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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아무 걱정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것1. 2016. 9. 18
지금의 시대는 과학 정보시대입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누구든지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적을 바라는 절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적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이지만, 전기의 형식을 갖추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심오하고 영적으로 깊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마태, 마가, 누가, 세 공관복음에 없는 가나의 혼인잔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 중생에 대한 니고데모 이야기, 사마리아 여인, 38년 된 베데스다의 병자의 고침,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심, 주었던 나사로의 부활 등 요한복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기적들이 있습니다. 또 14-17장의 내용은 주님의 고별 설교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내적으로 매우 깊이 있는 생명을 다룹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깊은 생명의 체험을 요한복음에서 체험을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과 표적 중에서 특별히 일곱 가지를 선택하여 요한복음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동사 ‘믿는다’가 98번이나 나타납니다. 피스테스, 믿는다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동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믿는다. 라는 동사가 이 기적의 현장 속에서 98번 등장을 합니다. 왜 이렇게 믿는다가 많이 등장을 할까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믿어야 기적이 되고 믿어야 영광을 봅니다. 믿음이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믿어야 기적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주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40일의 시험, 산상수훈, 천국 비유, 변화산상 사건, 겟세마네의 고민 등이 생략돼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적을 통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아들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분명히 십자가위에서 속죄하셨다는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이런 내용들을 진심으로 믿느냐? 이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믿느냐? 이 말씀입니다. 잘 될 때에도, 갑작스런 위기에서도, 전혀 예기치 않았던 때에도, 그 결과 앞에서도 예수님을 믿느냐? 이 말씀입니다. 요한은 사실 주님의 위임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에 대한 7대 선언을 그대로 말씀합니다. 0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08:12 나는 생명의 빛이라. 10:7 나는 양의 문이라.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11:25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14:6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라. 15:1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선언을, 말씀을 그대로 합니다. 여러분, 왜 공관 복음에 없는 독특한 내용의 기적을 말씀할까요? 그리고 왜 나는 누구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말씀할까요? 진심으로, 삶을 통해서. 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그대로 100퍼센트 믿느냐? 이 말씀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빛으로, 양의 문으로, 선한 목자로, 부활과 생명으로, 나의 길이시고 나의 진리이시고 나의 생명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생활을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진심으로, 삶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7대 선언을 그대로 믿어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 가운데 놀라운 회복의 잔치, 죽어야 될 인생이 다시 의미를 갖는 삶이 주어지고, 죽었던 인생이 다시 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세주, 메시야됨을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 첫 번째 표적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현장 속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할까요? 그 곳에 계셨던 분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요? 오늘 본문이 예수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면서 최초로 기적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붙이기를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오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의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몇 주간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은혜 가운데 자세히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율법에 기록이 되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분,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야, 그리스도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고 여기에 빌립이 주고받는 대화와 함께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들과 대면을 합니다. 그 대면을 하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주님에 대한 정체성과 신앙 고백을 나다나엘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정체성이 드러난 이후 오늘 본문 1절에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혼인잔치 집에 예수님의 어머니도 계시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 집에 계속해서 접객을 맞이하면서 대접해야 될, 있어야 될 포도주가 그만 떨어졌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연회의 장, 신랑의 주인과 웅성거리는 하객들 앞에서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가 진행이 되고, 그리고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요청에 순종한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결국에는 연회장소에 필요한 포도주를 다시 공급을 하는 일로 인해서 혼인잔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오늘 본문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예수를 믿으니라. 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여 줍니까?
1-1. 부정적이었던 나사렛 갈릴리 가나에서 시작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흘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서.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앞에 전개 되었던 내용이 갈릴리 나사렛의 사건입니다. 이 일이 있고 사흘 되던 날입니다. 빌립의 요청에 나다나엘이 대답을 했던 그 곳이 나사렛입니다. 나다나엘의 표현은 개천에서 용이 나겠느냐? 그런 표현입니다. 빌립이 어떻게 전도를 합니까? 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그렇게 말하니 나다나엘이 뭐라 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반박을 하며 의심을 합니다. 왜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배경이 있습니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메시아는 그리스도는 말씀에 어디 출신으로 예언이 되어있을까요? 미가서 5;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바로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 출신입니까? 45절 마지막에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성경에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출생은 어디일까요? 누가복음 1;26절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출생을 예고 받은 곳이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장에서 가이사 아구스도가 모든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등록하라 호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약혼자였던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 다윗의 출생지로 마리아와 함께 내려가는데 눅 2;5~7절에 뭐라고 하느냐,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 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잉태하고, 베들레헴에서 출생을 합니다. 그때는 모두가 호적을 하러 내려온 탓에 사관에, 여관에 묵을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쉽게 사관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나사렛에서 잉태한 예수를 어디서 출산하게 됩니까? 바로 약속의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 베들레헴 중에서도 마구간의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출생 소식을 들은 동방박사/ 목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고 찬송을 드리는 일을 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 헤롯이 그 메시야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동방박사들을 통해 메시야를 찾으려했지만 찾지 못하게 되자,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모두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그들을 애굽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그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다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가라 합니다. 이렇게 이들이 다시 돌아간 이스라엘 땅은 메시야로 증언하기에 적합한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베들레헴에서 메시야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들레헴출생이면서도 나사렛에서 잉태된 자요, 나사렛에서 자란 자,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왜 나사렛이었을까요? 마태복음 2; 23절에 나사렛에서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사렛이란 명칭이 들어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2; 23절에 ‘그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에서 ‘선지자’는 원어에서 복수로 쓰여 졌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이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대표되는 것은 시편 22편, 이사야 49, 53장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자신을 사람이 아닌 벌레요,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라 하며,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라 고 합니다. 예수님, 구세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은 고난 받을 메시야의 십자가만이 아닌 그의 출생지인 나사렛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이란 지역은 너무 작아서 요세푸스의 역사학자의 책에도 기록되지 않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조롱받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 마을에서 선한 것,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란 기대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바로는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중심지로부터 탄생입니다. 높고 영화로운 자리로 그 광채와 위엄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시와 조롱받으며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 없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나사렛, 갈릴리 가나에서 기적을 보여주고, 갈릴리 가나의 기적을 통해서 회복을 시키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합니다. 처음부터 부정적인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 베들레헴 출생의 갈릴리 가나, 나사렛 예수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렇세 처음 시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이 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첫 표적이 일어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첫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가장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조롱을 받는 그곳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갈릴리 가나에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하여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까? 지금의 상황 때문에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까? 멸시와 조롱이 기다립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길이고, 빛이고, 생명이고, 생명의 떡이시고, 생명의 빛이시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이런 가나의 기적을 여러분의 이런 부정적이고 조그만 터전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어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였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모십니까? 어느 자리에 예수님을 모셨습니까? 오늘 날 히메지가 텅텅 비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우성입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이나 직장을 다니시는 분 모두 거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땅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불황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물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을 말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너희들이 별 수가 있나? 우리가 하는 대로 따라 와야 된다고 합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그렇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완장 채워주고, 칼 들게 하니까? 이제 와서 모든 잘못과 어려움과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행동을 할까요? 왜 이렇게 절제하지 못할까요? 왜 오만할까요? 두려움의 대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은 이런 현상 앞에서 모든 방송과 신문들이 민심이 두렵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민심을 잘 읽어야 합니다. 민심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민심입니까?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 유태인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유태인들이 일심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밖으로 내칩니다. 민심에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는 민심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민심이 두렵습니까? 사람의 눈치가 두렵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눅12;4-5에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 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가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민심이 아니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겸손하기 위해서, 절제하기 위해서는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있을 때에, 겸손할 수 있고, 절제 할 수 있고, 엎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의 대상은 민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다윗은 시3;6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두 세 사람이 아닙니다. 천만인이 나를 향하여 다가와도 두렵지 않다고 다윗은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두려워해야 될 대상이 누구입니까? 눅12;5절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그 목적은 저나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두려워해야 될 대상을 알게 하는 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될 대상을 알면서 살아갈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요14;8에 또 빌립이 나옵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께 말하는데 14;9에 예수님의 대답은 빌립아 내가 너희와 오래 이렇게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두려워 할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두렵다는 이 단어가 두렵다는 단순한 뜻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의 두렵다는 단어는 두려워하기 위하여 경외하다. 높이다. 받들어 섬기다. 받들어 순종하다.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기 위하여 어떤 대상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를 모시고 그 분 앞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리십니까? 오늘 본문 2절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가나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습니다. 청함을 받았으나 그 때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대접을 하십니까? 진정으로 주인공이십니까? 진정으로 상석에 모시고 그 혼인잔치의 주인이십니까? 여러분, 결혼식에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있고 객이 있습니다. 다음 주말에 김 행욱 안수집사님과 이효선 권사님의 장남, 김 한준의 결혼식이 한국 서울 양재동에서 있습니다. 결혼식에는 주인이 있고 객이 있습니다.주인공을 위해서 주례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런데 11/19일에서 11/12일로 한번 바뀐 예식일정입니다. 그래서 항공권을 예약을 하고 그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한번 변경 수수료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갑자기 9/24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부터 세미나 행사가 시작이 되고, 금요일 끝이 나고 강사님을 간사이공항에 모셔다 드려야 합니다. 그 길에 저도 1박2일로 결혼식에 가서 부탁한 주례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항공기 좌석도 제한적입니다. 45000엔에서 57000엔을 달라고 합니다. 어제 김진경 권사님과 이종희집사님께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좌석도 한 좌석입니다. 피곤합니다. 주일을 위해서 토요일 24일 날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 밤 7시 30분에 출발을 하는 아시아나 항공기에 몸을 실어야 합니다. 간사이공항 도착을 하면 9시 조금 넘습니다. 잘못하여 지체가 되거나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면 리무진은 이미 마감이 됩니다. 그러면 고베로 와서 히메지로 들어오는데 아마 밤 12시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야합니다. 주례를 부탁받았지만 객은 객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라도 가야할까요? 친구의 아들이라 그렇습니까? 잘 살라고, 백년해로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그 혼인잔치에 청하고 청한 주님을 그 가정에 주인으로 세우기 위해서 주례를 하고 축하를 하고 말씀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연회장이 나오고 신랑이 나옵니다. 연회장은 그 집의 주인이고 신랑의 아버지입니다. 특히 신랑은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그렇다면 청함을 받은 주님은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잔치집을 떠올리면서 연회장, 신랑, 주님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문자대로 청함을 받은 그런 존재, 손님입니까? 축하객입니까? 여러분, 주님의 자리와 위치가 중요합니다.
1-3. 지금 가나의 혼인잔치의 분위기는 어떤 분위기입니까? 잔치 집, 결혼잔치, 아들을 딸을 결혼시키는 잔치는 흥겨움의 대명사입니다. 출발이 행복이고 행복의 대명사입니다. 시작과 끝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가나의 혼인잔치를 가리켜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신앙의 여정이 이렇게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복되기를 소원해서 첫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이라고도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 혼인전치의 현장에는 애통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습니다. 슬픔과 걱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이런 분위기의 주인, 신랑과 연회장은 얼마나 흡족할까요? 얼마나 기쁠까요? 모두가 축하를 드리고 축하를 받습니다. 인사를 올리고 인사를 받습니다. 여기에 주님을 초청했습니다. 연회장과 신랑의 입장에서 주님이 축하하는 한 사람, 축하해주는 한 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주님은 객입니다. 철저히 객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여러분, 이 일은 보통사건이 아닙니다. 예상 밖의 일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요사이 같으면 마스벨류를 가든지, 코스트코를 가든지, 히마와리를 가든지, 봉 마르쉐를 가든지, 하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결혼 예식을 앞두고 1년 이상 준비를 해야 합니다. 숙성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또 하나는 결혼잔치에 초청할 대상이 300명이라면 하객을 위해서 얼마를 준비합니까? 아마 400-500명분을 준비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을 하고 더 많이 준비를 하고 더 많이 계산을 하고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왕좌왕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 앞에 2;3절에 마리아만 등장을 하고 마리아만 걱정을 합니다. 연회장이나 신랑은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서 실생활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주인인 연회장과 신랑과 가족들이 주님을 청했지만 주님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모자라는 부분을 그냥 수용합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초청해서 그 자리에 와 있어도 그냥 축하해 주는 한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보아주는 분으로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한 분으로 그렇게 뫼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분들이 이런 생각과 이런 인식과 이런 사고를 가지신 분들이 주님을 두려워해야할 대상으로서 존경하고 경외했을까요? 주인으로 모셨을까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서에 없는 부분들을 기록을 했습니다. 7대 기적과 7대 선포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영적으로는 성령께서 영감으로 요한을 들어서 기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록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도 요한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나 일을, 그리고 믿음과 신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기록을 할 때 그냥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통해서 밝혀줍니다. 먼저는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록합니다. 1;29 이튼 날, 1;35 또 이튼 날, 1;43에 이튼 날, 날짜를 기록합니다. 두 번째는 그 장소를 밝힙니다. 1;19 예루살렘에서, 1;28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 예루살렘 옆에 있는 베다니가 아닙니다. 갈릴리, 오늘 가나, 장소가 나옵니다. 셋째는 시각까지 밝힙니다. 1;39절에 제 10시쯤 되었더라. 그러니까? 날짜와 장소와 때, 시간을 밝히는 것은 잊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확실하게 기억하고 확실하게 되새기고 마음에 곱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주님을 만난 사람, 자기와 함께 주님을 기억한 사람, 그래서 주님을 진심으로 주인으로 모셔야 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잊으면 안 된다고,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떤 액션을 취하느냐?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합니다.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1절에 사흘 되던 날에, 4절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했다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던 기적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없습니까? 계획했던 대로 잘 진행이 되십니까? 그냥 주님을 청하기만 해놓고 우리의 즐거운 분위기로 살아갑니까? 행복하십니까? 그래서 주님이 별로이십니까? 아니면 문제가 발생하셨습니까? 계산대로 되지 않습니까? 예상을 했던 그 이상의 일로 인해서 화급한 문제가 생겼습니까? 긴급하게 일어난 일입니까? 그럼에도 주님이 안중에 없습니까? 주님을 못 느끼십니까? 어떤 사건이 생겨도 의논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을 내 집에 초청을 했다는 것은 초청만 한 것이 아니라, 24시간 주님을 어떻게 대접을 하며, 어떤 자리, 어떤 대우를 해야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일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바로 가나의 혼인잔치의 놀라운 기적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혼인 잔치의 새로운 반전의 분위기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행복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함께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4.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하고, 주님을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될 때는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 잘 될 때에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곤고하고 문제를 안고 있는 분들에게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계시록 4장에 사도 요한은 영의 음성을 듣고 하늘 세계를 봅니다. 희한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4;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을 켠 것이 있는데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사도요한은 7영을 봅니다. 고후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부득불 자랑하는데 주의 환상과 주의 계시를 말하는데.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셋째 하늘, 삼증천을 경험합니다. 에스겔37장에서 에스겔은 한 사람에 의하여 에스골 골짜기로 이끌려 가는데 에스겔은 거기서 마른 뼈들을 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소망의 골짜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사이 우리교회 몇몇 분들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었습니다. 교회의 문이 닫혀있는데 흰 문으로 닫혀있고 그 안에서는 피아노를 치고 찬양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분은 한 사람에 이끌려서 지나가는데 물위를 지나가고 한 건물로 인도를 받았는데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분이 나타나서 편지, 서신을 주고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분은 설교하는 강대상에 올라갔는데 청중이 얼마 안 되는 사람만이 있었습니다. 주변은 흩어져 있고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느끼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비전교회와 교우들을 생각하고 기도를 합니다. 잘 될 때에 돌아보고 내일과 미래를 위해서 오늘 신앙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14;12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의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히었는고! 어찌 그리 되었는가?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어찌 그리 땅에 푹 찍혔는가? 오늘 연회장과 신랑은 풍성했습니다. 축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 자르지 않도록 계산을 해서 더욱 넘치게 준비를 했습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구석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별 마음이 없습니다. 의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하객으로서 계시는 주님이면 만족입니다. 신랑이 결혼하는 날 기쁘고 복되고 축하 받고, 행복한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바보 같은 처신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상황입니까? 여러분의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포도주가 넘치고 젊음이 있고, 재능이 있고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 순간에 그 때에 주님은 이런 때에 어디 계십니까? 모자라는 날이 갑자기 옵니다. 부족한 삶이 예지치 않은 때에 옵니다. 그러면 이런 때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요? 전12;1-5절에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사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온 뒤에 구름이 다시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 날에는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떱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구부러집니다. 맷돌질 하는 사람들이 적으므로 그칩니다. 창들로 내어 보는 사람들이 어두워집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 지고 맷돌소리가 적어지고, 음악을 하는 여성분들이 쇠하여지고 살구나무가 꽃이 피고, 메뚜기도 짐이 되고, 은줄이 풀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집니다. 예기치 않은 때에 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억하고 그래서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고, 그래서 주님을 내 인생의 중앙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이 나의 인생 가는 길 내내, 나의 삶의 터전 위에 일어나게 됩니다. 문제가 있어도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인생이 복된 인생이고 이런 삶이 행복하고 기쁜 삶이 됩니다. 욕됨이 영광이 되고, 무명한 사람 같으나 유명한 사람이 되고, 죽은 사람 같으나 살고, 징계를 받는 것 같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항상 대안이 있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항상 부요하고,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고후 6;8-10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절대 신뢰하고 전하시는 그래서 여러분의 내일과 미래가 활짝 열려져잇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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