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 서쪽 문루인 금서루. 올라가는 길에 세계유산 지정 안내 팻말을 세웠습니다.
관광객들 외에 시민들이 운동 삼아 공산성을 오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금서루. 토성 위에 다시 석성을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려서 상당히 위압적으로 보입니다.
공주에 산재하여 있던 각종 비석을 모아 올라가는 길 옆에 세웠습니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형에 맞게 성을 아주 잘 쌓았습니다. 약간 엉성해 보이는 저 성벽이 두부모를 자른 듯한 돌로 쌓은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합니다.
현재의 공주 공산성은 백제의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 이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서문 아래로 난 자동차길도 최근에 조성하였을 것입니다. 원래는 저 자리가 문루가 서 있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2015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이 지방 출신인 박세리와 박찬호에게 홍보대사를 위촉하는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금서루에서 서쪽 전망대로 오르는 길. 경사가 완만하여 힘들이지 않고 전망대까지 갈 수 있습니다.
서쪽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금서루
서쪽 전망대에서 보면 공산성 전체가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여 아주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전망대에서 조금 올라가면 공산정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눈이 정말 시원합니다. 공산성의 전망은 물론이고 금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공산정에서 내려다 본 공북루. 공북루는 공산성 북쪽에 있는 누각입니다. 성안사람들이 여기에 거주할 때 여름이면 모두 나와 저 누마루에서 잠을 자면서 온갖 이야기를 하여 공주지역의 설화가 많이 탄생하였다 합니다.
공북루 앞의 빈터. 과거에는 여기에 성안마을이라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백제민속촌 건립을 위하여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이곳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백제의 왕궁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제 왕궁지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중군영인 진남관이 서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이곳을 국유화하였고, 이후 이곳을 공주 갑부 김갑순에게 불하하였다 합니다. 김갑순은 이 자리에 있는 중군영을 헐고 소작료로 받은 쌀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창고를 지었다 합니다. 그때 이곳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훼철되었습니다.
공북루에서 본 공산정. 몹시 가팔라 보입니다. 2013년 저 공산정 주변 성벽의 붕괴로 한 동안 통행이 금지된 적이 있었습니다.
공북루에서 본 공산정. 그 후 해방이 되면서 여기에 사공과 마부들이 중심이 되어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100여 호가 살았다니 작은 동네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서 백제민속촌 건립을 위하여 성안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합니다.
공산성 석빙고. 금강이 가까워서 얼음을 획득하기가 좋았을 것입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양잠을 하면서 이곳을 종자를 보존하는 창고로 사용하였다 합니다.
만하루로 가는 길에서 본 성안마을. 그런데 이곳에서 2011년 발굴 작업 중에 여러 차례 옻칠을 한 최고급의 갑옷이 출토되었고 또, 백제시대의 대규모 목곽고가 발견되면서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히 정관 19년(서기 645년)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갑옷을 두고 해석이 아직도 분분합니다. 어쨋든 이 유물의 발굴로 공산성은 단번에 유명세를 탔습니다.
만하루와 연못. 저 아래 보이는 건물이 만하루인데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는데 영조 때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것을 토대로 발굴사업을 벌여 1980년에 건물지를 발견하였고 1984년 그 자리에 만하루를 복원하였습니다. 그 앞에 있는 연지는 홍수로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82년과 83년에 발굴 조사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만하루 앞 연지. 이 연지의 바닥 부근에 바로 금강의 물을 끌어 당기는 수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하루에서 북벽을 타고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릅니다. 여기만 오르면 성곽길은 아주 순탄합니다.
북벽 길을 오르면서 내려다 본 만하루와 연지.
한 고개를 넘어 잠시 숨을 돌립니다. 내려다보는 만하루와 금강의 경관이 말할 수 없이 빼어납니다.
다시 몸을 돌려 마지막 고개를 올라 갑니다.
북벽 끝 전망대에서 본 금강
동문으로 오르는 길에 본 두꺼비
여기는 성벽이 토성입니다.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입니다. 저 아래 동문이 내려다 보입니다.
동문에는 성 아래 마을로 통하는 작은 길이 나 있습니다.
광복루. 원래는 공북루 옆에 있던 중군영의 누문이었는데 일제가 이곳으로 옮겨 웅심루라 하였습니다. 후에 백범이 자신이 출가한 적이 있는 마곡사에 들렀다가 이곳 공산성에 올라 광복루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습니다.
임류각. 백제의 동성왕이 이곳에 누각을 지었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후에 발굴을 하여 기와와 주추가 발견되면서 이곳이 임류각로 추정되어 건물을 세웠다 합니다.
동문에서 남문인 진남루로 내려서는 길
진남루. 한 때는 이 진남루 앞 평지를 웅진시대 백제 왕궁터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발굴 작업 결과 그에 관련된 유물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남루
남문인 진남루에서 서문으로 오르는 남쪽 성곽길. 수목이 우거져 있습니다.
진남루에서 본 쌍수교
진남루에서 성벽을 따라 조금 올라서면 넓은 평지가 보입니다. 여기가 웅진시대 백제 왕궁터로 추정됩니다. 복원되기 전에는 일제가 마장으로 사용하였고 해방 후에는 시민들이 운동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공산성에 피난 온 인조가 자신의 마음을 두 그루의 나무에 의탁해 위안을 삼았다 합니다. 후에 관찰사 이수항이 이곳에 쌍수정을 지었습니다.
백제시대 우물터. 이곳에 대규모 우물이 발견됨으로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해졌습니다.
남쪽 벽을 따라 걸으면서 본 성안마을. 지금 왕궁지로 추정되는 쌍수정 일대는 아무래도 공간이 비좁고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과연 왕궁이 여기에 있었을까 하고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성안마을을 발굴할 때 남북으로 길게 난 폭 6m 이상, 길이 90m 이상의 남북대로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일부 사학자들은 저 아래 성안마을이 왕궁지였다고 주장합니다.
내려오면서 올려다 본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둘레를 쉬엄쉬엄 걷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