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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원문보기 글쓴이: peater
2013년 7월 27일 토요일 [(녹) 제16주간 토연중 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 모세는 주님에게서 받은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준 뒤 이를 잘 따르겠다는 백성의 약속을 듣고 계약의 예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자유의 백성이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밀밭에 비유하신다. 이 밭에는 가라지도 섞여 있다. 열매를 맺기 전에 가라지를 거두면 밀까지 뽑힐 수 있다. 그래서 밀밭의 주인은 인내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추수 때까지 이 세상의 죄악을 그대로 두신다(복음).
<이는 주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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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의 밀밭에 그의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려 버립니다. 밀이 한창 자라기 전에는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인지 몰라서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립니다.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가 확실히 구별되면 그때 뽑아 버릴 생각입니다. 사제품을 받고 꼭 10년이 되던 날, 지난 사제 생활을 가만히 성찰해 보았더니 ‘밀’도 있었고 ‘가라지’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께서는 ‘밀’의 선물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반면, 순수했던 열정이 다소 식어 가고, 좋지 않은 습관들이 쌓여 가며, 기도를 소홀히 하는 면에서는 ‘가라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찰 뒤에 성체 조배를 하는데, 하느님께서 제 가슴속 깊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모두 나에게 맡겨라. 농부는 네가 아니라 나다. 너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자라기만 하여라. 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나는 그대로 두겠다. 그렇다고 네 밭이 밀밭에서 가라지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만 맡기면 된다. 내가 농부이다.’ 사제의 길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사제의 길뿐 아니라 부부의 길에도, 젊은이들의 길에도, 아니 모든 삶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농부이신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에 따르십시오. 밀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양분이 그분께 있고, 가라지의 성장을 가로막을 제초제 또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
복된 죄(Felix culpa) “밀농사에 도움이 안 되는 ‘가라지’들을 보는 족족 솎아낼까요?”라는 질문에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와 무서운 분이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빨리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박’으로, ‘보란 듯이’ 크게 손 좀 봐주겠다는 의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였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말이지 큰 뜻, 엄청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청소년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한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 없이 공격하여 하루 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램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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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다해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가라지의 유용성
벼를 심고 꾸준히 계속 해 주어야 하는 것이 ‘피사리’입니다. 벼와 함께 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피’라 부릅니다. 그것을 꾸준히 뽑아주지 않으면 벼가 먹어야 할 양분을 그것들이 다 빨아먹습니다. 그것들은 워낙 양분을 많이 먹어서 나중에 자라고 나면 벼들보다 훨씬 크게 자랍니다.
그러나 크게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때가 이미 늦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주 크게 자라기 이전에는 피와 벼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피사리 해 놓은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벼를 뽑아 놓은 것인지 피를 뽑아 놓은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저도 피사리를 여러 번 해 보았는데, 아무리 주위를 해도 뽑아놓고 보면 벼가 몇 개씩 함께 뽑혀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때는 피를 뽑으면 옆에 있던 벼까지 함께 딸려 올라오기도 합니다. 논은 질고 뿌리가 서로 엉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피를 뽑다가 멀쩡한 벼를 뽑아버린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것을 보다 못한 저의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넌 피사리 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밀과 함께 자라는 녀석이 가라지입니다. 일꾼들이 가라지를 뽑겠다고 할 때 주인은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자칫 밀까지 상처를 주거나 뽑아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더라도 멀쩡한 밀 하나가 뽑히는 아픔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해줍니다.
“넌 피사리 하지 마라!”
사실 영혼에게 있어서는 악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제가 로마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이상한 모기에게 팔뚝을 여러 방 물렸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모기 종류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이 아플 정도로 부었고 그것이 가라앉은 이후에도 진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진물은 거의 2년 동안 나왔고 저는 여름에도 짧은 팔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찮은 모기에게 물려도 그렇게 고생하는 이유는 제 안에 그것에 대한 항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렸을 때 한국에선 그런 모기에 물려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터키에 갔더니 수도에서 나오는 식수로 양치질을 해도 사람들이 다 바이러스 때문에 설사를 하고 배앓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은 물에 들어있는 그 바이러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물을 어려서부터 마셔서 그들에겐 그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매우 깨끗한 공기에서 크기 때문에 아토피나 기관지 문제 등의 면역력이 매우 약하다고 합니다. 이는 온실 속에서만 자란 꽃은 야생에서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방 주사란 것이 그 몸속에 병균을 넣어서 항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어느 정도의 병균을 접하는 것은 나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도 태어날 때부터 원죄에 물들어 약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엔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담과 하와와 같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겪었던 과정을 이 세상에서 미리 겪고 더 완전해져서 하늘나라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악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위해 일부러 악에 접근하는 것은 교만이요 그것 자체가 죄이겠지만,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악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고 또 유익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너무 힘들고 안 좋은 일만 일어나서, 하느님은 안 계시다고 합니다. 선하신 분이 어떻게 나쁜 것을 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위하는 부모라면 공기 청정기만 돌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보통 공기와도 접촉하게 해야 하는 것처럼, 온실 속에서만 키우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히려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주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도 이런 면에서 다른 제자들에게 유익했던 사도였습니다. 좋은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다면 어떻게 인내와 용서와 기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라지는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 할 것입니다.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더 강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면 됩니다. 그것이 가라지를 통해 밀에게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聖 막시미아노(7인의 성인)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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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