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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27일 자기연민에 빠진 이를 고쳐주신 예수님 요5:1-9절
요즘 ‘힐링’이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그만큼 상처가 많고, 피곤에 지쳐있다는 증거입니다. ‘힐링’이란 깨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참 좋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연과 이웃들과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가정이 갑자기 파산당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당하거나, 말과 행동으로 폭력을 당하면 자신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경쟁과 성공과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살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부모와 잘못된 제도와 가치관에 억압당하면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자기연민은 자신의 삶을 갉아먹고, 자꾸 몸집을 키웁니다. 유진 피터슨목사는 연민과 자기연민을 구별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 대한 연민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지만, 자기연민은 가장 천박한 감정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며 손을 쓸 수 있지만, 자기연민은 자신의 현실 인식을 심각하게 왜곡해 두 손과 두 발을 묶어버리는 감정의 병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과 치유의 필요성을 발견한고 힘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지만, 자기연민은 우주만물을 개인의 상처로 축소해 자신을 더 중요하다는 증거로 들이밀게 한다. 연민은 자비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아드레날린이지만 자기연민은 중독성이 있는 마약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자기연민의 부정적 효과를 잘 알기 때문에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자기연민은 도움은커녕 언제나 해가 될 뿐이다.”
자기 연민에 빠지면 자신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나는 세상을 정말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운이 안 따른다.” 자신을 자책합니다. “누구는 무 먹고 누구는 인삼 먹냐?”면서 세상을 원망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나를 미워하신 모양이다.”고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절망의 늪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양을 매매하는 양의 문이 있었는데 그 옆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따금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자비의 연못입니다. 베데스다에는 앞을 보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다리 아프다고 아우성 치고, 몸이 마비되어 간다고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곪은 상처에서 악취가 나는 이들이 뒤엉켜있었습니다. 모두가 불쌍한 이들이었지만 혼자만 살려고 달려가는 사람을 밀어서 넘어뜨리고, 앞서가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요즘의 대학병원의 응급실과 같았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연못이라고 불리었지만 1등만 살아남는 살벌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38년 된 환자’에게 다가갔습니다. 이십대에 병들었다면 회갑이 다 된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아이쿠, 병이 중해 보입니다.’고 말하면서 다가갑니다. 6절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환자가 병 낫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 왜 “네가 낫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을까요? 7절에서 38년 된 환자는 “물이 움직일 때 저를 은혜의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빨리 들어갑니다. 저는 이렇게 38년 동안이나 생고생만 하고 살고 있답니다.”고 대답합니다.
38년 된 환자의 말 속에는 심각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 보세요, 저 약삭빠른 놈들이 얌체 같이 불쌍한 나에게 양보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들어가지 뭐예요? ‘내가 아플 때 누구 하나 옆에서 있어주고, 손 잡아주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한, 두 번 애써보았으나 다 부질없는 짓이어요. 그래서 이것도 운명이거니 생각하고 38년 동안 이 자리에서 너부러져 될 대로 되라면서 자포자기했어요.’ ‘저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쓸모없는 인생이랍니다.’
그는 얼마나 외롭고 힘겹고, 고통스러웠으면 자기연민에 빠져 세상에 대한 불평과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 튀어나왔을까요?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누구 하나 눈길 한 번 주고, 손을 잡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쓸모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8년 된 환자는 “저에게는 아무도 없다.”면서 옆에 계신 주님도 보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오랫동안 앓고 무관심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지쳐 있습니다. 돈을 내고 병을 고치려고 이 병원 저 병원에 갔건만 짐짝처럼 취급당했을 것입니다. 때론 의사들이 실험 도구인양 여기저기 쑤시고 찔러댔을 것입니다. 힘 있고 배경 있는 사람들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새치기하는 냉정한 현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마저도 지쳐서 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혹한 것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저주받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터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온천지에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들만 보였습니다. 몸이 아프면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나쁘게 생각합니다. 가족들이 짜증을 내고, 사회의 통념으로 죄인 취급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굵은 쇠사슬로 자신을 옭아매고 꼼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실까요?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너는 실패자다, 너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자기연민에 빠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운명적으로 이렇게 태어났어.”, 그러니 “나의 앞날도 뻔해”, “이대로 살다가 죽겠노라”고 체념하도록 만듭니다.
나 자신을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자기연민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슬픔이든 기쁨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슬픔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면 모든 슬픔이 나에게 스나미처럼 덮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행복이나 기쁨, 희락, 평화 등의 좋은 것들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 부정적인 믿음은 더 큰 절망을 불러오고, 자신을 더 큰 슬픔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부정적 생각과 슬픔은 우리의 뇌를 강하게 자극합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슬픔과 고통과 절망이 폭탄의 파편처럼 날아와 우리의 영혼에 박혀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온 교우들이 관심과 사랑을 가져 주어서 마냥 좋았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믿음이 자라지 않았고 오히려 불평만 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자신만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확신도 사라졌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원망하는 소리만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저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버려두십니까!” “왜 저를 이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나요?” “왜, 저에게 나쁜 부모를 주셨습니까?” “제 슬픔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누구도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저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살 가치도 없습니다.”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그러다보니 자신을 세상에서 아주 형편없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불행이 없어질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외로움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만만한 남편에게 화를 냈습니다. 남편은 툭하면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통곡하는 아내를 보고 처음에는 불쌍하다고 생각하여 위로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콧노래도 한 두 번이지 시간이 흐르면서 지쳐서 포기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울면 “또 시작이다. 또 시작이야...어휴! 내가 이런 여잔 줄 모르고 결혼을 하다니.” 남편마저도 아내 때문에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부부의 사이는 회복이 어려운 지경까지 치달았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은 남편 때문에 서럽다고 울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목사님이 “네 스스로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듣고 가슴에 팍 꽂혔습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열등감에 빠져 자신을 하찮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로부터 시달려서 누구의 말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비난하고 무시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아 비난하고 무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 늘 외로워서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두려움을 달래려고 쇼핑을 하거나 술로 달랬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자기 연민의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대로 자신의 어린 시절 모든 상처를 하나씩 들춰내면서 치유해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오셔서 말을 거십니다. 내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가족이 없고, 내가 아파할 때 자비의 손길로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절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사랑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순히 따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왜 38년 환자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고 물었습니까?
예수님은 말 한 마디로 어떤 병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에게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지 물으시고, 동의를 구하십니다. 내가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바랄 때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막7장 24~30절에서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유대인은 이방인들을 더럽다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더러운 귀신마저 들었었습니다. 여인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겹겹이 쌓여 있지만 만사를 젖혀 두고 예수님에게 달려와서 넙죽 엎드렸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이런 일이 생기면 집안 망신이고 부끄러워서 못살겠다고 집을 나가버리거나 죽을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에게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주인이 자기 자녀들에게 배부르게 먹인 뒤에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그 여자를 개로 취급하면서 시험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인생이 힘들어 괴롭지만 용기를 내어 찾아왔는데, 예수님마저 나를 더러운 개로 취급을 한다면서, 예라! 잘 먹고 잘 살아라” 욕하고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고쳐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도와주세요.”라고 졸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있지만 누구나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서 손가락질 하는 것, 예수님께서 시험하고자 떠본 말도 주님께로 나아가서 딸을 살리려는 믿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맡길 때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날개 아래로 모으듯이 몇 번이나 자녀를 모으려고 했으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가 간절히 사모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두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해야겠다는 것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고, 원하는 선을 행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악을 행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선한 생각, 나쁜 생각, 믿음과 의심이 복잡하게 요동칩니다. 그래서 가수는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르게 악한 생각과 나쁜 습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것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어 새롭게 살려면 두렵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과거가 익숙하여 거기에 연연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하려면 ‘안 됩니다. 모르겠습니다. 짜증납니다.’ 저항하면서 지금까지 살았던 대로 살려고 하지요.
사단은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는 모습을 털어버리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하여 행복하게 살려면 “네가 할 수 있냐?” “너는 안 된다”고 유혹합니다. 38년 된 환자도 예수님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고 했을 때, “저는 다른 사람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저는 원래 이렇게 버림받았습니다.”고 자기연민에 빠져서 절망하면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래 운명적으로 이렇게 태어났어.”, 그러니 “나의 앞날도 뻔해”, “이대로 살다가 죽겠노라”고 체념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자기연민에 빠져 원망과 불평으로 38년 동안 세월만 낭비한 사람과 정면으로 대결하십니다. 그리고 8절에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사람에게 “네가 원하고자 할 때만 네가 일어설 수 있다. 그리고 네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한 자리에서 남을 탓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운명처럼 끌어안고 주님께서 하실 일을 부정하고 끈질기게 저항하는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고, 남을 탓하던 나쁜 습관이 배어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자를 뒤를 돌아보고 다시 주저앉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여 힘차게 행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곳을 믿고 일어나 힘차게 걸어가는 자만이 희망찬 내일이 그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 나쁜 환경, 실패한 과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의 모습을 잠시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래 모습으로 회복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네가 낫고 싶으냐? 물으십니다. 큰 소리로 “예!”라고 힘차게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단의 꾐에 속아왔습니까? 사단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38년 아니 영원히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평하는 자리에 달라붙어서 살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지 않고 가족과 성도를 미워하고, 저주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하여 주시려고 아들까지 포기하는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살았던 사슬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목숨을 걸고 주님께 소망을 둡시다.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던 자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던 어둠의 권세의 종노릇을 더 이상 즐기지 맙시다.
이제 나 자신을 나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마저도 믿지 못했던 절망의 자리를 찢어버리고 벌떡 일어납시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주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자연과 함께 행복을 누리면서 힘차게 달려가는 동서교회 성도님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