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덕이 #8 (바다낚시)
해 마다 이맘 때
초가을 접어들 즈음의 부산 앞바다
짙은 하늘색에 노란 물감 몇 방울 떨어뜨린 듯
높고 깊은 가을 하늘만큼 투명하고 마알간
에메랄드빛으로 변한다
따뜻한 물에서 산다는 물고기 떼 몰고
남태평양 난류가 올라 온 게다
태종대 앞바다엔 고기 떼 쫓아 어지러이 나는 갈매기
새파란 하늘 끝없이 이어져 무리를 지는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다
넋을 잃고 바라보노라면
캔버스 유화의 풍경 속에 들어와 앉은 듯
이곳은 갈매기가 주인
나는 내가 아닌 그저 자연 속에 들어앉은
자아 상실의 피사체일 뿐
바닷가 따라 질서 있게 흐트러진 크고 작은 바위들
밀려오는 파도를 하얗게 부서뜨리며 바람마저 잠재우고
커다란 활 모양으로 휘어진 수평선까지
여러 모양의 배들 점점이 떠
잔잔하게 밀려오는 갯내음 또한 싱그러운 가을 재촉한다
태종대 입구 왼쪽 능선의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깎아지른 듯 바위가 멀리 펼쳐쳐 파도를 하얗게 부순다
천애의 절벽이라 할 만한 비경
바다 왼쪽으로는 해양대학교가 있는 섬이 보이고
멀리 수평선엔 보일락 말락 신기루가 하나
그걸 대마도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놈은 아무도 없다
이 빼어난 절경은 저 신라시대 태종 무열왕이
이미 감탄을 하였던 바에 따라 태종대가 되었대나 어쨌대나
하지만 무열왕도 이곳까지는 접근조차 못했을 것이리라
치렁치렁한 임금님의 옷차림으로 이 가파른 암벽을 탈수는 없는 이치
사람의 발자국이라고는 우리 패거리 말고 누가 또 남겼을쏘냐
갯가재 바위 타듯 암벽을 타고 한참 내려가면
녀석들이 주 무대로 활동하는 바다낚시터가 나온다
빡빡머리 몇 녀석 낚싯대와 멜빵을 주거니 받거니 바닷가에 내려서면
흩어지는 품새가 꼭 갯가재 바위틈 파고들 듯
명당을 하나씩 차지한 녀석들 개발 새발 낚싯대 펴고
갯바위에 붙어있는 까만 홍합새치 떼 내어 잘게 부서뜨린 다음
"자 도망가는 놈들아 모두 돌아와라"
하고 낚싯대 드리워진 곳으로 연신 뿌려댄다
고기 떼를 불러 모으는 게다
웬만한 사람은 찾아오지도 못하는 난코스
우리는 늘상 다니는 곳이라 각자 자기 자리까지 정해져 있다
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망상어 채비와 구로다이 강성돔 채비가 다르듯
바늘 목줄 그리고 미끼선택이 그 날의 낚시도사를 가늠한다
주로 망상어와 노래미를 낚는데
운 좋으면 감성돔이나 구로다이가 올라오기도 하고
그러다 햇살이 뜨거워지기라도 할지라면
바위 아래 바닷물로 곧장 뛰어들기도 한다
주변의 꾼들에게는 당연히 욕을 먹어 싸지만
이런 해수욕이야말로 최고의 맛이 아니더냐
바다낚시엔 낚시장비 외에도 갖춰온 것들이 많다
고추장에 빙초산과 오뚜기 슈가를 버무려 만든 초고추장은 첫 번째 필수품
빙초산은 식초보다 훨씬 가격이 싸면서도
너무 독해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오뚜기 슈가 역시 설탕보다 훨씬 가격이 싸면서도 달다못해 아예 쓰기까지 하다
또 어떤 녀석은 아버지 방에서 몰래 들고 나왔다며
반쯤 담긴 사홉짜리 대선소주병
하마 깨질세라 슬그머니 꺼내놓고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인다
갑자기 활처럼 구부러진 낚싯대
물속에서 낚싯대를 힘껏 끌어당기며 몸부림치는 떨림
틀림없이 대물이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
미끼에 걸려든 망상어
파란 물속에서 은빛 찬란한 몸뚱아리를 번쩍거린다
낚싯대를 놓칠세라 바짝 움켜 쥔 녀석
"이햐 손맛 쥑이네" 하는 표정이 정말 가증스럽다
빡빡머리 녀석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연신 망상어랑 놀래미를 끌어올리고
낚시 때마다 어김없이 부엌칼 가지고 나타나는 어떤 녀석
엄마가 동네시장에서 식당을 한다는데
회 뜨는 데는 그 놈 당할 자 아무도 없다
도시락 반찬으로는 김치가 필수고
소주 안주로는 초고추장 강성돔 망상어 놀래미 등등 잡어회
먹을 줄도 모르는 소주 한 모금씩 병째 들이키고
"캬" 하고 아버지들 흉내 내면
녀석들 초고추장에 벌개진 이빨 드러내고 키득거린다
또 어떤 녀석은
"누가 그라는데 빙초산은 공업용이라 눈이 멀지도 모른다 안 카나"
하면서도 잘만 처먹는다
도시락에 생선회에 소주 몇 모금은
땡볕이 내리쪼이는 너럭바위에 늘어져 한 잠씩 들게 한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수평선 윤곽이 무척 뚜렷하다
저 멀리 커다란 배 한척 하얀 꼬리 만들며 먼 바다로 향한다
혹시 아버지 배 아닐까
문득 아버지께서 저 배를 타고 떠나기라도 하듯
허전함이 가슴을 스치운다
이린 시절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겪어 왔던
가슴이 텅 비는 듯 한 이 허전함
주위에 사람들이 많다지만 아무리 많은들 무엇하랴
부모님 두 분의 빈자리는 세상사람 다 모여도 채울 수가 없는 것
이런 내 마음을 빡빡머리 녀석들이 알 리가 없다
"야 니 회 더 안 묵을 끼가"
잠이 덜 깬 듯 너럭바위서 일어난 한 녀석
남아 있던 회가 아까운 듯 채근하고
망상어와 놀래미 몇 마리를 바닷물에 담아와
순덕이네 양은 양재기에 풀어놓으니
아직 몇 놈은 살아서 파닥거린다
순덕이 엄마 환한 얼굴이 되어 무척 좋아하고
"아이고 아직도 살아있네 느그집에 가져가지 와 우리 집에 죄다 퍼주노"
"전에 재첩국하고 파래도 주셨는데 파래는 도시락 반찬으로 잘 묵었다 아입니꺼 그라고 지는 마 낚시하면서 회 마이 묵고 왔심더"
국어시간 도시락 사건이 입에서 맴돌지만 꾸욱 참는다
"야 임마야 느그 집에 새 엄마도 오시고 새 여동생도 왔는데 그라먼 몬쓴다 느그 집에 다 져 가그라"
갑자기 전에 없던 근심스런 얼굴로 바뀌는 게다
"아입니더 우리 집에 필요없심더 순자하고 순덕이 마이 묵으라 하이소 그라고 지는 마 우리 새 식구들보다는 순덕이네가 더 좋은 기라예“
"아이고마 야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누가 들을세라 두리번거리는 순덕이 엄마
대들 듯 내밷는 내 말에 무척 당혹스러운 게다
도망치듯 순덕이네 집을 뛰쳐나온 두근거리는 가슴
“아따 시껍했네”
첫댓글 이야기를 하도 구수하게 잘풀어놓아 내가 낚시터에 앉은것 같으이
좋은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