일과 이스라엘 |
6월16일 |
왕상19:1-18 |
남은자가 칠천 |
엘리야의 열정있는 한 사람이 되자 |
우울증(탈진)에서 극복하자 |
6월23일 |
왕상 4:1-7 |
새힘을 얻는 길 |
어려움에 처한 선지자 아내 |
엘리사의 도움 |
6월30일 |
전1:7-8 |
당신이 더 위대합니다 |
자존감을 회복하라
평신도 운동하는 목동교회 |
셀 나눔 |
1주 |
○ 선교회별 모임입니다
마지막 주일 새신사 환영 준비 부탁드립니다. |
○ 남여선교회는 어린이 집 |
○ 청년들은 2층 |
○ 학생부는 교회 |
○ 목회자는 사택입니다. |
2주 |
○ 엘리야의 열정,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열정의 사람이 우리 중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이번주는 이스라엘 건국의 과정을 프제지로 준비했습니다. 한주동안 준비한 것입니다. |
○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키지 위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키고 확장시키는데 어떤 노력을 하는지요???? |
○ 모든 셀이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셀의 활성화를 위한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여름 계획 같은 것 |
생활과제 :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준법, 세금, 등 |
3주 |
○ 엘리야의 열정,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열정의 사람이 우리 중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엘리야가 오늘 이렇게 우울증이 온 이유는? |
○ 이 우을증을 극복한 방법 1 하나님을 바라봄 2 육체의 피곤함 해결 3 ? |
○ 나 만 홀로 있는 셀 리더를 격려합니다.
수고들 많았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힘든 것을 목사도 똑같이 경험했습니다.
같이 이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기 원합니다. |
생활과제 : 셀 원 중에 우울한 사람들을 웃겨주자
셀 원 중에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자 |
4주 |
○ 성도들 중에 선지자의 생도 아내처럼 어려움에 처한 셀원이 있는가? |
○ 지금 나의 형편과 처지를 서로 나누어 보자 |
○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서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 |
○ 하나님은 분명 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
생활과제 : 셀 리더는 셀원들에게 안부전화 혹은 톡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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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 이미 표가 되어 있어 추가하는 방법이 좀 그러내요
자존감의 상태는 ? 나는 나에 대하여 어땋게 생각하는가?
목동교회는 평신도 운동을 합니다.
자신의 재능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목동교회에서 당신의 가치를 빛내는 자가 되라
1. 셀 리더에게
셀 모임을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사람은 셀 시작하면서 항상 나누기 원합니다.
2. 셀 맘에게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이 크듯, 셀에서는 셀 맘의 역할이 큽니다.
셀 원과의 화목과 친교에 관심을 갖아 주시기 바랍니다.
3. 셀 나눔
삶 나누기 :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서 일어난 사건(경험) 나누기
내 가정 삶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 이야기
말씀 나누기 : 오늘 말씀에서 내가 받은 은혜 나누기
오늘 말씀에서 새롭게 안 사실
전도 나누기 : 한 주간 전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
1 2013년 6월 예배위원
만찬:이윤기,노정애 헌금:오윤서,오윤혁 안내:김하영,강문자
애찬: 2셀 청소: 4셀 설거지: 2셀 형제, 51셀
2 첫주 선교회모임 있습니다.
선교회별 모임 갖습니다.
목회자는 사택에서 있습니다.
3 32기 성경공부 모집
6월 9일부터 1시 사택
신청자: 문새한슬,장용준,
4 7기 제자반
일시 6월 24일부터(화,목 오전 10시부터)
신청자:손성문,박나래,김성은,손세현,손세라,
이범기,이근호,
화,목 저녁 8시반 신청자:이예진
5 회의
교사전회회의 6월 15일 오후 4시
6 주일학교, 학생부 여름 캠프
일시: 2013년 7월 29- 31(2박3일)
장소: 그리스도대학교
회비: 4만원
7 셀리더 모임
일시: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9시
셀리더 및 부리더 모임
6월23일 치현교회
6월17 – 20일 기도원
6월 23일
말씀
1. 이제는 희망을 말할 때
며칠 전 수원에서 50대 가장이 부인, 그리고 아들 두 명과 함께 집에 연탄불을 피워 동반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중학생 초등학생인데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70만 원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나 몇 달치 집세를 내지 못하는 등 최근 형편이 몹시 어려웠다고 합니다. 생활고를 비관해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생활고를 비관하고 신병을 비관하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갈 정도로 경제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는 하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절망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희망을 말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저는 희망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약 2년 전에 했었던 설교를 다시 한 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만큼 이 말씀이 희망에 대해서 훌륭한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다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또 한 번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본문은 엘리사 시대에 일어난 기적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빚을 진 여인이 그 빚을 다 갚았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생활비까지 해결했다는 줄거리이지요. 고대 근동 지방에서 과부가 큰 빚을 져서 생계가 막막해진 상태에다가 두 아들까지 노예로 넘겨줘야 할 형편이라면 절망 중에서도 최악의 절망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가정은 어떻게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와 희망의 빛을 찾게 되었을까요?
2. 절망에 이르게 한 문제, 문제들
먼저 이 가정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1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주인공은 선지 생도의 아내였습니다. 오늘로 친다면 신학생 전도사님의 사모님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만 아내와 아들 둘을 남겨놓고서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냥 죽은 것만 해도 슬프고 답답한 일인데 큰 빚까지 처자식에게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남편이 다니던 신학대학의 엘리사 학장님께 찾아와 자기 가정의 딱한 사정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여기 선지 생도의 부인에게는 절망에 빠지게 한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믿고 의지할 가장이 없습니다. 그 옛날 중동 지역에서 남편의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야말로 한 집안을 떠받치는 기둥이요 대들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은 오로지 남편과 아버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버지를 잃은 고아를 특별한 돌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여인은 장차 목회자가 되고자 큰 꿈에 부풀어 신학공부를 하던 남편 전도사님을 잃고 졸지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먹고 살 일이 막막한 과부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남편만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설상가상으로 큰 빚을 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빚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사랑의 빚 이외에는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빚을 지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항상 채주에게 눌려 지내기 마련입니다. 이자라도 줘야 할 날이 오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은 것만 해도 큰 슬픔인데 거기다가 막대한 빚까지 졌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형편이었지요.
셋째, 큰 부채로 인해서 사랑하는 두 아들을 노예로 넘겨야 할 처지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어떤 사람이 정해진 시간 안에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본인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까지 노예가 되어서라도 변제할 것을 합법화했습니다. 여인은 집안 형편이 너무나 가난해서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2절에 보면 이 집에 남은 것은 기름 한 병이 전부입니다. 그야말로 빚을 갚는 것은커녕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막막했지요. 그리하여 이 여인은 생때같은 두 아들을 꼼짝없이 채주의 집에 노예로 보내서 최소한 6년 동안은 머슴살이를 시켜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3. 절망에서 빠져나와 희망으로 가다
산이 크면 그늘도 크다는 말이 있지요. 죄가 크면 은혜도 크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이 클수록 희망도 큰 법입니다. 극심한 생활고로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가정이 살아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갑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첫째, 엘리사에게 찾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다녔던 선지학교의 교장인 엘리사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지요. 이 여인이 찾아가 도움을 구할 대상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남편의 친인척들도 겨우 자기 식구들의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지 이 여인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래도 자기 남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엘리사에게 찾아가 딱한 사정을 하소연합니다.
우리가 큰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 대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자기 남편을 가장 잘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큰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면 해결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0: 1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해결책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2절을 보세요.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 여인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돕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반드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하여 돕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허공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사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기에 얼마든지 금방 돈을 만들어서 즉석에서 빚을 다 갚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작은 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5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한꺼번에 기적을 일으켜서 전원을 다 먹이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소년이 싸들고 온 도시락,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초로 해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실 때에도 먼저 빈 항아리 여섯 개에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큰 문제 앞에 여러분이 갖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본문의 여인처럼 지극히 작은 것, 즉 기름 한 병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작은 것을 통하여 큰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할 수 있으면 모든 이웃에게 많은 숫자의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3절을 보세요.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왜 빈 그릇을 빌리되 되도록 많이 빌려오라고 했을까요? 그 빈 그릇에 한 병 남은 기름을 가득 채워준다는 암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능력을 믿는 이 여인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지요. 여기서 빈 그릇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말합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당연히 빈 그릇도 적게 빌려오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기름 한 병 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 빈 그릇을 많이 준비하면 그 그릇마다 가득 차게 해주실 줄 것입니다.
넷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두 아들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빌려온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두 아들과 함께'와 '문을 닫고'입니다. 5-6절 말씀을 보면 이웃집을 돌면서 빈 그릇을 빌려온 것은 두 아들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지시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치된 순종이 꼭 필요합니다. 이 집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마지막 한 병 남은 기름을 붙들고 큰 믿음으로 빈 그릇을 많이 빌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 아내와 자식들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일에는 한 가지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온 가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가 되어보십시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마지막 남은 것이 기름 한 병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준비한 믿음과 순종의 그릇 수만큼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세 모자만 자기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기름 한 병은 이 집안에 마지막 남은 재산입니다. 그 기름 한 병마저 채주에게 빼앗긴다면 이 집안에는 기댈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름이야말로 이 집안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문을 닫고 비밀스럽게 그 기름 한 병을 다른 빈 그릇에 부으라는 것은 그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채주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마지막 남은 이 기름 한 병을 '믿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기름 한 병,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라는 기름 한 병만 가진다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기름 한 병을 세상의 채주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문을 닫아야 할 이유는 기름 붓는 행위에 방해를 받지 말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가운데 기도해야 할 이유도 오직 기도에만 집중하고 방해를 받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름을 빈 그릇에 붓는 행위는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려온 빈 그릇마다 가득 채워주심을 믿는 마음 하나로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5-6절을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엘리사의 말 그대로 순종했다는 말이지요. 아들 둘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빈 그릇을 빌려왔고, 드디어 세 모자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어머니는 두 아들이 가져오는 그릇대로 기름이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빌려온 모든 그릇이 가득 찼을 때 기름은 뚝 그쳤습니다. 구약판 오병이어의 기적인 셈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이제 결론부인 7절을 보세요.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이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기름을 팔아 빚을 청산하면 됩니다. 이제 빚만 갚으면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갈 일이 없습니다. 빚에 대한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남은 기름을 팔아 앞으로 생계비로 쓰면 됩니다. 현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래의 문제까지도 해결된 것이지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의 빛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5. 무지개 = 비 + 태양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이 있지요. 한 노인 어부가 84일 동안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조수로 일하던 소년마저 크게 실망해서 노인을 떠나 다른 어부의 배로 갑니다. 홀로 먼 바다에 나간 노인은 사흘간의 사투 끝에 대어를 낚아 배 뒤에 매달고 육지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와 노인은 또 한 차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노인이 이 모든 싸움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항구에 닿았을 때 그가 잡은 물고기는 상어 떼에 물어뜯겨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처절한 절망 가운데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위엄있게 싸우는 인간의 용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물고기와 싸우면서 노인이 내뱉는 명언들이 나옵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이 노인의 말처럼 우리 역시 인생의 고비마다 닥치는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파괴될지언정 패배 당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암세포와 싸울 때 비록 파괴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패배는 당하지 않는다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더욱이 아무리 절망의 밤이 깊더라도 결단코 희망의 새벽이 밝아온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히틀러 정권에 의해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던 시가 있습니다. 독일 퀼른에 있는 한 지하방공호의 벽에 쓰여 있는 시의 내용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주위에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침묵 속에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또한 20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매튜라는 청년은 죽기 10개월 전에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비가 없어도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아! 태양과 비! 웃음과 고통! 그것들이 함께 어울려 무지개를 만드는 거지!”
옳습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비가 온 뒤 태양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도 무섭게 쏟아지는 소낙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소낙비 다음에 태양이 비칠 때 찬란한 무지개가 뜹니다. 절망 다음에 희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갖가지 절망스러운 문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일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남은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큰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믿음과 순종으로 빈 그릇을 준비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그 빈 그릇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6월 16일
본문: 열왕기상 19:15-18, P.550 제목: 남은 자 칠천 명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죽여 기손 시내를 붉게 물들였다는(왕상18:40) 소식을 아합 왕으로부터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의 진노의 칼을 피하여 도망하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갈멜 산의 이적.... 엘리야를 엘리야 선지자답게 한 놀라운 이적입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의 가슴 속에 참으로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여 제물을 불태움으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의 신앙고백을 부르짖게 한 사건이었습니다(왕상18:39). 일당백(一當百)이 아니라 일당사백오십(一當四百五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죽여 그 피로 기손 시내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갈멜 산 이적의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승리의 개가를 불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 날 그때의 승리의 기사를 읽는 오늘의 우리 성도들에게도 통쾌한 승리감에 젖어들게 하는 참으로 기분 좋은 승리였습니다. 그 승리의 한 가운데 엘리야 선지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도망자의 고달픈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내일 이맘때에 정녕 네 생명을 취하겠다」는 왕비 이세벨의 통고 앞에 너무도 나약하게 무너져 버린 갈멜 산의 이적을 가져 왔던 개선 장군의 모습입니다. 왕상 19: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자신의 생명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고, 자신의 생명을 취할 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을 알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도망자 엘리야는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막상 그의 삶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들이 가지는 이중성으로 아직 "완전"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지금 이세벨의 진노의 칼을 피하여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좋게 보아주어도 이세벨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죽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이세벨의 진노의 칼이 나를 어찌 하랴!"는 차원이 아닙니다. 왕상 19: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엘리야의 착각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나....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4년 전으로 기억합니다만, 이 엘리야의 착각에 대하여 살펴본바 있습니다. 본문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엘리야의 착각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엘리야 선지자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생각이었지만, 자신의 눈에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사람들로 보였지만....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칠천 명이나 남아 있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 칠천 명』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 『남은 자 칠천 명』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가히 상상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도 아니요, 두 사람도 아니요, 열 사람도 아니요, 백 명도, 천 명도 아니요.... 7천 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남겨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밤낮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실상은.... 바알에 입맞추지 아니하고,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다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이들의 기도가 조국 이스라엘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진노의 칼에 죽어가며 이들이 뿌린 순교의 피가 엘리야의 갈멜 산 이적에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남겨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밤낮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주는 의미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1.여호와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입니다. 본문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여기의 내가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본문15절). 그리고 "남기리니"는.... 미래형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남기다, 여유 있게 하다"의 뜻인 [솨아르(ra'v;)]란 단어의 완료형입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너만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나를 위하여 7천 인을 남겨두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엘리야의 말에 여호와께서 주신 응답입니다. 엘리야는 생각합니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앞뒤, 좌우를 돌아보아도 모두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엘리야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엘리야의 착각이 됩니다. 고전 15: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부활의 주님의 부르심을 입을 때에 이미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으로.... 주님의 도구에 불과한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48:11절/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당신의 뜻을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거기에 필요한 도구를 미리 준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로 엘리야 선지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7천 명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내가 나를 위하여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절되어도 여호와의 이름이 욕되게 되고, 다른 신의 이름으로 구원되면 그 영광이 우상에게로 돌아가게 되니....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루어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 시대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하신 그릇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삼상2:35).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고 했습니다(삼상16:3).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사43: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루리라」 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시대의 그릇으로 남겨두신 7천 명입니다.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고, 바알에 입 맞추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 바라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남겨두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엘리야의 착각처럼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해 두신 7천 명의 그릇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이들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風采)도 없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지만.... 실상은 이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갈멜 산의 승리를 거둔 엘리야 선지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이들 7천 명의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2.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다 무릎을 바알에게 끓지 아니하고".... "무릎을 꿇다"는 말은.... 항복한다, 복종한다(빌2:10), 기도한다는 뜻입니다(왕상8:54). 주님이 친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눅22:41). 이는 또한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가(행9:40),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행21:5). 바알에게 꿇어 복을 빌어 기도하지 않고, 바알에게 경배하지 않은 사람들을 7천 명이나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남겨두신 사람들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눈물 뿌려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보면.... 북 왕조 이스라엘의 타락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왕상16:31)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를 왕궁 안에까지 끌어들여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자기 식탁에 함께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선지자들을 죽이며 우상을 전파하였습니다. 아합 왕을 농락하여 정치, 종교를 장악하여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피를 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이세벨의 진노의 칼날이 시퍼런 때에....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 7천 명이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눈물 뿌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하나님이 아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다니엘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름 없는 7천명의 기도생활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니엘의 기도가 이 시대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함으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는 조서에 다리오 왕이 어인(御印)을 찍어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기도생활을 쉴 수 없었습니다. 전과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루에 한 번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모함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그대로 걸려든 것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이들도 저 다니엘처럼 그렇게 이세벨의 칼날에 죽어갔을 것입니다. 위대한 엘리야도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판국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세벨의 칼날이 두려운 시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이룰 이름 없는 7천 명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왕상 19: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나만 남았다.... 엘리야의 착각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7천 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착각....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변절자들이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홀로 아세라 선지자 400명, 바알 선지자 450명과 외로운 투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엘리야의 눈에 보이지 않는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엘리야의 승리 뒤에는 7천 명의 기도가 있었음을 엘리야는 몰랐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기도의 향연이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상달되어(계8:4) 그 기도의 응답으로 갈멜 산의 이적이 나타났음을 몰랐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내 뜻을 이루려고 준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가 사백오십 인이요,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이었습니다(왕상18:19). 우상숭배가 극에 달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왕궁 안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가 차고 넘쳐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남겨두신 7천 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흘린 눈물과 이들이 흘린 순교의 피로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갈멜 산의 이적이 이루어지고,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의 신앙고백을 부르짖게 한 것입니다(왕상18:39).
3.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자들입니다. 본문 18절/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엘리야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알지 못하는 7천 인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이 이들이 누구인지를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몰랐으니 다른 사람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이들 7천 명의 사람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자들입니다. 북 왕조 이스라엘의 타락이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아합 왕궁 가까이에 포도원이 있었다는 것으로 나봇은 죽어갔습니다. 기업의 땅을 남에게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다 이세벨의 모함으로 죽어갔습니다(왕상21:1-16).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바알 신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이세벨의 진노의 칼날에 죽어야 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의 진노의 칼날이 무서워 엘리야 선지자도 생명을 위하여 도망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선지자 중에서 최고의 능력을 행한 선지자입니다. 그 엘리야가 도망하는 판국인데, 그래도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조국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정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그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남겨두셨다"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실상은 조국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서 지켜내는 유명한 자이었습니다(고후9:6). 『남은 자 칠천 명』 엘리야가 능력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살아가면서 "하나님 사랑"을 몸소 삶으로서 실천한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엘리야 선지자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고, 갈멜 산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님만 아실 뿐.... 성경도 그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선지자 중에서 최고의 능력과 이적을 행한 엘리야....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엘리야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중 최고의 지도자 엘리야.... 그는 그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고 있습니다. 일당사백오십(一堂四百五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죽여 기손 시내를 붉게 물들인 엘리야가 이세벨 한 사람을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스스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3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주님을 버리고, 복음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건지려면 오히려 잃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법칙은 "누구든지" 똑같이 적용됩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할 때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오늘의 위대한 지도자들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살아가면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덧입혀 주신 성령의 능력이 사라지고 맙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는 착각 속에 빠지고 맙니다. 갈멜 산의 승리가.... 엘리야 한 사람의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7천 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엘리야의 눈에도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가 아니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내가 준비한 7천 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위대한 지도자들도.... 그들의 성공 뒤에는 그들도 모르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 뿌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은 자 칠천 명』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형교회를 이룩한 유명한 목사들이 은퇴한 후에 일어나는 문제들....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은퇴한 후에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엘리야의 착각"에 빠져 있지 않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고, 교회가 분열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찢을 수 있단 말입니까.... 진정 교회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진정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왔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인이요, 성령의 역사로 부흥해 왔다면, 일군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교회가 그런 시련을 겪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은 자 칠천 명』 이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나를 위하여 나의 뜻을 이루려고 남겨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세대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후 세대도 그들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남은 자 칠천 명』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남겨두신 자들입니다. 실상은 이들의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갑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이들의 존재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지상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은 목회자 한 사람의 역량이 아닙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새벽마다 눈물 뿌려 기도하는 『남은 자 칠천 명』 같은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이런 『남은 자 칠천 명』과 같은 성도들의 숫자가 줄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벽마다 눈물 뿌려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보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보다 지금 엄청 줄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부흥의 정점(頂点)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은 바로 『남은 자 칠천 명』과 같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줄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남은 자 칠천 명』 아합 왕 시대를 바라보세요. 이세벨의 칼날에 죽어져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흘리는 피를 바라보세요. 일당사백오십(一堂四百五十)의 능력을 행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남은 자 칠천 명』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들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남은 자 칠천 명』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눈물 뿌려 주의 몸된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하나님만 아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영광!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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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만이설교자료방 원문보기▶ 글쓴이 : lee님
6월 7일
설교 입니다.
설교는 프레즈로 합니다.
1 현충일, 6,25등 한국전쟁
2 이스라엘의 건국
3 하나님 나라와 나
특별히 저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보전을 위해
"이때"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 두 단어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4 셀리더들은 조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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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 기도력 |
어린이 기도력 |
왕후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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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6, 개정).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4). |
미국의 한 잡지에서 컴퓨터가 합성한 ‘환상의 미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미용 전문가들에 따르면 샤론 스톤의 얼굴형,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눈, 캔디스 버겐의 코, 킴 베이신저의 입술을 합친 용모가 나타났다. 이처럼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미인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환상의 절세미인 에스더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첫째, 에스더는 히브리식 이름으로는 하닷사, 페르시아식 이름으로는 에스더(별)이다. 에스더서는 바벨론 포로 기간이 끝나고 스룹바벨과 에스라 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바사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스더서에는 왕이라는 단어가 무려 100번이나 나오지만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이름은 없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했다. 둘째, 포로 신분인 에스더는 고아라는 외로운 환경에서 삼촌 모르드개의 양딸로 입양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치리하는 페르시아 제국 수산궁의 아하수에로 왕과 결혼해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大臣)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을 충동하였다. 하만은 자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에게 대학살의 조서를 내리도록 왕께 요청하였다. 유대인의 큰 애통이 있었다(에 4:3). 셋째, 왕후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과 더불어 3일 동안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결심하고 왕 앞에 나갔다. 하지만 멸망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었다. “에스더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른 시련은 그 시대에 국한된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세상 끝 날까지 여러 시대를 내려다본 계시자는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라고 선포하였다. 오늘날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볼 것이다. 과거 여러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참교회를 박해하게 한 동일한 정신이 장래에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행동을 하고자 할 것이다. 지금도 이 마지막 대투쟁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참교회의 원수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적은 무리 가운데서 대궐 문에서의 모르드개와 같은 사람을 본다. 당신의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경의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버리고 당신의 안식일을 짓밟고 있는 자들에게 끊임없는 견책이 된다”(선지자와 왕,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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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치원의 텃밭에 작은 애호박 모종을 심었어요. 잎이 몇 장밖에 되지 않는 애호박 모종에 물도 주고 주변의 풀들도 뽑아 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수없이 해 주며 정성을 쏟았지요. 비가 와서 바깥 놀이터를 못 나갈 때도 우리는 속상해하지 않았어요. 대신 비를 마시고 쑥쑥 자라날 애호박 모종을 생각하며 기쁜 나날들을 보냈지요. 그리고 곧 아름답게 핀 노란 꽃봉오리는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어요. 우리는 곧 이 꽃봉오리들이 연두 빛깔의 맛있는 애호박을 맺게 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꽃들을 바라보면서 벌써 좋은 열매의 맛을 본 듯한 느낌도 들었지요. 믿음으로 우리는 싱싱하고 맛있는 열매를 상상하면서 애호박이 될 노란 꽃을 보며 감사를 드렸어요. 호박꽃은 믿음의 꽃과 같아요. 열매가 맺히기 전에 꽃이 피어야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 전에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해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은 어떤 것이라도 우리는 구할 수 있다. 그다음에 우리는 받은 줄로 믿어야 하며 받은 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축복의 어떤 외적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그 선물은 약속 중에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이미 소유하는 그 선물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다”(교육, 258). 연두 빛깔 애호박이 될 예쁜 노란 꽃봉오리처럼 우리의 감사의 표현은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랑스러운 꽃봉오리랍니다. 함께 말해 볼까요? “예수님, 당신의 약속에 감사하오며 최선을 아시는 주님께서 적절한 때에 주실 것을 믿고 기쁨으로 기다리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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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이야기 입니다.
참고하세요
세상을 살아가는 한 개인의 눈으로 [사랑의교회 당회의 입장]이라는 글을 찬찬히 살펴 보면, 현재 우리 사랑의교회 당회가 담임목사님과 어떤 관계인지 또 추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러한 결정을 내렸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판결을 내려야 지금의 사랑의교회 체제를 유지하고, SGMC 건축을 무사히 마무리 지울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결정은 100점짜리 입니다.
하지만, 한 신앙인의 눈으로 이 글을 조금만 뜯어보면 180도 달라집니다.
첫 째, 우리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물론 심지어 한국 교계와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담임목사님을 왜 당회에서 직접 벌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자발적인 벌은 없습니다. 저는 판사 앞에서 내 벌은 내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받겠다고 말하는 피고인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감히 당회원님들게 여쭙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우십니까? 아니면 담임목사의 잔소리가 무섭습니까?
둘 째, 이 글에 따르면 권영준 장로님는 이번 담임목사님 표절사건을 당회 보다 먼저 세상에 알린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차에 사실로 재확인되었다면, 당회에서 상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벌을 받아야 합니까? 이해가 안됩니다. 오히려 지금껏 당회는 권영준 장로님의 경고를 귀 담아 듣지 않고서 담임 목사님을 제대로 보필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누가 누구를 징계한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됩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고성삼 목사님은 왜 나오십니까? 무슨 부적절한 처신을 하셨습니까? 온 교인에게 밝히 알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혹은 우리)에게 무슨 고정관념이 있다고 그걸 내려놓으라고 하십니까? 혹시 당회원님들께서 가지고 계시니 다른 성도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것이야 말로 고정관념입니다. 당회원님들께서 무슨 고정관념을 가지고 계신지 먼저 밝혀주십시오.
저는 어린 시절 사랑의교회 주일학교에서 전도사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컸습니다. 다니엘처럼 믿음을 지키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고 교회에서 가르치셨고, 지금도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만약 그 옛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려고, 하나님께 기도 안하고, 금신상에게 절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고… 그렇게 했다면, 다니엘서 말씀은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랑의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적당한 결정으로 어물쩍 넘어가면 – 우리가 비록 올해 말에 담임목사님과 함께 SGMC에 가서 멋지게 입당 예배 드리고 잔치벌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우리들 만의 축제일뿐이요.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우리 믿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사랑의교회를 ‘사랑의교회’로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름이 수치가 될 것입니다.
담임목사님과 당회원님들께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제발 죽어주십시오. 죽어야 삽니다. 우리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구원의 능력이 여기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교회 담임목사부터 부교역자, 장로와 순장 그리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낫게 여기십니다. 적당히 죽은 척하거나 반쯤 죽어서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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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라(대상4:9-10)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에 지경을 넓히시사 모든 환난 걱정 근심 염려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모든일을 주의 손으로 도우시사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게 하옵소서(대상4:9-10)”
수년전에 애틀랜타의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 목사가 쓴 야베스의 기도: 축복받은 삶으로 나아가기(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가 출판된지 3개월만에 410만부 이상이 팔려서 USA 투데이, 뉴욕 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선정 베스트 셀러 1위가 되었입니다. 이 책에서 윌킨슨 박사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한 우리가 당연히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으며 또 축복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지나치게 축복을 간구할 경우 미신적이고 샤머니즘적이며 이기적이라는 비판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브루스 윌킨스에 따르면 본래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넘치도록 축복하시는 데 있으므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구하지 못해서 큰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습니다. 존스(Jones)라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여기 저기를 안내해 주는데 한 이상하게 생긴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거대한 창고(warehouse)가 있는데 이 건물은 창문은 하나도 없고 오직 문 하나만 달랑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간청을 해서 존스는 겨우 이 창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창고 안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반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는데 각 선반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자들은 모두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기 때문에 존스는 자기 이름이 쓰여진 상자를 열심히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할 수 있으면 존스가 자기 상자를 열어보지 않기를 바랬지만 존스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 이름이 적힌 상자를 즉시 찾아 열게 되었습니다. 존스가 이 하얀 상자를 여는 동안 베드로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불쌍한 듯이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까요? 존스가 열어 본 상자 안에는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했던 수없이 많은 복들이 가득차 있었지만 존스는 한번도 그 복을 구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윌킨슨은 이 예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태 7: 7)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축복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위에 사는 동안 마땅히 누려야할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야베스는 누구이며 그가 올린 기도는 어떤 내용의 기도였습니까?
야베스는 누구인가?
먼저 야베스는 성경에서 가장 지루한 책으로 유명한 역대기 상에 등장합니다. 특히 역대상 1―9장은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말로 연결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보로서 아담에서 이스라엘 12지파까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는 오백명 이상의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야베스는 다윗왕의 혈통인 유다지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별로 뼈대있는 집안이 아니었던지 3장에 나오는 왕족의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고 4장에 비로소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에 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9절 후반의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고 한 구절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괴롭게 하다” 혹은 “슬프게 하다”의 뜻을 가지는데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컨대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혹은 ‘빼앗는 자’(grabber)인데 이름 그대로 그는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또한 나오미가 그 두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말론은 ‘병약한’(puny)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기룐은 ‘수척해지다’(pining)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 이름대로 두 사람 모두 젊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룻기 1: 1-5 참조). 솔로몬의 뜻은 ‘평화’(peace)인데 그는 이름처럼 전쟁에 한번도 나가지 않은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의 뜻이 한 사람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난산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야베스가 태어남으로서 어떻게 먹여 살릴까 경제적인 문제로 근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의 이름 뜻으로 보면 어머니로 하여금 “이제 너는 고생문이 훤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태어난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슬픈 출생과 과거를 지닌 야베스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가 다른 형제들보다 더욱 존귀케 되었다고 합니다. 야베스가 불행과 슬픔의 과거를 딛고 축복과 존귀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바로 그의 담대한 기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렸기에 그가 축복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첫째로, 야베스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복을 달라고 하는 기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여서 기왕이면 더 잘살고 더 잘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우리를 축복해주시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건강하고 잘살고 성공하고 승리하시길 원하십니다. 잠언 10: 22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축복을 어떻게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정욕만 위하여 축복을 구한다면 그런 축복은 의미가 없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영화롭게 하는 축복은 우리가 반드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어떤 축복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받게될 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채 그저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는데 자기의 책임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 7: 7―8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은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복을 채워주시길 원하시는 분인 까닭에 열심히 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하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야베스는 하나님께 자기의 지경을 더욱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가 살던 시대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12지파에 골고루 땅의 지분을 나누어주었던 시대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땅 한 조각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목숨을 건 전쟁을 수없이 치러야 했으며 땅을 넓힌다는 것은 무한히 생육하고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는 단순히 이기적인 복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책임을 달라고 하는 비전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경을 넓혀달라고 간구한 뒤 그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나가다 보면 어려운 장애물이 하나 둘 출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한 축복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기적적인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많은 수고와 고생을 한 뒤 어려운 장애물들을 잘 통과한 뒤에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와주고 계심을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직접 임하시는 능력을 상징합니다(여호수아 4: 24과 이사야 59: 1 참조). 또한 사도행전 11: 21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말함으로서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초대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기의 지경을 넓혀나가는데 있어서 주의 손이 함께 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야베스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산다고 해도 환난과 시련이 때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수없이 많은 근심이 우리를 삼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우리의 지경이 크게 넓어져 엄청난 축복을 받게되었을 때 우리는 실수해서 죄악에 빠지거나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건실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뒤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저버림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축복이 근심없는 축복,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축복이 되어야지 추한 이기심으로 일그러진 축복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을 경우 빼앗아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베스는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특별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넘치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그 형제들보다 더욱 존귀한 사람이 되어서 유대 전승에 의하면 당대의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기도함으로 고통과 수고로 가득했던 야베스의 삶이 존귀해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역전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6월 2일 말씀 펌
사도 바울의 간절한 바램같이 (딤후 4:1-8)
오늘 말씀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로,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보낸 간절한 바램이다.
1. 바울처럼 선한 싸움에 힘쓸 것을 명하였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후 4:6-7a) 이미 제단 위에 오르게 된 제물처럼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최선을 다해 싸운 것처럼, 제자인 디모데도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전도자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명하고 있다. 성도의 삶은 전투장 같은 세상에서 악의 영들과 싸우며 거룩한 목적과 목표를 두고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한다.
2.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킬 것을 명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킨 것처럼 제자인 디모데도 그렇게 주워진 사명을 다할 것을 명하고 있다. 성도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얽매이기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마지막까지 승리해야 할 것이다.
3. 바울이 간절히 기대하는 면류관을 사모할 것을 명하였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 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 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의의 면류관은 구원이 전제된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종한 의로운 일에 대한 상급을 의미한다. 디모데는 물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귀한 면류관을 받을 것을 명하고 있다. * 의의 면류관(딤후 4:8)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가 받는 상급 *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시련을 받은 자가 받는 상급 * 승리의 면류관(딤후 2:5, 계 3:1) 전도 및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받는 상급 * 기쁨,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빌 4:1) 전도함으로서 받는 상급 *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참 종으로 고난을 받는 자가 받는 상급 *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고 모든 일에 절제한 신앙인이 받는 상급이다.
결론: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명한 것 같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명한 것 이니 성도로서 2013년에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과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귀한 상급을 받도록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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