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대립(宋大立)
[생졸년] 1542년(중종 37)~1583년(선조 16) / 향년 41세
조선전기 호조좌랑, 형조좌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사강(士强), 호는 외암(畏庵). 아버지는 청홍도우후(靑洪道虞候) 송옥청(宋玉淸)이며, 어머니는 만호 홍세신(洪世信)의 딸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성혼(成渾)과도 교유하였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73년(선조 6) 성균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그 뒤 사력(司歷)·사평(司評)·감찰을 거쳐 호조·형조·공조좌랑 및 정랑을 지냈고, 학행이 뛰어나 이이(李珥)의 천거를 받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그 때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외직으로 물러나 배천군수에 부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는 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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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참의 송공 묘갈명(贈參議宋公墓碣銘)
호남은 예로부터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많다고 일컬어졌다. 그중에 한 집안에서 두 충신이 나온 집안은 광산(光山)의 고씨(高氏)와 흥양(興陽,전남 고흥군 고흥읍에있는 읍성)의 송씨(宋氏)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고씨만 알고 송씨는 모르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삼가 생각해보니, 나라의 풍속이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한다. 광산은 남방의 큰 도시로 문물이 찬란하여 볼 만하지만, 흥양은 구석진 바닷가에 있어 문교(文敎)를 받지 못했으니, 비록 아름다운 절개를 지킨 사람이 있더라도 누가 전하여 서술하겠는가. 이는 그 지역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니 송씨는 여산(礪山)에서 나왔으며 시조는 송례(松禮)이다. 송례의 7대손 휘 간(侃)은 단종(端宗)의 명을 받고 호남을 순무하다가 양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또 여산에서 흥양으로 들어가 자손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대립(大立)은 그의 6대손으로 자는 신백(信伯)이다. 젊어서 독서하여 대의를 통달하였으나 호탕하고 기개가 남달라 구속받는 선비가 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왜란이 일어나 혼란하여 사람들이 모두 새나 쥐처럼 도망하였으나 공은 홀로 분연히 나라를 위해 죽기로 마음먹었다.
마침내 붓을 던지고 갑오년(甲午年,1594) 무과에 급제하여 천거를 받아 부장(部將)에 임명되고 누차 관직을 옮겨 훈련원 부정에 이르렀다. 얼마 후 정으로 승진하였으니 군공 때문이었다. 정유년(丁酉年,1597), 왜구가 다시 침입하였는데, 공의 아우 희립(希立)이 지도 만호(智島萬戶)가 되었다.
공은 집에 있다가 편지를 보내 대의를 깨우치고, 함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통제영 막하로 갔다. 떠나기 앞서 모친 선 부인(宣夫人)을 모시고 가서 동복 현감(同福縣監) 송두남(宋斗南)에게 부탁했으니, 송두남이 그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통제사는 평소 공의 명성을 들었기에 공을 얻고서 몹시 기뻐했다. 공은 마음을 다해 계책을 짜내어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 후 통제사가 호남의 해안을 걱정하여 도원수 권율(權慄) 공과 합심하여 지킬 방법을 논의하고, 지략이 있다는 이유로 공을 천거하였다. 원수는 공을 창의 별장(倡義別將)으로 삼고 연해의 땅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공은 마침내 흥양으로 돌아와 장사를 모집하여 첨산(尖山)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였으니, 동남쪽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가는 왜선이 있으면 번번이 정예병으로 습격하니 적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여 사방이 믿고 의지하였다.
3월, 왜선이 보성(寶城)을 침범하자 공이 용사들을 거느리고 급히 가서 막았다. 한 번 싸워 수백 명을 죽이니 적이 달아났다. 얼마 후 또 본현의 망제포(望諸浦)를 침범하자 공이 군사를 옮겨 육박하였다. 적이 해안에 올라 맞이하여 대적하니 형세가 마치 개미떼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공이 앞장 서서 활을 쏘니 모두 쏘는대로 쓰러졌고, 간혹 여럿을 맞추기도 했다. 적 9명이 달아나자 다시 혼자서 첨산(尖山)까지 추격하여 칼로 베기도 하고 사로잡아 겨드랑이에 끼기도 하며 모두 해치우고 돌아왔다. 홀연 복병 천여 명이 갑자기 오는데 비바람처럼 빨랐다.
공이 한 자 검으로 싸우면서 좌우로 휘두르자 적이 쓰러졌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싸우는데 기운이 갈수록 매서웠다. 적이 두려워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조총으로 공의 옆구리를 맞혔다. 공은 말에서 내려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마침내 절명하였으니 때는 4월 8일이었으며 나이는 겨우 48세였다.
일이 알려지자 선조대왕께서 병조 참의에 추증하라 명하시고, 선무 공신을 책훈할 때 공이 또 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공은 진주 소씨(晉州蘇氏)와 혼인하였으니 만호 거(琚)의 딸이다. 3남을 두었으니 눌(訥)은 선무랑을 지냈고 겸(謙)은 군수를 지냈으며 막내 심(諶)은 숭정 정축년(丁丑年,1637)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있으면서 중영(中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後金)이 돌아가는 길을 막고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해의 간지가 정(丁)에 해당하고 나이도 48세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숙종조에 공의 부자에게 정려문을 내리도록 명하고 ‘충신의 집안’이라고 하시니, 국가에서 크게 보답하는 은전이 여기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다.
희립(希立)은 오랫동안 충무공의 군중에서 공을 세웠으며 관직이 본도 좌수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의 묘소는 고을 북쪽 구산(龜山) 병향(丙向)의 언덕에 있다. 그의 현손 정악(廷岳)이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원수의 행주대첩은 / 元帥幸州之捷
천행으로 말미암았고 / 蓋由天幸
충무공은 한산대첩으로 / 忠武閑島之戰
남쪽 변방을 진압하였네 / 坐鎭南屛
씩씩하고 용감한 공은 두 곳을 오갔는데 / 以公雄勇遨遊兩間
함께 공을 세우지 못했네 / 不能與同其功
홀로 첨산에서 패배하였으니 / 而獨當尖山之敗
이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 玆豈非命耶
그러나 몸을 돌보지 않고 뛰쳐나간 것은 / 然奮不顧身
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이었고 / 欲忠國耳
싸움에 죽을 힘을 다한 것은 / 戰而死綏
군율이 원래 그러하다네 / 師律則爾
이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 不有是父
어찌 이런 아들이 있겠는가 / 焉有是子
아, 외딴 바닷가에 정려문이 찬란하니 / 嗚呼窮海之濱棹楔煌煌
고씨와 아름다움 비길 만하네 / 足以齊美於高氏
후세 사람이여 / 嗟後之人
행여 문무를 차별하지 말라 / 罔或文武之異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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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증 …… 묘갈 :
이 글은 송대립(宋大立)의 묘갈명이다. 송대립의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신백(信伯)이다. 1551년(명종 6) 태어나 1598년(선조
31) 4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따라서는 1597년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향년이 48세이므로 1598년이 옳다.
[주02] 광산(光山)의 고씨(高氏) :
고경명(高敬命) 집안을 말한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금산(錦山) 전투에서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