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백제사 게시판에 쓰려고 했는데...너무도 토론의 열기가 뜨거워서
여기다 쓰게 되었습니다. ^^ 눈이 좀 편해서요!
고국원왕이 근초고왕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은 매우 유명하죠.
근초고왕은 흔히 백제 최초의 전성기를 이룩한 영웅으로 인식되는데 반해
고국원왕은 전연의 모용황에게 대패를 해서 왕비와 왕모,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조공을 바친 비운의 왕으로 인식되죠.
특히 근초고왕에게 패사했다는 사실로 유명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고국원왕은 전연에게 패배해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백제를 공격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시기적으로 전연에게 대패를 한 뒤에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했다고 하죠.
개인적으로 당시 고구려가 북방에서 전연의 위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백제를 침공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어떤 분은 근초고왕이 삼한을 제패해서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고구려의 종주권을
위협하자 공격했다고 하더군요.
그 분은 고구려가 원래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하는 종주국인데 근초고왕이
삼한을 제패하면서 고구려의 종주권을 무너뜨리자...고국원왕이 침공한 거라고 했죠.
첫댓글 [관련논문]
고구려의 國難과 故國原王像 /李道學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23, 2006.6, 9-28 (20 pages)
백제의 평양성 공격로와 마식령산맥 관방체계 구축 /문안식 한국고대사탐구학회, 한국고대사탐구 22, 2016.4, 145-183
여휘님이 잘 답변해 주시겠지만 이도학의 논문을 보니,
말씀하신 백제침공의 직접적인 원인은 재위 25년~39년의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공백기간 동안 고구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 치양, 수곡성, 평양성 전투의 양상을 보면, 고구려군 2만, 백제군 3만 등의 기록이 나오는데 고국원왕 치세의 고구려군은 종심이 짧은 백제에 비해 남부 전선의 집중도가 떨어졌고, 백제군사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근초고왕 백제의 종주권 때문에,,, 하는 말들은 좀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구려 침공군이 패하면서 근초고왕의 우위가 일시적으로 돋보였다"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가 봅니다.
문안식의 논문에는 <속일본기>를 인용하여 "당시 대방지역의 호족들은 반독립적인 자치를 이룬 상태에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였다."는 상황으로 미루어, 일종의 세력공백상태인 평양남부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했던가 봅니다.
고국원왕은 342년의 환도성 함락 이후 요동 진출을 포기하고 대외 진출 전략을 南進으로 전환하였다.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할 무렵 백제 역시 예성강을 넘어 대방지역으로 진출하는 등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백제의 대방지역 진출은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영향력 확대에 맞서 이루어졌다. (문안식 148쪽)
위 질문과 관련해서 <고구려 남진정책의 함의> 역시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네요.
아래 논문 합하여 시간 나는 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덕분에 공부 했습니다.
5世紀 前後 國際情勢와 高句麗 平壤遷都의 배경 /장종진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61, 2011.3, 221-260 (40 pages)
박현숙의 논문 <3~4세기 백제의 대외관계와 왕권의 추이> 146쪽에는,
"350년대부터 대방 지역의 동향에 변화가 보이게 된다. 고구려가 전연과의 오랜 대립을 끝내고, 355년 책봉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는 남쪽의 대방 지역으로 눈을 돌려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369년 이전부터 황해도 남부에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고구려의 정세 변화 속에서 백제로 남하하는 대방군의 유민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백제로 이주한 대방 유민들은 백제에 중국의 문물과 기술을 전파해 주었으며, 이후 백제의 남조교섭에서 활약하게 된다."
위의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고국원왕 25~39년은 대방의 고토를 향한 공격적인 남진이 이루어졌고, 이에 대방군유민이 비교적 온건한 백제로 이주하는 와중에 세력공백지역에서 양국간에 충돌이 벌어졌지 않나 생각됩니다.
---- 여휘님 도와줘요...
다 정리하셔놓고...엄살을 부리시는 겁니까? ^^;; ㅎㅎ
여기서 한가지만 언급하자면, 당시 고구려의 정책이 황해도 일대의 영역화인 점은 맞지만, 이를 <남진>이라는 한마디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고구려는 이미 각 방면에 대한 군사정책이 있었으며 그 군사정책마다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국경선이 전진하였다는 단순 의미로만 본다면 남진이 적절하겠으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남진정책은 다른 방면에 대한 정책의 회수(?)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 용어를 잘 써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추후 박사논문에서 용어 정리는 한번 해야 할테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써야 한다...정도는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솔직히 논문이 아니면 크게 중요하지도 않죠)
과연 그렇군요. 이후 광개토대왕, 장수왕대의 전략적 선택과 비교하면 용어 사용이 부적절해 보입니다. 북연과의 요동쟁패에 비하면 영역규모 면에서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다만, 이 당시 無主의 중원 군현으로의 진격은 고구려, 백제 양국에게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획득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의 質에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저 시기에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얼마나 험난한 역사적 맥락을 거쳐왔는지 새삼 실감합니다.
@꼬비에뚜 이번에 그와 관련된 논문을 투고했는데, 너무 방대한 내용(4개 전선의 시기별 변화양상)을 한 논문에 담으려고 하다 보니, 심사 과정에서 많은 지적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남부전선만 총괄적으로 정리해 다시 투고했는데 결과가 어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연말만 되면 항상 논문 작성에 조급함이 생기는건 어쩔수 없는듯 합니다. 쩝). 암튼, 어떤 국가의 <주력>이 투입되는 전선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만, 국가의 군사정책이 언제나 <주력>만 바라보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접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시기의 특정 정책을 '서진' 혹은 '서방정책', '남진' 혹은 '남방정책'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꼬비에뚜 저희 연구소장님이 저를 보면서 항상 말씀하시죠(전공=청동기). "고구려 애들은 항상 너무 거칠다면서, 맨날 남에꺼 뺏어먹고 약탈하고, 지네꺼 없으니깐 훔치고 그런다"고요. (저를 보면 고구려틱한지 종종 그러십니다 ㅎㅎ) 암튼 그럼 전 이렇게 말씀드리죠. "그렇게 볼품없는 좀도둑으로 시작한 나라가 700년이 가고, 수-당을 거꾸러 뜨리는 것 또한 대단한 것 같습니다." 라고요. 이번에도 서안 답사를 갔다 오면서 북조-수-당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중원왕조의 위력을 느끼고 왔지만, 역시나 그런 애들과 맞짱 뜬 고구려의 매력이 한층 부각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고구려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이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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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그게 고민이었습니다. 백제는 분명 신라에 사신을 2번 보냈습니다. 366년과 368년. 신라측 반응을 보면 적어도 367년에는 근초고왕의 사신이 <백제 사신>으로 대표될 정도로 백제와 근초고왕의 위상이 격상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왜 369년에 내려왔을까요?? 고국원태왕 시절 전연에 대한 고구려의 정책을 보면 조심스러운 측면이 많아 366~368년 사이에 백제에서 벌어진 어떤 사태를 관망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2만 정도의 병력을 왕이 직접 이끌고 내려왔다면, 이는 다급함의 반증입니다. 당시 5~6만의 원정군을 별도로 운용 가능했던 고구려가 백제 정벌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방 일대에 대한
국지적인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급하게 내려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조심스럽게 소설을 써 보자면, 고국원태왕은 근초고왕의 자립위왕이라든가, 백제의 지위 격상 등은 예의주시하였지만 그 자체에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4세기 한성백제의 고고학적 범위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반도 중부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고구려와 1대1로 싸워 이길 수준은 아니었으니깐요. 그리고 고구려가 대대로 백제와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던 <대방> 일대에 대해서만은 달랐을 것입니다. <대방> 일대에는 대방군(국)으
로 대표되는 토착+외래계 집단이 있었고, 말갈로 대표되는 완충지의 재지계 집단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향방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느냐는 고구려에게도, 백제에게도 큰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4~5세기 이후 고구려가 강원도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했음에도 그 땅에는 성곽, 취락, 고분군(대규모) 등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는 군사적인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들로 그 넓은 땅을 통치했다는 의미인데, 그렇게 본다면 고국원태왕 시절 고구려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일순간에 그들이 親백제화 된다면?? 고구려 남부전선에 크나큰 전략적 공백이 생겨났을 겁니다. 아마 고구려는 그걸 관망하다가 급하게 움직인게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