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
늪과 같은 죄
지체하는 일을 삼가라.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 여러 천만 사람이 이 점에 실패를 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다. 사람의 생명이 짧고 덧없음에 대하여 여러 말을 않거니와 하나님의 성령의 애소(哀訴)하는 소리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의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는 일은 두려운 위험-우리가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위험-이니 과연 이러한 지체는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다.
죄는 아무리 작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범하는 때에는 무한한 손실을 받게 될 것을 각오(覺悟)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우리를 극복하고 우리를 멸망케 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그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시대를 내려오면서 이 땅에서는 비탄의 부르짖음이 그치지 아니하고 창조함을 받은 만물이 인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하여 함께 탄식하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 하늘 자체도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그 영향을 받았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기에 요구되는 놀라운 희생의 기념물로 서 있다. 우리는 죄를 심상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그 영향은 우리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저희는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저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또는 저희가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경솔히 여길지라도 일후에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희의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은혜의 성신을 거스린 이후에라도 또는 저희의 감화를 사단의 편으로 끼친 이후에라도 어떤 최후적 순간에 저희가 걸어오던 방향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일생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즉 그 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받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비록 품성 가운데 한 가지의 못된 성벽이나 한 가지 악한 욕망이라도 고집스럽게 품고 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복음의 모든 능력을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죄악적 방종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신을 강하게 한다. 대담하게 불신의 정신을 나타내는 자,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전연 무관심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심은 바의 수확을 거둘 뿐이다. 온 성경을 통하여 죄인은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니”(잠 5:22)라는 솔로몬의 말보다 악을 심상하게 보는 데 대한 더 두려운 경고는 없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시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히 배척하므로 자멸하는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 8).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여호와는 기쁨과 슬픔의 착잡(錯雜)한 감정으로 찬 사람의 마음, 더러운 것과 거짓의 거처가 되는 방황하고 제멋대로 나가는 사람의 마음속을 보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동기와 의사와 목적을 아신다. 그대는 더럽힌 그대로의 심정을 가지고 그에게로 나아가라. 시편 기자와 같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자 앞에 그 마음 문을 열어놓고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하고 부르짖으라.
많은 사람은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아니하고 지적신앙(知的信仰) 곧 형식적 경건만을 받아들인다. 그대들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할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영혼을 진실 되게 취급하라.
그대들의 육신적 생명이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처럼 열심히 또는 꾸준히 행하라. 이 일은 하나님과 그대들 개인 사이에 영원히 결정하여야 할 문제이다. 추상적 소망은 결국 그대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거룩함의 큰 원칙을 그대들에게 밝히 보여 주나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이 말씀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다. 이 말씀을 그대들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유의(留意)하라.
그대들의 죄의 흉악한 것을 볼 때에 또는 그대들이 자신의 진상(眞相)을 볼 때에 실망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화목 시킬 것이 아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후 5:19)하셨다.
그는 당신의 부드러운 사랑으로써 죄에 빠진 당신의 자녀의 마음을 사려고 하신다. 세상의 부모라도 저희의 자녀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하여 참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시는 자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죄인에게 그보다 더 인정 있게 애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입술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보다 더 인정 있는 간청이 새어 나온 적이 없다. 그의 모든 허락과 경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시이다.
사단이 그대에게 와서 너는 큰 죄인이라 하거든 그대는 그대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말하라.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은 곧 그의 빛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대의 죄를 자복하라. 그러나 원수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는 것과 또 그대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하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빚진 자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한 사람은 그 주인에게 적은 금액의 빚을 지고 다른 사람은 매우 많은 금액의 빚을 졌는데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시몬에게 묻기를 어느 사람이 그 주인을 더 사랑할 것이냐 하셨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눅 7:43)하였다.
과연 우리는 큰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유함을 받기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희생의 공로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드리기에 넉넉하였다. 많이 사유함을 받은 자는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희생에 대하여 그의 보좌 곁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분히 이해하는 그 때이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리운 줄의 길이를 볼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달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움과 통회로 녹아지는 것이다.
💕[1시간연속듣기] 심령이 가난한 자는,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https://youtube.com/watch?v=FsFmqylP_4M&si=7gD8siD8L7zOba5s
찬송가는 영혼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찬송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