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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문훈숙 은퇴 후 9년만에 발레 심청공연에 카메오로 무대에 섰다 무대는 자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관객과 소통하는곳 무대에 오른 2분동안 내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무대 위를 새, 물고기처럼 움직일때 행복했다
지난 5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창작 발레 '심청' 공연을 올리면서 카메오(유명인의 단역출연)로 무대에 섰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역은 아니었지만 은퇴 후 9년 만에 서는 것이라 주역이라도 맡은 것처럼 긴장되고 떨렸다.
낡은 목조건물로 된 동네의 작은 발레 학교에서 일곱 살 때 배운 발레. 발가락을 솜으로 감싸고, 떨리는 마음으로 연습실의 바(barre)를 두 손으로 잡고 첫 토슈즈를 신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흘러 마흔 살까지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고 현역 무용수로는 이미 은퇴한 나였다. 하지만 다시 토슈즈 위에 서고 보니 온 세상 위로 올라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온몸의 세포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음을 전해주고 있었고, 오케스트라 피트(무대와 객석 사이의 오케스트라 악단이 앉는 자리) 너머에서 공기를 타고 쏟아지는 객석의 시선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다. 무대는 자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드러내는 특별한 곳이며 관객과 심정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곳이다. 다시 무대에 오른 그 짧은 2분 동안 내가 얻은 깨달음이었다. 나는 역시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게 더 자유롭고 편했다. 그리고 무대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춤은 또 하나의 언어이다. 어쩌면 몸의 언어는 말보다 솔직하다. 아무리 외적으로 아름답게 꾸민다 하더라도 내면이 아름답지 않으면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수년 동안 무대 위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대는 늘 그렇게 가슴 떨리는 곳인지도 모른다.
일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즈음 발레단을 경영하면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소통이 원만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나는 "아"라고 했는데 상대방은 "어"라고 받아들일 때가 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전달할 때 몸의 언어 또는 태도에서 오해가 생기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상처를 준다면 건설적인 발전보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올 수 있다.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행동이 말보다 더 크게 들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몸은 솔직하기 때문에 눈빛, 자세, 걸음걸이, 모든 태도에서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이 아니다. 장차 세상에 나가서 잘 살고 크게 성공하라는 뜻을 담은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또 하나의 이름이 브랜드(brand)처럼 붙게 된다. 적극적인 사람, 날카로운 사람, 부드러운 사람, 배려하는 사람, 게으름뱅이, 책임감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긍정적인 사람, 매사에 불평만 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 솔직한 사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마음이 좋고 순수한 사람….
이렇게 우리에게는 브랜드가 하나씩 붙게 된다. 그런 배경에는 우리가 하는 말뿐만 아니라 몸의 언어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명품이 그렇듯이 브랜드가 좋으면 그만큼 가치가 올라간다. 나 스스로 어떤 브랜드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살아가면서 말과 더불어 행동이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클래식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왕자를 유혹하는 흑조가 똑같은 동작을 해도 그 의미와 내용은 완전히 반대되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몸으로 말하는 침묵의 언어에는 우리의 진심이 묻어 나온다. 예술가가 완벽을 위해 끝없이 노력을 하듯이 우리가 살아갈 때에도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에 대해서 끝없는 자기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9년 만에 무대에 섰던 심청 카메오 출연은 단지 짧은 2분이었지만 20년 이상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 자신이 발레단 CEO가 아닌 '예술가 문훈숙'을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소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와 심정을 음악과 하나가 되어 표현하면서 무대 위에서 움직일 때, 끝없이 하늘을 훨훨 나는 새처럼, 그리고 넓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행복했다. 나는 앞으로도 CEO로서 경영에 최선을 다 할 것이지만 이번 무대는 내가 예술가라는 것을 일깨워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고맙다 나를 찾게 해준 2분.
출처 : 조선일보 201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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