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68. 데바난단(P. D. Devanandan)
우리는 데바난단과 함께 세속국가와 현대적인 힌두교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데바난단은 현대 힌두교와 세속적 사고에 대한 다양한 처지를 이해하고 힌두교 친구들과 동시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폴 데이비드 데바난단은 1901년 아버지가 안수 받은 목회자로 일하던 마드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드라스와 트리치노폴리, 하이데라바드에 공부했고, 자프나, 실론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마드라스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925년에 그는 미국에 방문하면서 자신을 비서로 맞아들인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 K. T. 폴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7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캘리포니아의 태평양종교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나중에 예일대학교에서 1950년 “마야의 개념”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에 런던원탁회의에 참여했던 폴은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간디의 친구로 데바난단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뱅갈로르의 연합신학대학교에서 17년간 철학과 종교역사를 가르쳤다.
YMCA에서 얼마 동안 봉사한 후. 1956년에 뱅갈로르에 새로 설립된 ‘기독교 종교와 사회 연구소’(Christian Institute for the Study of Religion and Society)의 소장으로 일했다.
1962년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그 직책을 감당했다.
데바난단은 기독교 사상가이자 교회 지도자로서 인도와 해외에서 널리 알려져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사업과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당시 유행했던 신학적 자유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헨드릭 크래머와 칼 바르트에게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기초를 발견했다.
그는 나중에 크래머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지만, 이런 신학자들의 많은 흔적은 전적인 타자이면서도 인격적인 분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그의 저술들 속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생각하는 인도 기독교’의 저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모든 비기독교적인 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시도라는 바르트주의적인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는 바르트와 크래머가 ‘계시는 인간 세상에 대한, 인간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희생하면서,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현대 인도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상세한 연구를 통해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바난단에게서는 브라흐마반답의 삼위일체와 첸치아가 ‘새로운 창조’를 설명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 신앙의 기본교리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는 것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는 신조의 기본적인 확언들에 대해서 정통적이며, 성경과 속죄와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 가운데서 특별히 ‘인도적’인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기독교 메시지를 힌두교에 적용하기 보다는 힌두교의 내면적 적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힌두교 친구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힌두교는 스스로의 정통성과 현대세속국가의 간극을 연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가운데서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재고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개혁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힌두 신학이 현대국가의 생활에 필요한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는데 실패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1. 인격성에서 아트만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자유롭고 발전적인 사고들에 반하여 작용한다.
2. 창조에서 힌두교는 물질세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함으로 삶의 표준을 지원하지 못한다.
3. 역사에서 힌두교는 그 목적과 계획의 아이디어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4. 사회에서 힌두교는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변혁하는 공동체를 예견하지 못한다.
<인도기독교사상>에서 (로빈 보이드 저,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