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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구 시집 <권투선수 정복수>, 오성문화, 2015. 2
대구의 만인도(萬人圖)
맹문재(안양대 교수, 문학평론가)
1.
상희구 시인이 의욕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연작 장시의 네 번째 시집은 대구의 만인도이다. 그동안 지리, 장소, 전통 시장, 추석 명절, 명소 등을 통해 대구의 지도를 실감 있게 그려왔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을 통해 한층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시집에서 쓰인 대구의 방언을 사람들의 말투나 묘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대구의 만인도는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시인에게 대구는 국소적(局所的)인 공간이면서도 전역적(全域的)인 공간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국소적인 공간의 사람들을 최대한 발굴해서 전역적인 공간의 구성원으로 채우고 있다.
국소적인 공간은 개개의 신체를 토대로 근방으로 펼쳐지는 것, 다시 말해 대지에 지탱되는 자신의 신체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삼차원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국소적인 공간에서는 신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전후좌우나 상하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한 사람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의 방향성과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의 방향성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이 한 장소를 동시에 점할 수 없기 때문에 국소적인 공간은 동시에 경험할 수도 없다. 이에 비해 전역적인 공간은 국소적인 공간이 그 부분으로 자리매김 되는 전체로서의 공간이다. 전역적인 공간에도 방향성은 존재하지만 국소적인 공간에서와 같이 개개의 위치나 방향으로부터 영향 받지는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치한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대구의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문호였던 서거정을 비롯해 조선 고종 때의 민족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서상돈, 조선인을 위해 무료 변호를 맡고 한글학회에 자신의 집마저 헌납한 일제 강점기의 이산 변호사, 민족의 시인 이상화, 독립운동가 서상일 등 수많은 사람들을 국소적 공간의 구성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쌀 배급소의 최 씨, 나무꾼 팔수, 두부장사 손 영감,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 우리복덕방 나 여사, 토정비결 잘 보는 우 노인 등 이름 없는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다.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낮은 사람들,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 인정이 많은 사람들, 효심이 깊은 사람들, 인물이 좋거나 없는 사람들,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들 등으로 국소적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그 사람들을 전역적인 공간의 존재로 만들고 있다. 국소적인 공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전역적인 공간의 구성원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에서 대구는 문서상의 지도를 넘어 사람들로 만들어진 지도가 된다. 대구는 대한민국의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로 팔공산과 비슬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고, 영남 지방의 중심지로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고, 인구가 약 250만 명이고 등의 문서상 공간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지도가 되는 것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세계관은 “천하의 절경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온/어느 현자(賢者)가 탄식하였다//- 흥, 세상에서 아무리 이름 난 명승이라/캐쌓아도 거기에 사흘 만 사람이 없이잉끼네/아무것도 아잉기라”(「사람」)라고 노래한 데서 여실히 확인된다. 따라서 대구의 사람들을 계보화시키보다는 국소적인 공간에 놓인 그들을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결국 대구의 역사를 만인도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2.
영필이 아재는 우리 동네 보배다
일 잘하는 이장(里長)이사 따로 있지마는
이장 우에 영필이 아재가 있고
이장 밑에 영필이 아재가 있다
손재주가 좋은 데다 마실에
일이 생길 때마즁
일 두랑(斗量)하는 두릴빵수가 남다리다
누구네 집 위양깐 허물어진 것도 훗딱
해치얐뿔고 어는 집에 전기가 나갔다 캐도
뚜끼비집을 손본다, 소겠도로 만진다
캐쌓아민서 그렁 것도 훗딱 해치야뿌는
영필이 아재다
수막골 골목 끄티이 사는 순딕이네
막내이 알라가 밤에 자다가 곽중에
토사곽란을 만냈는지 죽는다, 산다
이문가문할 때 그 오밤중에 삼십 리 밖
성내의원꺼정 업어다 날란 것도 영필이
아재고 언젠가 아릿동네 봇도랑 우,
한도랑에 큰물이 났일 때 온통 뚝방이
무너진 거로 동네 청년들 및이 불러서
한 서너 달 웃째웃째 하디이마는 고만에
말짱하이 고쳐놨지렁, 모도가 하는 말이
‘관처(官廳)어서 손 본 것보다 더 낳구마는’
캐쌓알 정도다
동네에 한창 가물이 들어서 논바닥이 모도
뱃짝 말라붙었을 지경꺼정 됐을 때 동네에서
잘 내띠는 또출네 할배가
- 아이고 날이 이맇기 가문데 영필이는
어데 가서 머하노? 하늘에다 축수(祝手)해서
비나 좀 니리두룩하지, 카는데
또출네 할배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곽중에 하늘에서 천둥 벼락이 치쌓티마는
및날 및칠이나 비가 흥거이 와서
동네 가뭄이 해결된 것이다
또출네 할배가 또 내띤다
- 흥 아모래도 영필이는 우리 동네로 봐서는
하늘에서 내리보낸 사람이구마는!
―「영필이 아재」 전문
“영필이 아재는 우리 동네 보배”인데 그 이유는 “일 잘하”기 때문이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이웃집의 외양간이 허물어져도 말끔하게 고쳐주고, 이웃집의 전기가 나가도 두꺼비집이나 소켓을 손봐서 얼른 고쳐준다. “순딕이네” 막내 아이가 토사곽란으로 위험한 적이 있었는데 삼리 리 밖에 있는 의원에 업고 가서 살리기도 했고, 장마로 도랑의 둑이 무너지자 동네 청년들을 불러 말짱하게 고쳐놓기도 했다.
이번 시집에서는 “영필이 아재”처럼 일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자전거 빵꾸 하나 때우는 데는/구신 소리를 듣는” “올개 사십 줄에 들어서는/노총각 김군”(「칠정자전거방에서 자전거 빵꾸 때우는 김군」), “글캐 얼매나 수술한 데로/이뿌게 꾸맸던지 수술한 데가/다리미 밑바닥매로 맨드리하이/맨살 겉더매”라고 대구에서 제일 인정받는 “곽외과 곽예순 원장”(「곽외과 곽예순 원장」), “근 20여 연간을/한 분도 빠짐없이” “아침 일곱 시마/종을 땡그랑거리미/여축없이 우리 집 앞을/지내”가는 두부장사 “손 영감”(「두부장사 손 영감」), “칠성파출소 건너편에/허름한 움막 하나 얽어놓고/비가 오나 눈이 오나/한결같이 헌 구두만/집고 있는 윤 노인”(「칠성파출소 건너편에서 맨날 구두만 집는 윤 노인」) 등이 그러하다.
시인이 내세우는 일 잘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손재주가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소명의식을 가진 이들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이롭게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다. 위의 작품에서 “영필이 아재”가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는 것은 손재주가 있고 일을 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필이 아재”는 일 잘하는 일꾼의 차원을 넘어 대구 사람들의 전형이 된다.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는 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로서 공동체 사회의 본보기인 것이다. 국소적인 공간을 채우면서도 전역적인 공간을 채우는 “영필이 아재” 같은 사람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늦은 밤
군고구마 장사하는 최 영감 가게
리야카의 카바이트 등불이
까불락까불락 해쌓능 거 보이끼네
인자아 카바이트 약이 다 됬는 갑다
카바이트 약이 다 됬다능 거는
군고구마 장사, 가게문 닫을 때가
됐다는 신호
아까부터 근처에서 어슬렁어슬렁
쭈삣쭈삣하던 사람들을 보고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이
‘아, 어서 오소, 어서 와
이거 식으마 파이라 카이’
카민서
최 영감이 고구마 꿉는 도라무깡 뛰끼를
열고, 꿉다가 남은 군고구마를 마카
꺼내고는
쭈우욱 둘러섰는 사람들한테
및 개썩 가린다
주변에 있는, 지때 때를 못 챙기고
있던 노숙하는 이, 고학생들에게
이를테마 공짜로 군고구마
재고(在庫) 떨이를 하는 거이다
꼭 이때만 되마 있는 행사다
- 잘 묵고 갑니데이
- 잘 묵고 갑니데이
모도들 고맙다는 인사가 째진다
까불락까뿔락 하던 카바이트 불이
갑재기 작아지미 까불까불
춤을 추쌓티이
불꽃이 확 한 분 크게 솟꿀라오리디이
그단새 포로소롬해지민서
탁 꺼졌다
갑빠천으로 된 덮개로 고구마 꿉는
도라무깡을 덮고는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이 질을 나선다
한쪽 다리를 짜족짜족 저는데,
짤룸거리민서 어둑어둑한 불빛 속으로
지워져 가는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의
뒷모습이 참 아름답구나!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 사람을 통해서 바라본 1950년대의 풍경」 전문
군고구마를 파는 “최 영감”은 가게의 문을 닫을 때가 되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쭈뼛쭈뼛하던 사람들을 부른다. 그리고 “‘아, 어서 오소, 어서 와/이거 식으마 파이라 카이/카민서’” 굽다가 남은 고구마를 모두 꺼내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준다. 고구마를 받는 사람들은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한 “노숙하는 이, 고학생” 등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 영감”에게 “잘 묵고 갑니데이”라고 진심어린 인사를 한다.
그들이 돌아서는 때가 되면 가게를 밝히던 “카바이트 불이/갑재기 작아지미 까불까불”하다가는 탁 꺼진다. 비로소 “최 영감”의 하루 장사가 끝난 것이다. 그리하여 도구들을 챙긴 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한쪽 다리를 짜족짜족” 전다.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제때 끼니를 못 챙긴 이들에게 군고구마를 나누어줄 정도로 인정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 영감”은 군고구마를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또한 고구마를 구워 파는 일은 추위도 눈비도 졸음도 이겨야 하므로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천직으로 여기고 열심히 일해 가족의 생계를 마련하고 나아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고 있다. 국소적인 공간과 전역적인 공간을 동시에 채우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번 시집에는 “군고구마 장사 최 영감” 같은 인물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얼굴이 곰보여서 호감이 안 가지만 “누구네 집에 초상났다 카마 남 먼저/쫓아”올 정도로 마을의 큰일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실 못둑에 혼자 사는/당달봉사 할매로, 집에만 틀어박혀 기시마 할매가 지엽을 끼라고 한 분씩 할매로 업고는 할매 바람/씨이 디린다고 못둑을 및 바꾸썩 휘이휘이 도는” “늠이”(「살짝곰보 늠이-1950년대의 풍경」), “마실 아아들이/헤염질치다가 또랑에/빠졌다 카마 남 먼저/쫓아오고/또 마실, 누구네 집,/노인네에/우환이 들었다 카던지/초상이라도 났다 카마/남 먼저 팔을/걷어부”치는 “춘식이”(「우죽바린 춘식이」), “수태골 안창에 사는 팔푸이 팔수란 늠은 힘은 장사지마는 사램이 좀 모지”래는데, “올개 팔순 난 홑어마이캉 같이 사는데 묵고 사는 거는 팔수란 늠이 동네 뒷산 꼴짜아서 나무를 해다가 장에 나가 팔아서 그 돈으로 양석꺼리로 쪼맨씩 장만”(「팔푸이 나뭇꾼 팔수」)하기에 나무하기 좋은 곳을 배려해주는 동네 사람들 등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황씨”는 “칠성시장”에서 “‘쌀됫박에 인심 났다’는/말이 나서” “니리 삼대째나/쌀장사”를 해왔지만 “얄팍한 속임수에/고마 결국은 쌀집 문”(「쌀집 황씨」)을 닫고 말았다. 자신의 이익만을 챙겨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들이 1950년대의 대구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1950년대를 부제로 단 작품이 16편이나 된다) 다시 주목된다.
3.
대구 칠성동
단칸방 시절
큼지막한 손아귀 둘이 포개져서 악수하는
그림 위로 글구도 선명한 UNKRA 유엔한국재건단의
커다란 원통형 분유통을 우리 집 쌀통으로 썼는데
도무지 쌀통이란 것이 쌀이나 보리가 그득할 때는
든중하고 묵직해서 한 됫박을 퍼내도 그만
한 말을 퍼내도 그만이어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용물이 줄어들어 속이 비게 되면
이 쌀통은 큰 울림의 장구처럼 되어 마침내
울기 시작한다
어느 늦은 봄날이었던가
신 새벽, 몰래 일어나신 엄마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쌀통을 긁자
쌀통이 버어억- 버어억 울었다
엄마가 숨 끊어진 다음의 자투리 같은
끓는 소리로 내뱉었다
“아이고 이 새끼들 다 우짜꼬”
“아이고 이 새끼들 다 우짜꼬”
나는 그때부터 새벽잠이 없어졌다
장구든 북이든 쌀통이든
속을 비우면 다 우는가 보다
―「점점 장구가 되어가던 쌀통- 엄마 2」 전문
1950년대를 살아간 대구 사람들의 형편 중 우선은 가난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를 겪느라 사람들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은 폐허로 변했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들은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극한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상실감과 절망감을 치유하기 어려웠고 경제적인 기반의 파멸로 배고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국소적인 공간의 상황만이 아니라 전역적인 공간의 상황이기도 했다.
“신 새벽, 몰래 일어나신 엄마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쌀통을 긁자/쌀통이 버어억- 버어억 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 역시 “아이고 이 새끼들 다 우짜꼬” 하며 울었다. 생존의 위협이 컸기에 시인은 그 소리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추모식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다가 한 북한 여인이 “바짝 마른 입술을 동그랗게/오무려 코 언저리께로/말아올리면서//간헐적으로 콧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는 순간 “세 번째 연거푸 옆집에/쌀 꾸러 가던” “엄마”(「어느 북한 여인― 사람을 통해 바라본 1950년대의 풍경」)를 떠올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찍이 과수가 돼서/어린 손자 머시마 하나/딜꼬 사”느라 힘들어 “고마 입이 살짝 돌아”간 “삐때기 할매”가 그 한 예이다. 자신이 장애인이면서도 주변 이웃에 좋은 일들을 베푸는 것은 물론 “새우전 장사”를 하면서 계를 만들어 “월사금 없어서 공부 못하는/어럽은 학생 아아들/월사금을 목돈으로 대에”(「새우젓장사 삐때기 째보 할매」)주기까지 한 것이다.
1950년대를 살아간 대구 사람들의 또 다른 형편 중 한 가지는 매카시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역시 국소적인 공간의 현상이면서 전역적인 공간의 현상이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그 시절 참 엄청시립기도/귀에 따까리가 앉을 정도로/마이 들어본 소리가 ‘뺄개이’ 라는 말이다/처음에는 ‘뺄개이’라는 말이/사람 얼굴이나 몸띠이가/뺄간 사람인 줄로 알았다//어데서 집 때리뿌샀다 카마/뺄개이 소행/어데서 사람 때리쥑있다 카마/뺄개이 소행/철뚝 가새 폭탄 터잤다 카마/뺄개이 소행/이룩쿰 나뿌고 못된 짓 했다 카마/마카 뺄개이 소행이라 카이//도무지 뺄간색이 와 그런 긴지/‘빨강’이 있이마/‘파랑’도 있기 매련인데/‘뺄개이’란 말은 있는데/‘패래이’란 말은 와 없는지//그때 선생님이나 어른들한테/물어봐도 선듯/대답을 못하능 기이 ‘뺄개이’에/대한 이바구였다”(「뺄개이- 사람을 통해서 바라본 1950년대의 풍경」 전문)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뺄개이”는 ‘빨갱이’의 대구 지역 방언인데, 항일유격대를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전체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매카시즘은 1950년대에 미국을 휩쓴 정치사상이다. 연방 상원의원인 조셉 메카시(Josep R. McCathy)는 1950년 공화당의 선거 지원 연설을 하면서 국무부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을 시작으로 매카시즘이 시작되었다. 메카시는 다른 도시에서의 연설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아갔는데, 이와 같은 발언에 언론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국민들도 동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간의 냉전, 동유럽의 공산주의화,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49년 소련의 원자탄 보유,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등을 보면서 공산주의에 위협을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매카시의 주장에 대한 진위 여부가 확인되기도 전에 연방 공무원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되거나 수감되었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은 이성을 되찾고 매카시의 광풍에 맞섰다. 1954년 CBS에서 방영된 시사 프로그램에서 매카시가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것이다. 매카시는 자신의 주장을 확대시켰지만 상원의 청문회에서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매카시즘은 미국의 정치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이다. 정부 수립 후 국회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숙청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 등을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지만 친일파들의 반격과 이승만 정권의 비협조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때 친일파 세력들이 내세운 방어 수단 내지 공격 전술이 매카시즘이었다. 다시 말해 친일파의 숙청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운 것이다. 남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통치를 받아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할 정도로 격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매카시즘은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매카시즘을 이용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더욱 공격적이었다. 그리하여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대에게 특별담화를 통해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고 혐의를 씌우기까지 한 것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도 “굵다란 만년필로 열심히 써쌓던 그 글귀들이 나중에 우리나라 언론사에 큰 획을 그은 바로 그 명논설들”의 당사자인 “최석채 대구매일신문 주필”(「최석채(崔錫采) 대구매일신문 주필」)을 소개했다. 그는 3․15부정선거를 규탄한 「호헌구국운동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라는 사설을 발표할 정도로 역사의식이 굳건했다. 시인은 그와 같은 인물이 국소적인 공간에는 물론 전역적인 공간에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시집은 과거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4.
서울로 대학 공부하라꼬 올리보낸 다리꺼래 방앗깐네 춘자가 무망간에 딜이닥쳤다. 이튿날 춘자가 삽짝을 나서는데 저거하는 꼬라지 좀 보래이, 뺄간 주디이는 지로 및 마리나 잡아 묵었는지 구찌베니로 입수부리에다가 마아당지신으로 칠갑을 해나았는데 내사마 숭시럽어서 못 바주겠더마는, 미군부대서 야매로만 나온다 카는 쥬시후레쉬 필라맨트 껌을 짝짝 씹어대는데 씹을 때 딱딱 소리를 내능 기 우짜마 흡씨, 이 좋은 동시 둘이가 따디미 방마이 뚜딜기는 소리망쿰이나 박자가 탁탁 맞아 더가데, 글케 걸음 자죽을 띠는데 머냐스카토를 입어서 그런지 양쪽 궁디이가 탁 데배져 나온 기, 걸을 때마즁 궁디이가 실쪽뺄쭉 삘쪽뺄쭉 해쌓능기 내사마 볼라 카이 눈깔이가 시그럽어 가주고 기상토 않하더마, 캐쌓아미, 동네 아지매들이 또 한마디씩 건넨다.
- 아이고 방앗간댁이 딸로 서울로 대학 유학 보내가주고 팡검사 사우로 볼끼라고 지이갈로 지기 쌓티마는 저 집구서어는 인자 대학은 커영 마카 떡쌀로 당가꾸마는
―「돌아온 春子(춘자)- 사람을 통해서 바라본 1950년대의 풍경」 전문
“뺄간 주디이는 지로 및 마리나 잡아 묵었는지 구찌베니로 입수부리에다가 마아당지신으로 칠갑을 해나았”고, “미군부대서 야매로만 나온다 카는 쥬시후레쉬 필라맨트 껌을 짝짝 씹어대”고, “머냐스카토를 입어서 그런지 양쪽 궁디이가 탁 데배져 나온” 모습이 한국전쟁 뒤 미국 문화를 중심으로 수입되어온 외래문화의 상황이다. 그리하여 “동네 아지매들이” “내사마 볼라 카이 눈깔이가 시그럽어 가주고 기상토 않하더마”라고 할 정도로 갈등을 일으켰다. 외래문화의 유입에 대해 전통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유입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와 같은 혼란을 겪은 사람들은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외래문화의 유입과 사회 구조의 변동으로 인해 가족주의가 약화되는 대신 개인주의가 강화되었는데, 그것이 서구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다시 말해 성숙한 주체성을 갖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약화된 가족주의와 결합되어 가족 단위 혹은 가족 중심의 이기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물질문화의 숭배와 맞물려 사회 전반에 급속하게 번졌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월등한 무기와 군사력을 동원한 서구 제국들 앞에서 조선의 유교문화가 얼마나 나약한지 여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선 사람들은 서구의 과학 기술을 지향하고자 실학사상과 동도서기를 제기하거나 개화를 주장했다. 그와 같은 경향은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전쟁의 전후에도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독립과 아울러 민족의 자강을 추구한 것이나 한국전쟁 전후로 부국강병만이 약소민족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인식한 것이 그 모습이다. 그와 같은 면을 부정할 것은 아니지만 자정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해 왜곡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시집에 등장한 대구의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전환기를 살아간 이들이다. 그들은 양반 관료가 지배하는 신분제나 유교 윤리가 지배하는 봉건제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삶을 영위했다.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도 변화는 환경이었다. 따라서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느라 사람들은 매우 힘들었는데,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념의 대립까지 격화되어 큰 고통을 겪었다.
상희구 시인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한 인물들을 기억하고 발굴해내었다. 인간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이 사회의 윤리가 되기를 희망하며 노래한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라는 사실은 인간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를 넘어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시인이 대구의 만인도로 그려낸 국소적인 공간과 전역적인 공간의 구성원들은 역사적이고 규범적인 표상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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