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1986~1957)】 "세상의 통치자 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의 벽화에 대해서도 들어봤을 것이다. 멕시코 출신의 젊은 예술가 인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는 1908년 22살에 리베라는 멕시코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유럽의 생활 속에서 화가로서 영감을 받았다. 그가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 그의 개인적, 직업적 삶의 다음 페이지가 막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벽화와 프레스코 화에 기대기 시작했다. 곧 Rivera는 당시 멕시코 교육부 장관 인 José Vasconcelos가 계획 한 정부 후원 멕시코 벽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되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작가로서의 경력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경력에 대한 몇 가지 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멕시코 시티의 공교육 사무국의 벽화를 위해 그는 124 개의 다른 프레스코 화를 만들려고했다. 그래서 그는 1922년부터 1928년까지 그림을 그렸다.
같은 시기에 디에고 리베라의 삶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이 시작되었다. 1922 년 가을, 리베라는 기술 노동자, 화가 및 조각가의 혁명적 연합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그해 말, 그는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했다. 예술가로서 그는 사회적으로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의 공산주의 정치적 성향을 표현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장려하고 예술의 혁명적 성격을 믿었다. 평생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는 소련과도 강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글쎄, 적어도 처음에는. 나중에 미국의 커미셔너와 후원자가 벽화의 일부를 변경하도록 요청했을 때 몇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디에고 리베라는 벽화를 바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하지 않았다.
1922년에서 1953년 사이에 리베라는 멕시코 전역에 벽화를 그렸으며 미국에서 몇 가지 중요한 벽화로 그의 흔적을 남겼다. 샌프란시스코, 디트로이트, 뉴욕시에서 볼 수 있다. 멕시코와 미국 전역의 공공 건물 벽은 뛰어난 작품을 만들면서 그의 작품의 캔버스 역할을 했다. 리베라 덕분에 공공 예술의 개념이 재창조되었고,이 특별한 예술 형식은 미국과 멕시코 예술 모두에서 현대 미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시 한 번 인식되었다. 불행히도 모든 디에고 리베라 그림이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대중의 눈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일부는 그가 뉴욕 현대 미술관을 위해 그린 80개의 휴대용 프레스코 벽 작품과 보관되거나 확산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Change the World or Go Home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an Francisco Art Institute)의 멕시코 예술가 알레한드로 알만자 페레다(Alejandro Almanza Pereda)의 설치 작품 이름이다. 설치의 특정 부분은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작품 인 프레스코 화 만들기 (The Making of a Fresco)가 그 뒤에있는 도시 건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벽화 중 하나는 현재 다른 멕시코 예술가의 공연의 일환으로 바로 앞에 놓인 금속 구조물 뒤에 숨겨져 있다. 보도에 따르면 알레한드로 알만자 페레다 (Alejandro Almanza Pereda) 는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와 비교할 때 다른 메시코 예술가들이 무시 당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빛나게하고 싶었지만 리베라의 벽화 앞에 건축물을 놓는 것은 리베라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알레한드로도 그가 원하는 관심을 받았지만 그가 한 방식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은 여전히 그 금속 구조물의 그늘에 있으며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은 그것을 완전히 즐길 기회가 없다.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와 같은 성공한 예술가와 함께, 그의 작품 중 어느 것이 다른 작품보다 더 중요한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벽화 중 일부는 확실히 눈에 띄었고 일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벽화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들 각각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위 그림의 제목은 "우주의 통지자 Man Controller of the Universe" 다. 이 그림은 과학과 산업화, 공산주의, 자본주의라는 힘과 헤게모니, 이념을 강화하거나 싸우는 존재 "교차로에서 경쟁" 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리베라의 전도된 생각과 명분을 그린 그림 속에서 중앙에 배치된 프로펠러 몸통에 둘러쌓인 영웅적인 노동자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혼과 파괴되고 사탄에 무릎꿇은 그의 영혼은 파괴적이고 엽기적인 행각에 매몰되어 갔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년)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멕시코 민중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으로 유명해졌다. 생전에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정도로 여겨졌으나 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재조명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며 민족정신 고취와 문화적 계몽에 애를 썼고 멕시코 민중의 토속 예술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프리다의 사후, 멕시코 정부는 그의 모든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다.
사람들에게 망상과 착각이야말로 인류에게 기쁨이고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친 것이 미친놈한테 더 없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슬픔과 분노를 버리는데 쓸모있을 뿐 망상과 환영에 빠져 나에게 탐익한 약한자에 대한 복수에 대해서라면 아니다. 그것은 복수 대신에 일종의 일탈, 회피, 방관적 긍정이라고나 할까, 고기도 막어봐야 맛을 알고 씹어야 복수도 해 본자가잔인하게 해야지 아픔이 더 한 것. 하지만 상대에게 내 고통을 앙갚음하는 복수는 청량하나 왠지 더럽게 뒷맛이 씁쓸하다. 그보다는 상대를 뛰어넘은 후에 자비를 베풀어 용서하는 것이 더 통쾌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삶과 미술의 거의 모든 전선에서 누구보다 시니컬하게 싸웠던 혁명적 미술가 멕시코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년)는 그녀의 초현실 작품만큼 피에 접은 복수를 보여주었다. 이 세상을 향하여,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표현은 아마도 그녀를 미화하기 위하여 그냥 던져버린 말이 아닐까. 1907년 여름,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쇠약해지는 천형을 겪었다. 독일계였던 아버지 기예르모는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며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는 딸을 멕시코 최고의 명문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괴가 그녀를 덮친다. 소아마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다.
1925년 9월의 어느 날, 그녀가 타고 있던 버스가 고장 난 전기 트롤리와 충돌하면서 순간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기다란 쇠막대가 복부와 성기(性器)를 뚫고 허벅지를 통해 나왔고 척추와 갈비뼈 그리고 골반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 역시 부서졌고 오른발은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의사들은 모두 그녀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몇 주가 지나서 그녀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몸은 견인기와 석고 깁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근 아홉 달 동안을 꼼짝없이 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했다. 그녀는 통증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지루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과 싸우며 깨닫게 된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금속 보호대를 차고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인체 안전장치를 설치해주었다. 그녀는 하늘에 매단 인경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바라보고 손만 겨우 움직여 평생 55점이 넘는 자화상(自畵像)을 그렸다. 이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녀가 제일 잘 아는 주제는 'I AM'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프리다는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디에고를 사랑했다. 디에고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한 상태에서 프리다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 후 여러 작품활동을 함께했다. 하지만 불치병 수준이었던 디에고의 여성 편력은 그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은 두 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을 반복했다. |
프리다는 1928년 그녀는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년)를 찾아간다. 왕궁을 위한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는 발정난 코뿔소처럼 갑자기 나타난 예쁜 얼굴의 소녀에게 탐익하고 말았다. 디에고는 그림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며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유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태도는 얼핏 봐도 남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자신감이 있었고, 눈동자는 야릇한 빛을 뿜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귀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꽤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프리다의 첫인상에 대한 디에고의 회상이다. 멕시코 국민화가였던 디에고는 애정에 미친자였다. 그는 이미 불륜(不倫)으로 인해 한 번의 이혼과 두 번째 결혼을 한 상태였다. 디에고는 늘 여러 명의 여자와 동시에 연애를 했다. 하지만 프리다에게는 젊고 매력적인데다가 특별한 매력이 있었고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적 신념을 공유(共有)하며 더욱 깊어졌다. 더우기 디에고 보다 스물한살이나 적은 젊고 탁원한 여자가 볼품 없는 나를 좋아하다니, 프리다에 미치고 탐익한 그는 다른 여자들을 모두 정리한 후 프리다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청혼을 받은 프리다는 기가 막히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1929년 두 사람은 헝크러진 결혼식을 올렸다. 스물 둘 밖에 안 된 딸과 마흔 세 살의 바람둥이와의 결혼을 프리다의 부모가 반겼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도덕적 신체적 판단보다 더 중요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프리다는 죽을 때까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고 디에고는 그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이 껄쩍찌근한 결혼에 대하여 자신들의 딸을 보살펴줄 수 있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서 다행이다 싶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프리다는 짧은 생애 동안에 무려 서른 번이 넘는 외과수술을 받았다.
프리다의 아버지는 결혼 전 디에고 리베라에게 부탁인지 경고인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명심하게, 그 애는 악마야.”
디에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디에고는 유명한 허풍쟁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폭파 전문가이고 멕시코 전통 모자 솜브레로에 폭탄을 숨겨서 독재자 포르피리오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 젊은 시절엔 의대생들의 집단 실험에 참여해서 인육(人肉)을 먹은 적도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 이로 인해 ‘식인귀(食人鬼)’라는 별명이 붙었다.
‘악마와 식인귀의 결혼’이라니 기가 막히고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하지만 둘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놀렸다. 프리다의 친구들은 특히나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친구들은 “디에고는 너무 뚱뚱하고 더럽고 못 생겼다”고 대놓고 흉을 봤다. 그럴 때마다 프리다는 침착하게 말했다.
“디에고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다정하고 지혜로운 남자야! 나는 그를 깨끗이 목욕시키고 씻겨줄 거야.”
결혼 후, 프리다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140kg에 육박하는 남편 디에고를 어린이용 장난감으로 가득 채운 욕조에 앉혀서 직접 때를 밀어주었다. 프리다의 목욕 수발을 받을 때면 디에고는 원기를 회복하는 기분이 들었다. 프리다는 이것을 일종의 숭고하고 경건한 의식으로 여겼다.
결혼 후 몇 해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다. 디에고는 멕시코 토착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프리다는 테후안테펙 지역 여자들의 화려한 의상을 즐겨 입었다. 독특한 수와 장식이 놓인 블라우스에 긴 벨벳 스커트를 입고 금화로 만든 목걸이로 치장하는 이 스타일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그림에서도 손을 놓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리베라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프리다는 임신에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골반에 입은 손상 때문에 유산(遺産)을 반복했다. 디에고는 출산이 그녀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이자고 설득했으나 프리다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디에고의 아이를 낳는 것은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는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개수의 인형들을 모았고 강아지와 원숭이를 비롯해 비둘기, 물수리, 칠면조, 앵무새 등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길렀다.
하지만 프리다가 모성애적(母性愛的) 갈망과 싸우는 와중 디에고의 바람기는 봉인 해제되고 있었다. 사실 식인귀라는 그의 별명은 단순히 인육을 먹었다는 괴상한 무용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잡아먹는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디에고는 정조(貞操)를 지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남자였다.
1935년 고삐가 풀린 디에고는 결국 프리다가 배 속의 아이를 잃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동침(同寢)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친놈하고 살다 같이 미친것일까? 프리다는 참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떠났지만 결국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대신 각자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분노에 찬 프리다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과도 다양한 만남을 가졌다. 그녀의 일탈(?)은 디에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디에고를 사로잡는 섹스 중독의 실체를 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작품 활동에도 열정을 불살랐다. 선혈이 낭자한, 고통을 표출하는 기존의 거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차 정제되고 숙련되기 시작했다. 프리다가 창조한 낯선 세계는 세계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뉴욕과 파리의 갤러리에 잇달아 초청을 받은 그녀는 가는 곳마다 칭송을 받게 된다.
1938년 프리다는 멕시코시티대학 갤러리 그룹전에 참가한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12년째 되는 해였다. 이 전시 후 루브르 박물관이 그녀의 자화상을 구입했고 그녀는 루브르에 입성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작가가 된다. 이어 르누와 콜 갤러리의 멕시코전을 통해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을 받게 된다.
프리다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디에고는 그녀가 자신의 정치적 영웅으로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사랑을 나눈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디에고는 화를 누르지 못해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1939년 그녀가 멕시코에 돌아온 직후 이혼 수속을 밟게 된다. 적어도 황제 의식으로 세상의 통치자로 프리다 칼로를 짓밟고 군림했던 그에게서 아내이자 뮤즈였던 그이가 변절했을때 디에고의 자존감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깨져버렸던 것이다.
〈가시나무 목걸이와 벌새가 그려진 자화상〉(1940) 프리다는 여섯 살에 소아마비,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 30여 차례의 수술, 남편의 끝없는 불륜과 세 차례의 유산 등 자신의 삶에 반복된 고통과 절망을 오브제로 삼았다. 거울 속의 자신을 관찰하며 고통을 이겨냈고, 자신과 관련된 소재들을 즐겨 그렸는데 143점의 작품 중 무려 55점이 자화상이다. |
프리다는 예상치 못한 못된 디에고의 찌질한 이혼 요구로 또다시 충격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가시나무 목걸이와 벌새가 그려진 자화상〉에는 당시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처럼 생긴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 칼처럼 씌워져 있고 벌새 모양의 검은 펜던트가 암울하게 그려져 있다. 벌새는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아즈텍 전사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계속 만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프리다는 화가로서의 성공과 함께 재정적인 독립을 꿈꾸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프리다의 홀로서기는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잊고 있던 트로츠키가 그녀의 인생에 다시 등장한다.
1940년 8월 어느 날, 트로츠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파리의 공산당 서클을 돌아다니던 프리다는 즉시 경찰에 끌려가 열두 시간이나 심문을 당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주니어 칼리지의 벽화를 작업 중이던 디에고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종용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프리다는 짐을 꾸려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그 해 12월 8일, 두 사람은 이혼한 지 1년 만에 재혼했다.
〈부서진 기둥〉(1944) 척추 수술을 받은 직후에 그린 자화상. 교통사고로 거의 으스러지다시피 한 그의 몸에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유리 조각처럼 박혀 있었다. 이 작품은 황량한 벌판을 배경 삼아 자신이 외로운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육체의 고통과 무너진 여성성을 형상화했다. |
프리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 입원해 기력을 회복했고, 두 번째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그에게 편지를 썼다.
“디에고, 내 사랑, 프레스코화를 끝내면 티격태격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 오직 서로 사랑하기로 한 것만 기억할 거예요.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프리다에게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는 걸까. 그럴 리가. 디에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다른 여자의 침대에 뛰어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그의 바람기는 거의 불치병 수준이었다. 게다가 재혼 후 그는 프리다에게 자신의 불륜관계를 숨기기는커녕 대놓고 알렸다. 프리다 역시 그의 여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질투를 숨기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프리다는 디에고가 특히 좋아하는 여자를 가리켜 “커다랗고 못 생긴 젖통을 가지고 있다”고 비아냥거렸고 디에고는 “그 여자의 가슴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항변했다. 프리다는 “그건 당신이 그 여자가 누워 있을 때만 봐서 그렇다”고 쏘아붙였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바람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있나, 그녀는 “나의 인생에서 큰 사고가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교통사고고 나머지 한 번은 디에고와의 결혼”이라고 말했다.
멕시코로 돌아온 프리다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녀는 척추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수많은 요법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1944년에 그린 〈부서진 기둥〉에는 벌거벗은 채로 의료용 코르셋을 착용한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살갗에 박혀 있는 여러 개의 못과 척추 대신 자리한 부서진 기둥들 그리고 뺨에 희미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이 그녀의 신체적 고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Viva la vida : 인생이여 만세〉(1954) 그가 죽기 8일 전에 완성한 작품. Viva la vida는 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이다. 프리다는 투병 중에도 공산주의 활동에 나서다 폐렴의 재발로 인한 폐경색으로 1954년 7월 13일에 사망했다. 그는 “나의 퇴장이 기쁨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품위 있는 유언을 남겼다. |
1953년 드디어 멕시코의 유명 갤러리에서 그녀에게 첫 여성 단독 전시회를 제안한다. 그때는 이미 전시회에 참석하는 것도 힘들 만큼 그녀의 병세가 깊어진 후였다. 하지만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급차를 타고 팬들을 만나러 갔다. 그해 말에는 오른쪽 다리가 감염되어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했고 깊은 절망에 빠진 그녀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54년 여름, 프리다는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간섭에 반대’하는 공산당 집회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디에고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현장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혁명의 영웅’ 이라며 환호했다.
열정의 대가는 너무 컸다. 그날 외출로 폐렴이 재발한 프리다는 결국 열흘 뒤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가 죽기 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 〈Viva la vida〉는 스페인어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이다. 그즈음 그녀는 일기장에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고 적었다. 그리고 “나의 퇴장이 기쁨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품위 있는 유언을 남겼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고 나서 더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1955년 그는 그림 상인인 에마와 결혼했으나 곧 다른 여자와 불륜에 빠졌고 그의 병적(病的)인 바람기는 1957년에 그가 죽어서야 끝이 났다.
1940년대 후반 디에고는 자신의 영광을 기릴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아즈텍 사원들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해서 지은 이곳에는 희생 제물의 뼈를 담아두는 방을 재현한 공간이 있었고 디에고는 여기에 자신과 프리다의 재를 보관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디에고는 건물이 채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는 프리다의 재와 섞이지 않았다. 디에고는 멕시코시티 ‘국립 화가의 전당’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도 자신의 작품보다 ‘디에고의 아내’로 더 유명했던 프리다 칼로.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작품은 점점 잊혀 갔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부터 갑자기 그녀의 존재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프리다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그녀의 전기영화에서 주연을 맡기 위해 마돈나, 셀마 헤이엑, 제니퍼 로페즈가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셀마 헤이엑이 그 역할을 따냈고 2002년 영화가 개봉하자 대중은 프리다에게 열광했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프리다 칼로의 난봉꾼 남편’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멕시코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여성들에게 말이다. 디에고는 상상이나 했을까. 해바라기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 작고 연약한 여인이 인간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본인을 넘어설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디에고가 끊임없이 프리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어쩌면 그녀는 천재로서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디에고를 만나 탈선(脫線)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채 전복되어버린 것일지도. 그녀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예술적 발전을 이룩했을지 궁금하다. 기어코 그녀가 도착한 곳에는 과연 어떤 그림이 펼쳐져 있었을까?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